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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하지만 이미 혁명 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 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을 결성한다.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위안스카이가 이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지만 1919년 쑨원이 재창당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통해 국가부흥과 정당정치를 수용하는 듯...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옛 심복인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공화사상에 물들어 말을 듣지 않자 압박하여 내쫓았고 1912년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혁명당원을 제거하는 한편 빌미를 잡힌 리위안훙을 굴복시켰다.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껴 만만한 외교관 출신의 루정샹을 총리에 삼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만만하자[23]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삼은 후 새 총리로 유력하던 전 농림총장이자 국민당 대리 이사장인 쑹자오런의 암살을 사주하였다.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쑹자오런이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에 국민당이 반발하여 1913년 7월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이를 2개월 만에 간단히 진압했다.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 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무총리 슝시링을 겁박하여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 해산 이후에 정족수 부족으로 정회되어 유명무실해진 국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여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하면서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1914년 5월 1일에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법률로 보장받게 된다.
3.5.2. 홍헌제제, 황제 즉위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야심의 일환으로 위안스카이는 사천도독 윤창형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14년 12월 20일, 정식으로 공자를 숭상하기 위한 사천전례를 부활하고 12월 23일에 거대한 규모의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으로 왼쪽에서 두번째있는 수염 하얀 노인이 위안스카이다.
전부 왕처럼 보이겠지만 위안스카이 혼자만 흉배를 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분이 된다. 면류관의 평천판에는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해괴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주나라식 의복도 아니고 단령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곤룡포에 들어가는 흉배와 어깨 장식이 아니라 12가지 문양이 수놓아져야 한다. 나름 주나라 시대의 복식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사실이다. 1644년부터 청나라의 중국 정복이 실시됨에 따라 한족 중심의 화이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복과 문화 그리고 사상을 크게 탄압해 한족 왕조의 문화가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세번째 배신 당시 어용 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린다.
3.5.3. 단 한 사람을 위한 신문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던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있었다. 반면 둘째 아들 위안커원은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감우'라는 시를 지어 아버지가 황제 자리를 탐내는 것에 대해 경고를 내비쳤다.
당시 중국의 언론은 모두 위안스카이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군주제를 찬성했는데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인 순천시보는 위안스카이보다 강한 일본을 빽으로 업고 있어서 위안스카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공무를 보면서 시세파악을 위해 순천시보를 틈틈이 보곤 했는데 큰 아들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모든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찬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나 펑궈장, 쉬스창 같은 인물들은[25]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좌천시키는 등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붙혀 그동안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던 측근들도 반감을 품게 된다. 물론 대놓고 개길 힘이 없던 측근들은 대부분은 겉으로는 어서 황제에 즉위하라고 갖은 아양을 떨며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환영하는 척 했다.
이에 더해서,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내용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산둥성 칭다오의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간다. 당시 독일은 이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맥주는 유명하다. 그리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 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 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 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 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것은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위안스카이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협상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 혁명당'(오늘날의 중국 국민당의 전신)을 조직하여 해외에서 '반(反) 위안스카이 독재' 운동에 헌신한다.
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가 위안스카이에게 24시간 내로 제재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왔지만 전국의 군벌들이 입을 모아 제재를 칭송하던 와중에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갑자기 거기서 왜 나오냐는 반응이라서 무시하였고 결국 12월 25일 전계군벌과 량치차오가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관전하다가 대거 합세했다. 호국군은 초기에 조금 주춤했으나 북양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각성이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옌시산, 장쭤린 등 즉위를 부추기던 쫄따구들은 입을 쓱 씻거나 심지어는 아예 단절 및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했고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의 측근들까지도 퇴위를 종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숙정은 위안커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위안커원도 자신이 얼마 전에 위안스카이가 읽는 순천시보와 시중의 순천시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숙정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한 사건이었다.
3.7.2. 울분 속에서 사망하다
위안커딩은 끝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제재를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리며 징징댔으나 믿고 있던 안휘, 강소, 절강 지역의 장군들도 제재 취소를 요구하자 1916년 3월 22일에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3월 23일에는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로 복귀한다. 이는 군주가 '자의'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허나 이미 민심은 위안스카이를 떠난 뒤였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시켜 난징회의를 개최, 중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에 임시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했으나 각성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면서 개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26][27] 그래도 공화국 대통령과 제국 황제를 전부 경험한 지배자의 장례식답게 1916년 6월 28일의 장례식만큼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고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를 부추겼던 위안커딩은 장례 기간 내내 위안스카이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하며 위안스카이의 셋째 첩 김씨가 위안스카이를 따라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저지되었지만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3.7.3. 장례식
1916년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북양군벌은 안휘군벌과 직예군벌로 분열되어 안직전쟁, 강절전쟁, 제노전쟁이라는 격렬한 내전을 벌였고, 또한 장훈복벽, 호법전쟁 등의 대규모 내전을 야기했다. 이후 동북 지방은 봉천군벌까지 발흥하면서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 등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군벌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고통받았다.
난세의 실력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종씨인 원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원세개는 군재만은 확실했지만, 영도력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3.7.4. 무덤 원림
위안스카이의 무덤은 허난성 안양시(安陽市)의 환강(洹江) 근처에 있는 원림(袁林)이다. "林"은 공자나 관우 같은 성인들의 묘에나 붙이는 칭호여서, 조성 당시에도 이름이 참람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나마 장남 원극정은 황제의 묘에 붙이는 "陵"을 붙여 원릉(袁陵)이라 하려고 했으나 서세창 대총통의 반대로 원림으로 타협 본 것. 기존의 전통적인 중국의 묘지와는 달리, 당시의 최신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로 패루(묘지의 문)와 묘지를 만든게 특징.
문화대혁명 때는 마오쩌둥이 '특별히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란 명령을 내려서 홍위병들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28] 실제로는 홍위병들이 이 무덤도 폭약으로 폭파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콘크리트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서 가장자리만 조금 깨진 채 무덤 자체는 멀쩡하게 남았다고. 2013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됐다.
시진핑이 헌법개정을 통해 사실상 종신독재자가 됨으로써 중국 네티즌들이 위안스카이의 고사를 빗대어 폭풍까임을 행하자,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금지어가 되었다는 낭설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4. 후손
조선인 첩들이 낳은 자녀가 7남 8녀인데 위안스카이의 자녀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위안스카이는 17명의 아들 중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과 이씨(김씨의 몸종 출신 이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 위안커취안(袁克權)을 가장 총애했는데 특히 위안커원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후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실 우씨가 낳은 적장자 위안커딩(袁克定)은 독일과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위의 사건과 특히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를 예방했을 때 중국에서 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고는 신나서 순천시보 조작 사건을 비롯하여 군주제 선동 여론을 일으키고 다녔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톈진의 독일 조계지에 숨었으나 과거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행패를 부리고 다니진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로부터 한간이 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문사연구관 연구원이 되어 일하다가 1958년에 사망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있는 육준(六駿)의 석각을 훔쳤다. 소릉에는 당 태종이 전쟁에 썼던 여섯마리의 준마(駿馬)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이다. 위안커원 일당은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으며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화를 면한 네 석각은 현재 시안비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비림 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위 석각은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로 잘 보면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훔쳐가기 편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출처 반면 시안에 있는 삽로자와 권모과의 레플리카는 당연히 잘라 낸 흔적이 없다.
위안커원은 원래 샹치와 마작 유단자로서 명성을 날렸었다. 위안커원은 한 때 후계자 1순위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병사한 후에는 다시 장기와 마작으로 일생을 지냈다가 1931년 톈진에서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사실 더 유명한 것은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대총통과 황제 시절 위안커원의 기녀 출신 측실이 무려 785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 위안자류(袁家騮)는 물리학자로써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대만에서 국립타이완대학 대우교수를 지내다가 2003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위안자류의 부인은 장쑤성 타이창 출신의 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으로 베타 붕괴를 발견하고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미국 물리학회 첫 여성 학회장, 울프상 최초의 물리상 수상, 맨하튼 계획 참여, 과학자 중 최초로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소행성(2752 우젠슝)을 가진 저명한 물리학자이다. 1997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이후 위안자류는 2001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남동생과 아들, 손주 등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자녀가 32명, 손자만 79명이었던 만큼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가끔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 중인 후손들의 행적이 보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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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일본에 조선의 "소유권"을 포기한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는 뜻.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조선과 화령(和寧)이라는 두 개의 국호를 명나라에 보내어 '결재'를 받았을 때부터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된 셈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 조선 공문서나 각종 문헌에 중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이 독자적인 연호(광무)를 사용한 것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2년 후인 1897년이다.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은 중국의 일개 자치구 정도였던 셈.
500여 년 계속된 중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뿌리 깊은 인식이 인위적인 조약이나 역사적 사건만으로 간단하게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고위 관료 가운데 "얼마 전까지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최근 어느 책에서 봤는데, 1945년 장개석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장개석의 머릿속엔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을, 일본이 중국에 항복했으니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과 소련이 중국(국민당)을 배제하고 한반도에 진주하자 중국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며 "땡강"을 부렸을 법도 한데, 그런 흔적은 아직 보지 못했다. 6.25 때 장개석이 한반도에 파병하겠다고 했지만 미국이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원세계(袁世凱), -요즘은 '위안스카이'가 올바른 표기법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겐 지명도가 꽤 높은 쪽에 속한 중국인이다. 임오군란 진압차 조선에 들어와 고종을 부하처럼 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원세개를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고 하는데, 공식 직함인지 별칭인지 모르겠다. 감국(監國)이란 직함은 정복지를 황제 대신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일종의 황제 대행이라고 한다. 통상의 총독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이라고 한다.
며칠 전 주한중국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이 이재명을 집으로 불러 저녁을 먹인 뒤 일국의 대사로서는 주제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말을 했다고 해서 언론에서 시끄럽다. 외교 문외한이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말인데, 0.74%만 극복했으면 대통령이 됐을 뻔했던, 평소 순발력이 좋은 데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말 펀치"를 잘 날린다는 이재명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싱하이밍 옆에 공손하게 앉아 있는 이재명의 영상을 보면서, 조폭처럼 생긴 자(조폭이 아니라는 해명이 있었음)가 성남시장 책상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을 때, 그 옆에 서있던 이재명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싱하이밍도 원세개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고, 원세개처럼 행동하고싶은 욕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싱하이밍의 "이재명 면전 발언"은 원세개 시대와 다른 점을 감안한 표현일 뿐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 정권의 외교 관리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반격 받을 것을 우려하여 외교에 무지몽매할 것 같고, 친중적인 이재명을 활용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출처] 감국대신 위안스카이와 감국대사(監國大使) 싱하이밍|작성자 필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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