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문학기행 베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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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 좋은 계절/ 오산문협 문학기행/충북 진천/2024. 10. 26
꽃사과/문숙
노인정 화단 앞 꽃사과
잎 진 가지에 종종 매달려 있다
푸른 한 철
누군가를 향해 내보였던 가슴에 주름이 졌다
붉었다 식어버린 몸 쪼글쪼글하다
마른 몸에서 댕댕 종소리가 난다
뒤늦게 자신을 보아버린 쓸쓸한 몸짓
노인정 배경이 되어
아파트 그늘을 덮고 있다
하얀 서리를 맞으며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지워가는 꽃사과
꽃이라는 이름의 저 마른 열매들
뒤집힌 팬티 / 김연종
뒤집힌 팬티를 본
아내의 눈이 뒤집혔다
황당하게 뒤집힌 스케줄로
이른 아침 퇴근하던 참이었다
핸드폰과 가방이 뒤집어지고
옥신각신 서로를 뒤집으며 살펴보니
팬티만 입고 어슬렁거리는
아들놈의 팬티 또한 뒤집혀 있다
이윽고 서랍장이 뒤집히고
서랍 속의 가지런히 정돈된 팬티들
모두가 뒤집혀 있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뒤집힌 아내와 나는 서로를 뒤집었다
속과 겉이 애매한 팬티들도
한참을 내외하고 나서야 본 모습으로 뒤집어졌다
안과 밖의 모호함이여
사랑과 불륜의 아슬아슬함이여
아무리 뒤집으려고 해도 뒤집어지지 않는.
주름/신달자
저 깊은 계곡
절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
투덜대지 않고 조신하게
네 생의 발자국이 파고 간
파도
이제 잠잠한 굴곡의 깊이에서
인자하여라
편안한 침묵의 골에 누워도 좋겠다
모든 걸 내어 준 자리에 깊게 파이는
물살
바람에도 떠내려가지 않았다
일생
농사지은 생의 볏단을
여기 쟁여놓은 것 같은
저 얼굴에 접힌 주름
희열과 안락의 깊이라도 되는 듯
부신
시간 위에 얼비치는 무늬
가까이 봐도 허물이 아니다
출렁이는 슬픔/박수봉
비 내리는 연못에 앉아 나는
한 사람을 지우고 있다
연잎은 고인 물을 차르르 쏟아내며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다
연잎에 고이는 빗물처럼
마음을 파고 앉은 슬픔을 들여다보면
눈자위 붉게 번지는 사람이 있다
연잎처럼 시원하게 쏟아버리지 못하고
나는 그 사람을 퍼내느라 늙어버렸다
울어도 젖지 않는 마음 곁에서
꽃이 진 자리를 아프게 만지고 있다
아내의 말씀/최 재 경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바람 좀 쏘이고 온다 했더니, 피우러 가는겨, 쐬러 가는겨? 물었다
그러더니, 여기 집에는 바람 안 부나? 거기 만 바람 부나?
그래서,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
모임에 좀 다녀온다 했더니, 거기 가면 돈이 생기는 겨? 물었다
진드감치 집 일이나 하고, 돈 벌 궁리나 하란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돈 벌 궁리를 하기로 했다
나도 얼마 전 까지 머리를 묶고 살았지만
머리 묶은 시인은 집에 데려오지 말란다,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아직 말을 못 했다
건강검진 날 잡았으니, 한 달 간 술 담배 싹 끊으란다
고개 만 끄덕였더니, 대답을 하란다
그래서, 그리 한다고 대답을 했다
이장 그만 둔 것도, 순전히 그 사람 뜻이었다
이런저런 말 듣기 싫으니 그만 두라 해서였다
참지 못하고 씅빨을 확 부리면, 나 보다 목소리가 더 커진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데로 말 잘 듣고 살기로 했다.
벌레 생긴다고, 멀쩡하게 뻗어 오르는 담쟁이를 자르고 있다
아무 소리 못했다.
진신사리/홍사성
평생 쪽방에서 살던 중국집 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도와주는 고아들 명단과
장기 기증 서약서를 남겼습니다
10월/이시영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 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붓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송년회/황인숙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아마도)
<출력 제본/안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