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천하보다 중할 진데-/ 경인 김종환 선생님께 드립니다
정임표추천 0조회 14 20.02.29 09:08 댓글
이 글은 대구문협 카페에 올린 필자의 수필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를 읽고 경인 김종환 선생께서 "환자와 신자와 인간의 의미는 정 선생님께서 답을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을 위해 댓글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댓글을 주신지라 그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특정의 종교적 교리에 관한 글이 아니고 복음서를 읽고 느낀 인간의 영적 세계의 문제에 대한 필자의 영감을 설명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문제와 인간 세상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는 중생의 의식세계를 몽매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timid thought라고 표현하기도 했더군요. 헤르만 헷세는 "새는 알에서 깨어 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한다"고 했더군요. 자기 내면의 벽을 깨고 나오려고 치열한 싸움을 치루지 않고서는 밝음으로 나올 수가 없기에 몽매로 표현하는 것일 뿐 내가 독자들 보다 잘나서 몽매라는 표현을 쓴게 아닙니다. "미각지당 춘초몽"이라는 싯귀 속의 미각된 몽을 몽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리차드 버크는 그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의식이 크게 열리는 경지로 나아가려면 수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표현 하기도 했더군요.
대오각성의 경지로 나아가는 길이 인문학의 길이자 문학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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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이 천하보다 중할 진데-
- 경인 김종환 선생님께 드립니다
먼저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신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감사함의 힘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인간의 심리는 혼자 있으면 불안해 지는 탓으로 절대로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몰려다니게 됩니다. 연약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하듯이, 작은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비행 하듯이 힘이 약한 것일수록 존재에 불안을 더 크게 느껴서 무리를 만들고, 무리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안도를 하고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삶이 고단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록, 불투명한 미래가 많이 남은 육신의 에너지가 왕성한 청년일 수록 불안감이 더 크니 당연히 더 많이 몰려다니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서 “카톡”도 열심히 보내고 답도 받고 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안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카톡"을 만든 자가 큰 돈을 벌고 있지만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 특별한 종(種)에게는 무리를 짓게 되면 그 속에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비교가 아니 될 정도로 강하게 발현(폭발)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동물의 세계에서도 같은 종(種)을 누르려는 지배욕구가 있지만 오직 근육의 힘만 사용되니 힘이 센 한 마리의 사자가 미치는 영향은 생태계를 안정시키는 범위 내에서 저절로 자동조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종(種)은 영적인 존재라서 이념과 사상과 종교, 과학 그리고 돈으로 전 인류를 연결시켜서 자기지배의 세상을 만들어 버리니 동물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모든 사이비들은 여기에다 뿌리를 내리고 태어납니다. 인간의 영혼을 조작하는 영적인 활동영역은 보이지 않는 세계임으로 일반인은 알 수도 없고 설명해도 잘 모릅니다.
인류의 역사 특히 정신사는 딱 한가지로 설명 됩니다. 인간을 도구화 하여 자기 영광을 취하려는 인간의 등장(신격화 된 인간의 등장, 죽어서 까지 동상을 세우고 역사를 날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불멸의 인간)과 이에 맞서서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론적 목적에 충실하려는, 시냇가에 심은 버드나무와 같이 푸르게 번성하려는 꿈을 꾸는 인간의 대립이었다는 것입니다. 성서적 표현을 빌리면 전자는 적그리스도(가짜 메시아)이고 후자가 진짜메시아(선한 사마리아인, 참 감람나무) 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이미 이 복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이비들이 나올 것을 예견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거짓선지자, 거짓목자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설명을 해 두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당시 사회 환경은 지도자라 칭하는 자들 전부가 거짓 목자였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기이한 것(예언과 방언, 이적과 기적과 돈)만 쫒아 다닙니다. 이적과 기적은 수단일 뿐 본질이 아닙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외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신천신지(新天新地)를 외치는 자들은 양의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튀어 나옵니다. 맹목적으로 그들에게 영혼이 팔려가 버리면 일신이 망하고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아니 하나 뿐인 우리의 생명이 파괴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기 예수가 나타났다 저기 예수가 재림했다 하더라도 몰려다니니 말고 한 생명이 천하보다 중하니 그대 목숨을 중히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자기 몸을 떡과 포도주로 내어 주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여기는 사랑” 말고는 죽어서도 신천신지를 만날 수 없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를 영원히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는 미사가 끝나면 영성체 의식으로 지금도 이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종교의 자유와 정치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오늘의 시민대중시대에 이르러서 문학인으로서 심히 염려되는 것은 “표” 때문에 “정치권력과 사이비집단종교권력이 다시 결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건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 19처럼 시민의 영혼과 삶을 황폐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때문입니다. 수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아멘! 아멘! 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의 강림을 외치는 그 자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19란 놈이 물 만난 고기처럼 자기들만의 새 세상을 열심히 복제시켜 나갔다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표현할까요?
꿈을 잃은 청년들에게, 불안을 느끼는 시민들에게 진정한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의연한 정신을 지닌 문학인들이 많이 나와야 세상이 밝음 속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문학의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대사회에서 사이비 종교권력이 비대화 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한 인간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인간들의 머리수와 어마 무시한 규모의 돈 때문입니다. 종교단체 및 종교인에 대한 과세를 법제화하면 세수확보 그 자체보다는 종교단체가 사용하는 돈의 용처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가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사용의 정당성을 간섭할 수가 있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밝고 투명하게) 만드는 효과가 아주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2020. 2. 29 08 : 25
우거에서 후학 정임표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