목포의 눈물 / 이난영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 항의 풍광----- [1935년 이난영이 최초에 취입한 원곡 목포의 눈물]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의 노래비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다. 그때 영예롭게도 목포 출신인 문일석씨의 가사가 당선되었고 여기에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대표적인 목포의 노래이다. [예비 음원] 목포의 눈물 / 이난영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사공의 뱃 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이난영과 그 일행----- 작사자는 문일석, 작곡자는 손목인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목포의 애향가"로까지 불려져 사랑을 받으면서 목포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는 노랫말을 적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난영 [李蘭影] 본명은 옥례(玉禮).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후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극단을 따라 나섰다가 1932년 목포에서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이 이난영의 재질을 발견하여 오케 레코드 사장 이철(李哲)에게 추천하여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향수 (鄕愁)” “종로 (鐘路)”를 취입하며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33년 11월 “불사조(不死鳥)” “고적 (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34년 2월에 발표한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하였다. 그해 가사 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한 데 이어 대중가요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던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으며 한국에서의 공연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이 마지막이었다.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1986년 목포시민의 상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