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생보존의 법칙
서울공대지 2018 Summer No. 109


조송이 전기정보공학부 행정실
질량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 닫힌 계의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1) 1774년
프랑스의 화학자 A.L.라부아지에에 의해서 발견되고, H. 란돌트(1908)와 L. 외트뵈시(1909)에
의해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 (주2)
문과출신인 내가 고등학교 화학
시간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질량보존의 법칙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며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이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워킹맘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을 키우며 일을 하는 워킹맘이다. 하긴
어찌 아이들의 숫자가 중요하겠는가? 하나면 하나인대로 둘이면 둘 인대로 우리 모두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 것을. 나는 종종 아이 키우는 일을 역기운동에 비유하곤 했다. 버거운 역기로 겨우 겨우 몸을 만들어 가는데 근육이 붙어 이제 좀 익숙해질 만 하면 덤벨이 또 늘어나고(둘째) 또 그 무게가 적응되면 다음 덤벨이 더 얹혀지는 상황(셋째). 그렇기에 덤벨이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그 사람에게는 그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최대치인 것이고 다만 각자 근육량이 조금 다를 뿐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무게가 줄어드는
일은 없기 때문에 결국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주관적 무게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어떻게 아이를 셋이나 낳게 되었냐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나는 자녀들을 낳을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아이 키우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렵겠나 싶었고 매사에 효율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성격상 아이도 셋 정도는 되어야
가정생활에서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녀를 양육하면서 인생에서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효율성과 경제성을 적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관계, 특히 자녀양육에 있어서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밥상 한 번 차릴 거 세 명 먹이면 되겠다는 발상은 세 아이가 식성이 다 다른 상황에 직면했고(첫째는
국이 있어야 밥을 먹고 둘째는 야채를 좋아하며 셋째는 철저히 육식동물이다.) 책도 읽어줄 때 셋이 들을
테니 한 번의 노력으로 세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건만 각자 가져오는 책이 다르고 자기가 고른 것이 아닌 책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냥 들어주면 좋으련만 아이들이 어디 엄마 마음 같은가. 셋을 묶어서
하나로 키우려고 했던 생각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없는 생각이었다. 오롯이 한 명 한 명을 1:1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하긴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고귀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을 도매금으로 다루려고 했던 내 생각자체가 경솔했던 것이다.
희생보존의
법칙, 전 인생을 살아가며 희생을 부담하는 성분 및 시기는 다를 지라도 희생의 총량은 불변 하다는 법칙
요즘 세상은 마치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나의 소유를 부추기는 시대이다.
하지만 살면 살수록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여서 이것을 가지면 저것을 잃게 되고 이것이 없더라도 다른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조율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가령 돈을 얻을 때는 시간과 에너지가 희생하게 되고 다른 무엇을
얻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아둔하게도 당연한 이 자연법칙을 육아를 하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세 아이 육아와 직장생활이라는 팍팍한 일상 속에서 내가 조금 더 희생하면 아이들이
누리게 되고 내가 좀 편한 것은 누군가(아이들이든, 남편이든, 친정엄마든 직장동료든)가 대신 희생해주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이름하여 ‘희생보존의 법칙’이라고 명명했다. 인생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가볍게는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 것인가부터 시작하여 중하게는 결혼, 진로 등 인생의 중요한 향방을 가르는 결정들을 해야 할 순간들이 있다. 특히
육아는 선택의 연속이다. 아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미성년자들을 대신하여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 아이들보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내 인생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내 결정에 아이들의 인생이 좌우된다고 하니 매일 매일의 선택이 마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다. 인생에서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릴 때 참고하는 지침 가운데 상당한 우선순위를 두고 고려하는
것이 바로 이 희생보존의 법칙이다. 지금 내가 희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대가로 얻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2017년 가을 소백산 비로봉에서 세
아이들과 함께
그렇다면 이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그 대가로 받은 것을 허투루 허비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육아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희생보존의 법칙을 적용시켜 보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는 점은 (물론 다른 보상들도 있겠지만) 금전적 보상일 것이다. 반면 가장 희생하는 것은 시간과 아이들이었다. 나에게 월급은 그냥 단순한 돈이 아니라 금쪽같은 내 새끼들이 희생하여 얻은 대가였다. 그래서 나는 돈을 허투루 쓰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고 일방이 희생하면 그 구멍이 생기는 법이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이 방치되다 보니 몇몇
위험신호들이 감지되었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희생보존의 법칙을 적용해보았다. 일과 가정이라는 양팔저울에서 희생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은 과연 무엇을 희생할 때 인가? 희생의 총량을 변하게 할 수 없다면 어느 시기에 어느 쪽으로 추를 옮겨 최선을 이룰 것인가? 어른들은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많은 고민과 물음 끝에 육아휴직을 내게 되었다. 나의 휴직으로 인하여 학부, 경력,
금전 등이 희생할 것이고 그 대가로 가족(특히 아이들),
시간이 혜택을 받을 것이다. 휴직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지만 솔직한 내 심정은
두려웠다. 내가 누리게 된 이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 인지 알고 있기에 혹시라도 이 시간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의미 없이 빠져나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시간은 쏘는 화살보다 빠르다고 하지 않던가?
휴직을 이틀 앞두고 원고 청탁을 받았다. ‘아 무슨 일복은 이 순간까지 따라다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글을 쓰면서 오히려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그렇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은
‘시간’이다. 큰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귀한
시간인 만큼 이 시간들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워져 그 힘으로 후일에는 또 기꺼이 희생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래본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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