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은 <전선야곡>
경산형님께서는 노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1952년께 헌 축음기를 하나 사셨다. 뚜껑도 없고 했지만 판은 돌아갔다. 창구동 살 때 전선양곡, 아내의 노래, 해조곡, 페르샤왕자, 등 많은 음판을 사 오시어 시간이 나면 틀어 노래를 불렀다. 나는 경주에 근무하던 시절이라 토요일에 영천 집에 오면 우리 종반(병집, 병숙, 병극), 용낙, 형식 들이 축음기를 틀어놓고 같이 배우며 불렀다. 특히 어머님이 계실 때라 어머니를 보고 부르면 실감이 났다.
<참고자료>
대체로 군가는 행진곡풍이며, 가사도 “나가서 싸우자” 등의 선동적인 내용이다. 이와 달리, <전선야곡>은 전장의 군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렸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소재로 한 진중가요이다.
유호가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이 노래는 전장에 나간 어린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로 알려졌다. 소설가 박완서의 말처럼, 모든 것을 파편화시킨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우리 국민의 정서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거의 전부였다. 대체로 전쟁으로 자아를 상실하면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이 노래도 군인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민의 감성에 호소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이 주효해, 당대인은 물론 후대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왔다.
레코드가 발매한 신세영의 음반으로 앞면에는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가, 뒷면에는 <전선야곡>이 있는 축음기 음반이다.[ 1.4 후퇴가 배경인 노래 전선야곡은 신세영이 1947년 오리엔탈 레코드가 주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여 오리엔탈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방음이 되지 않았던 녹음실 때문에 통행금지로 차가 다니지 않았던 밤 12시부터 6시까지 녹음을 했었다. 그가 노래를 녹음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고, 신세영은 목이 멘 상태로 녹음을 하게 되었다. 목이 멘 상태에서 했던 녹음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1925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한 신세영의 본명은 정정수이다. 예명인 신세영은 신카나리아의 ‘신’과 장세정의 ‘세’, 이난영의 ‘영’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48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로맨스 항로>로 데뷔했다.
군예대원으로 활동한 신세영은 가수 손인호 등과 최전방에서 위문 공연을 했다. 가는 곳마다 군인들은 <전선야곡>을 청했고, 심지어 어떤 부대에서는 이 노래를 모르면 부대장이 군인에게 밥을 주지 않았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전선야곡>은 박일남, 은방울 자매, 김연자, 주현미, 조용필, 나훈아, 현철, 현인, 남일해, 금잔디, 김용임, 들고양이들, 박경원 등 많은 가수들이 컴필레이션 음반, 혹은 메들리 음반으로 여러 차례 다시 불렀다. <아내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은방울 자매, 김연자, 이미자, 바니걸스, 오기택, 조용필, 이영희, 금잔디, 문희옥, 방주연, 들고양이들, 나훈아 등이 이 노래를 다시 부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1. 전선야곡 곡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2.전선야곡 가사
1.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귀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아아아아 그목소리 그리워
2.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아들의 공비는
어머니의 흰머리가 눈부시게 울었소
아아아 아아아 쓰러안고 싶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