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임신부님 강론
연중 제14주일, 7월 7일, 마르코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찬미예수님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고린12,9) 사도 바오로의 겸손한 마음을 봅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고 단점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장자는 선진인(先眞人) 먼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유진인이후유진지 有眞人而後有眞智” 참된 사람이 되고 나서 참된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 참된 사람이 되고 나서 참된 지식을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12,10)
오히려 자기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이 참사람입니다.
최진석 교수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말합니다.
“자신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기준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기준이 아니라 외부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외부에 있는 기준은 항상 체계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보편적이라고 인정되는 기준에 견주어 부족하게 보이지 않을 인간은 없다. 그 기준과 경쟁하려 하다가는 자신은 결코 결함과 부족을 메울 수 없다.
큰 인간은 외부의 것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한지 더 나은지를 따지지 말라. 경쟁에 빠지지 말라. 오직 자신과만 경쟁하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지만 자세히 살펴라.”
남과 비교하고 남과 경쟁하지 않는 마음, 그런 마음에 참된 지식이 형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마음을 방문하셔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도 못마땅해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의 마음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판단하고 비교하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안다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다는 것 그것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교만으로 작용해서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정되고 익숙해지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참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남을 보는 눈 역시 그러합니다. 안다는 기준을 정해놓고 남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새로움은 없습니다. 참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있는 것을 그대로 잘 받아들임이 중요합니다. 거부는 사람을 슬픔과 미움 그리고 이별로 몰아가지만 받아줌은 희망의 출발이며 관계의 향상이 됩니다.
받아들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육신의 눈과 귀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의 문을 여는 관계의 시작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이해와 관계의 출발점이 어긋난 사람입니다. 자기 육신의 눈과 귀에만 의지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이해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해의 시작이며 미움의 출발점이 됩니다. 의사소통의 장애가 옵니다. 자기에게 갇혀 있기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둘째는 마음의 눈과 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와 소통입니다. 이해와 소통은 마음의 밭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이해와 사랑의 문이 열립니다. 마음이 식었다거나 떠났다는 것은 관계의 끝입니다. 마음의 눈과 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는 '영혼의 눈과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의 눈과 귀로 소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귀를 울릴 때 먼저 육신의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귀를 열고 이어 영혼의 귀로 소중히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영혼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눈과 귀로써 받아들임을 실천할 때 우리는 참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서 참된 지식과 이해가 있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서 사랑이 일어나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서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가정과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되어 우리 안에서 사랑과 기적이 일어나고, 기쁨이 일어나기 위해 서로를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된 사람이 있는 곳에 참된 지식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멘
무태성당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
첫댓글 + 찬미예수님
아멘 감사합니다 !!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흑역사도 있고 좋은 역사도 있고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도 많이 있습니다.
며칠전 고종사촌 동생에게서 전화가 와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못본지 30년된것 같은데 저는 그동생의 커다랗고 잘생긴 눈과 그시절 서울대가 너무 자랑스럽고 이쁜 기억들을 떠올리고 말해 주었더니 그가 참 기뻐 했습니다.
그에대한 기억이 너무 좋아 서로를 덕담하여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었습니다.
가까운 형제 친척 어릴때 친구 흑역사때 이웃은 좋은 기억보다 시기 질투하고 무시하고 단점을 들추어 새로운 상처를 서로 주고 받기도 하여 참으로 속이 상한적 많았습니다.
저에게 잘못된 고정 관념이 있다면 과감히 깨게하시고 용서 빌게 하시고 나의 잣대로 절대로 잘못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제눈을 빛으로 밝히시어 선한것 아름다운것 성장되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
말씀으로 영혼의 눈과 귀로 이웃을 보고 듣고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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