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멸망, 요(거란) 개국, 고려(高麗) 개국
수(隋, 581~619년)의 문제(文帝) 양견(楊堅, 541~604년)이 581년에 북주(北周)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랐으며, 589년에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 진(陳,557~589년)을 멸망시켜 중국을 재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통일이란 남북조(南北朝)의 통일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화인민국 땅 동부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남북조(南北朝) 주요국의 도읍지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도읍지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그림 1] 북주, 북제, 남조 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추정지역
그런데 수(隋)는 문제, 양제 등 2대에 걸쳐 39년을 연명하다가 망했다. 수(隋) 양제(楊廣) 양광(楊廣, 569~618년)은 고구려를 세 차례(612년, 613년, 614년) 침공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내란으로 망하고 말았다.
내란을 일으킨 이연(李淵)은 당(唐, 618~907년)을 개국하였다.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정관(貞觀)의 치(治)(627~649년)'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내치를 잘했다고 하나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이어서 당(唐) 고종(高宗)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660년)시키고 고구려마저 멸망(668년)시켰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과 더불어 신라 땅까지 차지하려 하다가 신라와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당군(唐軍) 20만명은 675년 매소성(현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괴멸되었으며, 신라군은 군마 3만 380필을 노획하였고, 노획한 병장기(兵仗器)도 그와 같았다고 한다.
또 당(唐) 수군(水軍)은 676년에 기벌포(현 산동성 동평현으로 추정)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22회에 걸쳐 연거푸 패함으로써 수군(水軍)마저 패퇴하였다고 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고종 3년(678년)에 따르면, 그 당시 고종이 다시 군사를 발동하여 신라를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당(唐)의 시중 장문관(張文瓘)이 병들어서 집에 누워있다가 가마를 타고 들어와 아래와 같이 간하였다고 한다.
"지금 토번이 노략질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발동하여 서방을 토벌하는데, 신라가 비록 순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나, 아직은 변경(邊境)을 침범하지 않았으니, 만약 도 동방 정벌을 한다면, 신은 아마도 공적이건 사적이건 그 폐단을 이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따라 고종이 마침내 신라 정벌을 그쳤으나, 이틀 후 장문관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당(唐)이 무리해서 전쟁을 계속 끌고 나가다가는 나라의 존망을 우려해야 할 상황에 처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당(唐) 현종(玄宗, 712~756년) 시기에 '개원(開元)의 치(治)(713~741년)'라고 불리던 시기가 있었으나, 당(唐)은 20대 황제에 걸쳐 이어가다가 수많은 반란과 절도사들의 세력 갈등, 그리고 환관과 외척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결국 황소(黃巢)의 난(농민 반란, 875~884년)을 거쳐 절도사 주전충[朱全忠, 후량(後梁, 907~923년) 개국]에게 멸망 당했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8개 부족을 통합하므로써 916년에 거란(契丹, Khitan, 초창기 국명은 거란이었으나, 나중에 요라고 함)을 세우고 도읍지를 상경(上京) 임황부(临潢府)라고 불렀다.
상경 임황부는 현재까지 현재의 내몽골자치주 적봉시로 알려져 있지만, 위치가 변이된 것이며 본래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거란족은 부여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 부여성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남쪽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부여가 살던 땅에 거란족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즉, 부여의 금와왕이 흉노 호한야 선우와 동일 인물이며, 부여가 바로 흉노족임을 알 수 있는데, 흉노가 살던 곳에 거란이 외부에서 이주한 것이 아닌 이상, 흉노가 바로 거란이 아이겠는가?
다만, 시대 별로 사서(史書)에 써있는 종족의 명칭이 서로 다를 뿐이다.
한편, 『삼국사기』 궁예(弓裔) 열전에 따르면, 그 당시(요가 건국되던 시기) 궁예가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급하게 내어 모든 관료, 장수, 아전들과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으며, 부양(斧壤)과 철원(鐡圓)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국, 『삼국사기』 궁예(弓裔) 열전에 따르면, 왕건의 부히들이 왕건에게 폭군을 몰아내고 성군이 되시라고 아래와 같이 권했다고 한다.
"918년 여름 6월 장군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능산(三能山), 복사귀(卜沙貴),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의 젊었을 때 이름인데, 네 사람이 몰래 모의하고 밤에 왕건(고려 태조)의 사저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부당한 형벌을 마음대로 집행하여 처자를 살륙하고 신료를 죽이며, 백성은 도탄에 빠져 스스로 삶을 편안히 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시키고 지혜가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청컨대 공께서는 (폭군인 걸왕과 주왕을 몰아내고 왕이 된) 탕왕과 무왕의 일을 행하십시오.”
또 왕건의 부인 유(柳)씨가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왕건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고 손수 갑옷을 들어 왕건에게 바쳤다고 한다.
"인(仁)으로써 불인(不仁)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여 왔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저도 오히려 분발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뭇 사람들의 마음이 문득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호위하고 문을 나서면서 앞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었다!'고 외치게 하니, 이에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와 따르는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또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들이 또한 1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궁예가 이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에 미천한 차림으로 산림에 달아나 들어갔다가 곧 부양(斧壤)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916년에 거란(契丹, Khitan)이 세워진 지 2년 후인 918년에 고려(高麗, 918~1392년)가 건국되었다.
첫댓글 비치 님 8월21일 월요일
상큼하고 그윽한 하루소망사랑의공동체
〃´`) 카페사랑 감사 드립니다.
카페활성화
,·´ ¸직장과 가정에 하느님 은총 충만 하시길..,·´`)
(¸,·´ (¸
좋은글좋은정보 감사합니다
*..∩_∩ ♡ ∩_∩ 오늘도 많이 웃고
( ∇ ) ( ∨ )..* 많이 많이 행복한날되세요
행복과사랑,,소망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
귀한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