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여,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1)
사목자로서 신자들의 양육을 위한 지도와 사목의 지침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는 티토서 2장 1절~3장
11절의 단락 가운데, 3장 1절과 2절은 신자들의 일반 사회 생활을 위한 지도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바오로 서간과 바오로계 공동 서간에는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각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뿐만 아니라, 시민의 일원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과 윤리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로마13,1~7; 1티모2,1~3; 1베드 2,13~17).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하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생활
지침을 제시하면서 우선 위정자들에 대한 바른 윤리는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통치자'로 번역된 '아르카이스'(archais; rulers)의 원형 '아르케'(arche)는 '시작하다'
(루카3,23)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아르코마이'(archomai)에서 유래하여 원래 시간의 연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기점을 말하는 '시작', 만물의 시작을 말하는 '태초'(마르10,6; 13,19; 요한1,1; 2테살
2,13)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점차 '개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지도자'(콜로1,18; 묵시1,8;
21,6; 22,13)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아르케'를 대부분 영적 존재인 천사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문맥으로 보아 국가의 위정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집권자'도 마찬가지다. '집권자'로 번역된 '엑수시아이스'(eksusiais; authorities)의 원형
'엑수시아'(eksusia)는 '선택권'(1코린9,12,18; 2테살3,3,9), '정신적, 육체적인 힘'(마태9,8; 사도8,19;
묵시9,3), '권위와 권리'(마태9,6; 마르2,10; 루카5,24), '통치권'(마태28,18; 묵시12,10; 17,13) 등을
의미한다.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유사어로 '뒤나미스'(dynamis)도 있는데, '뒤나미스'는 체력과
정신력에서 나오는 힘에 강조점이 주어진 주어진 반면, '엑수시아'(eksusia)는 그것이 신적 권위이든
국가적 권위이든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에서 발휘되는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복수형으로 쓰여 국가의 공직자들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러한 세상 통치자들과 공직자들의 권세에 순종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복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동의어 '휘파쿠오'(hypakuo) 대신에, 노예가 주인에 대하여
절대 복종함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인 '휘포탓소'(hypotasso)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
복종하되 종이 그 주인에게 복종하듯이(티토2,9)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덧붙여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의 원형
'페이타르케오'(peitharcheo)는 여기와 사도 행전 5장 29절과 32절에만 쓰인 단어로서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할 때도 쓰인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위정자들의 권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며, 따라서 그 백성은 위정자가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상관없이 모두 그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마태17,24~27; 22,15~22; 로마
13,1~7; 1티모2,1~7; 1베드2,13~17).
특히 사도 바오로는 앞서 '복종하고'로 번역된 '휘포탓세스타이'(hypotassesthai)는 현재 수동태
부정사로 쓰고, 이어 나오는 '순종하며'로 번역된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은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쓰고 있다.
여기서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자신에게 이로울 때 뿐만 아니라 불리할 때도 복종과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동태와 능동태가 교차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명령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자는 이에 대해 보다 능동적인
태도로 임해야 함을 보여준다.
당시 사회적인 정황으로 볼 때, 크레타인들은 로마 통치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폭동, 살인
등에 가담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자들을 향해 폭력적인 대항 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그들이
신자로서 해야 할 선한 의무를 다하도록 교훈하라고 티토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읽고 주해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까를 줄곧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읽으면, 어떤 독재 권력도, 부패한 권력도, 유물로적 무신론적 공산주의 권력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무조건 신자로서의 해야 할 선(善)한 일을 찾아야
한다.
물론 전지(全知)하시고 전선(全善)하신 하느님께서 악(惡)을 허락하시는 이 문제, 소위 신의 정의
<正義; 공의(公義)>에 관한 신정론(神正論)에 관한 문제는 옛날부터 내려온 문제이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명제를 '보다 더 큰 선을 위하여, 보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악을 허락하신다고
일축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全知)하셔서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니(예지; 豫知), 우리 믿는
자들을 좋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구원과 성화에 이롭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러한
불만스런 환경을 허락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기도하라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뜻 안에도, 이 땅의 국민과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좋은 권력도 하늘에서
허락하셔야 된다는 느낌을 가진다.
특히 성경안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임금들과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서, 그들이 선민으로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견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계명에 충실했을 때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를 계속 지을 때에는, 주변 외교 열강들의 침입을 받아 나라를 잃고 유배당하고
종살이 하는 것을 보았다.
사도 바오로는 이 지상의 권력 아래 사는 것보다는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루 빨리 살기를 원했고,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어떤 권력 앞에도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론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변화없이 어떻게 이율배반적인 믿음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도 인간들의 욕심과 남용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고, 그 끝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복음적 가치관과 사회 정의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가?
그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노력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소관으로 맡길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 영혼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건설하는 일이고, 모든 권력, 체제, 이념을
넘어서 수많은 영혼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그들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은총의 지위, 영혼의 성화를 도모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혁명(열심)당원(zellotai; 젤로타이)이 되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여호수아서 6장에 나오는 난공불락의 예리코성이 신무기와 훈련된 정예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 결코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피앗사랑 rigel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