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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도슨트 윤씨를 따르는 사람들은 30여명으로 늘었다.
콩나물 시루에 재인 듯 다닥다닥 붙어서 고개만 삐죽 내민 그들이 더위를 탈법도 하지만, 말 한마디를 놓칠세라 여념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의 중간에 선 한 중년 신사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의 위태로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앞 사람에게 그것을 떨구는 ‘실례’를 범하고 만다.
다음 작품은 ‘셍 폴 위의 부부.’
10여 미터를 이동하는 동안 맨 뒤에 섰던 커플이 약삭빠르게 맨 앞으로 헤집고 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 섰던 덩치 큰 중학생들이 뒤로 밀렸다.
“안 들려욧!” 맨 바깥 줄에서 나온 아우성.
조그마한 확성기라도 동원하면 시원시원히 들릴 법도 하지만, 조용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겹겹이 쌓인 인파는 어느새 50여명.
“뒤에서 안 들리는 분들은 15분 뒤에 시작하는 다음 설명을 들으시면 됩니다.”
하루 두 차례(오전 11시, 오후 4시) 진행되던 작품 설명 투어가 네 차례로 늘어 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40~50분 정도 걸리는 투어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족적(自足的)인 존재.’
도슨트의 작품 해설과 설명은 되려 작품 감상과 이해를 그르치게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내재 비평가’들의 작품 감상 열기도 만만치 않다.
허리춤에 팔을 얹은 채 작품 앞으로 다가섰다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방학 숙제를 위해 들렀다는 중학생, 엄마의 등을 받침삼아 스케치북 위에 샤갈을 옮기고 있는 손놀림 빠른 초등학생. 모두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들 이상의 진지함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며 극구 말 붙이기를 꺼리는 아줌마들.
“언어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는 보여 줄 수 있다”는 게 샤갈의 생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그림을 다시 언어로 전환하는 작업에는 무리가 따랐을 법도 하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많은 울림을 받았다며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샤갈의 ‘나와 마을’을 보기 위해 찾았다는 한 중년 신사는 유독 그 작품이 빠진 이번 전시회가 못마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샤갈이 겪은 고난과 슬픔이 묻어나는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접하니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젊은 날도 보상되는 듯 하다며 결국 반색한다.
“학교 근처의 ‘사발에 술 내리는 마을’ , ‘김에 밥 내리는 마을’ 이라는 술집과 밥집을 애용하는데, 그 간판들의 ‘저의’가 궁금해서 샤갈을 찾았다”는 캠퍼스 커플도 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잡아는 끄는 요인은 다양했다.
“‘샤갈’ 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낭만이죠. 조금은 오래 된 거리를 오랜 친구와 함께 거닐며 커피를 함께 하고 싶은 그런 느낌까지 전해주는… .”그래서 서울 모처에 자리한 카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을 자주 들른다는 구춘옥씨(52).
그의 말마따나 여기서 접하는 샤갈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따뜻하며,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 샤갈이라는 이름 자체가 낭만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리도록, 한국 사람들이 샤갈에게 관심을 갖도록 한 사람은 것은 시인 김춘수였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라고 노래하면서 였다.
그러나 샤갈의 마을에 눈이 내린다고 따라 읊조리던 시심에 내리던 게 단지 눈 뿐일까.
박상우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소설이다.
치열했던 80년대를 지나 1990년에 발표된 소설에서 여섯 명의 친구들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카페를 찾아 떠난다.
그들이 원했던 건 여섯 명의 ‘우리’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푸근한 카페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줄고 줄어 두 명만 샤갈의 그림 앞에 선다.
그러나 그 둘이 얻어 들은 말이란 “결국은 둘도 안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결국은…….”이라는 말이다.
샤갈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 온 우리들 속에 웅크리고 있던 기억과 자의식을 불러 낸다.
전투적이고 치열했던 시간, 사상적으로도 경직된 시대….
민족ㆍ민중ㆍ민주를 외쳤지만 마음 한 켠에는 이방의 도시를 품고 남몰래 꺼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란 말은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마법의 주술이었던가.
이번 전시에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국내에 한번도 공개된 적 없는 ‘유대인 극장’ 연작(Panels of Jewish Theater).
극소수의 대형국제전을 통해 구미권에서만 소개된 작품이다.
‘무용’, ‘연극’, ‘음악’, ‘문학’으로 구성된 이 패널화는 1920년에 모스크바 소재 유대인 극장의 패널화로 제작됐지만 스탈린 정권에 의해 철거된 이후, 50년 이상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가 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1995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샤갈의 러시아 시기 전시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작가 샤갈의 예술과 철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한국 전시를 위해서 특별히 공수된 작품이다.
- 샤갈의 색감에 질투 느끼는 미술학도
미술관의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도시위에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최흥수 기자 |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해는 기울고 더위가 옅어질수록 샤갈을 만나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진다.
이런 미술관 분위기와는 달리 한 작품에 10분 이상씩을 할애하는 한 커플이 유난히 눈에 띈다.
“우리도 그림을 그리지만, 어울리는 색깔 찾는 것이 가장 힘든데 샤갈의 경우는 막 쓰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며 질투부터 한다.
허무해 보이는 질투심, 샤갈을 딛고 올라서겠다는 야심이 말마따나 묘하게 어울렸다.
폐관까지 한 시간을 조금 못 남긴 저녁 8시 5분.
연인 한 쌍이 미술관에 도착한다.
이미 관람 소요시간을 감안, 더 이상의 객을 받지 않는 시간이다.
“서둘러 봐야 시간 내에 볼 수 있다”는 안내 요원의 말에 “샤갈과의 첫 만남을 주마간산으로 시작할 수 없다”며 등을 돌린다.
훗날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린 그들의 등은 이미 땀으로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해는 기울었지만, 여전히 후끈거리는 미술관 밖에는 많은 이들이 미술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샤갈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벤치와 파라솔에서, 더러는 잔디 위에 누워서 샤갈을 이야기한다.
잔디 위에 앉은 한 중년 부부는 샤갈에게 빠져 전시관을 서너 바퀴 돌았는데, 3시간 가까이 혹사당한 다리가 도저히 움직이질 않아 주저 앉았다고 푸념.
그러나 행복한 피로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박소현 인턴기자 peste@naver.com">peste@naver.com
[色의 幻-샤갈展] 샤갈은 누구인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색채 마술사
슬라브족 특유의 환상성과 신비함 접목시킨 독특한 화풍의 거장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색채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95)은 러시아 비테프스크(현 벨로루시) 출생의 유대인이다. 20대 초반부터 그는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파리, 미국에서 활동하며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거뒀다. 이렇게 유대인이면서 러시아인이라는 점, 그리고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서구에서 이방인으로 활동했다는 점, 바로 여기에 샤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있다. 샤갈의 위대성은 20세기 세계 화단을 풍미했던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흐름을 두루 소화해내되 이 모두를 넘어선 독창적 작품 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에 있다. 샤갈의 생애에는 인종 박해, 이념 분쟁,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가 그대로 굴곡 지워져 있다. 결코 그의 그림들에 나타나는 환상적 세계처럼 화려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던 생애, 하지만 그 생을 버텨냈기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나아가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에 공감을 일으키고 짙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샤갈의 본명은 모이셰 세갈. 1906년 유대인 화가 예후다 펜의 작업실에서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진 수정 작업실의 조수로 일하면서 간판 화가 훈련을 받는다. 여기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1910년 파리로 건너가 앙데팡당 전에 출품하는 등 4년간 생활하다 1914년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3개월 예정으로 고향으로 가 첫 부인 벨라와 결혼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파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샤갈은 고향 비테프스크에 미술 학교를 열고, 1920년에는 모스크바 국립 유대인극장의 패널화를 제작한다. 1922년 다시 러시아를 떠난 그는 1924년 파리 바르바장주 - 오데베르 미술관 회고전을 계기로 앙드레 말로와 친교를 맺는다. 앙드레 말로는 이후 샤갈의 그림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절, 샤갈은 특유의 환상적 화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파리 화단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격화되자 샤갈은 다시 1941년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다. 2차대전 종전 후 1947년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에 영구 정착했다. 1973년 고향을 떠난 지 51년만에 구 소련을 방문해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 해 프랑스 니스에 국립샤갈미술관이 개관된다. 1977년에는 프랑스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회고전이 열린다. 1985년 그는 생폴드방스에서 20세기와 함께 했던 98년의 긴 생애를 마감했다.
슬라브 지역 특유의 환상성과 유대인의 신비성을 결합시킨 독특한 화풍, 하늘을 나는 연인 등 소박한 동화의 세계 같은 화폭…. 샤갈의 자유로운 공상, 화려하면서도 따스한 색채는 시공을 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향수와 동경, 사랑과 낭만 등 우리 삶이 갖는 밝은 측면을 샤갈 만큼 긍정한 작가도 드물다. 그것이 샤갈을 20세기에 명멸한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남게 한 이유일 것이다. |
하종오기자 joha@hk.co.kr">joha@hk.co.kr
[色의 幻-샤갈展] 샤갈전 관람포인트
사랑, 희망, 삶의 의욕 북돋는 명작들
연인, 샤갈과 지중해 등 7개 주제로 전시
서울시립미술관(7월15일~10월15일)에 이어 부산시립미술관(11월10일~ 2005년 1월15일)에서 열리는 전시회 '색채의 마술사: 샤갈'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샤갈의 대표작 120여 점을 모아 보여 준다. 국내 전시 사상 최대ㆍ최고 규모라는 표현에 과장이 없다.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전시에 이은 세계 순회전이다. 프랑스 니스의 국립샤갈미술관 소장품 60여 점을 비롯해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스위스 샤갈재단,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파리시립미술관의 소장품들로 구성됐다. 작품 가격만도 보험가 기준으로 1억 달러(약 1,200억원). 샤갈의 러시아 시기(1910~1922) 파리 시기(1923~1941) 미국 망명기(1941~1948) 프랑스 정착기(1948~1985) 등 시기별 대표작을 고루 망라해 '연인', '상상', '파리', '서커스', '성서 이야기', '호메루스의 오디세이', '샤갈과 지중해' 등 7개 주제로 나눠 보여준다. 한 점 한 점이 우리의 사랑과 희망, 삶의 의욕을 북돋는 명작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들을 소개한다. |
<도시 위에서>
1914~1918,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캔버스에 유화, 139X197㎝
샤갈이 벨라와 결혼한 직후 그린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러시아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음에도 그는 주변 상황에 무심한 듯 전통적 회화 형식으로 사랑의 행복을 전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세련된 색채로, 회색을 주조로 한 초록 분홍 파란색이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와 그 위를 나는 연인의 모습은 이후 샤갈의 작품들에서 계속 변주되는 핵심적인 두 가지 주제이다.
작품 평가액 1,000만 달러(약 120억원)에 달한다.
<음악>
1920,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캔버스에 과슈와 템페라, 213X104㎝
샤갈이 1920년 모스크바에 있던 작은 유대인 극장의 장식을 의뢰 받고 그린 4점의 연작 ‘음악’ , ‘무용’, ‘문학’, ‘연극’ 중의 한 점. 그는 이 연작에서 고전적 예술 양식을 상징했던 초상화적 인물들을 거리의 악사처럼 평범한 인물들로 대치해도 고전 예술의 인물화와 같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작품은 또 당시 러시아에서 싹트고 있던 추상을 거부하고 구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녹색 얼굴의 바이올린 연주자 역시 이후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작품가 500만 달러(약 60억원).
<비테프스크 위의 누드>
1933, 파리, 개인 소장
캔버스에 유화, 87X113㎝
화면의 아래쪽에는 화가가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의 모습이, 위쪽에는 부인 벨라가 등을 돌린 채 누워있다.
창백한 누드, 샤갈의 다른 작품과 다른 전체적으로 회색조의 화면이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시기 암울한 샤갈의 내면을 보여준다.
화면 자체의 비현실성은 당시 화단을 풍미했던 초현실주의적 경향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샤갈은 사실상 이 그림을 통해 자기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수탉>
1947, 파리 퐁피두 센터
캔버스에 유화, 126X91.5㎝
그림 속 수탉을 자세히 보자. 그 한쪽 발이 팔레트를 움켜쥐고 있다.
깃털에서 슬쩍 나온 손은 붓을 쥐어 붉은 옷을 입고 꽃다발을 든 여인을 그리고 있다.
이 수탉-화가는 바로 샤갈 자신이다. 그러므로 수탉 그림은 샤갈의 자화상인 셈이다.
샤갈은 ‘추시계와 자화상’에서는 당나귀, ‘강변에서의 부활’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이중적 얼굴을 가진 스스로의 모습을 그렸다.
샤갈의 작품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의 동반자이자 스스로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파란 풍경 속의 부부>
1969~1970, 파리 개인 소장
캔버스에 유화, 112X108㎝
‘도시 위에서’가 비테프스크의 하늘을 나는 연인의 모습이라면 이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의 생폴드방스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샤갈이 추구한 색채의 승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파란색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전체 정경을 부드럽고 감미롭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첫 부인 벨라의 죽음 이후 두 번째 결혼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접어든 샤갈이 프랑스 남부의 온화함, 젊은 여인과 아이, 말, 닭 등 동물을 함께 등장시켜 새로운 상징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첫댓글 아주 좋은 글을 올려 주셨네여.. 고맙습니다. / 맨 위에 사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네 장의 큰 그림이 걸려 있는.. 저것이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라고 하던데.. 참 멋이 있었습니다. / 러시아에 있는 유대인 예술관 건립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한번 가 보시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달리'전보다 작품수는 작지만.. 작품의 질이라는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더군여.. / 서울시립미술관 '샤갈'전 만원(10.000).. 예술의 전당 '달리'전 만이천원(12.000).. ㅎㅎ. 샤갈전 강추!
최단 기간에 많은 인원이 관람하였다고 신문지상에서 떠들어 대길래.... ㅎ 퍼온 글입니다...울 나라에도 샤갈 못지 않은 화가들은 많을텐데... 이만한 명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