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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찍힌 판화
황 순 원
우선 이사 가는 곳이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그만하면 방도 깨끗한 편이었다. 한 간짜리 이 뜰아랫방이 면젓변호사댁 헛간보다도 작은 것이 좀 안됐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방에는 전등을 끌어들인 흔적이 없었다. 그것도 별 수 없는 일이다. 헛간에서 살 때와 마찬가지로 해 있어 저녁을 해치우면 그만인 것이다.
가던 날로 우리는 어둡기 전에 저녁이라고 한술 꿇여 먹은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밑으로 두 애는 벌써, 그리고 위로 두 애는 아까 낮에 못다 판 신문을 저녁 먹고 다시 안고 나가더니 좀전에야 돌아와 그들도 한구석 에 구겨박혀 잠이 든 모양인데.
나는 어둠 속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자꾸 무엇엑 쫓기는 심사였다. 다른 것은 말고 요즘 와서는 길거리에서 신문 파는 애들의 외치는 소리까지가 무서웠다. 저게 큰놈 동아가 아닌가, 저게 둘쨋놈 남아가 아닌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해지곤 하는 것이다. 그게 어두운 밤이면 더했다.
신발 끄는 소리가 미닫이 밖에 와 멎더니 안댁네가 그 나이에 비겨 퍽 애리애리한 목소리로, 주무시느냐고 한다. 바로 미닫이 안에 누웠던 아내도 잠들지 않고 있었던 듯 웃으며, 불도 없고 해서 일찍 누웠다고 하니 안댁네도 따라 웃으며, 누워 계신데 미안하지만 바깥 선생님 잠깐 안으로 들어오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좀전에 이 집 대문에 달린 종이 울린 것으로 보아 바깥주인이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세 사람의 손이나 거쳐 이 방을 얻었을 뿐, 사실 우리는 이 집 바깥주인과는 대면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아까 낮에 이사 올 때만 해도 바깥주인은 밖에 나가고 없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인사 겸 안 들어갈 수 없었다.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뜰로 내려서니 안방 미닫이 안에서 궁근 남자의 목청 이, 어서 들어오이소, 한다.
방 한가운데 주인사내가 소반을 앞에다 놓고 앉아 있었다. 사십은 잘 됐을, 얼굴빛이 약간 검은 사내였다.
안댁네는 아랫목에 잠들어 있는 애를 한쪽으로 밀며, 내려앉으시라고 한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주인사내는 상 위에 놓인 놋잔에다 막걸리를 그득히 부으며,
“서울서 오셨다믄서요? 욕보심 더.”
나는, 앞으로 신세를 져야겠다고 했다.
주인사내는 뭐 신세랄 게 있느냐고 하면서,
“저븐 육이오사변 직후에는 지금 형씨 들어 있는 방에 김천서 온 젊은 내우가 들었지요. 그때 그 내우가 자꾸만 부산꺼정 피난 간다는 걸 내가 말렸지요. 자고로 이 대구가 생긴 후로, 크고 작고 간에 무신 난리건 예꺼정 들어와 본 예가 없심더. 와 저기 저 대구 괴기장사들이, 통대구 사이소, 통대구 사이소, 안 합디꺼. 그기 통대구 괴기 사라는 기 아이라, 모두 대구에 와 살락 하는 기요. 그때 젊은 내우도 내 말 듣고 예서 무사히 있다가 머스마까지 하나 낳아 가지고 갔지요. 요븐에도 대구꺼정은 아무 일 없을 낍니더.”
여기서 주인사내는 내게 술 들기를 권하고 자기도 단숨에 술잔을 내더니 그걸 내게 건넨다. 주인사내는 꽤 전작이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젖빛 같은 막걸리가 흘러나오는 주전자 주둥이를 바라보며 지금 주인사내가 한, 통대구 사이소, 라는 말의 해석에서 언뜻 어려서 어른들한테 들은 얘기를 되살려 본다. 평양은 배의 형국이 돼서 가호가 오만인가 십만이 넘으면 짐이 고돼서 한번씩 기울어지고야 만다는 얘기와 서울은 또 화기를 낀 형국이라 궁궐을 지을 때마다 화재를 면하기 위해서 불을 집어먹는다는 해태를 만들어 세운다는 얘기.
“그라고 형씨, 보이소. 요븐에 이북으로 치밀고 올라갈 때만 캐도 초산이란 데를 가 찌를 기 아이라, 저 무산이나 회령 쪽을 가 덮치야 하는 기라. 우리나라 땅은 토끼 모양으로 생겄다고는 해도 따지고 보믄 호랭이 모양인데 호랭이란 아가리도 무섭지만 젤 힘쓰는 데가 앞죽지 아인기요. 그 무산이나 회령 쪽이 가사 일러 말하자믄 호랭이 앞죽지거등요. 이놈만 이펜이 덮치 놓으믄 다음은 문제없심더. 백제호랭이 아가리만 가서 설 찔러 났시니 그기 될 일입니꺼.”
주인사내는 여기서 또 내가 건넨 잔을 비우고 나서, 그렇지 않으냐는 듯이 이쪽을 넘겨다본다. 총이 세 보이는 검은 눈썹이 퍼뜩 치켜올려 있었다.
우리나라 지형을 호랑이로 본다든가 토끼 혹은 누에로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 그저 그렇지만, 그걸 어떤 전략적인 의미까지 붙여 이야기하는 데는, 물론 그게 한낱 취담에 지나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긴 하나 그대로 노상 홍미 없는 얘기도 아닌 것이었다. 그래 재미있다고 했더니 주인사내가 이번에는 말머리를 돌려,
“형씨, 곰이나 산대지 성미를 아십니꺼?”
하고는 이어서,
“곰이란 아주 미련키 짝이 없는 짐승이지요. 사람을 볼라치믄 좋아서 앞죽지를 버쩍 들고 달라들거등요. 이때 바로(여기서 한 손은 총대를 받들고 한 손으로는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앞가슴을 싸아 잡아야 하는 기요. 뒷죽지나 엉뎅이를 싸서는 백년 맞처 탔자 소용없심더. 엉뎅이에다 총알 및 관씩 달고 댕기는 곰이 울매나 많다고.”
본시 주인사내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초면인 나를 앞에다 놓고 그는 이어서 곰 잡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 대부분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긴 했으나.
곰이란 놈은 창날을 가슴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사람의 손에서 창 빼앗을 정신에 그만 제 가슴 찔리우는 줄도 모르고 잡아당기다 죽고 만다. 그리고 곰 잘 지나다니는 길목에다 곰의 선 키가 닿을 듯 말 듯하게 닭 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그 옆에 커다란 돌을 하나 그보다 좀 나직이 매달아 놓을라치면 곰이란 놈이 닭을 잡으려다 못 잡고는 그게 옆의 돌이 방해해서 그런 줄만 알고 돌을 밑치는 것인데 밀려갔던 돌이 되돌아오며 다시 닭을 잡으려고 일어서는 곰의 골통을 칠 밖에, 그러면 또 밀치고, 밀치면 와 골통을 치고, 점점 더 약이 올라 힘껏 밀치다 나중에 그만 그 돌멩이에 골이 터져 죽는다. 일본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면 북해도선가는 이 곰이란 놈이 큰 고목나무 썩은 속에 들어가 곧잘 낮잠을 자는데,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가서 낮잠 주무시느라 제멋대로 고목 밖으로 내민 발목 하나를 도끼로 냅다 찍을라치면 무슨 요량에선지 이놈은 다른 발 하나를 또 특 내미는 것이어서 이렇게 해 네 발을 다 찍어내어 곰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도 주인사내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짐승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가운데는 자기가 직접 사냥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았다.
꿩불을 놓을 때에는 꿩이 땅에서 일자마자든가 또는 시간을 놓쳐 꿩이 이미 속력을 내어 날기 시작하든가 내리박히는 때는 쏘아맞히는 율이란 전혀 없다시피 하므로 그저 땅에서 날아나 어느 정도의 높이에 올라가서 한순간 몸을 가누느라고 날개가 무디어지는 찰나를 놓치지 말고 불을 놓아야 하고, 노루나 사슴을 쏠 때도 덮어놓고 좀 가까이 왔다고 불질을 할 게 아니라 그것들이 껑충이는 장단을 총부리로 잘 겨누어 가지고 불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포수란 침착해야지 까딱 잘못하다가는 사냥개까지 쏘아 버리기 쉽다. 그런데 포수들이란 자기가 잡은 짐승을 유달리 불려서 말하기를 잘 하여 꿩 한두 마리 잡고도 네댓 마리 잡았노라고 말하기가 일쑤다…….
주인사내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바로 꿩을 쏘아 떨어뜨릴 그 찰나인 듯이 허공 한곳에다 총부리를 겨누고 쏘는 시늉도 하였고, 노루나 사슴들이 껑충이며 뛰는 장단을 맞추어 쏘는 시늉 등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의 몸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무엇에 열중해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거기 따라 그의 검은 눈망울은 술로 인한 것만 아닌 어떤 이상한 광채가 더해지는 것이었다.
잠시 주인사내가 말을 끊은 틈을 타 나는 그저 말대꾸나 하는 셈으로,
“댁에서 요새두 사냥 나가십니까?”
했더니, 주인사내가 갑자기 당황해하는 빛을 보이며,
“어대요.”
하고 고개까지 가로 흔든다.
하긴 내가 묻는 게 잘못이지 이 난리통에 사냥이 다 무엇이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주인사내의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스러워진 것이었다. 그는 무슨 곁눈질이나 하듯 한옆에 앉아 바느질손을 놀리고 있는 아내 쪽을 한번 살피고 나더니 목의 침을 삼켜 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좀전까지 무엇에 열중한 듯 광채나던 눈망울도 무슨 꿈속에서나 깨어난 사람처럼 흐려지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못 할 말을 한 것이나 아닌가 했다.
그러나 주인사내는 곧 생각난 듯이 주전자를 들어 술을 권하면서, 이거 공연히 혼자만 씨부려 쌓아 미안하다고 한다. 술은 내 잔에도 채 차지 못하리만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주인사내는 들었던 주전자를 그냥 아내 편으로 내밀며 술을 더 받아 오라고 한다. 나는 그만두시라고 했다.
무엇 고맛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초면인 사람을 불러들여다 놓고 어이없을 만큼 혼자만 떠들어 대는 이 주인사내와 더 오래 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불쾌한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실은 주인사내의 궁근 목청을 통해 벌어지는 무엇에 열중한 듯한 이야기와, 이건 또 지금 마신 막걸리 맛같이 텁텁하고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노상 언짢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좀전에 주인사내가 별안간 나타낸 태도로 인해 이 자리를 금방 떠나야만 옳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지금 주인사내가 자기 아내더러 술 더 사오라는 태도가 그냥 자연스러움으로 보아 그건 내가 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그저 나는 술이 상당히 취해 있는 주인사내에게 더 술을 하지 않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삼 일 뒤 주인사내와 나는 다시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저녁때 주인사내가 또 나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나도 술 한 되를 샀다. 이날 주인사내는 별로 사냥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저번처럼 화제를 시종 도맡다시피 햇다. 이렇게 둘이 술 두 되를 먹고 나서 그만 일어서려고 하니까 주인사내가 굳이 한잔만 더 하자고 붙드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한 되 더 사겠노라고 했더니, 그건 안 된다고 하면서 아내를 재촉하는 것이다.
안댁네는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주전자를 들고 일어섰다. 나더러는 곧 다녀올 테니 잠깐만 앉아 계시라고 하면서. 이 안댁네가 방문께로 가다 말고 뒤를 돌아다본다. 거기에는 다섯 살 난 이 집 사내애가 조금 아까까지도 말똥말똥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졸고 있었다. 안댁네는 주전자를 놓고 부리나케 자리를 깔더니 애를 안아다 누이고 나서야 다시 한번 나더러, 곧 다녀올 테니 잠깐만 앉아 계시라고, 그 나이에 비겨 애리애리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주인사내가 큰 소리로 아내에게 이왕이면 좀 멀지만 큰 거리집 특주를 받아 오라고 한다.
나는 이런 온화한 가정 분위기 속이면 술을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문에 달린 종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주인사내는 불쑥,
“형씨는 어린아가 넷이나 되지요? 참 복받았심더. 우리는 하나도 없심더.”
내가 의아스러워 애가 누워 있는 쪽을 바라보니, 주인사내는 곧 입가에 쓸쓸한 웃음을 어리우며,
“저 아 말입니꺼. 저 아는 우리가 논 아가 아닙니더. 우리 집사람이 지 성님한테서 얻어다 기르는 아지요. 내 동세는 아가 일곱이나 안 되겄소. 그 중 여섯쨋놈을 하나 얻어왔지요. 두 살인강 났을 땐데 저걸 얻어다 놓고는 우리 집사람이 우떻게 귀여워하는지요. 아마 지가 논 아도 그렇기는 몬 할 끼요.”
주인사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사실은 우리 집사람이 아를 몬 밴 건 아닙니더.”
하더니 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 일이었다. 결혼한 치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이 집 안댁네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부부의 기꺼움은 이를 데가 없었다. 태중에 좋다는 약과 음식도 이것저것 많이 썼다. 그러던 중, 마침 주인사내가 포수라 한번 태중에 좋다는 노루나 사슴의 피를 먹여 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봄철이었다. 아내를 데리고 사냥을 떠났다. 본시 주인사내는 대구에서도 이름난 포수였다. 사냥 나간 다음날로 적잖이 큰 노루 한 마리를 쏘아 잡았다. 그것도 뒷다리를 맞아 쉬 죽지 않았기 때문에 생피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산까지 따라 나선 아내는 곧 피를 먹기로 했다. 남편이 칼로 가슴을 찔러 참대통을 대주는 대로 아내는 빨아 삼켰다. 약이거니 생각해서 그런지 역하지 않을 뿐더러 듣던 말대로 구수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저 노루가 요동 못 하게끔, 몰이꾼들에게 짓눌려 가슴을 찔려 가지고 그냥 애처로운 비명을 질러 대는 것이 안 되었으나 이것도 태아를 위한 것이거니 하니 괜찮았다.
피 먹기를 마치자 몰이꾼들이 노루를 떠메고 산 밑 마을로 내려왔다. 모두 노루고기로 술을 먹게 됐다고 뒤숭거렸다.
한 사람이 노루의 배를 가르다가 소리를 질렀다. 새끼가 들어 있다, 고. 그리고는 모두 안줏감이 더 생겼다고 좋아라 떠들어 댔다.
이때 아내는 그 집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물론 밖의 떠드는 소리가 일일이 들려 왔다. 그러자 갑자기 구역질을 몇 번 하고는 토하기 시작했다. 피 같은 것이 나왔다. 그런데 이 액체는 아까 먹은 핏빛보다도 더 붉게 살아 있었다. 분량도 먹은 양의 배나 되는 듯했다.
그날 밤이었다. 아내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도 애절하기 짝이 없는 짐승의 울음 소리였다. 그게 바로 집뒷산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내는 무서워 옆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남편은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저게 오늘 낮에 잡은 노루의 수놈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총을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내는 허겁지겁 남편의 뒤를 쫓아 나가며, 그냥 놔두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밖은 이른봄 안개 머금은 초생달이 서산에 걸려 있었다.
그날 밤으로 아내는 여섯 달 된 애를 유산했다. 그 뒤로도 아내는 두 번이나 임신을 했으나 모두 다섯 달 아니면 여섯 달 만에 유산해 버리곤 했다. 첫번 유산 이후 아내는 남편에게 이제부터는 사냥을 그만두라고 졸랐다. 듣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총과 함께 사냥에 관한 도구 일체를 어디엔가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아내는 자기 언니의 애를 하나 얻어다 기르며 거기에다 모든 걸 의탁하게끔 됐다.
“우리 집사람은 아즉도 지 아 몬 놓는 걸 내가 사냥을 해싸서 그란 줄로 압니더.”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저번에 내가 요새도 사냥 나가느냐고 했을 때, 주인사내가 별안간 놀라는 빛으로 당황해한 것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한창 이야기에 열중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총질하는 시늉까지 했던 것이 그만 내 말에 퍼뜩 정신이 들며, 자기가 지나쳤음을 깨달았음에 틀림없었다는 것을.
주인사내는 내 귀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대고,
“형씨한테 내 좋은 거 하나 비드릴까요?”
하고 속삭이듯 말하고는 후딱 밖으로 나가더니 무엇인가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어른의 손바닥만한 네모진 남색 상자였다. 주인사내는 그 뚜껑을 열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가름한 여러 가지 모양의 반들반들 윤기가 도는 쇳조각이 정연하게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얼핏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사냥 총알입니더. 울매나 이뽑니꺼.”
사실 그것은 이뻤다. 주인사내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대견한 듯이 바라보더니,
“우리 집사람이 다른 것은 모두 없애 비렸지만 이것 하나만은 내게서 몬 빼앗았지요. 내가 지 모르게 여기저기 옮기 가믄서 감차 두거등요. 그랬다가 이렇게 몰래 꺼내 보지요. 지는 지대로 저눔아가 있으니 그만이고, 나는 또 이것이라토 꺼내 보는 재미에…… 이거나마 없으믄 우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겄소. 전에 한창 사냥을 댕길 때는 모든 사업이 뜻대로 잘 되드니만 이제는 모든 기 파이요. 자연 이렇게 밤이믄 술이나 묵고 집사람 모르기 이기나 꺼내 보는 기 내 낙입니더.”
여전히 몰래 속삭이는 어조였다. 그러나 어딘가 생기에 찬 어조였다. 그의 눈도 좀 아까 자기네에게는 애가 없다던 때의 쓸쓸한 빛 대신에 어떤 유열이라고도 할 만한 빛으로 차 있는 듯했다.
이런 주인사내는 이번에는 상자 속의 것을 하나하나 꺼내서 만져보고는 제자리에 놓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사랑하는 물건을 애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문득 나는 이 사내가 아내에게 새삼스레 먼 곳의 술을 받아 오라고 한 것도 이것을 애무할 틈을 만들기 위함이나 아니었던가 싶었다.
주인사내가 계속해 상자 속 물건에의 애무를 그칠 줄 모를 즈음 대문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주인사내는 누가 자기의 귀중한 보물을 빼앗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화닥 상자 뚜껑을 닫더니 품속으로 찔러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들어서는 아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서 주전자를 여기다 올려놓으라고 하며, 풍로 위의 찌개냄비를 내려놓으면서 나더러는 잠깐 소변을 보고 오겠노라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안댁네는 아랫목 애의 요 밑에 손을 넣어 보고 이불자락을 여며주고 나서 이쪽 풍로로 돌아앉아 숯불을 헤쳐 놓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린 채 무엇을 주저하는 빛이더니,
“저, 내 나간 틈에 우리 바깥양반이 머라카지 않든가예?”
한다.
내가 미처 무어라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안주인은 그냥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린 채 그러나 이번은 무엇 그리 서슴는 빛도 없이,
“미안합니더마는 내 나간 틈에 우리 바깥양반이 무얼 비지 않든가 예? 자기는 백줴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구마는 나는 다 알고 있지예. 전에 그 방에 들었든 븐한테도 그것을 꺼내 빈 걸 내 다 알고 있어예. 내 어디다 그걸 감차났는지도 다 알지만 눈감아 주고 있지예. 그것 하나에다 맘을 붙이고 이리저리 감추고 어째 쌓는 꼴이 안대서…… 그래도 다시 사냥할 맘이 생길까 바 겁이 나예.”
그러나 나는 웬일인지 이 여인이 아직 그 남색 상자의 은닉처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주인사내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가 변소에만 다녀오려 나가지 않은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리에는 한 장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 사람의 중년 사내가 조그만 상자 하나를 안고 그것을 감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한 장의 판화였다.
나는 이 판화 속 사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어서 뜰 아래 우리 방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돌아가 이날 밤도 같은 어둠 속을 몇 장의 신문을 안고 헤매다 돌아온 우리 두 어린것의 이불자락이라도 여며 주고만 싶었다.
(『황순원전집』,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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