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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자이사(難者二事)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라는 뜻으로,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다.
難 : 어려울 난(隹/11)
者 : 놈 자(耂/5)
二 : 두 이(二/0)
事 : 일 사(亅/7)
유관현(柳觀鉉)은 1759년 필선(弼善)의 직책으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서연(書筵)에서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주역을 가르쳤다. 사도 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있을 때는 흉년의 기민(饑民) 구제 등 볼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金樂行)이 제문을 지어 보냈다. 길어 다 읽지는 못하고, 내용 중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難者二事)를 꼽은 대목만 간추려 읽는다.
又竊論之, 難者二事.
또 가만히 논하려니, 어려운 것 두 가지라.
先貧後富, 人鮮好義.
가난하다 부자 되면, 의리 좋아하는 이 드물다네.
甚或惜金, 以弟喪歸.
심하게는 돈 아끼다, 아우 죽여 돌아오지.
聞公少時, 蔬糲充飢.
들으니 공께서 젊었을 때, 푸성귀와 멥쌀로 허기 채워,
勤其四體, 旣有旣完.
부지런히 힘을 써서, 살림이 갖춰졌다네.
(중략)
窮士得意, 鮮守平素.
궁한 선비 뜻 얻으면, 평소 모습 지키는 이 드물다네.
有尹京兆, 不念龍具.
공이 한성판관이었을 때, 가난을 괘념찮았지.
方公仕宦, 依舊田家.
벼슬길에 나가서도, 농가에 그대로 살았고,
馹騎在門, 園有農歌.
역말이 문에 서도, 농사 노래 들렸었네.
還山之期, 指以播麥.
산으로 갈 기약 두어, 보리 파종시키셨고,
談桑說麻, 野老爭席.
뽕과 삼을 말할 적엔, 시골 농부 앞다퉜지.
風致超然, 可警浮薄.
풍치가 초연하여, 경박한 이 경계로 삼을 만했네.
是公之高, 人或不察.
이것이 공의 우뚝한 점, 사람들은 잘 모르지
이 제문에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로 꼽은 두 가지는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는 것이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 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 글 속에 돈을 아끼려다 동생을 죽여 돌아온다는 말은 전국시대 월나라 도주공(陶朱公)의 고사가 따로 있다.
通政大夫刑曹參議陽坡柳公行狀
통정대부 형조참의 양파 유관현(柳觀鉉) 행장에서
- 대산 이상정
(前略)
계유년(1753, 영조29)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다. 경성은 북쪽 변경의 큰 진(鎭)으로 풍속이 무예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에는 힘쓰지 않았다. 공이 고을의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학사(學舍)에 모아 놓고 넉넉히 먹이면서 예업(藝業)을 익히게 하고 격려하고 훈계하니 흥기되는 자가 많았다. 여가가 있는 날은 전야(田野)에 순행(巡行)하여 농사일을 권면하고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전부 견감하였다.
옛 규례에 초하루와 보름에 남정(男丁)을 점검하여, 마음대로 출타한 자가 있으면 벌로 지포(紙布)를 바치게 하였는데, 공이 이 제도를 완전히 없앴다. 무포(巫布)의 승수(升數)를 경감해 주고, 어량(魚梁)과 시전(市廛)과 행려(行旅)와 상고(商賈)의 세금을 철폐하였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관에서 쓰는 비용을 절약하니, 몇 년 안에 일이 간소해지고 재정이 갖추어져서 관고(官庫)가 차고 넘쳤다.
병사(兵使)와 북평사(北評事)가 한 성(城)에 함께 거주하면서 번거롭고 바쁜 일을 처리하니, 모든 사람이 공의 청렴함과 간소함에 감복하였다. 줄이고 없앤 것이 많았으므로 공을 보좌하는 사람들 역시 두려워하고 움츠러들어 감히 가렴주구를 하지 못하였다.
을해년(1755, 영조31)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함경도가 특히 심하였다. 감사가 임금께 아뢰어, 잘 다스리는 고을 수령은 한 해 더 맡기기를 청하였고, 공은 이 때문에 임기가 끝났지만 돌아올 수 없었다.
미곡 천여 섬을 자비(自備)하고 군영(軍營)에 청해서 또 얼마간의 곡식을 얻어, 읍에서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 구휼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하니, 이 지역의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났다.
하루는 구휼하는 일을 감독하는 사람이 공을 만나기를 청하여 “남도(南道)의 기근도 관북(關北)과 다름없습니다. 성주(城主)께서 이미 봉록을 털어 백성의 생명을 살리셨으니, 또 인(仁)이 친족에게 미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구휼청(救恤廳)에 따로 비축한 것이 조금 있으니, 넉넉히 빨리 보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녹봉 역시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그것을 사사로운 재물로 보아 가족을 먼저 구휼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자년(1756) 봄 판관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 온 고을의 사민(士民)들이 길을 메우고 송별하였는데, 기민(飢民)으로서 구휼 받은 자들이 나름대로 조금씩 곡식을 모아 길가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길을 떠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행차가 귀문관(鬼門關)에 당도하니 기민이었던 장정 수십 명이 뒤따라 오며 “밝으신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었으니, 가마꾼으로 넣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여기 가마꾼이 있으니, 너희는 수고할 필요 없다”라고 하였지만 기민들이 가마꾼들을 밀치고 다투어 가마채를 멨고, 평탄한 길에 나와서 공이 말에 오른 다음에야, 눈물을 흘리며 절하여 하직하고 떠나갔다.
(下略)
난자이사(難者二事)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라는 뜻으로,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삶이 다르니 어려움을 느끼는 것도 각각 다를 터이지만 공감이 가는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고, 또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에 나온다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모두 어려운 일임은 분명한데 모두에 꼭 들어맞는 것일 수는 없다. 사람이 하기 어려운(難者) 두 가지 일(二事)이라 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 柳觀鉉(유관현, 1692~1764)을 떠올리게 된다.
한문학자 정민 교수의 일간지 연재물을 모아 출간한 ‘惜福(석복)’에 실리고서 이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유관현은 思悼世子(사도세자)를 侍講院(시강원)에서 교육하는 弼善(필선)을 역임하고, 목민관으로 있을 때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감면해 선정을 베푸는 등 치적이 많았다.
유관현이 세상을 뜨자 효행이 지극하고 문장이 뛰어난 후학 金樂行(김낙행)이 업적을 기려 제문을 지어 보냈다. 그의 호를 딴 문집 ‘九思堂集(구사당집)’에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들며 유관현이라 능히 할 수 있었다고 예찬한다. 중간에 나오는 성어의 그 부분은 이렇다.
‘가만히 논하려니, 어려운 것 두 가지(又竊論之 難者二事/ 우절론지 난자이사)’라 하면서 첫 번째를 꼽는다. ‘먼저 가난하다가 뒤에 부자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물다(先貧後富 人鮮好義/ 선빈후부 인선호의)’며 어릴 때 가난하게 컸어도 벼슬에 있을 때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어려운 백성을 구휼했다고 칭송했다.
두 번째는 ‘궁한 선비 뜻 얻으면 평소 모습 지키는 이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 궁사득의 선수평소)’고 들고, 벼슬길에 나가서도 농가에 그대로 살았고 뽕과 삼을 말할 때는 농부 못잖았다며 풍치가 초연하여 경박한 이들이 경계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재산이 늘어나거나 지위가 높아졌을 때 지난날의 미천하거나 어렵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처음부터 잘난 듯이 뽐내는 사람이 많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비아냥거림을 당한다. 이것 말고 인터넷에서 어려운 일이라며 떠도는 유머가 있다.
첫 번째가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 그리고 남의 돈을 내 호주머니에 넣는 일이라며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집사람이란다. 남을 설득하고 제 생각을 알리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중년 이상의 남성들에겐 공감할 듯하다.
베풀지 않는 자의 부유함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어질다'는 뜻을 갖고 있는 '현(賢)'자는 '어질 현(臤)'과 '조개 패(貝)'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기 이전 고대 중국에서는 화폐 대용으로 조개를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개는 재 화(財貨) 혹은 재물(財物)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질 현(賢)’자의 음(音)을 나타내는 ‘현(臤)’자는 어질다는 뜻 외에 ‘구휼하다’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질 현(賢)’ 자는 많은 재화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한다고 해서 ‘어질다’는 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중국 고대의 거부(巨富)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화식열전(貨殖列傳) 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화식열전을 읽어보면, 앞서 설명한 '어질 현(賢)'자의 의미에 딱 어울릴 만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상업의 귀재(鬼才)라고 불리는 도주공(陶朱公)입니다. 도주공의 본래 이름은 범려(范蠡)였습니다.
사기 중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을 살펴보면, 오나라 왕 부차에게 쫓겨 회계산에서 큰고통과 치욕을 겪은 월나라 왕 구천이 오직 부국강병을 이루어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품고 범려와 그의 스승 계연을 중용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범려와 계연은 구천에게 세상의 물품과 금전을 마치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부국강명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진언했습니다. 범려와 계연의 계책과 방법에 따라 10여년 동안 나라를 경영한 결과, 월나라는 농업과 상업과 목축업이 크게 부흥해 경제는 부유해지고 군대는 강성해졌습니다.
마침내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당한 지난날의 치욕을 되갚고, 더 나아가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패자(覇者)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구천의 성공은 모두 범려와 그의 스승 계연의 계책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범려는 구천이 자신과 스승 계연이 세운 계책과 방법 중 다섯 가지를 사용해 뜻을 이루었으니, 이제 자신을 위해 그 계책과 방법을 써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부귀와 권력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고 훌쩍 월나라를 떠났습니다. 그러고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천하 강호를 돌아다녔습니다. 제나라로 가서는 치이자피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서는 주공(朱公)이라 했습니다.
범려가 도 땅으로 들어간 까닭은, 그곳이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 여러 나라와 쉽게 교통하고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상업의 요충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도 땅에 머물면서 도주공으로 재차 변신한 범려는 시세의 흐름에 맞는 상품 거래와 물자 유통으로 엄청난 이익을 거두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도주공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 않고 단지 거래 상대를 골라서 자연의 시세에 맡긴 데 있다.”
도주공은 시장의 흐름(유행)과 사람의 소비 심리를 잘 읽는 재능과 지혜를 갖춘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물건을 팔려고 노력하지 않 아도 저절로 물건이 팔리게 하는 상술(商術)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도주공은 ‘상업의 귀재이자 상술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도주공은 19년 동안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천금을 벌었는데, 그중 두 차레는 천금을 가난한 친구들과 먼 형제 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한 까닭은, 평소 그가 “사람은 부유해지면 마땅히 그 덕(徳)을 즐겨 실천해야 한다”는 옛 성인의 가르침을 뻣속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도주공은 부유하면서도 황금보다 사람이 더 귀한 줄 알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덕을 베풀면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부유하면서도 황금 귀한 줄만 알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색하거나 교만하면 반드시 해로움과 재앙을 입게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고 나누는 부자는 인심을 얻기 때문에 매사가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황금보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덕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부유함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황금 귀한 줄만 알 뿐 베풀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큰 불만과 비난과 원망을 사기 때문에 부유함을 절대로 오래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한 철학을 갖고 있던 도주공은 막대한 재물을 모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 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부자(富者)라는 명성뿐만 아니라 현자(賢者)라는 명예까지 얻었습니다. 세상에 부자라는 명성을 얻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현자라는 명예를 얻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부자라는 명성에다가 현자라는 명예까지 얻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이닙니다.
도주공은 많은 재화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한다는 ‘어질 현(賢)’ 자의 뜻에 따랐습니다. 그래서 중국 고대 인물 중 거의 유일하게 부자이면서 현자라는 명성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부(富)와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베푼다는 ‘어질 현(賢)’ 자에 담긴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고 힘써 실천해야 합니다.
도주공 범려, 상인의 신으로 추앙받다
범려가 어디에서 출생하고 어떻게 월에서 벼슬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래 출생지는 초나라의 출신으로, 고향에서는 미치광이로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대부 문종의 눈에 띄어 월나라에서 구천을 섬겼다. 다른 기록(월절서)에는 초나라를 섬기던 문종의 눈에 띄어 초나라에 출사했다가 관직을 버리고 오나라에 출사하려고 했지만, 오나라는 오자서가 있기에 월나라로 가서 구천을 섬겼다고도 한다.
무협지 단골소재 월녀검(越女劍)의 주인공 발탁
명재상 오자서, 명장 손무 콤비를 결국은 꺾어버린 입지전적 인물이 바로 범려다. 구천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월에 돌아왔을 때 범려는 널리 인재등용에 힘을 쏟았다. 남여의 구분을 두지 않았는데, 칼을 잘 쓰는 월녀(越女)를 초빙해 무술교두로 삼았다. 초나라 출신의 활 제작 기술자 진음(陳音)을 등용하기도 했다.
농업과 길쌈을 장려하여 구천이 몸소 경작을 하고, 왕후가 직접 길쌈을 하는 등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민심 수습과 경제 안정을 위해 세금 감면과 상류층에게 고기 소비를 줄이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도록 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게 했다. 인구 증가를 위해 남자아이를 출산하면 술 두병과 개 한마리를 상으로 내리고,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술 두병과 돼지를 상으로 내리는 등의 정책을 폈다.
월은 제ㆍ초와는 친교를 맺고, 진(晉)을 상국으로 모시며 주변의 적대세력을 우호세력을 바꿔나가, 오를 고립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오에게는 무조건 무릎을 꿇어 오왕부차의 교만을 계속 부채질 했다. 태재 백비에게는 계속 뇌물을 바쳐, 오왕부차와 오자서를 이간질, 결국은 둘 사이를 떼어놓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월왕구천은 오자서 자결(BC 485년) 이후 오를 공격해 태자 패사(BC 482년), 입택(笠澤)에서 오군 격파(BC 478년), 오(吳)의 수도 고소성(姑蘇城) 포위 공격(BC 475년), 오왕부차 투항, 자결(BC 473년)로 와신상담의 기나긴 복수극을 끝맺음 한다.
재상의 자리 물리치고 천금을 주위에 나눠줘
월에서 떠나 제나라에 도착한 범려는 자신을 치이자피(鴟夷子皮, 술고래)라고 일컬으며, 두 아들과 농사를 지으며 장사도 해서 큰 부자가 됐다. '치이자피'라는 이름은 오나라의 공신이었으나 결국 모함에 의해 죽음을 당한 오자서의 시신이 말가죽으로 만든 술부대에 담겨 물에 던져진 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제에서 큰 부를 축적하자, 제평공(平公)이 범려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범려는 재상의 인장을 돌려주고 재산을 지인들에게 나눠 주며 제나라에서 도주한다. 범려는 제나라를 떠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정도(定陶)로 이주,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했다.
범려는 이름과 성을 바꾸어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부르고, 도(陶)로 가서는 주공(朱公)이라 했다. 주공은 도가 천하의 중앙으로 사방 여러 나라로 통하여 재물의 교역을 할 곳이라 판단하고 상업을 경영하고 물자를 축적하였다. 시세의 변동에 따라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고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생업을 잘 하는 자는 능히 사람을 선택하여 시세(時勢)에 맡긴다. 19년 동안에 세 번 천금을 벌고 두 번이나 풀어서 가난한 벗과 소원한 형제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것이 이른바 부유하면 그 덕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자다. 후년에 늙어서는 자손에게 맡겼는데 자손이 업을 닦고 이것을 늘려서 드디어 거만(巨萬)의 재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부를 말하는 자는 모두 도주공으로 일컫는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부호의 행적을 더듬으며, 범려를 가장 이상적인 상인으로 우러른다.
범려, 아들을 죽게 방치하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조격?
범려의 행적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도주공 시절 범려는 오늘날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원조라 볼 수 있는 '천금을 가진 부자의 자식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천금지자 불사어시 千金之子 不死於市)'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범려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그중 차남이 초나라에서 살인죄를 지어 옥에 갇혀 사형의 형벌을 받을 위험에 처한다. 범려는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막내 아들에게 거금을 주면서 초나라로 가서 차남을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장남이 집안의 큰일을 자기에게 맡기지 않는다고 반발하자, 범려는 마지못해 장남을 보낸다. 범려는 장남에게 자신의 지인을 찾아가 돈을 갖다주고 구명할 것만 요청하고 논쟁은 결코 해서 안된다고 단단히 당부한다.
장남은 초나로 가서 부친의 지인을 찾아가 범려가 시킨대로 거금을 주며 구명을 청하자 장선생은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장남에게 빨리 떠나라고 엄명한다. 범려의 지인은 청렴결백하고 신망이 높은 관리였는데 부탁을 듣는다는 징표로 돈을 받았을 뿐이고 부인에게 돈을 그대로 두었다가 일이 성사된 후에 도주공에게 돌려주라고 한다.
지인은 초왕에게 나라에 흉한 조짐이 있으니 덕을 베풀어야 한다며 대사면을 권하고, 초왕은 대사면을 받아들인다. 문제는 범려의 장남이 초를 떠나지 않고 별도로 관리에게 뇌물을 주면서 동생의 구명운동을 하던 중 초의 대사면령 정보를 들으면서 벌어진다.
장남은 부친의 지인에게 준 돈이 아깝다며, 월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한다. 지인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초에 남아서 별도의 계책을 진행한 장남의 처사에 분개, 초왕에게 대사면에서 도주공의 차남을 빼도록 만든다. 결국 초왕은 차남을 먼저 처형하고 대사면령을 내려서 장남은 차남의 시신을 가지고 월나라에 돌아오고 범려의 가족들은 상심한다.
그때 범려가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큰 애는 돈을 버는 고생을 같이한탓에 돈을 쓸줄 모르고, 막내는 부유한 때 태어나서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쉽게 잘 쓴다. 그래서 내가 막내를 보내려고 한 것인데 큰 애가 우겨서 가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슬퍼할 것도 없고 나는 밤낮으로 둘째 애의 시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 難(어려울 난, 우거질 나)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새 추(隹;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근; 난)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진흙 속에 빠진 새가 진흙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뜻이 합(合)하여 '어렵다'를 뜻한다. 본래 菫(근)과 鳥(조)를 결합한 글자 형태였으나 획수를 줄이기 위하여 難(난)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새의 이름을 가리켰다. ❷형성문자로 難자는 ‘어렵다’나 ‘꺼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難자는 堇(진흙 근)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堇자는 진흙 위에 사람이 올라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근→난’으로의 발음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難자는 본래 새의 일종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일찌감치 ‘어렵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새를 뜻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새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가 왜 ‘어렵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일까? 혹시 너무도 잡기 어려웠던 새는 아니었을까? 가벼운 추측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서 難(난, 나)은 (1)어떤 명사(名詞) 아래에 붙어서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렵다 ②꺼리다 ③싫어하다 ④괴롭히다 ⑤물리치다 ⑥막다 ⑦힐난하다 ⑧나무라다 ⑨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⑩공경하다, 황공해하다 ⑪근심, 재앙(災殃) ⑫병란(兵亂), 난리(亂離) ⑬적, 원수(怨讐) 그리고 ⓐ우거지다(나) ⓑ굿하다(나) ⓒ어찌(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쓸 고(苦), 어려울 간(艱)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쉬울 이(易)이다. 용례에는 어려운 고비를 난국(難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난문(難問), 어려운 문제를 난제(難題), 전쟁이나 사고나 천재지변 따위를 당하여 살아 가기 어려운 처지에 빠진 백성을 난민(難民), 풀기가 어려움을 난해(難解), 일을 해 나가기가 어려움을 난관(難關), 무슨 일이 여러 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음을 난항(難航),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을 난색(難色), 어려움과 쉬움을 난이(難易), 견디어 내기 어려움을 난감(難堪), 바라기 어려움을 난망(難望), 처리하기 어려움을 난처(難處), 잊기 어렵거나 또는 잊지 못함을 난망(難忘), 어떤 사물의 해명하기 어려운 점을 난점(難點), 뭐라고 말하기 어려움을 난언(難言), 병을 고치기 어려움을 난치(難治), 이러니 저러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시비를 따져 논하는 것을 논란(論難),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궁핍함을 곤란(困難), 뜻밖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을 재난(災難), 힐문하여 비난함을 힐난(詰難),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난(苦難), 위험하고 어려움을 험난(險難), 공격하기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아니하는 난공불락(難攻不落),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난망지은(難忘之恩),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난형난제(難兄難弟) 등에 쓰인다.
▶️ 者(놈 자)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者(자), 者(자)는 동자(同字)이다. 원래의 자형(字形)은 耂(로)와 白(백)의 합자(合字)이다. 나이 드신 어른(老)이 아랫 사람에게 낮추어 말한다(白)는 뜻을 합(合)하여 말하는 대상을 가리켜 사람, 놈을 뜻한다. 또는 불 위에 장작을 잔뜩 쌓고 태우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❷회의문자로 者자는 ‘놈’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者자는 耂(늙을 노)자와 白(흰 백)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者자는 耂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노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者자의 갑골문을 보면 이파리가 뻗은 나무줄기 아래로 口(입 구)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탕수수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즙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탕수수’를 뜻했었다. 후에 者자는 ‘놈’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者(자)는 (1)어떤 명사(名詞) 아래에 붙여, 어느 방면의 일이나 지식에 능통하여 무엇을 전문적으로 하거나 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임을 뜻하는 말 (2)사람을 가리켜 말할 때, 좀 얕잡아 이르는 말로서, 사람 또는 놈 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놈, 사람 ②것 ③곳, 장소(場所) ④허락하는 소리 ⑤여러,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⑥이 ⑦~면(접속사) ⑧~와 같다 ⑨기재하다, 적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병을 앓는 사람을 환자(患者),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글을 쓰거나 엮어 짜냄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기자(記者),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을 학자(學者), 책을 지은 사람을 저자(著者), 살림이 넉넉하고 재산이 많은 사람을 부자(富者), 힘이나 기능이 약한 사람이나 생물 또는 집단을 약자(弱者), 그 사업을 직접 경영하는 사람을 업자(業者), 달리는 사람을 주자(走者), 어떤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을 신자(信者), 어떤 일에 관계되는 사람을 관계자(關係者), 물자를 소비하는 사람을 소비자(消費者),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을 근로자(勤勞者), 해를 입은 사람을 피해자(被害者),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을 노동자(勞動者), 희생을 당한 사람을 희생자(犧牲者), 부부의 한 쪽에서 본 다른 쪽을 배우자(配偶者), 그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사람을 당사자(當事者), 권리를 가진 자 특히 선거권을 가진 자를 유권자(有權者),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근묵자흑(近墨者黑), 붉은빛에 가까이 하면 반드시 붉게 된다는 근주자적(近朱者赤) 등에 쓰인다.
▶️ 二(두 이)는 ❶지사문자로 弍(이)는 고자(古字), 弐(이)는 동자(同字)이다. 두 개의 손가락을 펴거나 나무젓가락 두개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둘을 뜻한다. 수의 둘을 나타내는데 옛 글자 모양은 아래 위가 거의 같은 길이로 썼다. 위를 조금 짧에 쓰면 上(상; 위)이란 글자의 옛 모양이 된다. ❷상형문자로 二자는 ‘둘’이나 ‘둘째’, ‘두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二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나열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를 일렬로 늘어놓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러니 二자는 두 개의 나무막대기를 나열하여 ‘둘’이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한자에는 획이 나란히 나열된 글자가 있어서 간혹 二자가 쓰일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모양자 역할만을 할 뿐 뜻은 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二(이)는 수(數)의 이름. 둘. 이(貳) 등의 뜻으로 ①두, 둘째 ②두 번 ③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④두 가지 마음 ⑤둘로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두 겹이나 중복을 이중(二重), 검은 털과 흰 털을 이모(二毛), 벼슬의 둘째 품계를 이품(二品), 재물을 아껴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을 이간(二慳), 두 사람을 이인(二人), 두 층으로 지은 집을 이층(二層), 다시 없음이나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이중으로 하는 것을 이중적(二重的), 차원의 수가 둘인 것을 이차원(二次元), 기구나 조직 문제 따위를 둘로 함 또는 둘이 됨을 이원화(二元化), 한 가지 사물에 겹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을 이중성(二重性), 군대의 가장 아래 계급의 사병을 이등병(二等兵), 한 경작지에 일 년에 두 가지 농작물을 차례로 심어 거두는 일을 이모작(二毛作), 두 가지 규율이 서로 반대된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 부부 사이의 정을 이성지락(二姓之樂), 성이 다른 남자와 여자가 혼인을 하는 일을 이성지합(二姓之合), 열여섯 살 전후의 젊은이로 젊은 나이를 이팔청춘(二八靑春), 절친한 친구 사이를 이인동심(二人同心), 센 털이 나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뜻으로 32살을 이르는 말을 이모지년(二毛之年), 때를 놓침으로 절망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이십오시(二十五時), 둘 중에서 하나를 가려 잡음을 이자택일(二者擇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서로 맞닿은 쪽의 발목을 묶어 세 발처럼 하여 함께 뛰는 경기를 이인삼각(二人三脚) 등에 쓰인다.
▶️ 事(일 사)는 ❶상형문자로 亊(사), 叓(사)는 고자(古字)이다. 事(사)는 깃발을 단 깃대를 손으로 세우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역사의 기록을 일삼아 간다는 데서 일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事자는 ‘일’이나 ‘직업’, ‘사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이 등장했던 시기 使(부릴 사)자와 史(역사 사)자, 事(일 사)자, 吏(관리 리)자는 모두 같은 글자였다. 事자는 그중에서도 정부 관료인 ‘사관’을 뜻했다. 사관은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事자는 제를 지내고 점을 치는 주술 도구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후에 글자가 분화되면서 事자는 ‘일’이나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정의하기로는 史자는 ‘일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吏자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事자는 ‘직책’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事(사)는 일이나 볼일 따위를 이르는 말(~를, ~을 다음에 쓰이어)이나 또는 일의 뜻을 나타냄의 뜻으로 ①일 ②직업(職業) ③재능(才能) ④공업(工業), 사업(事業) ⑤관직(官職), 벼슬 ⑥국가(國家) 대사(大事) ⑦경치(景致), 흥치(興致) ⑧변고(變故), 사고(事故) ⑨벌(옷을 세는 단위) ⑩섬기다 ⑪부리다, 일을 시키다 ⑫일삼다, 종사하다 ⑬글을 배우다 ⑭힘쓰다, 노력하다 ⑮다스리다 ⑯시집가다, 출가하다 ⑰꽂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事實), 뜻밖에 일어난 사고를 사건(事件),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사태(事態)평시에 있지 아니하는 뜻밖의 사건을 사고(事故),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사정(事情), 모든 일과 물건의 총칭을 사물(事物), 일의 전례나 일의 실례를 사례(事例), 일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운영되는 지속적인 활동이나 일을 사업(事業), 일의 항목 또는 사물을 나눈 조항을 사항(事項),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일의 안건을 사안(事案),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 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사사건건(事事件件), 사실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무근(事實無根), 사태가 급하면 좋은 계책이 생김을 사급계생(事急計生), 일정한 주견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 사람을 붙좇아 섬기면서 의지하려는 사상을 사대사상(事大思想), 자주성이 없어 세력이 강대한 자에게 붙어서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는 경향을 사대주의(事大主義)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