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결혼한 지 9년이 되는 어느 날, 15세 연상이었던 남편은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24년간 희귀한 뇌질환을 앓다가 2000년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팔순의 시어머니마저 척추골절로 반신불수가 돼 9년을 집안에 남편과 함께 누워있었다. 세 살짜리 막내까지 딸 셋을 둔 서른다섯의 주부였던 그녀는, 그의 앞에 닥친 가혹한 운명과 그런 불행을 이겨낸 세월을 살았다. 사랑하는 딸들에게조차 한 번도 내색도 하지 않았고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자기의 부끄러운 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남편은 아팠지만 살아 있었다. 그것이 24년간의 우리 부부 생활이었다. 나는 그동안 소리 없는 총기를 구하고 다녔다. 그래, 물론 그의 심장을 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누가 발사했는지 찾을 수 없는 미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총기를 나는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남편은 노사관계에 대해 선견지명을 보인 촉망받는 학자(고 심현성 숙명여대 교수)였다. 남편과의 결혼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남편은 재혼이었고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신혼여행을 갈 때 남편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행선지를 부산에서 인천으로 바꾸고, 빨간색 여행 드렁크를 내내 자신에게 들게 했다.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매정한 남편이었다. 사랑보다는 갈등과 미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아빠이고 성실히 살아온 한 인간이기에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에서 좋다는 약을 구해와 의사 몰래 링거에 집어넣고 굿판까지 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지만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나무토막이 됐고, 그 후유증 때문에 한 번 웃기 시작하면 약기운이 돌 때까지 몇 시간씩 그치지 못했다. 웃음이 겨우 가라앉으면 이번에는 사흘씩 딸꾹질을 했다. 뇌손상으로 인해 어린아이의 지능으로 돌아간 남편은 병문안 온 손님 앞에 놓인 사과를 권하지도 않고 몽땅 먹어버리기도 했다. 통곡도 시원찮은데 웃는 그 남자를 보는 일은 머리가 휑 도는 일이었다. 그런 몰골로 웃는 남자를 바라보는 일은 비극이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웃기 시작하면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지금이 웃을 때야!> 그렇게 미친 듯이 외치면 남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병신이지.>
그는 마비된 남편의 몸을 되돌리기 위해 거친 수건으로 하루 종일 몸을 문질렀다. 하루 두 번 목욕을 시킬 때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어서 타월 위에 남편을 올려놓고 질질 끌어 목욕탕으로 데려가 씻긴 뒤 다시 그 타월을 끌고 방으로 왔다. 약 다리고, 목욕 시키고, 주무르고, 아이들과 노모 돌보고, 살림하느라 잠잘 시간조차 없는 고된 하루가 이어졌다. 그 정성에 힘입어 남편의 몸은 조금씩 좋아졌으나 정신은 오히려 망가졌다. 우울증이 찾아와 시시때때로 <죽지 않을 만큼만> 자살기도를 하고 정신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했다. 약기운이 떨어지면 신경질을 부리고 점점 거칠어졌다. 불러서 바로 대답만 하지 않아도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타작마당의 벼처럼 껍질이 벗겨지면서 남편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심하면 매질을 해대고 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눈알이 터지기도 하고 허리를 밟히기도 했다. 감정적으로 느끼는 불행은 고사하고라도 무엇보다 돈 문제가 심각했다.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남들이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 사들였다. 살고 있는 집 외에 갖고 있던 집 한 채는 급한 마음에 시세의 절반에 이미 팔아버렸다. 그는 여고시절 경남백일장에서 1등을 할 만큼 일찌감치 촉망받는 시인이었지만 시는 돈이 돼주지 못했다. 고민 끝에 양복천을 팔러 다니는 보따리 장사에 나섰다. 그러나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지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받았던 모욕감에 지쳐 천 보따리를 욕조 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중대한 시점에 서 있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선택하지 않으면 그녀의 모든 인생은 무너지고 말 것 같았다.
마흔 살에 그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빠는 환자고 엄마는 보따리 장수면 우리 딸들이 시집이나 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을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헌책방에서 영어책을 사다가 온 집안에 펼쳐놓고 설거지를 하면서, 지압을 하면서, 걸레질을 하면서, 남편을 목욕시키면서 공부를 했다. 그래도 공부는 남편이 쓰러지기 전, 그가 주는 돈으로 쌀과 연탄을 사고 김치를 담그는 것 외에 더 이상 아는 게 없었던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강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여든한 살의 시어머니는 방바닥에 넘어지면서 척추 뼈에 크게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흔에 돌아가실 때까지 9년을 누워있었다. 그 시절 시어머니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그녀는 여름밤 벼락이 치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시어머니를 미워한 만큼 벼락을 무서워했다. 죄책감에….
다행히 대학원에 입학하고 난 뒤 그의 생활은 조금씩 달라졌다. 첫 수필집 <다시 부는 바람>이 5000부나 나갔고, 이어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100만부 이상 팔리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그 인세로 빚을 청산했다. 남편도 학교 측의 도움으로 숙명여대에서 계속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는 학장까지 지냈다. 그는 남들에게 불행한 여자로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예쁜 옷을 입고 밝게 웃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남편은 2000년 10월21일 눈을 감았다. 죽기 이틀 전 그는 간병인을 물리치고 둘이 있는 자리에서 심각하게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내 인생의 십자가였던 사람이 자식들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내 팔에 안겨서 그림처럼 멋있게 죽었다.>며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의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곤두박질하는 삶 속에서 죽을까 아니면 도망갈까 늘 생각했지만 끝까지 나한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고통을 잊고 편안해졌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신달자 교수(43년생, 전 평택대학교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와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겪은 삶의 줄거리다.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행복한 이야기다. 한 여인이 요동치는 혹독한 시련과 싸우면서 마침내 혹독한 시련을 이기고 행복한 여인이 된 신달자 교수가 겪은 삶의 이야기를 읽고 무엇을 느끼는가? 어떤 시련 앞에서도 물러서지 말고, 포기하기 말고 새로운 삶을 위해 선택하고 그리고 선택한 미래를 위해 준비하며 살라는 것이다. 당신은 결단코 포기하지 말라. Don't Give up!
대저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성경은 말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잠언24:16) 사람이라고.
기쁨 있는 교회
고재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