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가네히로의 정체
다음날 아침, 시경에 출근하자 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권 기자시죠? 옆의 다방에 와 있는데,,,,,, 만나야 할 일이 있으
니 잠시 나오시죠.
목소리는 공손하면서도 나지막한 것이 만만치 않은 사람 같았다,
혹시 박성길의 조직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순범은 자리에
서 일어났다. 박성길의 조직원이라면 도움되는 정보를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십대 초반의 두 사나이가 손짓을 하는
것이, 대번에 순범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역시 짐작대로 상대방들
은 어딘지 모르게 강한 이미지를 풍겼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순범
에게 자리를 권한 이들은 차를 시키고 담배를 한 대 권한 후, 종업
원이 차를 가져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순범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말을 조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이들 중 나이가 조금 더 들어보이는 사람이 말을
거 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사장님께
서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사장님?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요? 먼저 신분을 밝히는 게 도리
가 아닌가요?
그러나 사나이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가네히로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시다면 같이 가보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순범은 깜짝 놀랐다, 박성길의 조직원일 것으로 생각한 이들이
가네히로를 들먹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박 주임으로부터 얘
기를 듣고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순범은 이들을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좋습니다. 나갑시다.
순범을 태운 이들의 승용차가 고려대학교 앞을 지나칠 때 순범은
적잖은 의심이 생겼다.
(내가 너무 경솔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에 이들이 흥성표의 부하
들이라면 일본에 있는 그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나를 살해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순범은 다시 한 번 사나이들의 옆모습을 훌터
봤다. 운전하는 자까지 모두 세 명. 내릴 때까지도 상황이 확실치
않으면 이들에게 기습을 가하고 달아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세 사람이라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습을 가하고 달아날 수 있겠지
만, 이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만만치 않은 기색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정도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자들이라면, 결코 만만치 않을 것
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순범은 한두 마
디 붙여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러자 앞에 앉은 사나이가 뒤를 돌아보며 순범의 옆에 있는 사
나이에게 가볍게 턱짓을 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어.
순범은 아차했다.
순범은 일부러 못 알아들은 듯이 옆의 사나이에게 물었다.
어디로 간다구요卜
머리 박아, 이 자식아!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어?
앞의 사나이가 몸을 뒤로 돌리고 있는 것이 이 좁은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순범은 괜히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켰다가 나중의 기회도 놓치게 될까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순범이 고개를 숙이자 옆의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검은 천을 꺼내
순범 의 눈을 가렸다.
(이놈들이 눈을 가리는 걸로 보아서는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
군.)
순범은 위기 속에서도 내심 안도하며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
일까 궁금해 했다. 자동차는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 듯 천천히 멈
추더니 옆의 사나이가 순범을 데리고 내렸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바로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지하실로 가는 모양이었다. 순범은 상
황을 알 수 없어 궁금했지만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래로 다 내려왔는지, 순범의 눈가리개가 풀어졌다. 주위가 컴
컴한 것이 지하창고나 주차장 같았다. 앞에는 무지하게 생긴 사나
이 하나와 덩치가 좋은 사나이 둘이 버티고 서 있었다. 순범은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아까 차에 타고 있던 사나이들
하고 일을 벌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솔직히 얘기를 하면 그냥 돌려보내 주겠다. 그러나 만약 거짓말
을 했다간 너는 여기서 죽을 거야. 나는 긴 말은 싫어하는 사람이
니 알아서 하도록 해.
순범은 난감했다. 이들의 하는 짓이나 모양새로 보아서는 홍성표
와 연계된 조직의 일원이 틀림없었다. 설사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
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섣불리 따라온 자신이 매
우 경솔하게 생각돼 후회스러웠지만, 지금은 후회나 하고 있을 때
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을 감추고 어떻게 하고 할 계제
가 아니지만, 실제 순범은 감출 것도 없는 입장이었다. 일본에서 홍
성표를 보게 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순범은 이
런 폭력조직에 끌려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불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가네히로를 어떻게 아나?
그 전에 당신들의 정체부터 알아야겠어. 당신들은 홍성표의 조
직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야쿠자의 자금을 받아 조직을 관리해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물론.
결국 너희들도 야쿠자의 하수인이란 말이군. 그렇다면 나는 아
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이 권순범이가 너희 같은 쓰레기들의 협박
에 못 이겨서 얘기를 할 걸로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야. 기왕 오늘
은 무사하지 못할 것 같으니 한 번 걸판지게 싸움이나 해보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순범은 옆에 서 있는 덩치의 복부를 내질렀
다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다가 일격을 받은 덩치는 앞으로 고꾸라
지고 말았다. 순범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주먹으로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을 가격했지만, 사나이는 날쌔게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다시 뛰어오르며 가슴을 찼으나 상대는 역시 슬쩍 몸을 돌려 피했
다. 역시 예상대로 보통이 아니었다. 순범은 일이 안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습으로 둘을 쓰러뜨리면 달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려웠다. 그때 먼저 고꾸라졌던 사나이도 몸
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범은 다시 앞의 사나이를 후려치는 듯하다
가 몸을 돌려 미리 보아둔 계단 쪽으로 뛰었다. 전력을 다해 비상구
에 다다라 손잡이를 돌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순범은 문에 등
을 기대고 돌아섰다. 하찮은 일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의 얼굴과 이 박사와 개코, 윤미, 미현의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나이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달아날 길이라곤
없었다. 조심스레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는 순댐은 처음보다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달아날 곳이 없다면 여기서 싸우다가 쓰러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사나이들은 무지막지
하게 공격을 해오지는 않았다.
권 기자, 우리는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아. 다만 어떻게 가네히
로를 아는지만 말하란 얘기야. 당신이 제대로만 말하면 우리는
당신을 돌려보내 주겠어. 그걸 말하는 건 별것 아너잖아卜
그걸 말하는 것 자체는 별것 아니지만 야쿠자의 하수인 노룻을
하는 자들에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룻 아니오?
순범은 약해지고 있었다. 달아나기도 틀렸고 목숨을 걸 만한 가
치가 없는 일이라 생각되자 본능적으로 타협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벽것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것은 순
범이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순범은 상대가 야쿠자
와는 관계가 없다고 얘기해 주기를 바랐다. 이것은 순범이 타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순범을 편하게 해주
지 않았다,
야쿠자와 같이 일하는 게 뭐가 어때서 자꾸 그러는 거야? 모든
게 국제화시댄데 우리도 서로 협력하고 살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놈들 돈좀 가져다 쓰는 게 나쁠 게 뭐 있어-
문제는 당신들의 자세에 있지, 그놈들 돈을 가져다 결국 울리는
게 누구냔 말이오? 한 핏줄을 나눈 동포가 아닌가? 아무리 당신
들이 양심을 잃고 산다고 해도 외국의 검은 돈을 가지고 동포를
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게다가 어디 무릎 꿇을 데가
없어서 일본 깡패들에게 무릎을 꿇느냔 말이야? 당신들 아버지,
핥아버지가 저승에서 얼마나 가슴을 치고 계실 것인가 생각해봤
어-
내 아버지는 아직 저승에 안 가셨어.
그러면 당신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봐. 잘하는 짓인지 어떤지를
""-
이 말을 듣자 사나이들은 웃었다. 순범도 이들과 몇 마디 얘기를
하다 보니 색 위험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들
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일격을 맞고 일
어난 사나이조차 독기를 품고 달려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말과는 달리 애초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던 듯했다.
잠간 기다리시오.
사나이들은 순범을 혼자 지하실에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온 이들 중의 한 사람이 순범을 데리고 나갔다. 꽤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많은 문이 있었는데도 문에는 아무런 표시
가 붙어 있지 않았다.
순범은 이들의 정체가 무언지 점점 궁금해졌다. 이윽고 복도의
맨 마지막 문앞에서 사나이는 옷깃을 여미고는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모셔 왔습니다.
수고했어.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사나이는 오십대 초반의 점잖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순범에게 소파를 권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한
가지 확인할 일이 있어 그랬던 것인데 제가 사과를 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거듭 미안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순범은 점잖게 생긴 이 사람이 정식으로 사과를 하자 약간 마음
이 풀렸다. 사실 지금의 순범의 마음은 우선 살아난 데 대한 기쁨과
내용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 사나이를 가격한 데 대한 미안함이 교
차하고 있었다
저는 처음에는 무슨 폭력조직에 납치당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
다.
미안합니다. 제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나이는 인터폰을 눌러 여비서에게 차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차를 권하며 사나이가 얘기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저는 국가안전기획부 제 1국장입니다. 박진헌이라고 하지요.
순범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가네히로 아니 흥성표 사건 안기
부가 개입했단 말인가?
권 기자님에 대하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순범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하는 박 국장은 매우 치밀하고 섬
세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되었다.
저는 권 기자님이 박 주임을 추궁하는 것에 대한 보고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매
우 어려웠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놓고 생각을 거듭하다 결국
저는 권 기자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협조를 얻는 방법을 택
했습니다.
(그러니 박 주임이 입을 열지 못했군,,,,,,.)
이 일의 내막에 대하여 권 기자님께 얘기를 한다는 것은 저로서
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뜸을 들이거나 할 썽격이 아닌 것 같은 이 사람이 이렇게
까지 신중하게 서두를 끄집어내는 것을 보면, 예삿일은 아닌 모양
이라고 생각하면서, 순범은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는 의사를 보였
다.
안기부의 제 1국은 다른 어느 부서보다도 중요합니다. 사실은
안기부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안기부가 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부서입니다.
순범은 뭔지 모르지만 박 국장은 안기부의 역기능에 대해 거부감
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얘기는 자신들은 진정한 안기
부맨이라는 데 대한 긍지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의 정보를 입수하여 분석하
고,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해당 부서에 알려주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국이라는 것이 해외정보 및 공작을 담당하는 부서라는
얘기였다. 순범은 기자인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박 국장이 일부
러 꺼내는 것은 얘기의 줄기를 잡아가기 위한 것으로 느꼈다.
최근 이 년간의 국내외 마약거래 상황을 추적하다 보니, 대단히
이상한 흐름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히로뽕 등의 마
약이 국내에서 제조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지금에 와서는 오
히려 일본에서 제조되어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
겠지만 이 마약이라는 것은 그 복용자를 색출해내기가 대단히 어
려운 것이라서 밝혀져 있는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실정이
죠. 한때는 일부 일본과 왕래가 잦은 지역의 적지않은 룸살롱이
나 카페 쓰레기통에서 수십 개씩의 일회용 주사기가 발견되기도
하는 등 일반 국민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일본에서 들어온 마
약을 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즉각 이러한 사실을 관
계부서에 통보하고 그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보사부 소속 마약단속반이 법무부 소속으로 바뀌고 대검에 마약
담당부서를 신설하는 등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원인을 분석하다 보니, 이 마약 흐름의 역
조에 일본의 한 거대한 야쿠자 조직이 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야쿠자 조직이 있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는데. 문제는 이들
이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밑지는 장사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넘어오는 가격이 일본 국내가격의 절반
도 안 되고 있었습니다. 운반의 위험을 고려하면 그 가격은 상식
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격이죠. 일반 상품이든 마약이
든 남아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법인데,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도 거래가 끊기지 않고, 날이 갈수록 그 양이 많아지는 것
이 우리로 하여금 신경을 몹시 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하군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물건을 밑지고 괄 때는 있습
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적으로 밑지고 판다는 것은 다른 이유
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른 이유라면?
분석 결과 두 가지의 가능성을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죠. 미국이 처음에는 중국대륙
에 콜라를 거저 주다시피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 후 콜라에 길들
여진 중국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콜라를 찾게 된 것과 같은 방법
이죠.
무서운 일이군요.
그러나 더 무서운 건 따로 있습니다.
-
바로 또 하나의 가능성이죠.
순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약의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장
기간 밑지고 파는 야쿠자들의 계산보다 무서운 것이 있을 수 있는
가?
권 기자님은 혹시 고스톱을 칠 줄 아십니까-
네, 압니다만은,,, ,,,.
순범은 박 국장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묻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일
단 할 줄 아는 것은 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었다.
고스톱, 즉 화투의 유래도 아십니까?
글쎄요,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군요.
저는 일본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인데 보통의 일본인들이 화투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건달과 기생만이 친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런 것이 한국에서는 어째서 저렇게도 성황일까
생각하며 나름대로 자료도 좀 찾아보려 했으나 확실한 기록은 없
더군요. 그러나 오랫동안 생각해본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
다.
이 사람은 참 별것을 다 연구했구나 싶어 순범은 박 국장의 화투
이야기에 흥미가 당겼다.
어떤 결론입니까?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
고 있던 시절, 그들은 눈에 보이는 침략에 앞서 우리나라를 정신
적으로 황폐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택
한 방법 중 하나가 화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우리나라에 보내 갈 지방을 돌아다니며 화투를 배워주
고 화투를 치는 사람들에게 돈을 대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화투
를 성행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제시대에 본격적인 지배를
하면서 더욱 더 화투를 퍼뜨렸습니다. 특히 일제시대부터 전국에
화투로 집과 전답을 잃은 농민들의 수가 급중하고 있는 것은 바
로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망국의 병은 해방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잡히지 않고 있지만, 그 근원에 대하여는 이
런 무서운 흥계가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범은 박 국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국정부가 중국인의 정신
을 황폐화시키기 위하여 아편을 택했듯이 일본이 한국인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위하여 화투를 유행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거
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또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지금 야쿠자의 거대조직
들의 배후에는 우익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쿠자들의 비
상식적인 거래의 배후에 이들 우익 정치인들이 혹시 개입하고 있
지 않은가 알아보고 있숩니다.
설마 그럴 리가?
일본의 야쿠자들은 무섭습니다. 그들이 정치에 개입해온 역사는
이미 수백 년이 넘었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우
익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지금 일본은 광범위하게 변하
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는 특히 야쿠자들의 입김이 거
세지곤 하던 것히 일본의 근대사와 현대사입니다. 특히 일반인들
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요즈음 일본정치에는
유달리 우익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설마하고 그냥 지나가버릴 수는 없습니
다. 특히 안기부.제 1국에서는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응대를 하면서 순범은 홍성표와 안기부의 이 작업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효율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야쿠자 조직 내에
우리의 정보원을 심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가들
과의 연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위치의 간부가 있어야 하
는데, 일본에서 야쿠자 조직의 간부를 매수하는 것은 매우 위험
한 일입니다. 이중첩자가 될 우려도 있고 한 번 실패하면 앞으로
는 매수작전이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끝에 우리는
야마구치의 후계자로 지목받고 있는 마사키가 적극적으로 뒤를
봐주고 있는 홍성표를 지목했습니다.
홍성표라는 이름이 박 국장의 입에서 나오자 순범은 아연 긴장했
다.
그가 국내에는 발을 붙이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 일본으로 도피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찰의 습격과
그의 영웅적 도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홍성표
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그의 성격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세밀
히 분석한 결과 의외로 그가 야쿠자 자금을 얻어 쓰고 있기는 하
지만, 민족정신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냈습니다. 특히 그는 외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
게 풀리더군요. 우리는 홍성표를 설득하기 위한, 아니 그를 개조
하기 위한 작업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최단시간 내에 하는 것
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경마장에서 위장 탈주극을 벌이고
는 바로 안가로 데려와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그를 설득했습
니다. 물론 협박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그를 설득했
습니다. 특히 당신의 매국행각이 밝혀지면 아들이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아가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죽여도 좋으니 아들에 게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더군요. 설득은 성공했습니다. 우
리는 그에게 바로 마사키에게 연락하도록 했고 마사키는 그를 밀
항시켜 일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니, 잠깐.
순범이 박 국장의 말을 끊었다. 박 국장이 의아한 눈으로 순범을
쳐다봤다.
경마장에 미리 대기시켜놨던 승용차는 마사키에게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었나요-
그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흥성표의 용의주도함으로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홍성표는 마사키에겐 없어선
안 될 심복이었기에,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았던 겁니다.
순범은 박 국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는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각본이 기다리
고 있었습니다. 마사키에 의해 와해 된 시모노세키파의 잔당이
마사키를 급습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홍성표, 즉 가네히로는
미리 알고 있다가 칼에 찔리면서까지 전력을 다해 마사키를 보호
했습니다. 물론 시모노세키파의 잔당이 급히 모집한 행동대원 중
에 끼어 있던 우리 요원과의 약속된 칼부림이었습니다. 마사키
피습사건으로 가네히로는 일약 야마구치락의 간부로 올라섰습니
다. 이것이 바로 홍성표 탈주사건의 비밀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얘기군요.
순범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뭔가 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렇게까지나 엄청난 계략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박 국장은 순범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말을 덧
붙였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네히로의 정체가 지
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권 기자님이 박 주임을 집요하게 추궁하
자 박 주임은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내막도 모르는
채 우리 직원의 부탁을 받고 탈주극을 연출했을 뿐인데, 권 기자
님의 추궁을 받고 무척 괴로워 했습니다. 그 자신은 끝까지 비밀
을 지킬 사람이었지만, 권 기자님으로부터 가네히로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입니
다. 그래서 고심 끝에 모든 것을 다 밝히고 권 기자님의 협조를
얻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랬군요.
순범은 가네히로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
을까 생각하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홍
성표가 내뱉었던 한마디, 가네히로라는 이름을 들먹거린 것이 이렇
게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범은
그러나 이 비밀은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이제 다 알았으니 박 주임을
추궁할 필요도 없겠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지 알겠습니다, 어떻게 가네히로가 흥성표인 줄을 알았느냔
말이죠?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순범은 동경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순범의 얘기를 다 듣고
난 국장은 무릎을 쳤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우리는 혹시 다른 경로로 그의 정체가 누
설되었을까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했숩니다. 그건 그렇고 권
기자님도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그 국토관의 깡패들을 상대로 그
런 활극을 벌였습니까-
깊은 비밀얘기가 끝나자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
졌다. 박 국장은 순범의 얘기를 듣고는 흐뭇해 하며 순범을 다시 보
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약한 기자로만 생각했던 순범의 강단
이 보통이 아닌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대화가 끝나고 일어설 때 박
국장은 다시 한 번 순범에게 다짐을 두었다.
권 기자님, 이 일의 성패는 오로지 비밀 유지에 달려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앞으로 혹시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주십시
오.
감사합니다.
박 국장이 내주는 차를 타고 시경으로 돌아오는 순범의 마음은
가벼웠다. 엄청난 비밀을 들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심하게
만 생각했던 우리나라 정부의 어느 한 곳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
들이 있다는 데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은연중에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