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삼매如如三昧
六根門頭不遊漢 不知來處忽靈知
每事諸境心無心 念念色色本三昧
<和翁>
육근
문두에
놀지 않는 놈
온 곳은
알지 못하나
홀연히 신령스럽게 아는 놈일세!
매사제 경
에마음이
무심해지면
생각 생각
두두 물물이
그대로 본 삼매일세!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근경상대즉식생기중根境相對則識生其中이라 했다,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상대相對하면 육식六識이 그 가운데서 생긴다고 했다, 눈(眼)은 색경色境을 만나면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耳)는 성경聲境을 만나면 이식耳識이 생기고, 코(鼻)가 향경香境을 만나면 비식鼻識이 생기고, 혀(舌)가 미경味境을 만나면 설식舌識이 생기고, 몸(身)이 촉경觸境을 만나면 신식身識이 생겨나고, 마음 뜻(意)은 법경法境을 만나면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빼놓고 우리 인식은 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초기 경전에 보면 생문 바라문이 찾아와서 어떤 것이 일체一切입니까? 묻자, 일체一切는 십이입처十二入處라고 대답을 하셨다, 바라문이 묻는 일체一切는 우주만법宇宙萬法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를 우리 인식 기관인 십이입처十二入處 눈, 코, 입, 혀, 몸, 의식과 색, 성, 향, 미, 촉, 법이 일체 전부라고 단언을 하셨다, 부처님의 세계관이 여기에 있다,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 하나로 돌아가는 종교다, 불교의 최상승 경전인 화엄경華嚴經도 핵심은 일심법계一心法界다, 마음 하나 깨닫자는 것이 불교다, 화 옹은 20대 후반에 부처님의 경전을 보다가 소금이 짜지 않다는 경구를 보고 식광識狂이 나버렸다, 우리가 먹는 소금이 짜지 않다는 말에 미쳐 버렸다, 백이면 백사람 천이면 천사람 다 물어보아도 다 짜다고 하는데 경전에서는 짜지 않다고 했으니, 그 말 듣고 어찌 미치지 않겠는가? 내가 가지고 인식하는 육근 육경 육식으로 분명하게 짜게 인식을 하는데 왜? 짜지 않단 말인가? 이 말 한마디에 크게 충격을 받아 크나큰 의문疑問이 생겼다, 그냥 대충 넘어가는 의문이 아니라 마음에 확 꽂혀 버렸다, 자나 깨나 그 의심이 마음자리에서 떠나지를 않아 화두 의단疑團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간 병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왜? 짜지 않단 말인가? 하고 한 생각에 몰입 집중하다 보니, 11일이 지나 버렸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왜? 짜지 않는고? 했는가? 화두話頭 일념一念이 되어 버렸다, 화두話頭는 다른것이 아니라, 모르면 모든 것이 다 話頭다,화두는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확 꽂혀야 한다, 생선 가시가 목에 탁 걸리듯이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이 탁 마음자리에 꽂혀야 한다, 의심하지 않아도 의심이 되고 들지 않아도 들어져야 화두독로話頭獨露가 된다, 대중처소는 간 병실 골방을 그냥 두지 않는다, 몸이 아픈 스님들이 쉬는 공간인데 누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으니, 난리가 난 것이다, 문 창호지를 찢고 문고리를 열어 들어와 보니, 화 옹이 앉아있는지라 어디가 아픈가? 왜 이렇게 굶고 있느냐? 묻고 묻는 질문만 많았다, 그때 심정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서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 답답도 해서 1,400고지 산행을 했다, 굶기를 열흘을 넘게 하였지만 의문疑問이 풀리지 않았으니 분심憤心이 나고 답답도 했다,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은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불광어자不狂語者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고 부처님의 인식은 참 인식인데 짜다고 느끼는 소금의 인식은 중생의 인식이라는 말인가? 이 둘 중에 하나는 잘못된 인식이 분명하다, 그래서 짜다고 느끼는 나의 인식에 대한 분노가 날 수밖에 없다, 아니 모르는 나로서는 당연한 부처님에 대한 참 인식이라는 말에 의심도 생겨서 오기와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그 분노 오기심으로 눈이 무릎까지 빠진 산을 올랐다, 800고지 정도 오르다 보니, 목이 심하게 말랐다, 그래서 눈을 두 손으로 한 움큼 쥐어서 입에 넣었다, 기갈감수飢渴甘水랄까? 천하일미天下 一味다, 꿀맛도 이런 꿀맛이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물맛은 처음 맡을 본 셈이다, 그 것도 눈(雪) 맛을 이렇게 맛이 있게 먹다 보니, 정상까지 오르면서 자꾸 눈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먹었던 눈맛 꿀맛이 아니라 들척지근 하다가 맨 나중에 먹었던 눈맛은 차디찬 눈 맛 뿐이었다, 아니 눈은 똑같은 눈 일터인데 눈 맛이 다른 것은 왜? 일까 하고 또 의문疑問이 생겼다, 그래서 처음 꿀맛이었던 800고지로 내려와서 그 눈을 맛을 보았다, 그런데 처음 꿀맛이었던 그 눈 맛이 아니라 차디찬 눈 맛이었다, 먹을 때마다 눈 맛이 달라지니 어떤 눈맛이 참 눈맛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내 육근 육경의 인식이 참 인식이라고 믿었던 생각이 와장창 다 무너져 버렸다, 멘붕 상태가 되어버렸다, 눈맛 하나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내 인식임을 그때 비로소 깨달게 되었다,식즉망識卽妄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 소회를 적은 게송이 위의 게송이다, 소금이 짜지 않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일수사관一水四觀으로 중생들의 업보견業報見을 타파打破하고 계신다, 일수사관은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도 한다, 물 하나를 넷으로 본다는 말씀이다, 인견수人見水, 어견당魚見堂, 아귀농혈餓鬼膿血, 천상보화天上寶貨다, 사람은 물을 물로 보고, 고기는 물을 집으로 보고, 배고픈 아귀는 먹는 음식 피로 보고, 천상에서는 금은보화로 본다는 말씀이다, 물이라는 하나의 경계를 이렇게 네 가지로 보는 것은 중생들의 세계는 업에 따라 보는 세계도 다르게 인식을 한다는 말씀이다, 바닷물이 사람같이 짜다고 느낀다면 바다 속에 살고 있는 고기들은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업보 따라 보는 세계도 다르게 인식을 한다는 말씀으로 소금이 짜지 않다는 말씀으로 사람들의 업견業見을 타파하시는 말씀인 셈이다, 그래서 중생계는 동업同業 별업別業으로 나누어 져서 업이 같은 동업同業이면 짜게도 느끼고(通味), 짜지 않게도(不通味)느낀다고 해서 중생계衆生界는 부사의 세계不思議世界라고 하셨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시골 재래식 변소 똥통에 꿈틀거리며 사는 똥 구더기들은 사람들이 느끼는 더럽다는 생각을 가지면 못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 사는 똥 구더기는 그 속에서 잘살고 있다,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다, 업業이 다르면(別業) 보는 세계도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정말 참 인식인가? 되돌려 회광반조 해 볼 일이다, 이렇게 허망한 우리 인식에 휘둘리지 않고 속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통찰하는 마음으로 무심 여여하게 사는 사람이 항상 삼매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얼 벗님들! 50년 전에 체득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적어본 글입니다, 코로나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모두 모두 예방수칙 잘 지켜서 무탈 건강들! 하십시오, 불기 2565년 1월 29일여여법당 화옹 합장,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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