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을 그릴 때, 다빈치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성스러움과 순수함이 가득한 얼굴을 원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밀라노의 교회 성가대원 중 청년 한 명을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 청년의 얼굴이 맑고 평화로워서 많은 사람이 추천했고, 다빈치도 이 청년의 얼굴이 예수님의 모습에 딱 맞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림의 마지막 부분인 유다 이스카리웃을 그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배신과 탐욕이 드러나는 인물을 찾던 중,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죄수를 모델로 데려왔습니다. 그림을 다 그리자, 그 죄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고백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당신이 그렸던 예수님의 모델인 청년입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예수님 같던 얼굴이 유다의 얼굴로 변해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유다의 얼굴을 가졌던 사람이 점차 예수님 얼굴로 변해갔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나의 얼굴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님 닮은 얼굴인지, 아니면 세상 것만을 쫓아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면서 점점 유다 얼굴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산다면, 점차 유다의 얼굴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날이 멀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세상 것을 쫓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이 회개의 시급성과 하느님의 인내와 은총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커다란 사건 둘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인명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지어서 그런 끔찍한 벌을 받았다고 수군댔습니다. 이를 정면에서 반박하십니다.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으로,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닌 자기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회개가 얼마나 시급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나오는 포도 재배인처럼 우리에게 기회를 계속 주십니다. 즉, 은총의 시간이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인내는 크지만, 그것이 끝없는 방임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금, 여기’의 삶. 회개를 위한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점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모습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첫댓글 빠다킹(조명연 마태오)신부님 강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