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칭란(주경란) 朱慶瀾(1874~1941)】 「윤봉길 의거를 진행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측에 15,000달러의 운동자금을 지원】
중국 산둥성(山東省) 리청현(歷城縣, 현 지난시(濟南市))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74년생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산둥지부아문(山東知府衙門)의 막료였던 주진탕(朱錦堂)이다. 자는 쯔차오(子橋·子樵·紫橋)다. 본적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가교(柯橋) 어후촌(漁后村)이다.
동북으로 건너가 둥산성(東三省) 총독 자오얼쉰(趙爾巽)의 부하로 들어가 펑황(鳳凰)·안둥(安東)·진저우(錦州)의 현지사(縣知事)를 역임하였다. 1907년 육군장교연구소(陸軍將校硏究所)에서 수학하고 펑톈독련공소(奉天督練公所) 순경총국(巡警總局) 판사(辦事)를 지냈다. 1909년 자오얼쉰이 쓰촨총독(四川總督)으로 옮길 때, 쓰촨에 가서 쓰촨순경도(四川巡警道)로 임명되었다. 이후 청두(成都) 육군제33혼성협(混成協) 협통(協統), 제17진(鎭) 통제(統制), 육군 부도총(陸軍副都統) 등을 맡았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혁명에 호응하여 쓰촨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쓰촨대한독립군정부(四川大漢獨立軍政府)의 부도독(副都督)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순경대의 반란과 쓰촨 출신 군인의 반란으로 부득이 쓰촨을 떠났다. 이후 1912년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임시총통 군사고문(臨時總統軍事顧問)을 거쳐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옮겨 헤이룽장독서(黑龍江督署) 참모장, 헤이룽장성 장군(黑龍江省將軍)을 역임하였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후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으로서 정치의 실권을 잡은 북양군벌 돤치루이(段祺瑞)가 주칭란을 광둥성장(廣東省長)으로 임명하였다. 광둥성 성장으로 부임한 후 쑨원의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지원하였다. 1917년 광둥신군사령관(廣東新軍司令官)으로 임명되었다. 쑨원 지원에 불만을 품은 돤치루이가 1917년 7월 주칭란을 광시성장(廣西省長)으로 임명했지만 취임하지 않고 상하이(上海)에 칩거하였다.
1922년 장쭤린(张作霖)의 요청을 받아 주칭란은 다시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동북특구행정장관(東北特區行政長官) 겸 중동철로호로군총사령(中東鐵路護路軍總司令)으로 활동하였다. 중동철로 주변에서 러시아인이 점거한 토지를 전부 회수하는 등 적극적으로 중국 국가주권 옹호에 힘썼다. 1923년 주칭란은 김규식(金奎植)이 이끄는 대한혁명군(大韓革命軍)이 옌지(延吉)에 주둔하는데 편의를 봐주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하얼빈(哈爾濱) 일본영사관 경찰이 한인을 붙잡자 경찰권 침해라며 영사관에 항의하는 등 일제 측의 월권적 한인 탄압을 제지하였다. 1925년 봄,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9년 3월 국민정부진제위원회(國民政府賑濟委員會) 상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30년 1월 진무위원회(賑務委員會) 상무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국난회의(國難會議) 회원에 초빙되었고, 베이핑(北平)에서 요길흑열사성민중항일후원회(遼吉黑熱四省民衆抗日後援會)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같은 해 10월에는 국민정부 황허수리위원회(黃河水利委員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만주사변을 전후해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후원을 시작하였다. 1931년말 박찬익(朴贊翊)·안공근(安恭根)을 거쳐 김구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32년 5월 중순에는 김홍서(金弘叙)·최동오(崔東旿)·김원봉(金元鳳)·신익희(申翼熙) 등에게 각각 300달러씩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전부터 윤기섭(尹琦燮)과 교류하고 있었고, 1932년 8월 20일경 윤봉길 의거를 진행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측에 15,000달러의 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32년 11월경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위원장 자격인 윤기섭과 중한연합의용군(中韓聯合義勇軍) 조직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33년 주칭란은 베이핑항일구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9월 하순 베이핑에서 구국 각 단체대표들과 협의회를 갖고 일제와 만주국에 대항하는 항일구국제간편의대(抗日救國除奸便衣隊, 이하 편의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편의대는 1대에 20명씩 총 5대를 구성하였다. 편의대는 10월 초순부터 농민 혹은 상인으로 변장하여 하얼빈·펑톈·옌지 등 주요 도시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편의대는 만주에서 활동중인 중국공산당 만주총국, 조선공산당과 제휴하여 일본군·만주군의 기밀사항을 정찰하고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통해 치안을 소란하게 하고, 만주국 주요 관헌과 기관을 상대로 폭탄 의거를 계획하였다.
1936년 2월 진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38년 진제위원회(賑濟委員會) 상무위원이 되었다. 주로 산시성(陕西省)과 허난성(河南省) 일대를 무대로 전쟁난민 구제 등 자선사업에 매진하던 중, 1941년 1월 13일 시안(西安) 재동교양원(災童敎養院)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