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8
8월10일[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연중 제18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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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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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ni-6Wytz-k
(신기훈 그레고리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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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어야만 삽니다!>
여름 캠프 성수기를 맞아 저희 피정 센터도 대목입니다. 한 본당 초중고 학생들이 신나게 젊음을 발산하고 떠나자 마다, 또 다른 사회복지시설 청소년들이 들어와 행복하게 지내는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다 흐뭇해집니다.
아이들을 위해 불볕더위에 장작불을 피우고, 엄청난 양의 삼겹살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소나무 장작의 상상을 초월하는 화력에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지만, 맛있다 하면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더위가 더위가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연세가 만만치 않은데도 아직도 매일 같이 이런저런 일이 산더미처럼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내가 누군데, 하고, 어깨에 딱 힘주고 살아간다면, 청소며 빨래며, 불피우는 일이며, 고기 굽는 일이 엄청난 고통이요,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낮추고, 나를 죽이고, 그 자리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되살아나시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작은 힘듦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지침을 한 가지 과제로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복음 12장 24~26절)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죽으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덧없이 짧은 이 세상은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정녕 중요하고 큰 것을 얻으려면, 스쳐 나가는 작은 것은 아쉽지만 떠나보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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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DP41M6CX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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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가져오라는 황제의 말에 불순종하여 빨갛게 달궈진 석쇠에 순교하였습니다. 황제를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자유로운 시대에는 정말 아무도 섬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섬길 것, 당신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섬기는 대상이 사는 곳에 함께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처럼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내 목숨을 내어주지 않는데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위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여자를 위해 에너지를 씁니다. 에너지를 쓴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는 대상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끔 맹금류들이 폭포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빙하에 얼어붙은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다가 그만 그 얼음에 붙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런 맹금류는 자신의 에너지를 먹는 것을 위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섬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인간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어쩌면 대부분이 그런 우상을 섬깁니다. 누구든 자신이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생명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섬기는 것에 내가 먹히고 만다는 것의 좋은 예가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시골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기린과 코뿔소를 포함하여 20여 종의 이국적인 동물을 키우는 농부인 마리우스 엘스(Marius Els)는 친구와 가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완용 하마 험프리를 마치 말처럼 타고 다니곤 했습니다. 험프리가 가끔 마리우스가 자신의 등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표현을 했음에도 그는 그냥 장난을 치는 것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짐승이 가장 좋아하는 사과를 먹이고 이빨을 닦아주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마음속으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신을 하마의 입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마는 매년 약 500명의 인간을 죽이는 맹수입니다. 이 수치는 사자, 코끼리, 표범, 코뿔소, 버팔로가 인간을 죽이는 숫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험프리는 아들 같은 존재다. 내가 부르면 달려온다. 또한 나는 그와 함께 수영할 수 있다. 험프리는 내가 등에 올라타도록 허락했고 나는 그를 말처럼 탄다. 나는 험프리와 함께 수영하는 게 좋다. 위협적인 건 알지만, 난 마음속으로 험프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괜찮다.”
이 인터뷰를 마친 얼마 뒤 마리우스는 험프리에게 공격당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얼마의 사체만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이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이 우리를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의 뱃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것들의 운명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라면 나도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것에게 자신의 목숨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위하여’ 사는 대상, 섬기는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 나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섬기면 그 대상은 나에게 먹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먹히는 그 대상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자기를 봉헌하고 그 대상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하나의 선택입니다.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의 바탕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투자입니다. 투자는 불확실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투자해야만 한다면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이언은 딸 미스티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란 딸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딸은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이런 편지와 함께 선물상자를 내밉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남자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라이언은 약간 실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라고 먼저 불러주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타워즈 공주처럼 머리를 묶어주셨고 지금까지 평생 저를 키워주셨죠. 그리고 5학년 때는 사인을 위조하다 걸려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처음으로 함께 록 콘서트에도 가고요.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함께 해왔고 그게 바로 아빠인 셈이죠. 아빠 없는 제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 아빠를 아빠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음, 그리고 이 편지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그리고 울어도 괜찮아요, 아빠…. 저를 정식 딸로 받아주세요.” 라이언은 울면서 미스티를 안아줍니다. “내가 이날만 기다렸단다.” [출처: ‘수십 년 만에 의붓딸에게 '입양신청서' 받은 새아빠의 반응’, 유튜브 ‘포크포크’]
나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나요. 그 대상이 내가 먹히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도 나에게 상을 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생명을 쏟는 그 대상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또 그 대상도 나에게 자녀로 받아달라고 할 때 어쩔 수 없이 서로 먹히는 관계가 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둘은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먹힙시다. 그러면 그 대상도 영원한 생명으로 나에게 양식이 되어 먹혀주실 것입니다. 결국 섬김은 먹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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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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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매주 평화신문을 읽습니다. 1면부터 20면까지 꼼꼼히 읽습니다. 이유는 제가 신문사를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읽어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으로 신문을 읽을 때는 귀찮기도 했고, 시간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으면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평화신문은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그 지면들에는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글들이 교회의 보물이라 생각하니 신문을 읽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며칠 여행을 갈 때면 꼭 신문을 챙겨서 갔습니다.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으니 시간도 금세 지나갔습니다.
공부도 그랬습니다. 성격상 미리 준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는 늘 먼저 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과제가 있으면 동창 중에서 가장 먼저 하곤 했습니다. 해야 하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과제는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제게 동기부여가 한번 있었습니다. 10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준다는 달콤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했었고, 원하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공부는 의무가 아니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선생님들이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수업시간이 졸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20문제 중에 아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나뭇잎의 운명이듯이 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유혹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했던 추억과 기억은 제게는 문신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논문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논문주제를 ‘설교’로 정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면 꼭 필요한 논문이라 생각하니 준비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는 말처럼 즐겁게 하니 논문도 동창 중에 가장 먼저 제출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주변에서 신앙의 기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대부, 대모를 서는 것이 귀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자, 대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대자, 대녀의 축일을 챙겨주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런 대부, 대모를 보고 신앙 생활하는 대자와 대녀들은 신앙의 기쁨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지난번 ‘신앙 강좌 기획팀’의 모임도 그랬습니다. 그분들은 비행기가 연착되었어도, 길이 막혀 12시간 넘게 운전을 하였어도 전혀 짜증내지 않았습니다. 복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미사가 없는 날은 미사가 있는 미국 성당으로 가서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미사는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러니 멀어도, 언어가 달라도 기쁘게 미사에 참례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들만 중독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나눔도, 봉사도, 희생도 기쁘게 하면 중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이 기쁨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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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밀알 하나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의 뜻은, “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의미 없는 희생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과 같다.”입니다. <땅에 심어진 밀알 하나는 ‘많은 열매’로 돌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밀알이 땅에 심어지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맺어진 ‘많은 열매’는 ‘신앙인들’, 즉 바로 ‘나’, 바로 ‘우리’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생을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들도 먼 옛날의 ‘낡은 말씀’일 뿐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인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시는 분”이고, 예수님의 말씀들도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순교자들은 바로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의 전 단계였던 것처럼, 순교자들의 죽음도 부활의 전 단계이고, 예수님의 죽음이 많은 열매를 얻은 일이었던 것처럼, 순교자들의 죽음도 많은 열매를 얻는 일입니다. 그 열매는, 첫 번째는 순교자 자신의 구원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꼭 순교자가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순교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이 첫 번째 열매이고, 나의 신앙생활에서 영향을 받거나 나의 활동으로 인도를 받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이 두 번째 열매이고, 그 모든 일이 하느님 나라 건설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세 번째 열매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많은 사람의 구원이라는 열매로 이어졌기 때문에, 결코 ‘헛일’이 아니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예수님 자신도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었습니다.(요한 17,1-5) 순교자들의 순교도,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절대로 ‘헛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실천하는 많은 일이 다 그렇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현세적인 것만 생각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의 인생은 ‘하루살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허무한 ‘하루살이’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인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준 기쁜 소식입니다. 길을 알려 주어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허무하게 사라질 때가 되면 그때서야 후회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만 희망하고 추구하면서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미워하다.’ 라는 말은, 실제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헛된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다.’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헛된 욕심과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욕심 부리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 자들이 망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그자들이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어떤 심판을 받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보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받고 싶다면 나를 따라라.”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는 말씀과 사실상 ‘같은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헛일이 아니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로 이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힘든 일들을 겪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메시아 왕정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메시아 왕정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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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1)
초세기부터 교회는 라우렌시오 성인을 공경했습니다. 성인을 그린 대표적인 성화를 보면, 부제복(달마티카)을 입고 한 손에는 불타는 석쇠가, 다른 한 손에는 교회의 ‘보물’을 담은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석쇠 위에서 오랜 고통을 겪으며 화형을 당한 그의 순교와,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보물로 여기며 돌보았던 애덕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다른 성화에는 한 손에는 석쇠가, 다른 손에는 월계관이 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이 가진 뜻처럼 사랑의 삶과 거룩한 순교로 하느님께 월계관을 받은 성인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3세기 중반 교회의 재산을 탐내던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칙령에 저항하여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이때 성인이 가리킨 이들은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이방인들로 성인이 날마다 교회의 재물로 돌보던 이들이었습니다. 황제는 그를 석쇠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서서히 죽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애덕의 실천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행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제1독서 참조).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사실 오늘 복음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이웃에게 선물로 내주는 인생에 대하여 성찰하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삶,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아낌없이 내주고 기쁘게 주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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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날 많은 이가 농촌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농부의 기다림이나 인내하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어떻게 뿌리내리고 싹을 틔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 눈에 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생명과 죽음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이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보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철저한 고독 속에 완전히 버림받은 죽음을 선택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답일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을 생각해 봅니다. 광포한 탐욕자인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에게 교회의 재산을 넘겨주는 대신 성인은 불 속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가는 순교를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생명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습관의 노예가 되는 삶에서 벗어나 죽어야 합니다. 수난을 외면하는 삶에서 벗어나 죽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비유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드러냅니다. 어두운 땅속에서 점점 숨이 막혀 죽어 가는 밀알을 두고 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의 강생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사랑은 섬김이었고, 그분의 섬김은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은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의 삶이 되지 못하고 밀알 한 알 그대로인 채로 남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미약하나마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작은 실천으로 일상 안에서 생명을 위한 위대한 죽음을 선택할 용기를 가져 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한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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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라벤나’에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십자가형 건물의 벽과 천장은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곳에 낯선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창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네 복음서가 놓인 열린 서가가 있고, 반대편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장작불이 피워져 있으며, 그 위에 큰 석쇠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궁금증은 점점 커져 이를 계기로 성화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어떤 성인을 그릴 때 그와 관련된 대표적 일화나 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하여 그 성인을 나타내고 교육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기에 손에 성경과 칼을 쥐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식스토 2세 교황을 도와 일하였던 부제들 가운데 수석 부제로, 교회 재산을 관리하고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여 참수한 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그는 3일 뒤에 주겠다고 한 뒤, 교회의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3일 뒤 많은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황제에게 가서 “보시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순교의 순간, 그가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워라.”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그의 상징물은 석쇠입니다.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의 보물은 무엇인가? 나의 가장 큰 보물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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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마태12,24) 이는‘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입니다.’ 물론,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 능력, 물질,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배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으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입니다.홍승모)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 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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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교에 입학하고 군대 포함해서 거의 10년의 시간을 보내면 사제가 됩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의 대학원 시절인 1~2년만 잘 보내면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나갈 거면 조금 일찍 결정하면 좋았을 것을, 그 오랜 시간을 그냥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한두 해도 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두 해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 이상 되시는 분에게 여쭤보십시오. 자기와 한두 살 차이 나는 것을 크다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라는 표현도 쓰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기에 세상 속의 한두 살은 대단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못되었다고 해서 시간 낭비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도 쓸모없는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을 때가 가장 빠른 선택이 될 수 있지요. ‘가장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의 빠름에 한 것 없다면서 아쉬워할 것도 없고, 또 후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쉽고 후회할 일이 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늘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강조하셨지요. 어떤 결정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결정입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주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당신 뜻을 따를 것을 명령하시는데, 우리는 아직은 할 수 없다면서 이유를 나열합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남들도 안 하니까, 나만 하면 손해니까, 남들로부터 잘난척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결국 끝까지 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 노력은 언제 해야 할까요? 언젠가 할 것이라면서 뒤로 미루는 노력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하며, 지금 당장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세속적인 물질과 이기심을 모두 버리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만족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직도 멀었다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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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하느님께서 베푸실
참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우상의 세상에서
더 빠져들려는
헛된 목숨을 미워합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실
고귀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탐욕의 세상에서
더 가지려는
값싼 목숨을 미워합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실
강렬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권력의 세상에서
더 누리려는
허약한 목숨을 미워합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실
모두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경쟁의 세상에서
더 이기려는
이기적인 목숨을 미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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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독서와 복음은 모두 씨앗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밀알 하나와 같은 존재였고, 씨앗을 많이 뿌린 사람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씨앗에 비유하여 얘기하는데 복음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바로 밀알 그러니까 씨앗이었다는 얘기인 데 비해 독서는 씨를 많이 뿌린 곧 선행 실천을 많이 한 분이 라우렌시오 성인이라고 얘기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씨앗이든 자기 선행이 씨앗이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공통의 목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씨앗은 씨앗이 아니거나 불량 씨앗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을 묵상하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순교하였으니 진정 밀알 하나였고,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니 씨앗을 많이 뿌린 분이었고 그래서 많은 열매를 거둔, 다시 말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하고 확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도 되는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저를 보고 수도원 들어온 사람 하나도 없고, 제 조카들 가운데도 수도자나 재속 프란치스칸이 된 놈이 없으며, 저를 보고 세례받았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위하는 차원일지 모르지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저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성인과 비교하여 왜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사랑 차이겠지요. 죽도록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적당히 사랑하는 차이,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과 일부를 내어주는 사랑의 차이,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과 바라는 사랑의 차이, 섬기는 사랑과 시혜적인 사랑의 차이, 뭐 이런 거지요.
알면 됐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데 다 욕심부리지 않고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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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냥 죽겠습니까?>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씨앗과 관련한 복음을 듣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과 분명 연관이 있기 때문이고, 라우렌시오 성인이 씨앗과 같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죽어 진정 많은 열매를 맺은 분이시고, 그렇기에 교회는 그의 죽음을 기념이 아니라 축일로 기념합니다. 전례적으로 축일은 열두 사도만 축일로 기념하고 열두 사도 외에는 성녀 막달라 마리아와 스테파노뿐인데 라우렌시오도 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고 사도들의 사도이기 때문이고, 스테파노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는 왜 축일 급으로 지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로마 교회의 씨앗이었기 때문인데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프루텐티우스 시인의 말대로 그의 영웅적인 순교와 그의 아름다운 행위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을 때 생선 석쇠 구이처럼 석쇠 위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한쪽이 다 익자 뒤집으라고 할 정도로 죽음의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인 순교의 모범을 보였으며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은 그에게 보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후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는 하여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보물로 여겨야 하는 모범을 남긴 그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죽음과 그의 사랑이 다 로마 교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보며 사랑으로 죽고, 사랑하며 죽는 삶을 오늘 묵상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다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 죽습니다. 다 죽는데 죽음이 다릅니다. 사랑으로 죽는 죽음과 그냥 죽는 죽음이 다릅니다. 죽음만 그러겠습니까? 사랑하며 사는 삶과 그냥저냥 사는 삶이 다릅니다.
사실 그렇게 산 삶이 그렇게 죽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산 사람은 사랑으로 죽고 그냥저냥 산 사람은 그냥 죽습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냥 죽겠습니까? 어차피 죽는데 사랑의 씨앗이 되어 열매 좀 맺고 죽을 수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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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삶>
-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르는 삶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시편112,1)“
오래전 애독했던 ‘니코스 카찬스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읽다가 흥미있는 예화가 있어 나눕니다.
-옛날 후궁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 위대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무척 잘 생겼고, 잘 먹고, 잘 지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도원에 가서 고행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불쌍하다는 듯 고행자를 쳐다보았습니다.
“정말 굉장한 희생을 치르시는군요.”라고 그가 말하자, “당신의 희생이 더 커요.”라며 고행자는 대답했습니다.
“어째서요?”
“나는 덧없는 삶을 버렸는데, 당신은 영원한 삶을 버렸으니까요.” -
-어느 날 젊은 여자가 사막의 안토니오를 찾았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계명을 모두 지켰고, 정성껏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천국문을 열어 주시겠죠?” 이어지는 안토니오와 여자의 대화입니다.
“당신에게는 가난이 부유함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아바”
“불명예는 명예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적들은 친구가 되고요?”
“아닙니다. 아바”
“그렇다면 아가씨, 지금 당신은 아무 것도 갖지 못했으니 어서 가서 정진하세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하는 일화들입니다. 덧없는 삶중에 어떻게 하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덧없는 삶중에도 모두를 지닌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을,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을 섬기고 나누고 따라 살면 됩니다.
어제 써놓은 짧은 깨달음의 글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처럼 사는데
새삼 무슨 휴가?”-
덧없이 흐르는 세월, 하루하루가 소중한 인생 휴가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가 영원한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 오늘 지금 여기의 꽃자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이런 진리를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친히 영원한 삶의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무지의 눈을 활짝 열어 영원한 삶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순교성인과 순교적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을 그러했습니다. 이미 살아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버리고 비워 죽어감으로 무수한 열매를 맺기 시작한 삶이 영원한 삶입니다. 죽어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순교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악귀는 욕망을 먹고 자란다’ 며칠전 신문에서 읽은 대목입니다. 누구나 세상 욕심중에 살면 악귀가 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다음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지고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정말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목숨에 초연한 사람들로 자기를 비워가는 무욕의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늘 사랑으로 섬기고 따르는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에 항구함이 답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 나누고 따를 때 끊임없는 자기초월의 비움의 삶, 겸손한 삶, 영원한 삶, 천국의 삶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새삼 우리의 단 하나의 영성은 “섬김servive과 servant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나눔이 주님을 따름입니다. 섬김과 나눔과 따름중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요 아버지의 존중과 사랑이 뒤따릅니다.
저절로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 고백대로 살 때, 영원한 삶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이런 주님을 선택하여 사랑을 훈련하며 살 때 사랑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자발적 나눔의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섬김의 표현이 나눔이요 따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갈 때 하느님의 은총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스페인 출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역시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기 까지, 덧없는 삶중에도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성인은 순교직전 교회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준후 이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리고 나타나 말합니다.“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입니다.영원한 삶에 활짝 눈이 열렸기에 참보물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알아챘던 성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늘 현존하시는 참보물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성인에 대해 언급합니다.“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시인 프루텐타우스는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며 그를 칭송합니다.
성인의 축일은 4세기부터 교회전례에 도입되고 그에 대한 공경은 널리 빠르게 확산되어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빈민과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모든 성인이 그러하지만 성 라우렌시오 부제 역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따름으로 덧없는 삶중에도 주님과 일치되어 영원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덧없는 삶중에도 온갖 유혹에서 벗어나 초연한,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시편112,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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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교회의 보물!>
오늘은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주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가운데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 부제(225-258년)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교회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으로 데려가 "이들이 바로 교회의 재산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이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 속에 넣어 처형했는데, 성인께서 화형벌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제 잘 익었으니 뒤집어 주세요."
'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일까?'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지 않을까?'
예수님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낮은 자리인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리고 최후의 심판 기사(마태25,31-46)에서 가난한 이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고,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처럼, 우리도 교회의 보물인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풍 카눈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영호남 경계선을 따라 한반도 남과 북을 그대로 관통하는 유례없는 태풍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잘 대비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립시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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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vHaUu7vX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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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생명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낮아져야
행복하고
낮아져야
비울 수 있습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생명의
역설입니다.
하나의 죽는
밀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삶을
기억합시다.
열매는 언제나
새로운 삶의
변화이며
실천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길이
될 순 없습니다.
죽고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신앙의 기초이며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하느님께 바치는
겸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순교는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습니다.
열매와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임을
믿기에 십자가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생명은
십자가와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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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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