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이 땅에 천지귀신을 감동시킨 노래가 있었다. 하늘에 해가 두 개 나타난 변고를 물리치고, 100일동안 사라지지 않는 핼리혜성의 노여움을 달래어 평화를 노래하게 하고, 다섯 살 먹은 아이의 눈을 뜨게 해주었던 진정성 어린 노래가 있었다. 천년 신라의 노래 향가다. 향가는 민초들에겐 복음이요, 통치자들에게는 과오를 바로잡게 하는 경계의 거울이었다. 민생을 외면한 일방적 통치로 사회적 불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요즘 향가는 평등·대동의 미래를 꿈 꾸게 하는 희망의 노래로 다가온다. 박진환 시민기자의 '향가 천년을 걷다'를 연재한다. 향가 전통을 물려받은 시조도 일부 다룰 예정이다.
정과정공원에 있는 정과정
향가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 향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서의 '정과정곡'이다. 한국문학사에서 첫 충신연주지사로 평가되는 이 노래는 고려 의종 5년(1151년)에 고향 동래로 귀양온 정서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다수 고려가요가 작자 미상인 점에서 이 노래가 가지는 중요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동래 정씨인 정서는 고려보윤호장 정지원의 5세손으로, 아버지 정항이 고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사간을 거쳐 한림학사를 지냈고, 아버지 형제인 정제 정점 정택 등도 문과에 급제했던 고려시대 최고 명문가의 후예다. 김부식 사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것 이외에는 이런 가문이 없었던 것 같다. 정서 자신도 문음으로 관계에 나가 벼슬이 정5품 내시낭중에 이르렀으며, 고려 18대 임금 의종과 19대 명종, 20대 신종의 친모인 공예태후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왕실의 일원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출세가도를 달리던 정서는 의종의 동생인 대령후 경을 옹립하려 했다는 참소로 유배길로 들어섰다. 의종 5년에 시작된 귀양살이가 의종 24년(1170년)에 풀렸으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생 세옹지마라고 했던가. 만약 이때 정서가 귀양지에 있지 않았다면 무신의 난(1170년년)에 화를 입어 연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신의 난에서 문신은 하급관리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기록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파한집'의 저자로 알려진 이인로도 승려로 위장하여 살아남았다.
동래 정씨 시조묘가 있는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공원을 찾았다. 화지공원은 정묘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동래 정씨 2세손 안일호장 정문도를 화지산에 장사지냈는데, 그날 밤 도깨비들이 묘를 파헤쳐 버렸다고 한다. 아들 목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같은 곳에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하는 수 없이 해박한 노인을 찾아가 이런 기묘한 사연을 얘기하자, 노인은 "화지산의 그 묘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된다. 그러나 그럴 수 없으니 보리짚에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도 속아 넘어 갈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대로 하자 더 이상 도깨비들의 훼방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동래 정씨 가문은 약 400년동안 10대에 걸쳐 17명의 고관을 배출했다고 한다. 왕족인 전주 이씨가 22명, 세도정치의 대명사 안동 김씨가 19명의 고관을 배출한 것을 보면 화지산 정묘의 명당발복이 사실인 것 같다. 정묘의 바로 앞에는 천년기념물 168호인 배롱나무가 하얀 속살을 드러내놓고 묘소를 참배하는 듯 바람을 막고 서있다. 자태가 자못 고고하다. 화지공원을 나서니 마천루 아파트가 앞을 꽉 막고 선다.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아무리 명당이라고 한들 이렇게 아파트 숲이 앞을 가리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에 명당도 비켜갈 수는 없나 보다.
정서가 동래정씨 5세손임을 알리는 화지공원의 비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공원으로 가는 길은 새로 난 신작로가 자동차의 질주를 부른다. 정과정 바로 턱밑까지 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쳤으니 정서의 유배지는 아직도 유배 당시처럼 상심의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몇해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호젓한 도심 속의 작은 쉼터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이태 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지금처럼 개발 홍역을 앓고 있다. 작은 초막이 어울릴 것 같은 정과정을 복원한답시고 화려한 정자로 세워놓은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과정에서는 이제 정서가 수영강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연주했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정과정곡'이라도 한곡 부르면서 씁쓸함을 달래야 할 것 같다.
내가 님을 그리워해서 울고 있으니 산접동새와 난 비슷합니다. 아니며 거짓인 줄을 잔월효성이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은 한 데 가고 싶어라. 어긴 것이 누구였습니까?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말짱한 말씀이었군요. 죽고 싶습니다. 님이 나를 하마 잊으셨습니까? 아으 님아, 돌려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악학궤범'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조동일 번역>
이 노래는 다섯 줄 사뇌가(향가)와는 다르다. 아마도 정형의 향가가 이어져오다 정격이 파괴된, 향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가 될 것 같다. 정과정공원 입구에 붉은 색 계단이 주단인양 늘어져 있고, 그 옆에는 동백꽃이 수줍은 듯 잎속에 숨어서 바라보고 있다. 정서의 정열을 보는 것 같아 반갑우면서도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