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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江右)의 사우(士友)에게 통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슬프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 지가 지금 몇 달이며, 우리 성상께서 평안도로 파천하여 계신 지는 지금 몇 달인고.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추한 오랑캐들이 우리의 예악 문물을 더럽혔으니, 하늘이 장차 앙화내린 것을 뉘우쳐 인심을 계발해 줄 것이다.’ 하였는데, 저놈들은 이미 우리의 동족이 아니요, 또 죽이고 약탈하기를 함부로 하니 사람들이 누가 한(漢)을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양경(兩京 경성과 평양)을 평정함이 마땅히 오래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니, 슬프다! 사직의 신하로 능히 봉천(奉天)의 거가(車駕)를 돌아오시게 하고 간성(干城)의 장수로 능히 이(李)ㆍ곽(郭)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자고로 변란의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처할 인재가 있는 것인데 지금에는 유독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슬프다! 종거(鍾簴 악기)가 땅에 던져졌고 준조(尊爼 제기)가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하늘에 오르내리는 조종의 신령이 떠돌아 어디 의탁할꼬. 원수의 적이 오히려 떨치니, 섬멸할 날이 기약이 없다. 주상께서 창을 베개 삼는 뜻이 어찌 잠깐인들 조금이라도 해이하리오.
근자에 내리신 교서를 엎드려 읽으매 끝에 이르기를, “땅의 한계는 이미 다되었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돌아가고파 하는 한 생각이 물의 흐름과 같도다.” 하셨으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비감하여 눈물을 뿌리지 아니하랴. 인홍(仁弘) 등은 어리석은 생각에 격동되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군사를 거느린 지 반 년에 근근이 한 구역만을 지키고, 아직도 유둔한 적을 섬멸하지 못하니, 슬프고 분함이 더욱 괴로워 마음이 타는 듯하도다. 지금 임계영(任啓英)ㆍ최경회(崔慶會) 두 사람이, “적을 토벌하는 데는 처음부터 피차의 구별이 없다.” 하고, 정예한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까운 땅에 와서 주둔하면서 인홍 등과 더불어 성주ㆍ개령의 적을 치고자 하여 열렬한 의기가 보고 듣는 이를 감동시키니, 실로 하늘이 국가를 도와 강토를 회복할 징조로다. 다만 군량이 부족한데 판출할 계책이 없으니, 저 수천의 군사를 무엇으로 먹일꼬. 영남 50여 고을이 모두 적지 천리(赤地千里)가 되었고 오직 강우 6, 7고을이 추수가 좀 잘되었으나 관에서 새로 팔아 들인 곡식은 다만 우리 군사만 먹여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하물며 호남의 군사에게 공급할 수 있으리오.
옛글에 이르기를, “양식이 부족하면 굳게 지킬 땅이 없다.” 하였으니, 양식과 물자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면 비록 호남의 의병이라도 붕괴되어 흩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회복을 하려는 자로서 어찌 군량을 판출하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사우들은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재주에 부족하니, 시석(矢石)의 전장에 달려가서 왜놈 하나라도 쏘아서 적개의 충성을 바치려 한다면 그만이지마는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량을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들이 동지에게 두루 타일러서 성의를 다하여 곡식을 낸다면 적은 것을 쌓아 많은 것이 되어 호남 군사의 수개월 양식을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복할 계책을 성취시키게 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제 몸도 족히 아끼지 못하거든 하물며 감히 그 재물을 아끼랴. 들은즉 호남의 의사들은 행재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서로 권면하여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義穀)이라 이름하여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여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돌아보건대, 강우의 많은 선비들은 그 재력(財力)이 진실로 호남의 전성(全盛)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의곡의 장한 일은 본받지 못하지만, 감히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힘이 미치는 데에 따라서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을 보태고 태산에 한 티끌을 보태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또 각 고을 중에 능히 선창하는 이가 있으면 같은 뜻으로 응하는 자가 절로 기약하지 않고도 이르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므로 감히 각 고을에 유사(有司)를 정하여 성명을 기록하였으니, 선창에 도가 있으면 그 지성이 귀신도 감동시키거늘 하물며 사람이리오. 하물며 의리를 아는 사람이리오. 제군은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본도의 여러 의병에게 보내는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이다. 흉하고 추한 놈들이 침범한 지 이제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관군이 여러 번 붕괴되어 소탕할 기약이 없다. 7도의 생령이 이미 어육이 되었고 다만 호남 한둘만이 겨우 보전함을 얻었으니, 지금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찌 회복의 공을 성취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구하랴.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龍城)으로부터 거창(居昌)에 와 주둔하여 바야흐로 영남의 여러 어진 분들과 협력하여 개령ㆍ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 하나,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와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바로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가지로 생각하여도 상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하여 앉아서 응원병만을 기다려도 아직까지 먼저 소리치는 장수가 이 경계에 이르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까닭이 있다고야 하겠지마는 왜 그리 더딘지 또한 부끄러움이 없지 못하다. 개령의 험한 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을 것이니, 만일 흉한 오랑캐가 마구 몰아 빈다면 그 뒤에는 제군이 비록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득 찬 적을 막으려 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 굳센 적에게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추어 와 응원하여 좌우의 어금니처럼 서로 의뢰하고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엄이 미치는 곳에 적이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하여 일제히 치면 어떤 견고한 적인들 꺾지 못하리오. 비린내와 누린내를 소탕하고 씻어서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절로 완전하여져서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기미가 이와 같은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다시 원하노니, 제군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하여 후회가 있게 하지 말지어다. 임기응변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숭상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다가 늦어서 기회에 미치지 못하면 다만 모든 벗의 꾸짖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조정의 법이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아니하리오.
○ 성주ㆍ개령에 점거한 적이 더욱 치성하므로 관군과 의병이 연달아 싸워 불리하다. 본도의 감사와 모든 의병장이 여러 번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간절히 구원병을 청하였더니, 정철이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서 본도의 관군 5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개령ㆍ성주의 전투를 돕게 하다. 남간 등이 해인사(海印寺)에 진군하여 영남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조정이 용만(龍灣)에 오래 체류하매, 성을 버리고 거둥한 것을 후회하니, 따라가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당시의 수상이던 이산해(李山海)에게 허물을 돌렸다. 이때에 산해가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귀양가 있으면서 시를 지어 스스로 해명하기를, “성난 물결에 함께 빠지는 것은 자식이 달갑게 여기는 바이나, 몰래 업고 깊은 산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가. 백성들의 충의가 응당 무수하리니, 1려(旅)로 중흥함이 반드시 어려운 것만은 아니리.” 하다.
○ 영유(永柔)에서 무과를 보여서 무신 5천 명을 얻고, 또 의주에서 문무과를 함께 보여 문신 13명과 무신 6백 명을 얻다.
○ 휴정(休靜)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팔도 승병 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을 삼고, 유정(惟政)은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부총섭을 삼다. 적을 토벌하여 공이 많으므로 이런 승진이 있다.
11월. 경기 조방장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복수할 일로 격문을 전하니,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히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復讐之軍]라고 이름 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들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ㆍ형ㆍ아내ㆍ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흔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뼛하다.
제군들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發程)하여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 통문은 다음과 같다.
때를 불행히 만나서 가화(家禍)가 망극한데 불초한 고자(孤子 아버지가 죽은 상주의 자칭)는 초토(草土 상중에 있다는 뜻)에 병들어 아직도 이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었더니, 이제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 주창하여 여러 도에 전해 타일러서 원통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적을 쳐서 원수 갚을 일을 도모하니, 사람의 마음은 같은 바이거늘 누가 흥기하지 아니하리오. 조완도(趙完堵) 군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이라 반드시 장차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호서에서 깃발을 들 것이다. 고자는 비록 못났으나 친상(親喪)이 이미 땅 속에 들어갔으니 이 몸은 죽어도 또한 유감이 없으므로 애통함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 제군들과 군사와 기계를 모집하여 북으로 가서 적에게 죽을 계책을 하려 하노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러분도 역시 즐겨 들을 바일 것이다. 슬프다! 구차히 살아 이에 이르매 윤기(倫紀)가 멸하였다. 다만 인품이 미천하고 힘이 약하여 일을 선창하지 못함이 한이더니, 홍공(洪公)이 이미 선창하였는데 고자 등이 또 손을 소매 속에 넣고서 따라 일어나지 않고 늙어서 방구석에서 죽는다면 장차 어찌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뵈오리오. 홍공은 명성과 위엄이 이미 드러나서 그를 빌려 일할 만하고,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의 3사군(使君 지방의 수령)이 또한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품어서 이 적과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하였으며, 도체찰상공(都體察相公)이 군사를 합쳐 원수 갚을 것을 허락하여 법규로써 구속하지 않기로 하였고, 군량과 무기도 뒷날의 걱정이 없으니, 다만 제공이 호응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다.
아! 호남 사람이라야만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하건대 서울에서 남장으로 적을 피해온 사람인들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적의 칼날에는 요행히 면하였으나 풍상을 겪어 고생으로 부모를 잃은 이도 또한 이 적을 잊지 못하리라.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지 않으며, 형제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하지 않으며, 벗의 원수는 칼을 돌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거듭 생각하라. 망친(亡親)께서 추성(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남방의 제공이 국사에 같이 죽기로 기약하여 향을 태우고 하늘에 맹세하여 대장으로 추대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형제의 의가 있었으니, 불행히 공업(功業)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제공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을 보는 것같이 하겠는가. 당일에 부하로 있던 무사들은 다 이미 의병으로 달려갔을 것이나 혹시 일로써 집에 있거나 혹시 진터에 나누어 수자리하는 자들은, 원컨대 고자를 불초하다고 하지 말고 추성에서 피를 마시며 맹세하던 것을 생각하여 큰일을 같이 성취시킴이 어떠하오. 제공들이 만약 가하다고 생각하거든, 엎드려 비노니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세와 약속을 맺고 출병할 기일을 정하기를 지극히 비나이다. 월일에 전 임피 현감(臨陂縣監) 고종후(高從厚).
후록(後錄) 1. 비록 원수 갚는 데 뜻이 있어도 병들고 약하여 능히 종사하지 못할 자는 무기로 서로 부조하든지 혹은 건장한 종을 대신 보내든지 혹은 쌀과 베를 내든지 혹은 전마(戰馬)나 짐 싣는 말을 내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할 것이니, 하천(下賤)ㆍ빈궁(貧窮)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되의 쌀 한 치의 쇠라도 모두 서로 부조함이 가하다. 아! 정위(精衛)가 바다를 메우고 한 삼태기로 산을 만드나니, 다만 그 정성에 있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1. 한갓 피난하여 온 사람으로서 앞장서서 맨손으로 서로 도울 만한 것이 없는 이는 혹은 자신이 군중에 따르든지 혹은 군량을 모집하되, 수수방관하지 말고 한 팔의 힘이라도 같이 들어줌이 어떠하오.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거창으로부터 합천 해인사로 진을 옮겨서 영남 의병장 정인홍과 협력하여 성주의 적을 쳤다. 자세한 것은 계사년 5월 조에 나타나 있다. 최경회는 그대로 거창에 머물러서 김면과 개령에서 같이 일하다.
○ 심유경(沈惟敬)이 중국 조정에 갔다 와서 다시 평양의 적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가지고 간 병부의 칙서에 중국 군사가 와서 구원한다는 말이 있다.
○ 복수 의병장 전 현령 고종후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주(濟州)ㆍ정의(旌義)ㆍ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ㆍ양성(梁姓)ㆍ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에 하늘이 세 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ㆍ양씨ㆍ부(夫)씨요,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ㆍ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었으니,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을 많이 길러냄이 대개 세 신인의 덕택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옮겨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고자의 선대도 고려 말기에 장흥(長興)의 고씨가 되었고, 부성(夫姓)의 후예는 지금에 문씨가 되어 처음의 부씨는 세상에 알려진 이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분파(分派)가 되고 세계(世系)가 멀어서 경사와 조문에 통하지 않으나, 최초에 세 신인이 탄생한 상서와 형제의 의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칭도하는데, 하물며 그 자손이 된 자들이야 어찌 차마 그 옛날을 생각지 아니하고 원수 갚는 사람을 대번에 길가는 사람처럼 보겠습니까. 근일에 망친이 적이 경성을 범하고 7도가 붕괴된 초기에 먼저 의병을 선창하였는데, 몸이 흉한 칼날에 죽어 하루에 부자(父子)가 국사에 함께 죽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표장과 증직을 더하고 길 가던 사람도 듣고는 절로 눈물이 흐르거늘, 하물며 우리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이야 어찌 깊이 마음에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불초한 고자는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족히 망부(亡父)의 일을 이을 만하지는 못하나, 종천의 원통함을 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이에 격문을 가지고 사노와 대소 신민에 타이르는 동시에, 다시 생각한즉 동성(同姓)의 친함은 만세에 잊지 못할 의가 있으며 양성ㆍ문성 두 집도 또한 그 처음에 함께 생겼으니 한마디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담을 헤쳐 고하니, 소문을 듣고 의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3성(姓) 여러 어른들은 개연히 탄식하고 함께 불쌍히 여기시어 그 재력에 따라서 혹은 전마를 내고 혹은 힘을 합해 서로 부조하여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하여서, 위로는 하늘에 오르내리는 선조의 뜻을 맞추고 아래로는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바라는 바를 위로해 주심이 어떠하오. 정은 넘치고 말은 움츠러져 여쭐 바를 모르겠나이다. 《정기록(正氣錄)》에서 나옴.
○ 사노 의병장(寺奴義兵將) 전 현령 고종후가 운운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가 여러 고을 의병청 제공과 고을 안의 여러 군자에게 고하나이다. 고자는 저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첨지 홍계남, 조아사의 아들 완도와 더불어 함께 복수할 계책을 도모하던 차에 도체찰 상공께서 또 사노장(寺奴將)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고자가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망부의 뜻을 계승할 수는 없으나 종천의 원통함을 한번 씻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를 좇아 이 적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기로 맹서하니 여러 군자께서도 들으시면 또한 반드시 마음에 슬프게 여기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사노의 수효는 비록 명부는 만들었으나 늙고 약한 자를 추려내는 것을 오로지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보니, 속이고 협잡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고자가 일을 일으키는 공효(功效)는 이것을 중하게 믿었는데 만약 징발한 것이 실지와 다르면 군사의 모양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제공께서 살피고 관리해 주시어 아전들로 하여금 농간을 하지 못하게 해 주시면, 건당한 자가 뇌물을 써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니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자는 비록 사사 원수를 갚는 것이지만 실로 나라의 적을 치는 것이니, 여러 군자께서 그 수고를 꺼리지 않으시고 저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어찌 다만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감사할 뿐이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후록. 오늘날 나라 안이 임금의 땅 아님이 없고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고자의 일을 사정(私情)으로나 공의(公義)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예사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각 고을 제공 중에 의병을 모집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본래부터 친밀한 사이라야만 힘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널리 통문을 보내니 일정하게 지정한 데가 없으면 서로 미루고 사양할 염려가 있고 또 평소에 서로 아는 사이에는 한마디 간청이 없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의병청 제공 외에 또 따로 제공의 성명을 기록하면서 혹 비록 평소에 안면이 없이 명성만 서로 들은 분 또한 감히 외람되이 성명을 쓰니 협력해 함께 싸우기를 바라나이다. 《정기록》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 경상도 인동(仁同)의 향병장 장사진(張士珍)이 본현의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다. 사진이 날래고 용맹스럽고 담략(膽略)이 있어 처음부터 열성으로 적을 토벌하다가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해지를 지키다. 하루는 동현(同縣)에 둔쳤던 적 수백 명이 불의에 덮쳤는데 사진이 다만 용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힘껏 싸워 먼저 비단옷 입고 은 투구 쓴 적을 쏘고 머리를 베어 창 끝에 꽂으니 적도들이 부르짖고 울며 도망해 갔다. 사진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쏘아 죽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 후 10일 만에 왜놈이 군사를 있는 대로 몰아 다시 이르러서 먼저 10여 기병(騎兵)으로 유인하여 도전하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적을 쏘매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적이 넘어지다.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죽였는데, 매복하였던 적이 돌연히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사진이 앞뒤로 적에게 쌓여 좌편으로 치고 오른편으로 항거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다. 일이 조정에 보고 되니 통정대부로 증직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정곤수(鄭崑壽)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병부에서 황제에게 청하여 말값 은 3천 냥을 주어서 궁면(弓面)과 화약 등을 사서 운반해 가기를 허락하다. 고사(攷事)에서 나옴.
○ 황제가 병부시랑 정3품이다.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군문제독(經略軍門提督)을 삼고, 동지(同知) 종1품이다 이여송(李如松)으로 제독군무(提督軍務)를 삼아서 남북 관병(官兵) 4만여 명을 통솔하여 와서 본국을 구원하다.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좌협대장(左協大將)이 되었는데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왕유정(王維貞), 참장 이여매(李如梅)ㆍ이여오(李如梧)ㆍ양소선(楊紹先) 및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 등이 다 통솔되다.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은 중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ㆍ전세정(錢世禎)ㆍ척금주(戚金周)ㆍ주홍모(周弘謨)ㆍ방시휘(方時輝)ㆍ고승(高昇)ㆍ왕문(王問) 등이 모두 통솔되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은 우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ㆍ참장 조지목(趙之牧)ㆍ장응충(張應种)ㆍ낙상지(駱尙志)ㆍ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遂)ㆍ양심(梁心) 등이 다 통솔되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은 중군(中軍)이 되고, 비어(備禦) 한종공(韓宗功)은 기고관(旗鼓官)이 되며,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종5품이다. 유황상(劉黃裳)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6품이다.원황(袁黃)은 찬획(贊劃)이 되고,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薪)은 군량을 감독하니, 특명으로 길을 배로 재촉하여 달려와 구원하게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성지(聖旨)로 유격 장기공(張奇功) 등을 시켜 은을 내어 군량과 마초를 사서 의주로 옮기는데 연로(沿路)로 운반하여 군량을 대주다. 고사에서 나옴.
○ 호남 의병을 청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바다 도적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매 경계에서 막아낼 사람이 없어 7도의 강산이 적의 손에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잠식됨을 면하여 조종의 강토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한두 의병장들이 충의를 분발하고 격려하여 의사를 모아 합한 힘이 아니었던가. 용성(龍城)ㆍ금산(錦山) 두어 성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곧 도리어 섬멸되고 완산(完山) 한 부(府)가 거의 먹힐 뻔하다가 결국 보존되어 승전의 보고가 여러 번 날아와, 추한 무리가 넋을 잃어 한 도의 생령이 안심하고 살게 되매 다른날의 회복이 여기에서 근거가 될 것이니, 적개(敵愾)의 큰 공이 태상(太常 시호와 훈공을 정하는 곳)에 기록할 만하다. 그들의 고풍(高風)이 미치는 곳에 누가 감동되어 사모하지 않으리오. 인홍(仁弘) 등은 각 고을이 붕괴된 나머지에 분기하고 장수와 군사들이 흩어진 뒤에 수습하여 간신히 불러모아 겨우 1 려(旅)를 얻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鷸蚌相持]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르니, 군사는 피곤하고 양식은 부족한데 여러 성을 점령한 적은 좌우에 벌여 있고 길에 왕래하는 왜놈은 먼 데나 가까운 데에 가득하다. 부상당하고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한창 날뛰는 적을 항거하자니 또한 어렵도다. 근일 이래로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여 이웃 고을에 개미처럼 모였던 놈이나 상도(上道)에서 후퇴한 놈들이 모두 성주로 모여서 실로 수효가 많으니, 마구 침입할 염려가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닥칠 것이다. 오늘 혹 방어에 실책하면 겨우 남은 8, 9고을도 장차 차례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왜적들이 몰아 짓밟을 걱정은 역시 호남 지방에서도 같이 염려되는 바이다. 하양(下陽)이 한번 함락되매 우(虞)와 괵(虢)이 따라서 망하고, 한단(邯鄲)이 굳게 지켜지니 조(趙)와 위(魏)가 함께 온전하였다.
본도가 호남에 대해서는 곧 우ㆍ괵의 하양이요 조ㆍ위의 한단이니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을 것인데, 막부에서 어찌 영남의 존망을 멀거니 쳐다보고 염려를 하지 않는가. 오직 생각건대 막부에서 평원군(平原君)의 사자[使]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강황(江黃)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저 무용스러운 군사들이 와서 한쪽에 주둔한다면, 이것이 실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살펴서 능히 남의 곤란함을 급히 여기는 의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형(邢)을 구원하는 부분에 ‘머문다[次]’ 라고 쓴 것은 《춘추[麟經]》에서 비방한 바이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됨은 옛 사서(史書)에 경계한 바입니다. 만약 혹시 군사를 끼고 주저하여 멀리 성원(聲援)만 할 뿐이라면, 비록 나물을 캐는 것은 산에 있는 호랑이 때문에 꺼린다지만 장호(張鎬)의 구원병은 수양(睢陽)의 패함에 유익이 없었으니, 늦추어서 기회를 잃었다는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任)ㆍ최(崔) 두 장수가 멀리 이웃 도의 위급함을 구원하여 새로 칼날이 한창 날래고 피곤한 군사도 용기를 솟구치니 크게 승리할 기약은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원컨대 막부에서는 웅장한 계책을 쾌히 결단하여《시경》〈무의편〉을 읊고 와서 두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맞추고 힘을 한 가지로 하면, 본도의 사기(士氣)가 믿는 바가 있어 스스로 배나 될 것이며 충청도의 군사도 또한 서로 의지하여 떨칠 것이다. 그리하면 소륵(疏勒)의 외로운 성이 추한 오랑캐에게 삼켜지지 않고, 즉묵(卽墨)의 남은 성이 망한 제(齊) 나라의 업(業)을 수복할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종묘가 바람과 먼지를 뒤집어썼는데 깨끗이 소제할 기약이 없고, 금여(金輿)가 서리 이슬을 맞는데 돌아오실 날이 언제이뇨. 서쪽으로 바라보고 통곡하니,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어라. 송 나라 강왕(康王)이 금(金) 나라 병영에 억류를 당하였고, 승상(丞相)이 오파(五坡)에 포로가 되었도다. 임금의 욕됨이 이와 같으니 의리가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창을 베개로 삼는 분함은 피차에 같은 바이요 경계는 비록 호남ㆍ영남으로 갈리었으나 형세는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니, 때를 놓쳐서 미치지 못하면 배꼽을 물어뜯은들[噬臍]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부로(父老)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야흐로 고자(高子)가 오기를 기다리니, 숙(叔)ㆍ백(伯)은 여러 날이 걸리는지라 위(衛) 나라 사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니, 선생들께서는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좌의병 통문은 다음과 같다.
군량의 급한 것을 글월을 써서 달려가 고한 지가 여러 번인데도 아직 답장을 보지 못하였으니, 깊이 부끄럽고 괴이하게 여긴다. 혹시 중간에 지체되어 여러분에게 보여지지 못하였는가 걱정되므로 번독함을 잊고 다시 말씀을 드리노라. 대저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함이니, 군량 한 가지는 피차를 구별함이 없이 오직 넉넉한가 급한가를 볼 뿐이다. 지금 우리 군사가 처한 곳은 곧 호남ㆍ영남의 목구멍인 격으로 성산(星山)에 웅거한 적이 세력을 길러 치성해지려 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 이하에는 다시 험하고 막혀 방어할 만한 데가 없으니, 우리 도의 위태로움을 장차 구할 수가 없고 회복의 터전도 또한 의지할 데가 없으니, 기회의 중대함이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우리들이 이 때문에 여기에 힘을 써서 싸움도 하고 지키기도 하여 쳐서 죽인 것이 많으니 추한 놈들을 섬멸할 형세가 이미 우리의 눈앞에 있다. 다만 영남이 함몰된 나머지에 군량을 공급할 계책이 없고 우리들의 준비한 것은 또한 이미 다되어 거의 이룬 공이 하루아침에 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만이 담당할 걱정이리오. 동도(同道)의 유식자로서 마땅히 한심히 여길 바이다. 대저 먹는 것이 군사보다 먼저이니 먹을 것이 없으면 군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漢) 나라를 일으킨 공이 소하(蕭何)에게 갈 것인저. 하물며 지금 유림에서 거사하는데 나가는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하고 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군사를 위해 양식을 준비함이 한결같이 공의(公義)이니, 기회에 나아가 싸움을 이기는 것은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려니와 양식을 끊이지 않게 함은 누가 그 중책을 맡을꼬. 여러분이 공사(公事)를 위하는 마음으로 응당 경영하고 도모하여 널리 거두고 모았을 것이며 또 들은즉 청(廳)을 세울 지시와 준비가 있어 장차 기다리는 바가 있다 들었다. 우리 군사의 급함이 이미 이와 같고 여러분이 계책하는 바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 마음으로 서로 도울 것이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몸도 생각지 않거늘 하물며 그 재물을 생각하랴. 사재(私財)도 감히 생각하지 않거늘 하물며 향교나 서원의 소유는 곧 유가(儒家)의 공물(公物)인데도 지금 쓸데없이 둔다는 말인가. 삼가 원하건대 제공이 혹은 공(公)이거나 혹은 사(私)이거나 있는 대로 그에 따라서 번개처럼 싣고 별처럼 운반하여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는 듯한 바람은 풀어 주면 이 일을 능히 끝낼 것이니, 어느 것이 여러분의 덕택이 아님이 있겠는가. 삼가 원하건대 여러분은 자세히 살펴 힘써 도모하소서. 이상은 호남에 보낸 통문이다.
○ 합천 군수 김면을 본도 우병사로 임명하고,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를 통정대부로 가자하다.
○ 충청도 사람 이산겸(李山謙)이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일어나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적을 토벌하다.
○ 경기도 진사 원연(元埏)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용인(龍仁) 금령(金嶺)의 적에게 크게 패하다. 원연은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의 아우이다. 적령은 역의 이름인데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이 적은 곧 30리마다 일둔(一屯)씩을 둔 적이다.
○ 상의대장(尙義大將)이 합세할 일로 통문 하니,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침범한 때를 당하여 군웅(群雄)이 병립할 수 없는[連鶴不栖] 걱정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감히 어리석은 계책으로써 만전의 계책을 돕고자 하나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 비록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오늘날의 사세로 헤아려 본즉 가장 급선무는 합세하여 힘껏 싸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관군과 의병이 곳곳마다 벌 떼처럼 일어나는데 각기 맹주(盟主)가 있어서 깃발을 나누어 세워 군령에 통솔이 없고 여럿의 마음이 일치하지 못하니, 좌를 치려고 하면 갑(甲)이 달려와 원조하기를 꺼리고 우(右)를 치려고 하면 을(乙)이 경계를 넘을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피차의 사이에 전혀 입술과 이[脣齒]가 서로 의지하는 듯한 형세가 없고, 앞뒤의 진(陣)에 손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 함이 없으며, 심지어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여 앉아서 구원하지 않는 자도 있고,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패하는 자도 있습니다. 때를 끌고 날을 끌어 적의 세력을 점점 기르고 오늘에 싸우지 아니하고 내일에 싸우지 않아 우리는 점차로 약해져서 마치 불이 기름을 태우듯 합니다.
마침내 전란이 오래 끌어 북풍의 눈비가 박두하는데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서쪽 국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니, 어찌 국가의 깊은 수치가 아니며 신민의 오랜 슬픔이 아니리오. 대저 우리와 적의 강하고 약한 것이 비록 현격하게 다른 것 같으나 만약 두어 진(陣)의 힘을 가지고 한 떼의 적을 섬멸한다면, 이것은 활활 타는 불을 들고 마른 풀에 날아 들어 태우는 것과 같아서 저 죽음을 앞에 둔 적의 무리를 한번 휘두르는 깃발에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오히려 매복을 설치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소굴을 질러 끊는 거조가 없다면, 비록 한두 가지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래사장의 사람이 흙을 짓이겨 맹진(孟津)을 막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날로 치성하는 적의 화에 효과가 있으리오. 큰 공을 도모하는 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것이며 기특한 계책을 내는 자는 반드시 뜻밖의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니, 적을 치는 방법이 어찌 매복을 설치하는 데만 그칠 따름이리오. 세가 약하면 힘이 큰 자에게 압제를 당하고 원조가 고단하면 많은 군사에 좌절을 당함은 어리석은 이나 지혜 있는 이나 한 가지로 아는 바이거늘, 오히려 성패(成敗)에 요리조리 의심하고 이롭고 불리한 형세에 앞뒤로 오도가도 못하고서 1년의 오랜 세월을 끌면서 구벌(九伐)의 쾌함을 본받지 못하고 한갓 양식을 운반하는 허비만 있고 승리를 보고하는 기약을 보지 못하여 온 나라가 반이나 오랑캐의 땅이 되고 만백성이 전부 불타는 막사의 제비꼴이 되었소. 만약 이러기를 그치지 않으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사가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옛날 충의의 선비는 국사가 위급할 즈음을 당하면 꺾이고 패함으로 저상(沮喪)하지 아니하고 세가 약하다고 싸우지 않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일을 가지고 판단하건대 한구석 탄환만한 지역을 3국이 솥발처럼 맞선 즈음을 당하여 동으로 치고 서로 쳐서 앞뒤로 백 번 싸웠으므로 그의 말에, “우리와 적이 양립하지는 못할 것이요, 왕업이 한쪽에서 편안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10배의 군사로써 한 귀퉁이의 적을 질러 끊는 것은 애당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다시는 할일이 없습니다. 적이 와서 범할 때를 당하면 극력으로 방비하고 적이 물러갈 제는 합세하여 나아가 공격하여, 번갈아 싸워서 적을 애먹이는 공을 세우고 적을 구경이나 하여 길러 주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이것이 실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 아직까지 섬멸하는 것을 늦추고 있으니 하루이틀 지나 다시 몇 달이나 더 걸린다면 군량은 이미 다되고 백성은 모두 흩어져서 비록 굳게 지키려 하여도 되지 못하고 적이 우리 땅을 점령한 것은 전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의 양식이 다 된뒤를 타서 저 적의 물고 삼키는 화를 마구 저지른다면, 누가 다시 활을 당겨 적에게 항거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미치매 꿈에도 놀라고 먹다가도 목에 걸립니다. 원하건대, 모든 군자는 의리로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성으로 목숨을 바쳐, 하늘을 쏘는 흉한 놈들에게 마음을 분격하여 해를 취하는 공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실로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중류의 지주(砥柱)일 것입니다. 제군의 하루가 없으면 인도(人道)의 하루가 없는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 중에 누군들,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옷을 입었으리라.” 하지 않으리오. 신포서(申包胥)의 한 몸이 오히려 능히 초(楚) 나라를 보존하였고 1려(旅)의 군사가 족히 하(夏) 나라를 일으켰으니, 지금의 병력이 전일보다 10배가 되는데 여러 군자의 충성을 분발하는 절개는 또 어찌 옛사람보다 뒤지리오. 다만 군사를 거느린 지는 시일이 경과되었는데 성공을 고하는 기약이 없는 것은 진실로 군사를 거느린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하고 능히 합세하여 힘껏 싸우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군사를 쓰는 것은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지, 교묘하더라도 더딘 것을 숭상하지는 않습니다. 시사의 위급함은 불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원컨대 주저하지 말고 속히 큰 계책을 내십시오. 풍문에 들은즉 근지에 유둔하던 적이 여러 번 야습을 당하고는 도망한 놈이 반이 넘는다 하고, 더구나 가을이 지나 날씨가 차가워지는데 적들의 거처는 서늘하고 엷게 되어 있으며 본래 벗고 사는 놈들이라 견디기에 익숙지 못하여 알몸으로 얼어 죽은 놈이 길에 서로 잇다랐다 합니다. 아마도 흉하고 교활하며, 사납고 추한 놈들이 죄악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도 우리가 기회를 잃어 섬멸할 기약이 없으니 하늘이 반드시 추위를 빌려서 남김없이 죽이려 하심일 것입니다. 그러고 본즉 미친 적들이 우리 땅에 오래 지체하다가 겨울을 넘기는 것이 또한 국가의 불행 중 다행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악한 자에게 앙화를 주는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천시(天時)에 할 만한 기회가 왔으니 적이 어찌 그 목숨을 오래 끌 수 있으리오. 이러한 심한 추위를 당하여 급히 공격하고 놓치 말아야 할 기회가 이때입니다. 양쪽 진에서 통신하는데 편지 한 장이면 족하겠지마는 소모관(召募官)에게 부탁하여 간절한 뜻을 전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일에 회맹(會盟)할 때에 마침 사기(事機)로 인하여 크게 거사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통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고충(苦衷)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전하니, 상세한 것은 전하는 이의 입으로 다할 것입니다. 각기 개미 힘을 다하고 함께 닭ㆍ개의 피를 마시어, 성하(城下)의 맹세로 하여금 패상(㶚上)의 희롱에 돌아가지 말게 합시다. 삼가 바라노니, 제군은 각기 힘쓰소서.
○ 전라 좌ㆍ우의병이 오래 영남에 있어서 성주ㆍ개령의 적과 여러 번 싸웠으나 한번도 전승(全勝)한 때는 없고 비록 몇몇 베어 죽인 공은 있으나 정병과 용사들의 피해가 너무 많으므로 두 장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철병하여 북으로 가서 근왕할 계책을 하는 이가 많으니, 영우(嶺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머물러서 살려 달라고 굳이 청하다. 인동 선비 장봉한(張鳳翰)이 임계영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한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오. 그 충성과 용맹이 다른 관군과 견줄 바가 아니요 의기에 분발함이 또 중들의 유가 아닙니다. 의로운 소리와 높은 절개가 늠름하여 창졸의 사이에 계책을 결단하고, 위태롭고 망하는 즈음에 자신을 잊고서 기회에 나아가 싸우는 것은 오직 의일 뿐이요 크고 작은 것과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병의 앞에는 강한 적도 강함이 되지 못하고 많은 적들도 많은 것이 되지 못하여 부딪치면 부서지고 범하면 타버려서 그 형세가 마른 가지나 썩은 가지를 꺾은 것과 같이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옛날 주(周) 나라에 있어서는 정 무공(鄭武公)과 위 문후(魏文侯)요 당 나라에 있어서는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도 얻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하대(下代)이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이 얻기가 어려운데 우리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태학관(太學館)에 올빼미가 낢을 통분히 여기고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을 부끄럽게 여겨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개미 같은 군사를 모은 자가 곳곳마다 일어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정신으로 싸우니, 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충과 의가 모두 열렬하여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은 것은 전라도가 제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조종 2백 년의 교화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난리를 당한 즈음에 분발하게 하고, 호남의 의사들이 더욱 그 가운데 흥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께서 파천하시고 백관이 도망해 숨으며 빛나던 종묘사직이 이미 기장이 우거진 폐허가 되었는데도, 임금께서 다행히 여기시는 바는 전라도의 군사가 완전한 것입니다. 피란하는 백성들이 도마 위의 고기와 솥 속의 물고기를 면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는 고생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믿는 바는 전라도가 그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의 희망이 모두 전라도에 있을 뿐 아니라 왜적이 두려워하는 바도 역시 호남 한 도이니,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실로 물러앉아서 매우 위급한 오늘날에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大駕)를 눈과 서리 같은 모진 고생 가운데서 맞아 모셔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백성이 물과 불 같은 재난에 빠진 것을 보고 건져낼 것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국사에 절충하는 절개를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바치는 이것이 장군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도 60고을의 남은 백성 중에 산골에 숨은 자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언제나 끝남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글귀를 읊고, 호남을 바라보고는 매양, “왜 날을 지체하는고.” 하는 시를 읊조리면서 피란한 가운데서 목을 늘이고 바라는 것이 여후(黎侯)가 숙백(叔白)을 바라는 것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이제 겨울철이 닥쳐 추위의 위엄이 치성하니 각기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열렬히 가지고 앞다투어 원수 갚을 칼날을 갈아서 멀리 풍상의 고생을 무릅쓰고 발섭(跋涉)하는 괴로움을 꺼리지 말아서, 금릉(金陵)의 달밤에 깃발이 펄럭이고 감문(甘門)의 서리에 북소리가 들리어 즐거이 부르짖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고 물이 뒤집는 듯 뛰고 날치는 기운은 번개가 번쩍거리고 뇌성이 달리는 듯하여, 그 뜻이 장차 길보(吉甫)의 토벌을 따르고,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전진을 좇아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왕국을 평정하리니, 이것이 어찌 헛되게 갔다가 헛되게 돌아오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은 우리 백성이 북치는 소리를 듣고는 비록 바구니의 밥과 병에 넣은 장[簞食壺漿]을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영접하지는 못하나마 모두 기쁜 빛으로 서로 고하기를, “우리 장군은 위무(威武)와 용략(勇略)이 의를 제일로 삼는 분이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장사(將士)가 구름처럼 모이고 호령이 엄숙하게 행하며 군세(軍勢)가 이와 같이 장할까.” 하여, 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주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적을 죽이는 데는 모두 일곱 발자국 안에 허물없기를 기약하여 대를 쪼개는 형세와 매[鷹]처럼 드날리는 공을 하루아침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에 전도(前導)가 밤에 놀라 망녕되이 대군이 별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적을 잡을 기세를 놓쳤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의 실책이리오. 실로 영남의 군사들이 미친 개 같은 왜놈들에게 겁을 내는 것이 벌써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이 아니므로, 적이 우리를 추격한다는 말을 그릇 전하여 퇴군한 죄를 가지고 마침내 장군의 군사로 하여금 회군할 의사가 있게 한 것입니다.
아!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여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는 것만 같지 못하거늘 어찌 한 번 놀란 일로 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리오. 대저 근왕한다는 것은 반드시 근왕하는 실제를 다한 연후에야 그 명칭에 맞추어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아니한다 할 것입니다. 강회(江淮)의 외로운 성으로 감히 반역한 갈노(羯奴)를 항거하고 죄를 성토하는 한 장의 편지로 능히 백만의 군사를 물리쳤으니, 만고 이래로 의병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무릇 이 몇 사람이 만일 혹 적세의 강약을 비교하고 한 몸의 이해를 헤아렸다면 그 이름을 듣건대는 의사(義士)와 같은 점 이 있지마는 그 실지를 돌아보면 도리어 겁쟁이와 같으니 의에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군자는 그 실지를 다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장군은 맹렬하기가 범과 같은 용사와 곰과 같은 군사를 끼고 하늘에 뻗치는 칼을 짚으며 해를 휘두르는 창을 잡고서 의병으로 이름하고 호남의 의사를 끼고 왔으니 그 이름이 장하지 않습니까. 난을 평정하여 바른 데로 돌림이 이 한 걸음에 있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한 걸음에 있으니, 그 맡은 것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싸워서 이기면 의기가 등등하고 싸워서 패하면 군세가 움츠러들어서 한 번의 승부 사이에 진퇴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반드시 의병의 군문에 위엄이 사랑함보다 앞서고 군령이 엄숙하여 오직 의(義)를 따른다면, 방숙(方叔)의 계책이 장하여 매우 치성하던 적세가 스스로 위축되어 날로 위축된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맹시사(孟施舍)의 용맹을 굽히거나 조괄(趙括)의 겁(怯)을 내어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않았는데 오던 길로 수레를 속히 돌린다면 어찌 환영하였던 백성이 실망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상이 회복하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적에게 약함을 보임이 또한 심할 것입니다. 생(生)은 날뛰는 적의 세력이 이로부터 모진 독을 함부로 뿜고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더욱 물과 불에 빠진 고통을 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런즉 장군이 이번에 가시는 것을 혹자는 국가의 불행이라 합니다. 애당초 사방에 두루 의론하여 의기를 떨쳐 군사를 모집하던 실제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름과 그 실지가 현저히 다르니 혹자가 의병이라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나이다. 바라건대 장군은 생각하소서. 또 가는 것을 속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7월에 성상께서 손수 쓰신 조서를 만 리나 되는 평안도에 반포하시어 도탄에 빠진 남은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모집한 의사들을 표창하셨습니다. 한 장의 윤음으로 신자의 정성을 격려하고 충의를 가상히 여김이 호남의 장수와 군사에게 더욱 극진하시니, 전하의 명철하심으로 어찌 모르고 이같이 칭찬하겠습니까. 과감한 기풍이 이미 무사할 때에 증험되었으므로 충성과 의분은 세상이 요란한 뒤에 더욱 미더웠던 것인데, 이제 적의 굴혈에 와서 벤 머리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고 창과 칼을 거두어 넣으며 빠진 이를 건지러 왔던 수레를 장차 돌리려 하니, 비록 젖을 바라고 우는 어린애는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파천해 계신 전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구(旄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언덕)의 칡이 서도의 풍상에 마디가 변하였고 깃발이 오기를 바라는 기대는 한갓 경동의 부로들에게만 간절하니, 처량한 기상이 기하(岐下)의 천도(遷都)에 견줄 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흥을 생각하는 형세는 다만 호남의 의사들을 믿는데, 군사를 주둔한 지 10일 만에 혈전(血戰)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니 장차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가. 어찌 불행함이 이에 이르는가. 영남의 군사는 흩어지고 도망한 중에 불러 모았으니 흙 무너지듯 붕괴되던 나머지에 여러 번 물러감이 진실로 형세가 그러하지마는, 장군의 군사는 강하고 날래며 용감함이 견줄 데 없는데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 대한 의리를 알면서도 오히려 장한 기운이 꺾이어 도리어 군사를 돌리겠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전일에 올 때에는 한갓 아녀(兒女)들의 슬퍼함만 있었고 지금 돌아갈 때에는 피리와 북으로 환송함이 없으리니, 내일 아침 호남으로 가는 길에는 산하(山河)에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부로들이 물어보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다만 부로에게 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호남 의사의 낙담함이 장차 장군으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상가 원하건대, 장군은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을 깊이 애통히 여겨서 다시 근왕의 정성을 굳게 할 것이요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지 마소서. 남도를 수복하여 소목공(召穆公)의 경영을 성취하고 이수(李收)의 토벌이 성공할 때는 지금이 그때입니다. 저는 무(武)로는 적을 막을 재주가 모자라니 창을 메고 싸우는 노력도 감당할 수 없고, 문(文)으로는 적을 퇴각시킬 수 없으니 어찌 무의(無衣)의 시를 화답하겠습니까. 장차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본받아서 진(秦) 나라 뜰에 통곡 하고저 하나 갈 길이 아득하니 누구에게 의탁하리오. 멀리 북극(北極 임금의 별을 상징함)을 쳐다보니 슬픈 눈물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우뚝한 우리 장군이 지금 세상의 곽자의와 이광필로 기린각(麒麟閣) 위에 공이 반드시 제일이 되어 개선(凱旋)하는 날에 문무(文武)의 덕을 칭송하여 다시 〈6월편〉을 노래하기를 원하나이다. 장군은 장한 기운을 더하시어 곤이(昆夷)의 주둥이를 무찔러 주소서. 도망해 숨어 다니는 중에 소리를 삼키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생각하소서.
○ 호종 전연서 별좌(扈從典涓署別坐) 경상도 고령 사람 김응정(金應禎)이 전하는 변란 후의 소식은 다음과 같다.
당초에 사변을 듣고는 모든 일이 창황하였고, 또 한 사람도 장수될 만한 사람이 없어 이일(李鎰)은 함부로 싸워서 처음은 대군이 패하였고, 신립은 한신도 아니면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서을 쳐서 또 온 나라의 장사(壯士)를 다 죽였다. 주상과 조정은 항상 신(申)ㆍ가(李)를 장성(長城)처럼 믿었다가, 두 장수가 패한 것을 듣고는 인심이 놀라고 당황하였고 한두 정승이 처음으로 서도로 파천할 의론을 내어 경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게 되었다. 온 성중의 남녀들이 거리를 메워 물결처럼 달려서 길에 엎어지듯 자빠져서 구렁에 가득 찼는데, 대가를 호위하여 따르는 자가 겨우 수십 인이었다. 평양에 행차를 멈추시고 강변 7고을의 토병(土兵)을 긁어모아 임진강에서 방어하였더니, 적이 산곡에 군사를 감추고 수일 동안 약한 형세를 보였다. 이때에 신할(申硈)이 중군이 되고 이빈(李薲)ㆍ이천(李薦)이 좌우군이 되었는데, 좌우군이 이르기 전에 중위(中衛)가 먼저 돌진하였다. 적의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자 우리 군사가 혹은 물 속에 던져지고 혹은 칼날과 탄환에 죽어서 흐르는 송장이 강물을 막았고, 남은 군사들은 낙담하고 정신이 없어 투구를 떨어뜨리고 말을 버리고서 모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송경(松京)과 황해도를 함락시키고 대동강 가에 세 군데 진을 쳤다. 호종해 온 모든 신하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키고 매복을 설치하며 명주 30여 동(同)과 포목 40여 동, 군량 7만여 석을 거두어들이니 군세가 조금 떨치고 인심이 분발하기를 생각하였다. 창성(昌城)의 관인(官人) 임욱경(任旭慶)이 모집한 용사들이 자원하여 먼저 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쳐서 적의 중위를 섬멸시키고 적의 선봉장을 베니 적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양곡이 다하여 물러가려 하였는데, 중화(中和) 사람이 향도(向導)가 되고 경통사(京通事) 김덕겸(金德謙)이 계책을 도와주어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인도하여 오니, 수장(守將) 김억추(金億秋)ㆍ성취(成鷲)ㆍ박석명(朴錫命)ㆍ김응서(金應瑞) 및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이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를 심히 엄히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한 몸은 상관할 바 아니나 차마 아녀들이 욕을 당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다.” 하고, 거가가 장차 출발하려고 성문을 열도록 명하니 재상들이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듣자니 두어 사람이 출성하기를 청하는 이가 있었다 한다. 윤좌상(尹左相)은 혼자 성 위에 앉았다가 적이 성을 포위한 연후에 단기(單騎)로 나갔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계책을 결정하여 중전(中殿)을 강계(江界)로 보내고 동궁(東宮)을 강원도로 보내며, 임금은 하루 밤낮에 수백 리를 달려서 용천(龍川)에 멈추었다. 여러 신하들이 붕괴되어 흩어진 두어 장수를 잡아 베고 김명원(金命元)으로 원수(元帥)를 삼아서 순안(順安)에서 방어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이겼으므로 적이 감히 마구 몰아가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요양(遼陽)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더니, 중국의 유격 장군 사유(史儒)ㆍ왕유정(王惟貞)ㆍ왕수관(王守官) 대조변(戴朝弁)ㆍ서일현(徐一賢) 및 부총병(副總兵) 수양정(修養正)과 관전보 참장(寬典堡參將) 조승훈(祖承訓) 등이 나오고, 광녕위 총병(廣寧衛摠兵) 양소(楊紹)가 동요(東遼) 동양참(東陽站)을 출동시켜 감독하였다. 형양성 밑에는 논이 많다. 또 비가 왔다. 사유가 군사를 나누어 4초(哨)로 만들어서 매 초마다 각기 우리 군사 백 명으로서 전도를 삼아서 밤을 무릅쓰고 성을 부수어 일시에 돌입하니 적이 놀라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왔다. 우리 군사가 1초는 인도해 들어가고 나머지 3초는 들어가진 아니하니, 적이 다시 싸워서 사유가 죽고 중국의 말 5천 필과 중국 병사 4백여 명을 상실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돌아왔다. 예조 판서를 보내어 요동에 청병하였더니, 구련성(九蓮城) 양 총병(楊總兵)이 인하여 북경의 조정에 아뢰었다.
절강(浙江) 장수 낙상지(駱尙志)는 손으로 천 근의 무게를 들어 호를 낙천근이라 하는 자인데 그와 송응창(宋應昌) 등이 포수(砲手) 3천을 거느리고 근일에 구원하러 나올 것이라 하였다. 황제가 사신 설번(薛蕃)을 보내어 주상을 위로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돌아가고 중국 병사 수만이 왔는데, 모두 평지에서 달리기만 일삼고 활 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하므로 당분간 포수가 오기만 기다렸다. 동궁은 한 달 여를 이천(伊川)에 머물다가 적병이 사방에서 오자 성천(成川)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바야흐로 영변(寧邊)으로 향하려 할 때에 동궁을 모신 신하는 영상 최흥원(崔興元), 우상 유홍(兪泓), 이상상(二上相) 최황(崔滉)이요 임금을 모신 여러 신하는 풍원군(豐原君) 유성룡(柳成龍), 좌상 윤두수(尹斗壽)ㆍ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 형조 판서 한응인(韓應寅)과 구사맹(具思孟)ㆍ유은(柳垠)ㆍ심충겸(沈忠謙)ㆍ박충간(朴忠侃)ㆍ정사위(鄭士偉)ㆍ이충원(李忠元)ㆍ심희수(沈喜壽)ㆍ오억령(吳億齡)ㆍ이국(李𥕏)ㆍ이정립(李廷立)ㆍ홍인상(洪麟祥)ㆍ박응복(朴應福)ㆍ정곤수(鄭崑壽)ㆍ민준(閔濬)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諴)뿐이었다. 임금이 평양을 나올 때에 김귀영(金貴榮)으로 함경도 도체찰사를 삼아서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부자 등과 더불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였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될 경우에 행차를 따를 이를 물으니, 위에 열기한 신하들이었다. 유홍과 최황으로 하여금 종묘의 5신주를 모시고 동궁과 더불어 영동(嶺東)으로 들여보냈다.
적병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김귀영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이 우수하다 하여 도순찰사로 정하여 남ㆍ북병사를 통제하게 하였더니,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그 밑에 있기를 부끄러워하여 나이를 다투고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군졸들이 단결되지 아니하고 겸하여 함흥(咸興)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처음으로 반역하였다.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함께 회령으로 들어가자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이 공모하고 적을 끌어들여 두 왕자와 그의 부인, 기타 조신(朝臣)들을 잡아서 왜장에게 항복하였다. 왜장이 가마에 왕자 및 여러 재신들의 부인을 메고서 가는 곳마다 객사에 거처시키고 문천(文川)에 이른 지가 지금 거의 한 달이나 되었으니, 지금은 아마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 및 판관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가 유영립은 도망해 나왔고, 새 감사 윤탁연(尹卓然)은 겨우 평안도 경계 설한령(薛罕嶺) 밑에 별하소보(別河小堡)를 보존하였다. 적이 회령을 포위하고 6진을 치고서 강을 건너 호(胡)를 치자, 모든 호들이 멀리 도망하고 그 부락을 다 불태우고 돌아왔다. 전일에 청원사(請援使)가 요동에 이르러 수양정(修養正)의 말을 들었는데, 우리 사신이 중국 병사가 패한 데 대해 사과하니, 답하기를, “군사는 사지(死地)인데 어찌 우리만 살고 저들만 죽으란 이치가 있는가. 그리고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인화(人和)가 귀한 것인데 전해 들은즉 평양의 지세는 모두 진흙땅이요 또 논이 많다 하니 이것은 지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계절이 한창 장마비가 왔으니 이것은 천시를 얻지 못한 것이요 상국(上國)과 본국이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뜻이 통하지 못하니 이것은 인화가 없음이니, 그 때문에 패한 것이다. 반드시 남병(南兵)이 오고 겸하여 들판이 마르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달리어 적을 쫓을 수 있을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여 근일에 나가서 구원하리라.” 하였다.
옛날 주 나라 말기에 천자가 7국의 전쟁을 구하기 어려웠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북으로는 오랑캐에 인접하고 남으로 섬 왜놈[島夷]에 이웃하여 전쟁이 늘 연달았어도 중국 병사가 와서 구원함이 이런 극진함에 이른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본다면 회복할 수 있는 일맥의 희망을 이것으로 알 수 있고, 남쪽에서 의병이 곳곳에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것이 큰 기회이다. 다만 들은즉 적이 경영한 지 여러 해 만에 그 소굴을 거의 비우고 온 것은 재물을 도둑질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처음 나올 때에는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각도에 흩어져 들어가서 분탕하고 전복시킨 연후에 명년 2월에는 요동을 범하기로 계획을 하였다는데, 지금은 평양에서 항거하고 각도에서 근왕하는 군사와 중국 병사가 구름처럼 모이니, 적의 계획이 아마도 중간에 저지될 것이다. 다만 함경도와 강원도의 모든 적이 경성과 평양의 모든 적과 더불어 성세가 서로 응하여 동래로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 길에 막힘이 없어 적들이 모두 큰 도회지를 점령하였고 우리 군사는 곳곳의 들에 둔쳐서, 주인과 객이 바뀌어 괴로움과 편함이 형세가 다르다. 또 행재소를 호위하는 이, 동궁을 따르는 이, 순안에 있는 원수의 소관, 강동(江東)에 있는 이일(李鎰)이 거느린 바, 삼현(三縣)에 있는 김응서(金應瑞)가 거느린 바, 최원ㆍ김천일의 의병 만여 명과 호서(湖西)ㆍ삼포(三浦)ㆍ해서(海西)에 각기 감사ㆍ순찰사ㆍ방어사 등이 모두 군관 수천 명씩을 거느리니, 군사는 작고 장수는 많아서 여러 도에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는 장수와 군사가 무려 수십만이다. 군사와 말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과 콩이 적어도 수만 석은 되어야 하는데도 각 고을의 창고는 타버려서 저축이 없고, 도망한 백성과 싸우는 군사는 농사를 짓지 못해 수확이 없어 얼마간의 시일에 복구할 수 없을 듯하니, 군량을 판출하기 어렵다. 하늘이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평양을 수복하고 경성에 환도할 수 있으련만 통곡한들 어찌하랴. 대가는 중국 병사가 나와서 구원하여 평양의 적을 물리친다면 정주(定州)로 향하여 점차 연안(延安)에 머무를 것이다. 이정암(李廷馣)ㆍ김대정(金大鼎)ㆍ전현룡(田見龍)이 함께 연안을 지켰는데, 적이 7일 밤낮을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성을 잘 지켜서 마침내 완전히 보존하였다.
○ 구례(求禮)의 석주(石柱)와 운봉(雲峯)의 팔량(八良) 등에 새로 성을 쌓다. 두 곳은 호남의 요해지로 전에 성터가 있었다. 이때에 본도 방어사 곽영(郭榮)이 9월부터 항시 남원에 주둔하면서 조방장ㆍ별장 등을 영남 경계에 나누어 보내어 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다. 석주에는 별장 및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지키고, 팔량에는 조방장 이복남(李福男)과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지키며, 정동(井洞)의 육십치(六十峙)에도 모두 지키는 장수가 있어 매복을 설치하여 방비하다. 이복남은 곰티[熊峴]에서 힘껏 싸운 공으로 당상에 승진하다.
○ 소모관 안민학(安敏學)이 동궁에게 명령을 받아서 호서에서 군사와 말을 조달하다.
○ 경상도 군량 차사원(軍糧差使員)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敎) 오운(吳澐)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금년의 왜변은 개국 이래로 우리 동방에서 있지 않던 바이니, 군부(君父)의 욕됨과 사사 가문의 화는 말하면 통분하다. 어찌 차마 다 말하랴. 흉한 놈들을 제거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우리와 적이 서로 버티어 지금 벌써 8개월이란 오랜 시일이 되었다. 온 나라가 함몰되어 착수할 땅이 없으니, 우선 우리 영남 우도로 말한다면 전란을 면하여 심히 파멸되지 않은 데가 겨우 7, 8고을 인데 앞뒤로 적을 맞아 조석을 보장할 수 없어, 불타는 처마의 제비요 솥 속에 든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로다. 다행히 의병 제군과 적개(敵愾)한 장사(壯士)들의 힘을 입어 오늘날까지 보전하였는데, 군량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없다. 신농(神農)이 이른바, ‘비록 돌성 천 길과 탕지(湯池) 백 보가 있더라도 곡식이 없으면 능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한 걱정이로다. 전란을 참혹히 겪었으매 칼날에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고 남은 군사는 아직도 놀라 산곡에 숨어서 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많으니, 만약 양식을 쌓아 놓고 불러 모으면 10일 동안에 모두 다시 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은 곡식이 있으면 군사가 있고, 군사가 있으면 적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관가의 곡식은 탕진되고, 6월 이후에는 오로지 민간의 곡식에 의뢰하였는데 그것이 다되어 계속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일의 납속(納粟)은 관에서 지명하여 정한 것이요 자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본즉 3석으로부터 1백 50석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있게 관직으로 상을 주고 허통(許通)하고 면천(免賤)하게 되었으니 압입하는 바에 따라서 사목(事目)이 분명하고, 만약 납입한 것이 규격에 꼭 맞지 않는 것도 반드시 받아들이면 공사(公私)에 서로 이익될 것이다. 대저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각기 신자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니, 어찌 상을 내리기를 기대하겠는가. 다만 관직의 임명에 응하여 국가의 수용에 보조하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 것으로 더욱 부득이한 것이다. 하물며 양식이 다되어 군사가 흩어져 만약 마구 쳐들어오는 적을 막지 못하여 약간 보존되었던 땅도 끝내 적의 소굴이 된다면, 몸도 또한 보존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먹을 수나 있겠는가. 일의 득실은 다른 이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보수를 받지 못할까 의심하지 말고 당분간 내 곡식을 가졌다고 다행으로 여기지도 말며 서로서로 권유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 비인(鄙人)은 이 급하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국가에 보답할 방법이 없다가 마침 군량을 판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진실로 원하건대 제군 중에 납입하기를 원하는 자와 더 납입하는 자는 힘의 미치는 데 따라서 서명(署名)하고 아울러 석수(石數)를 기록하라.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12월. 행재(行在)에서 동요로 불리는 시가 있으니,
부슬비 서울 거리에 버들빛이 푸르니 / 細雨天街柳色靑
봄바람이 불어들매 말발굽이 가벼워라 / 東風吹入馬蹄輕
전일 대관들 환도하는 날에 / 舊時名宦還朝日
즐거운 개가 소리 한양성에 가득하리 / 奏凱歡聲滿洛城
하다. 혹자는 회복될 징조라고 말하였다.
○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국사가 창황한 날에 / 國事蒼黃日
누가 곽ㆍ이의 충성을 능히 하랴 / 誰能郭李忠
빈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 去邠存大計
회복은 제공을 믿네 / 恢復仗諸公
관산의 달에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수의 바람에 상심일세 / 傷心鴨水風
조신들아 금일 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려나 / 尙可更西東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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