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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에 ‘광야’가 존재하는 이유
도입: 하느님 나라는 왜 한 번에 오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지옥과 같은 이집트를 탈출하였을 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 꼭 광야라는 시험의 장소를 거치게 하셨을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이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두 비유가 하나의 짝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린 씨가 뿌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에 이른다.’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많은 새들이 깃들여 쉴 수 있는 휴식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구약성경 구절이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17,22-24)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향백나무의 가장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됩니다.
그 열매란 이것입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3)
만약 하늘 나라가 우리 노력으로 이뤄진다면 어떨까요? 인간은 교만해질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야 더 감사할 줄 압니다. 아기가 모든 이치를 깨달아서 자기 노력으로 두 발로 걷고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면 그만큼 부모에게 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행복하게 하시지 않고 광야의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행복해지면 행복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로 살다가 백만장자로 자수성가한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홀어머니에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려서 어머니 혼자 크리스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자면서도 결국 투자관리자로 큰 회사에 들어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위로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16세 때 교통사고로 두 팔을 잃은 슈레아 시나다가우더의 사연은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다행히도 크고 털이 많은 검은 남자의 두 팔을 기증받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 스스로 매우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팔을 잃지 않았다면 팔에 대한 감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베테랑’을 생각해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재벌 3세 조태호는 자신이 누리는 재산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만족합니다.
미국의 어떤 재벌들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노력해서 성공하는 행복의 기회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없었던 적이 없다면 그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조태호는 가난한 자의 고통 앞에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알아야 진정으로 상대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27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느냐고 할 때, “나는 버틴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고 포기하지 말라고 연설했던 덴젤 워싱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늘 나라를 믿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모님은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버티다가 엘리사벳을 통해 참 행복을 맛봅니다.
저는 연옥에 안 가는 기도를 압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2년 동안 바치면 됩니다.
처음 바칠 땐 저도 긴가민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12년 동안 바치고 난 뒤에 느끼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 알려줄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면서 천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먼저 믿고 버티는 광야를 거치지 못하면 행복을 알 수도 없고 행복을 전해줄 수도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역사 속에 완전히 자유롭게 이루신다. 당신 자신이 역사의 결정적 요소, “처음과 마지막”(묵시 1,17; 이사 44,6; 48,12)이심을 알게 하신다. 에제키엘서에서 말하는 향(백)나무의 햇순과 크게 자라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가 될 향(백)나무의 비유는, 메시아 왕국은 그 “보잘것없음”에서 성장하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으로 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32절) 되는 큰 나무가 된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27절). 이 말씀은 씨앗이 그 자체 내에 품고 있는 내적 생명력과 또 씨앗을 품어 이삭이 패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땅에서 얻는 내적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씨 뿌리는 사람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부터 수확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29절) 이렇게 지어진 농사에서 농부의 기쁨은 땀과 보살핌으로 맺어진 결실을 거두어들이려 낫을 댈 때 나타난다. 그때 그는 자기의 기다림과 희망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되며,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자생적 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보상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31절) 그러나 일단 땅에 심어지면 씨앗이 가지고 있는 생장력과 생명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본다. 그리하여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2절) 하느님의 나라도 시작과 성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적 성장뿐 아니라, 지리적 확장까지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체험 자체였으며, 그분의 자화상이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배척하였다. 그분의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성금요일에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말라빠진 십자가 나무는 온 땅을 뒤덮는 큰 “나무”가 되어 더위와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운 원기와 희망을 주었다. 하느님 나라는 시작할 때 보잘것없이 초라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나는 모습은 모든 인류의 역사를 충만한 정의와 자유로 인도할 만큼 위대한 것이다. 시작은 항상 보잘것없고, 소박하지만 그 성장은 마지막 상황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겸손하게 하느님의 능력에 신뢰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 3,6-7) 생명과 성장의 신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심거나 물을 주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도 자라게 하실 수 없다. 항상 올바른 응답을 하느님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선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해도 개인적인 책임은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2코린 5,9) 쓰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 자신의 ‘원의’를 새롭게 표현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의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우리에게 합당한 상급을 주실 수 있도록(2코린 5,10)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추수 때 구원의 성대한 축제가 영원한 기쁨 속에서 거행될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회 안에서 높은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들은 의사, 선생님, 운동선수, 정치인, 판사, 변호사 등 자기 분야에서 그래도 꽤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성공했다고 답변했을까요? 대부분이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성공은 아주 먼 미래에 있다’라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성공을 갈망하고 있고, 아직도 이 성공을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함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 관한 감사함이 있어야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셨습니다. 본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각종 성물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십자가의 길 등을 보시면서 계속 감탄하셨습니다. 1시간 정도만 머무르신다고 했는데, 2시간 넘게 머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곳 본당 신자들은 너무 좋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물이 있고, 또 멋진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니까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이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사 끝나기도 전에 성당 문을 나서며 돌아가시는 분들이 떠올려지면서, 누군가는 부러워하며 오래 머무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빨리 떠나고 싶은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내용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기보다는 불평불만의 마음으로 보기에 만족하지도 또 감사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는 마치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싹이 트고 줄기가 생기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습니다. 또 이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면서 풍요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새들이 그늘을 찾아올 정도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완벽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세히 보지 못하고 오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묻혀 바쁘게 사느라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만족과 감사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현자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스피노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이 중요한 겁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에 비타민이 되고 자양강장제가 되는
생생한 활력의 근원은
이러한 주님의 시선을 내가 느끼고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합일을 통해
그분과 친밀한 삶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커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질 때
하늘의 새들도 깃들기 마련입니다.
사제도 하느님의 사랑을 머금고 있을 때
교우들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복음말씀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