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60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죽는 건 여한이 없다
그거 잘못 놀렸다간 한 방에 간다
연안(延安)은 호남평야, 김해평야와 함께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지금이야 남북이 가로막혀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철조망이 없었다.
우리는 좀 바보스럽고 우둔한 사람을 비속적인 어휘. '새대가리'라고 놀린다. 지금도 임진강에 나가보면 새들은 자유롭게 철조망을 넘나든다. 새들이 우리에게 그럴 것이다. ‘새 대가리라고 조롱하지 말라.’
불과 365m밖에 되지 않은 용각산이 최고봉에 이름을 올리고 목단봉과 운두봉이 좌우를 감싸고 있는 연백평야는 천혜의 기름진 땅이다.
황룡이 살고 있다는 와룡지(臥龍池)와 남대 저수지(南大池)의 용수가 풍부해 흉년을 몰랐다.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소출도 많아 왕실의 궁사전(宮司田)과 정부의 군자전(軍資田) 그리고 공신전(功臣田)이 많았다.
연안은 세곡이 많아 탐이 나지만 왕실 토지와 권문세도가들의 땅이 많아 경기도와 풍해도가 서로 관할권을 미루는 고을이다. 한 때는 풍해도에 붙어 있다 경기도로 넘어가고 현재는 풍해도에 속해 있다.
텃세를 부려야 할 관찰사와 고을 수령들로서는 받들어 모셔야 할 중앙정부의 고위관리들이 많으니 꺼릴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공공 농토 외에도 세도가들이 농장 터로 눈독을 들이는 곳이 연안이다. 이곳에 땅을 갖고 있지 않으면 권문세도가에 끼지 못한다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비옥한 땅에 민무질도 전장(田莊)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숙번도 농장을 갖고 있었다. 이숙번의 향곡 농장에 의금부도사가 들이닥쳤다.
“죄인을 압송하라는 어명이오.”
이숙번에겐 날벼락이었다. 한양에서 구종지와 구종수가 국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숙번은 순순히 따랐다. 어명이라면 이유가 있어도 거역할 수 없다.
향곡을 떠난 압송행렬이 청단과 배천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왼쪽으로 가면 개성 가는 길이다. 얼마쯤 갔을까? 그리 넓지 않은 강물이 일행을 가로 막았다.
임진강이다. 나루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정이월 지나고 춘삼월이 다가오니 물동량이 많아진 것이다.
부보상들이 이숙번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백성을 무서워하라'는 옛말이 가슴에 다가왔다
“저기 잡혀가는 놈은 누구야?”
“글쎄, 누군지 모르지만 죽을 죄를 졌나보지.”
“니가 죽을죈지 어떻게 알어?”
“잡아가는 놈 철릭이 금부도사 같잖아.”
“예전에 병판을 지냈던 이숙번이라네오.”
나이 지긋한 부보상이 끼어들었다.
“저놈이 여적 죽지 않고 살아 있었어?”
“죽긴, 연안에 땅이 얼만데, 그거 아까워서라도 죽지 못 할 거야.”
“지 놈 목심은 삼(麻)으로 꼬았나? 나랏님이 죽이면 죽는 거지.”
“나랏님도 죽이지 못할 걸. 노루피를 나누어 마시며 같이 살자고 맹세했대잖아.”
“그 맹세 버린 지 언젠데, 지 놈이 정도전도 죽였으니 저도 그렇게 죽어야지.”
“송현에서 정도전을 죽인 건 다른 사람이래.”
“니가 봤어?”
“보긴, 그 아사리 판에서 내가 볼 수 있남, 들은 얘기쟤.”
“어디서 들었는데?”
“지난 한양 장에 피맛골에서 탁배기 한 잔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그러드라.”
“얌마, 들은 야그 함부로 하지마라. 사내들이란 자고로 혀뿌리 하고 그거 뿌리 잘못 놀렸다간 한 방에 간다. 못 봤냐? 며칠 전에도 어떤 놈이 한 방에 가는 거”
“그게 어디 우리 같은 백성들이냐? 인간이지.”
“인간이나 백성이나 한 방에 가는 건 시간문제다.”
“안 가는 사람도 있던데...”
“인석이 뒈지려고 환장을 했냐?”
말싸움을 하던 부보상들이 금부도사 일행을 힐끔거리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건 그렇고 이숙번은 문인이야? 무반이야?”
“문과에 붙었는데 무장으로 빠졌나봐.”
“칼을 좋아하는 체질이군.”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맞나봐.”
장사꾼들의 입방아가 요란하다. 평소에 무지랭이로만 알고 있던 백성들이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백성을 무서워하라’는 옛말이 가슴속 깊이 뼈저림으로 다가왔다. 일찍이 백성들의 말에 귀 귀울였다면 이러한 고초를 겪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후회로 밀려왔다.
이숙번은 못들은 척 거룻배에 올랐다. 도승관이 특별히 내준 거룻배다. 죄인을 호송하는 의금부도사 일행은 군마가 있으므로 상인들이 타는 나룻배에 섞여 탈 수 없었다.
강바람이 아직은 싸늘하다. 미끄러져 가는 거룻배에 몸을 맡긴 이숙번은 조용히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조선 최초의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여기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탓 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언 2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 참으로 세월이 무상하다.
비록 장원은 놓쳤지만 조선 최초의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7등에 합격하여 고향 안산으로 돌아가는 나룻배를 탔을 때는 한없이 기뻤고 배가 느려 보였는데 오늘은 빠른 것 같다.’
거룻배가 심하게 요동친다. 감았던 눈을 지그시 떴다. 거룻배는 급류가 흐르는 강심을 지나고 있었다.
“이보시오 도사, 내 한마디만 묻겠소이다.”
바로 옆자리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의금부 도사를 쳐다봤다. 이숙번의 물음에 도사는 못들은 척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숙번을 압송해가는 박안의 하고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안면몰수 하고 ‘소 닭 보듯’ 했다.
박안의가 형조좌랑으로 앞서 나갈 때, 이숙번은 안산군사였다. 태종 즉위와 함께 역전되어 이숙번이 중군총제직에 있을 때 박안의는 단양군사였다. 어느 사이엔가 깜도 안 되도록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잡아가는 사람과 잡혀가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주상전하께서 죄인을 압송해오라 명하셨으면 죄목은 알려주어야 예의가 아니오?”
“국문할 죄인을 잡아오라는 어명 이외에 난 아무 것도 모르오.”
건조한 답변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문이라? 그렇다면 구종지 구종수와 함께 내가 중죄인에 엮였단 말인가?’
등골이 오싹했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지만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단순히 구종지 형제 사건에 연루 혐의를 받고 있다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밝혀졌다면 끝장이다. 이 상황에서 어느 선까지 밝혀졌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전하의 국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이무도 죽었고 민무구 4형제도 다 죽었지 않은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온몸이 다시 굳어 오기 시작했다. 남의 얘기만 같던 팽(烹)이라는 낱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좋다. 사나이 한 목숨 언제 죽어도 죽는 것. 신명을 바쳤던 주군의 손에 죽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다.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할 때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정안군 손에 있었다.
23살 젊은 나이에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밤을 새울 때, 주상의 피 끓는 체온을 느꼈고 뜨거운 호흡을 느꼈다.
나에게 주어진 정사공신. 아무나 원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다. 더더욱 투전판에서 딴것도 아니지 않는가. 주상 전하의 공신당에 배향되지 못해도 좋다.
후대의 사가들이 나를 충신이라 평가하지 않아도 좋다. 나를 인정해주었던 주군이 죽어라 해서 죽는 것. 무엇이 두려울쏘냐.’
역시 사나이들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나보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때였다. 뱃사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기우도 사투리가 역력하다.
“임진리에 다 왔습니다. 내릴 준비들 하세요.”
거룻배에서 내린 일행은 나루터 마을에서 국밥으로 요기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파주를 지나 해음령을 넘으니 눈앞에 삼각산이 펼쳐졌다. 이제 한양이 지척이다.
임금의 노여움이 풀리면 금의환향을 꿈꾸었는데 죄인의 몸으로 잡혀가는 몸. 진정 꿈이었단 말인가? 이숙번은 만감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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