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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扶餘 扶蘇山 落花巖
扶餘 扶蘇山(△106m)
扶蘇山은 扶餘의 鎭山으로, 平地에 돌출했으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白馬江(錦江의 下流 扶餘一帶)과
맞닿아 있다. ‘扶蘇’는 百濟時代言語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扶蘇山을 ‘솔뫼’라고 보는 學說이 유력하다.
扶蘇山은 平時에는 百濟王室의 後苑으로, 戰時에는 泗沘都城(扶蘇山城)의 堡壘였다. 扶蘇山에는 軍倉址,
落花巖, 百花亭, 泗泚樓, 三忠祠, 西覆寺址, 迎日樓, 皐蘭寺등 遺蹟·遺物들이 있으며, 歷史性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扶: 도울 부 *蘇: 되살아날 소 *苑: 나라동산 원 *泗: 물 이름 사 *沘; 강 이름 비
*堡: 작은 성 보 *壘: 보루 루 *覆: 다시 복 *皐: 언덕 고)
(01) 扶餘 扶蘇山 落花巖 -白馬江 遊覽船에서 본 모습(06.05.30)
*落花巖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扶餘 白馬江邊의 扶蘇山서쪽절벽 落花巖은 百濟 마지막王 義慈王(在位 641∼660)때 羅唐聯合軍이 水陸兩面으로
쳐들어와 王城에 육박하자, 宮女들이 굴욕을 면하려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고 한다.
<三國遺事>, <百濟古記>에 이곳의 원래 이름은 ‘墮死巖’이었다고 하는데, 뒷날 宮女들을 꽃에 비유해
‘落花巖’이라고 불렀다. 절벽에는 朝鮮時代 尤庵 宋時烈이 쓴 [落花巖]글씨가 있다. 落花巖의 기암절벽은
白馬江에서 배를 타고 갈 때 더 잘 보인다는데 樹木이 우거져 암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遊: 놀 유 *覽: 볼 람 *尤: 더욱 우 *墮: 떨어질 타)
정상에는 宮女들의 寃魂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건립한 亭子 ‘百花亭’이 있다. (*寃: 원통할 원)
(02) 白馬江 ‘釣龍臺’
扶餘 白馬江 錦江邊 扶餘邑 井洞里앞 범바위[虎岩]~扶餘邑 縣北里 破陣山 모퉁이까지 약 16㎞구간이다.
白馬江은 唐 蘇定方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龍을 낚았다는 바위를 ‘釣龍臺’라 하고, 江이름도 泗河에서
白馬江으로 바꾸었다고 하나, 이보다 160여년전 武寧王時代의 기록에 錦江을 ‘白江’이라고 표기한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馬]을 ‘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白馬江은 곧 ‘百濟에서 가장 큰 江’이라고 붙인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釣: 낚을 조 *縣: 고을 현 *破: 깨뜨릴 파 *泗: 물 이름 사)
(03) 船着場에서 멀리 보이는 扶餘白馬江橋
扶餘白馬江橋: 扶餘郡 窺岩面 虎岩里~扶餘邑 龍井里間 길이 765m의 교량으로, 1998년 3월 架設했다.
(*窺: 엿볼 규 *架: 시렁 가)
(04) 扶蘇山城 後門
(05) 皐蘭寺 法堂 -2006.05.30 補修中이었다.
百濟때 王들이 노닐기 위한 亭子였다는 說과 宮中의 內佛殿이라는 說이 전하며, 百濟滅亡과 함께 燒失되어
高麗時代에 百濟後裔들이 三千宮女를 위로하기 위해 重創해 高蘭寺라고 했다는 說도 있다.
(*皐: 언덕 고 *裔: 후손 예 *蘭: 난초 란)
*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扶蘇山북쪽 기슭의 白馬江邊에 있는 皐蘭寺는 大韓佛敎曹溪宗 第6敎區本寺 麻谷寺의 末寺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法堂과 寮舍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寺刹이다. 皐蘭寺는 佛蹟보다는 皐蘭草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으며, 法堂뒤쪽에서 나오는 藥水와 함께 名物을 이루고 있다. 皐蘭寺는 百濟滅亡과 관련된 여러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遺蹟이나 遺物은 없으며, 皐蘭寺는 高麗時代에 창건되었는데 현 寺刹建物은 恩山 乘角寺를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寮: 동관 요)
(06) [皐蘭寺]扁額 -海岡 金圭鎭 글씨
*海岡 金圭鎭(1868~1933) -本貫: 南平 -出生地: 平南 中和
韓國의 近代 書畵家로, 篆書·隸書·楷書·行書·草書에 모두 妙境을 이루었으며, 山水畵·花鳥畵를 잘 그렸다.
四君子도 즐겨 그렸으며 글씨는 大字를 특히 잘 썼다. 書畵協會를 창설하는 한편, 書畵展을 개최하여 書畵藝術의
계몽에도 진력했다. (*篆: 전자 전 *隸: 종 예 *楷: 본보기 해)
著書에 <海岡蘭竹譜>· <六體筆論>· <書法眞訣>· <金剛遊覽歌>가 있으며, 작품으로는 글씨에
[天下奇絶](內金剛 大額書), [錦繡江山](平壤 浮碧樓), [大雄殿](平壤 永明寺), [白馬長江](扶餘), [矗石樓](晋州),
[伽倻山海印寺](陜川 海印寺), [普信閣](서울 鐘閣), [熙政堂大造殿](서울 昌德宮), [太極殿](서울 德壽宮),
그림은 [外金剛萬物相圖](昌德宮 熙政堂 壁畵), [瀟湘大竹圖], [大富貴吉祥圖]등이 있다. (*譜: 족보 보
*覽: 볼 람 *額: 이마 액 *繡: 수놓을 수 *浮: 뜰 부 *碧: 푸를 벽 *矗: 무거울 촉 *伽: 절 가 *倻: 가야 야
*壁: 벽 벽 *瀟: 맑고 깊을 소 *湘: 강 이름 상 *祥: 상서 상)
(左→右) 전서(篆書)-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해서(楷書)
*書藝의 書體
中國 周나라 宜王때 太史 姝는 甲骨·金石文 등 古體를 정비하고 필획(筆劃)을 늘려 大篆의 書體를 만들었다.
그후 秦나라 始皇帝때 宰相 李斯(?∼BC 208)는 大篆을 간략하게 한 문자를 만들어 皇帝에게 奏請,
이제까지 여러地方에서 쓰던 각종 字體를 整理·統一했는데 이것을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姝: 예쁠 주 *秦: 나라이름 진 *劃: 그을 획 *篆: 전자 전 *奏: 아뢸 주)
대전(大篆)의 예로는 春秋時代 末期(BC 5世紀경)의 <석고문(石鼓文)>이 남아 있고 소전(小篆)의 예로는
秦代 BC 219년에 만들어진 <泰山刻石>이 있다. 이들 篆書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던 書體이지만 전서(篆書)를
略해서 사무용으로 쓰기 위해 예서(隸書)를 만들었으며 빨리 쓰기 위한 筆記體로서 草書가 생겼다.
다시 楷書·行書가 생겨 일반적으로 楷書·行書·草書가 쓰였으나 宋·元代에 復古調의 기운이 생겨 주목되어
淸代에는 篆書· 隸書의 연구가 왕성해 졌다. (*鼓: 북 고 *隸: 종 예 *楷: 본보기 해)
*전서(篆書):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있다. 東周時代 靑銅器의 銘文등에 地方的特色이 나타나 있다.
秦 中心의 公式書體를 대전(大篆)이라고 한다. 小篆은 秦이 통일한 후, 始皇帝가 李斯에게 명하여 大篆을
간략하게 한 것이다. 篆書는 漢代에 예서(隸書)가 보급된 이후 璽印, 碑銘, 額字등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碑首의 題字부분을 ‘전액(篆額)’이라고 불렀다. (*銘: 새길 명 *斯: 이 사 *璽: 옥새 새 *碑: 비석 비
*額: 이마 액)
*예서(隸書): 戰國時代부터 秦나라에 걸쳐, 公式書體였던 篆書의 字劃을 簡略化하고, 日常的으로 쓰기
편리한 書體로서 만들었다. 따라서 隸書는 篆書에 隸屬하는 書體라는 뜻이다. 또 奴婢인 程邈이 小篆을
簡略化·直線化해 만들었다는 說도 있다. (*隸: 종 예 *簡: 간략할 간 *奴: 종 노 *婢: 계집종 비 *程: 길 정 *邈: 멀 막)
*행서(行書): 약간 흘려 쓴 漢字의 書體로 楷書와 草書의 중간형태에 해당한다. 隸書나 楷書의 規格性을 벗어나
좀더 效率的이고 빠르게 글자를 쓰기 위해 나타났다. 行書는 正書인 楷書의 筆記體形態를 띠고 있어
쓰기도 쉽고 解讀도 어렵지 않아 一般人들의 筆記體 글씨체로 널리 쓰여 왔다.
*초서(草書): 漢字의 篆書·隸書등의 字劃을 생략하여 흘림 글씨로 쓴 筆記體로, 漢代에 비롯되었다.
草書는 效率的이고 신속한 筆記形態로 나타났으나 지나치게 簡略化해 實用價値를 잃고 行書가 일반인들의
筆記體의 中心役割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草書는 오늘날에 와서는 藝術的書體로서 意義를 지니게 되었다
*해서(楷書): 일점일획(一點一劃)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書體로 隸書體와 비교해 多少 세로로 퍼져 있어
부드러운 형태를 가짐.
(07) 皐蘭寺 鐘閣에 안치된 銅鐘 (*皐: 언덕 고 *蘭: 난초 란)
(08) 百花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百濟滅亡當時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宮女들의 寃魂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건립했으며, ’百花亭’이란
이름은 中國 北宋때 詩人 蘇東坡의 詩에서 따온 것이다. 扶蘇山城북쪽 白馬江邊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건물은 六角形 平面構造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바닥 주변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렸다. (*寃: 원통할 원 *魂: 넋 혼 *坡: 언덕 파)
(09) 落花巖에서 내려다보이는 白馬江
(10) 泗泚樓(사자루) -충남 문화재자료 제99호
扶蘇山城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樓閣으로, 달 구경을 했다는 ‘送月臺’가 있던 자리이다. 朝鮮 純祖 24년(1824)
郡守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朝鮮時代 林川의 官衙正門이었던 皆山樓를 1919년에 移建하고 ‘四泚樓’라고 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누각 八作지붕건물로 四方이 개방되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건물 앞면에는 高宗의 五男 義親王 李堈이 쓴 [四泚樓] 편액(扁額)을, 白馬江쪽에는 海岡 金圭鎭이 쓴
[白馬長江] 편액을 걸었다. 건물을 이건하기 위해 땅을 고를 때 鄭智遠이란 이름을 새긴 百濟時代의
金銅釋迦如來立像이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泗: 물 이름 사 *泚: 강 이름 자
*衙: 마을 아 *皆: 다 개 *堈: 언덕 강 *釋: 풀 석 *迦: 부처이름 가 *扁: 납작할 편 *額: 이마 액)
(11) [泗泚樓] 편액 -義親王 李堈 글씨 (*堈: 언덕 강)
(12) [白馬長江] 편액 -海岡 金圭鎭 글씨
(13) [扶餘懷古] -錦雲 鄭淳圭 作 - 泗泚樓 樓閣 2층에 걸린 懸板
扶餘懷古(부여회고)/부여의 지나간 옛일을 돌이켜 생각함. (*懷: 품을 회)
百濟都城摠古丘(백제도성총고구)/백제도성 은 옛 언덕 되었으니(*摠: 다 총 *丘: 언덕 구)
桑田碧海使人愁(상전벽해사인수)/뒤바뀐 산천이 사람을 슬프게 하네.
(*桑: 뽕나무 상 *碧: 푸를 벽 *愁: 근심 수)
天政無形山歷曆(천정무형산역력)/天政臺는 형체도 없으나 산만 뚜렷하고
(*歷: 지날 역 *曆: 책력 력)
軍倉如夢水悠悠(군창여몽수유유)/군창터도 꿈속에서 물처럼 유유히 흐르네.
(*夢: 꿈 몽 *悠: 멀 유)
花落高巖千載淚(화락고암천재루)/낙화암 높은 바위는 천년 동안 눈물짓고
(*巖: 바위 암 *載: 실을 재 *淚: 눈물 루)
龍呑白馬一朝秋(용탄백마일조추)/白馬삼킨 龍도 하루아침에 쓸쓸해졌네. (*呑: 삼킬 탄)
三忠義魄今來吊(삼충의백금래조)/三忠臣의 의로운 혼백을 지금 弔問하려니
(*魄: 넋 백 *吊: 조상할 조)
忽憶羅江競渡舟(홀억라강경도주)/문득 白馬江에 다투어 건너던 배가 생각나네.
(*忽: 갑자기 홀 *憶: 생각할 억 *競: 다툴 경 *渡: 건널 도)
全羅南道 羅州郡 潘南居人(전라남도 나주군 반남거인)/전남 나주군 반남면에 사는
(*潘: 성씨 반)
錦雲 鄭淳圭 勤稿(금운 정순규 근고)/금운 정순규가 삼가 짓다.
(*勤: 부지런할 근 *稿: 원고 고)
(14) 半月樓
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扶蘇山 남쪽마루에 있으며 扶餘市街地 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半月樓] 편액은 國務總理 金鍾泌의 글씨이다. (*樓: 다락 루)
(15) 半月樓에서 보이는 扶餘邑 市街地모습
*扶餘는 靑銅器時代中期를 대표하는 松菊里文化가 개화했던 유서 깊은 도시로, 百濟의 마지막 首都로
泗沘(일명 所夫里)라고 불렀으며, 百濟 聖王 16년(538) 熊津(現 公州)에서 泗沘로 遷都했다.
그 후 31代 義慈王 20년(660) 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하면서 新羅에 예속되고, 景德王(742~765)때
扶餘郡으로 개칭되었다. 高麗 顯宗 9년(1018) 公州와 倂合해 監務를 두었으며, 朝鮮 太宗 13년(1413)
扶餘縣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16個面으로 扶餘郡이 되었으며, 1960년 扶餘面이 邑으로
승격되었다. (*菊: 국화 국 *泗: 물 이름 사 *沘: 강 이름 비 *熊: 곰 웅 *遷: 옮길 천 *慈: 사랑 자
*顯: 나타날 현 *倂: 아우를 병 *縣: 고을 현)
- (19-2) 扶餘 扶蘇山 扶蘇山城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