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222. 묵상글 ( 12월 22일. -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도. 등 )
----------------------------------------------------
231222. 12월 22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복음은 엘리사벳의 마리아 찬미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런데 두 찬미의 내용도 아름답지만
찬미하는 두 분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찬미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도 서로 이런 식이면 좋겠습니다.
이웃이 은총을 받았을 때 시기하거나 흠잡지 말고 칭찬하고 칭송하고,
그 칭찬과 칭송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자기 공으로 꿀꺽 삼키지 않고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으로써 덕을 돌려드리는 그런 식 말입니다.
아무튼 오늘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미의 내용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찬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총에 대해 찬미하지만
먼저 자기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하고
이어 자기를 통해 모두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미천한 자신을 구원해주심에 대해 찬미하는데,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하는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사무엘기의 한나가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께 찬미하는 것과 같이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 다 미천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하지만,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 처지였고 그래서 진짜 비참한 처지였던 데 비해
마리아는 전혀 그런 처지가 아니었으니 마리아가 자신을 미천하다고 한 것은
다른 의미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들 앞에서 미천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 앞에서 미천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있는 우리는
미천하고 그 은총을 받기에 늘 죄인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 반대잖아요?
존재로나 사랑으로나 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더 크신 하느님 앞에서는
무시하고 대들고 원망하고 하느님보다 훨씬 못한 미천한 인간 앞에서는
자신이 쫄아들고 열등감을 느끼며 자기를 미천하게 생각하잖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의 미천하다는 느낌은 성사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하느님 찬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찬미가 확장됩니다.
이것은 즈카르야의 찬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느님 구원의 은총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 현상입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만 또는 자기만 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통해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면 날름 삼켜버리고 입 싹 닦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나누라고 주신 은총을 확장하라는 뜻입니다.
----------------------------------------------------
231222. 12월 22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 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좌”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
231222. 12월 22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탄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낯선 카드와 선물을 받으며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카드를 쓸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과분한 선물을 받기만 하며 빚을 지게 됩니다. 카드를 보내지도 않았으면서 매일 우편물을 확인합니다. 어느새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거듭 태어나기를 다짐합니다.
마리아는 시골의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1,47-48). 비천함을 굽어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며 또 희망입니다. 우리의 비천함도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된 여인,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거룩하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고, 믿는 바를 가슴에 새기고, 새긴 바를 실행하게 될 때 비로소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복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처지나 여건, 환경을 비관합니다. 능력이나 성격을 상대와 비교하며 스스로 위축시키며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비교는 비참함을 가져오든 교만을 드러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1-53). 하느님께서는 지금 나의 처지를 인정해 주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지금은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더라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빛나는 존재입니다.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일에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지는 모는 수고와 땀의 결실은 하느님께서 충만하게 하시어 되돌려 주십니다.
젊은 날에 아이를 배지 못하는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늙은 나이에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주셨구나”(루카1,25).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자신의 처지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충실한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 안에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의 비천한 처지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1222. 12월 22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투자와 투기’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개념입니다. 투자는 불확실한 면이 있지만 더 낳은 미래를 예측하고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는 ‘전기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대학생 때는 ‘전자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이 전기에서 전자로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창들 중에도 ‘전자과’를 선택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인공지능, 생명공학, 유전공학’과 같은 과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그런 과목들이 미래에 대한 수요가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험, 증권, 은행은 더 많은 수익을 예상하면서 고객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고객들은 100% 안전하지 않다는 설명을 듣고, 원금에 손실이 갈 수도 있다는 설명을 듣지만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투자합니다. 반면에 투기는 100%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땅 짚고 헤엄치는 경우입니다. 개발정보를 미리 알거나,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 정보를 미리 알면 부동산을 사거나, 주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먼저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투기를 하는 것은 불법이기에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투명한 사회, 선진국에서는 이런 ‘투기’를 하지 않고, 할 수 없습니다. 투기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고, 결국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자와 투기와는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일까?’ 요한복음은 그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정보를 아시고, 모든 권력을 가지셨지만 ‘투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투자’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미리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투자의 위험성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투기’가 아닙니다. 신앙은 ‘투자’입니다. 때로 고난의 가시밭길이 있고, 때로 캄캄한 어둠이 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수고의 열매를 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성모님의 마음은 저의 무딘 마음을 깨우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는 신앙인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준비하였듯이, 우리들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
231222. 12월 22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한국 교회사 안에서의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입국 후 즉시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일차적으로 기도서 번역을 착수함과 동시에 조선 교구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하여 주시기를 교황청에 청하고(1838.12.1) 이는 1841년에 허락되었습니다. 1839년 앵베르 주교는 순교하였습니다.
다불뤼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성모 신심에 감화받아 성모 성심회를 한국에 도입하였습니다. 1836년 프랑스 파리에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신부 데쥬넷드(Desgenettes)에 의해 창설된 “성모 성심회”를 한국에 도입하였습니다.
달레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7년 전에 조선은 교황청에 무염시태의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신 동정 성모 마리아! 저 바다의 김대건 안드레아가 위험한 여행을 하는 동안 등대 노릇을 하여 주시었고 그가 조선에 돌아올 때 조그만 라파엘 호의 나침반 노릇을 하신 것도 성모 마리아였다. 그의 성화가 늘 돛대 밑에 펼쳐져 있었고, 낮에는 그에게 보호를 구하고 밤에는 그에게 호소하였으며, 선교사들이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바다와 박해의 모든 위험을 면하였다고 믿은 것이 옳은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의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가 있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꼭 성모님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 늘 성모님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모님의 신심이 우리 안에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리액션
한 달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인천교구 선교사 학교 강의를 맡았습니다.
드디어 강의 첫날입니다.
사실 모두 처음 보는 분들이고
진짜 학교 학생들처럼 무엇을 해도 무덤덤하게 보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상했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시작 5분 만에 느꼈습니다.
눈은 반짝였고, 무슨 말을 해도 리 액션 100이었습니다.
그러한 반응은 강단에 선 사람에게 참으로 큰 힘이 됩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난날을 반성해 봅니다.
수많은 선생님을 리액션 없이 바라봤던 시간 말입니다.
조금 더 잘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돌아간다면 수업 시간에 열심히 리액션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처럼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말입니다.
----------------------------------------------------
231222. 12월 22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영화를 잘 보지 않습니다. 볼 때도 있지만, 책에서 영화에 대한 소개가 나올 때 강의 자료로 쓰기 위해 영화를 볼 뿐입니다. 그러나 영화 보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영상을 보는데 눈이 쉽게 피곤해져서 ‘빨리 보기’를 눌러서 영화를 봅니다. 그리고 원하는 장면을 찾게 되면 어떻게 이 부분을 강의 때 쓸지를 떠올리면서 그 부분만 천천히 봅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봐서일까요? 영화의 내용을 잘 모르고, 또 영화가 크게 와 닿지도 않습니다. 매번 이렇게 영화를 봐서인지 영화에 정을 갖지 못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어떤 영화도 다 재미있게 봤지만, 지금은 아주 재미있다는 영화도 또 온 국민이 본 영화라고 해도 관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 안에서 빠른 결과만을 찾고 있다면, 그래서 미사나 기도에 있어서 ‘빨리 빨리’만 외치고 있자면 주님의 그 깊은 뜻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은총도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영화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야 감독의 의도와 배우들의 연기가 와닿는 것처럼, 주님께도 시간을 갖고 정성을 기울여야 주님의 뜻과 주님의 활동이 더 크게 와닿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너무 빠른 결과만 원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이는 주님과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사 시간도 빨리 끝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 의미를 찾으면서 미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시간도 해야 할 기도만 얼른 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빠른 것만을 추구하다가 미처 주님을 놓쳐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찬미가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친다고 하십니다. 또한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해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어느 순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하느님 안에 머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언제나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범을 기억하면서, 빠른 결과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함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어떠한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이의 꽃도 나무의 열매조차 금방 열리지 않는다. 하물며 인생의 열매를 노력하지도 않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에픽테토스).
----------------------------------------------------
231222. 12월 22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노래의 힘, 기도의 힘
-아나뷤(amawim;가난한 이들)의 노래, 아나뷤의 영성-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의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 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2부 엿새째 12월22일 “오! 후렴” 역시 주님 오심을 갈망하는 가난한 우리 아나뷤들이 바치는 애절한 노래요 기도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가난한 영혼의 노래요 기도입니다. 갈망의 사람이자 갈망의 기쁨이요, 갈망은 성소의 잣대이자 원동력이되고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갈망의 사람입니다. 희망과 꿈을, 갈망을 잃은 사람은 살아 있다 하나 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갈망할 때 비로소 깨어 기도하는 순수한 마음이 되고 주님을 기다리게 되고 마중나가게 됩니다. 은총의 대림시기야 말로 영혼은 갈망의 그리움, 갈망의 사랑으로, 갈망의 빛으로 은은히 밝게 타오르는 시기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이들 아나뷤은 물론 우리 모두가 깊이 잘 들여다 보면 가난한 이들 아나뷤입니다. 아나뷤의 영성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배곺아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가난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근원적 영혼의 허기(虛飢)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가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어제 나눈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리움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畵)이 되고
그리움
글자로 써내면
시가(詩)가 되고
그리움
소리로 부르면
기도(祈禱)가
노래(歌)가 되고
그리움
몸으로 풀으면
춤(舞)이 됩니다.”-
이래서 갈망의 사람들은, 그리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명의 하느님을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시는 그대로 갈망의 고백의 노래이자 기도가 됩니다. 아마 저보다, 여기 사는 수도형제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나이들어 70을 넘으니 동요童謠나 가요歌謠, 민요民謠의 맛을 알겠습니다. 산책시 아무도 없을 때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참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르니 애창곡愛唱曲만 해도 수십이 됩니다. 노래는 그대로 기도가 됩니다. 늦게서야 노래의 맛을 알아가니 이제 좀 철이드나 봅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수도형제들 역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아마 이렇게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한결같이 노래 많이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성가를 노래로 부릅니다. 노래중의 노래가, 기도중의 기도가, 시편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찬미와 감사의 시편 기도와 노래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정화하고 성화하니, 그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들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영혼들이 즐겨 부르는 시편 노래기도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나뷤의 노래인 시편입니다. 어느 나라나 가난한 민초民草들을 위한 민요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노래없이 그 절망의 엄혹한 현실을 견뎌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 어느 곳이나 전래되어온 있는 민요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시편중의 시편이, 노래중의 노래가 우리 그리스도교의 기도의 책이라 불리는 수천년동안 면면히 계속 불려지고 있는 시편집입니다. 시와 기도가 노래가 하나 되어 고백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시편의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주님께 선사되는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 위로와 평화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영혼들을 참으로 부유하게 하는 시편노래기도 은총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에게 노래는 절대적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입니다. 도대체 노래없이, 기도없이 살아갈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은 인간의 본질이요 깊이 들여다 보면 가난한 영혼들이기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시편 노래기도는 그대로 영혼의 호흡이자 식이자 약이됩니다. 새삼 어릴적부터 아이들에게 좋은 시와 노래를 많이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시와 노래를 잃었기에 희망과 꿈을 잃어가는 참 가난하고 불쌍한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나뷤의 빛나는 본보기가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와 마리아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노래하는,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이런 한나에게 사무엘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선물로 주어졌으니 바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진리가 입증됩니다. 한나의 믿음과 사랑의 고백은, 거룩한 봉헌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아나뷤의 빛나는 모델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바로 복음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빛나는 예표가 됩니다. 하느님은 또 하나의 마리아 성모님같은 이런 한나와 같은 가난한 어머니들의 기도는 우선적으로 들어주십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노래는 바로 한나의 노래요 기도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노래로 한나의 입에 담아 내 노래로 부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시편에 각자 마음을 담아 바치는 수도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개인의 노래이자 가난한 모든 이들의 염원이 담긴 가난한 공동체의 노래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개인 고백에 이어지는 노래 가사를 보면 그대로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를 빼다 박은 듯 닮았습니다. 아나뷤의 노래는 계속 전승됨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바로 아나뷤의 빛나는 후예인 우리 가난한 수도자들이 2천년 동안 날마다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끊임없이 불러온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의 감사찬미에 이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에 베푸신 하느님의 위업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표현하는 공동체의 노래가 됩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노래를 마리아 성모님의 입에 담아 성모님과 함께 부르는 아나뷤의 노래입니다. 혼자 부르라 있는 노래가 아니라 함께 부르라 있는 노래입니다. 혼자 구원이 아니라 함께 구원입니다. 아마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노래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가난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아나뷤의 후예들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노래의 힘,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난한 이들 아나뷤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요, 가난한 빈 마음, 빈 손으로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시고 주님의 힘으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
231222. 12월 22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굽어보시는 하느님과 함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나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나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나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나는
그다지
잘나지 않습니다
크지도
높지도
잘나지도 않은
나를
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맘으로
느껴봅니다
나는
참으로
작지 않습니다
나는
참으로
낮지 않습니다
나는
참으로
못나지 않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