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때였습니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온 힘을 합쳐 마을길을 포장했습니다. 새터 신작로에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1km 정도의 진입로를 콘크리트 포장을 했습니다. 그때는 레미콘이 없어 직접 사람이 모래와 자갈을 시멘트에 비벼 타설을 해야 했습니다. 평생 농사로 다져진 몸들이었지만 이겨내기 힘든 노동 강도가 연일 계속됐습니다. 마을길 포장이 끝나는 마지막 날 이장은 동네 스피커로 콘크리트 타설한 길을 걷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시멘트가 굳을 때까지 이틀만 기다리면 된다고, 개들을 묶어 놓으라고 스피커는 십분 거리로 왱왱거렸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 사람들은 경기(驚氣)를 했습니다. 개 발자국이 술 취한 듯 길 위에 이러저리 어지럽게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분노의 말들을 쏘아댔습니다. “어떤 개새끼냐”고. 하지만 그것은 개가 아니라 개 주인을 향한 말이었습니다. 결국 누구네 집 개인지 밝히려고 집집마다 개를 데리고 나오라 하여 발에 콘크리트가 묻은 녀석을 붙잡았습니다. 그 개는 즉시로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끄슬려졌습니다. 그리고 개 주인은 한동안 동네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개인의 자유나 이익보다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가 우선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지난 한 주 매우 숨가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사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노와 절망, 고통으로 우리는 밤을 새웠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태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닙니다. 숱하게 많은 질곡의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참 어이없습니다. 영악하고 치밀한 사람이거나 악독한 신념주의자가 아니라 동네 바보에게 집안이 다 털리고 뺨까지 맞은 꼴이 됐으니 말입니다. 무속에 빠져 점이나 보러 다니는 동네 모지리 아줌마에게 휘둘려 한 나라가 망국지탄에 이르렀으니 속된 말로 뭐 팔리는 꼴이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우스운 꼴이 된 것은 나라를 망친 대통령 부부의 문제나 탄핵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한 배경을 봐야 합니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 민생, 경제 같은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에 따라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입니다. 그 동물적 본능을 옹호하고 유지시켜 주는 배경이 바로 보수세력이며 영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영남이라는 집단적 혈연 공동체가 만든 신조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것이지요.
신념과 신조는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말은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갖습니다. 신념은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내적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소설가 최인호는 신념에 대해 그의 소설 <무서운 복수>에서 “내가 하는 행동이 과연 내 투철한 신념에서 나오는 일인가?‘라고 말합니다. 신념이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체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조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신념에 가깝습니다. 특히 종교(특히 기독교, 이슬람 같은 유일신교)는 신조를 통해 내집단 구성원들을 복속시킵니다.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대속 구원 같은 것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고 그것을 집단 신조로 삼습니다. 그 신조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면 이단으로 처단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종교적 신조는 저항할 수 없는 하나의 국가 권력처럼 됐습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탄핵 표결에 불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영남의 보수적인 신조 때문입니다. 국힘당 의원들에겐 나의 신념으로 대의(大義)를 따르기보다 경상도 사람들의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 즉 종교적 신조에 따르는 것이 다음 공천과 당선이 보장됩니다. 국민의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신이 신념을 포기한 대가로 차기 당선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상도식 정치입니다. 배신자(이단자)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면 굴종하고 비굴하게 아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낳은 신조입니다.
작금의 이 사태를 만든 큰 원흉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 번째가 정치를 종교적 신조로 변질시킨 영남세력입니다. 두 번째가 보수 개신교회들입니다. 영남과 보수 개신교회의 공통점은 신념으로 정치나 종교를 보는 게 아니라 집단의 오염된 신조로 국가와 종교를 보는 것입니다. 신조에 굴종하면 진실을 왜곡하고 짓밟아도 존중받습니다. 종교적 신조를 벗어나지 않으면 그가 어떤 비리를 저질러도 용서되고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단의 혐의를 받게 되면 그는 처단됩니다. 경상도식 정치 역시 자기 지역 정당의 영역 안에 있으면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용서되고 이해됩니다. 작은 일에 가해지는 도덕적 비난은 언제나 야당 몫입니다.
사람이 가장 무지하고 폭력적일 때가 이념과 신조로 세상을 볼 때입니다. 이념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갱이와 빨갱이 아닌 사람만 보입니다. 종교적 신조로 세상을 보면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만 보입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지이고 이 무지가 힘을 쓰면 폭력이 됩니다. 이 무지로 똘똘 뭉친 경상도가 오늘의 윤석열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난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영남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나 공산품은 구매하지 않습니다. 그쪽으로 휴가도 가지 않습니다. 내가 일본에 가지 않고, 일본 제품을 사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길 닦아 놓으니 개가 먼저 지나간다’는 속담처럼 피 흘려 닦아놓은 민주주의 대로를 영남에서 풀어놓은 개들이 설치고 다녀,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제발 개들좀 함부로 풀어놓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라고 뻔뻔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