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9
8월11일[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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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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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8YowCLFfmE
(홍승국 이사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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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웅적인 겸손과 빛나는 가난의 성녀 클라라!>
목숨이라고 다 같은 목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참으로 구차스럽고 굴욕적인 목숨이 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견뎌내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목숨이 있습니다. 이게 과연 살아있는 건가? 하는 짙은 회의감이 들 정도로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목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기쁨과 의미로 충만한 목숨이 있습니다.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찬란한 목숨이 있습니다. 그런 목숨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고,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합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목숨입니다.
이 땅에 육화 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목숨을 살아가셨습니다. 물론 적대자들의 미움과 분노로 인해 하루하루 목숨이 위태로운 생애를 사셨지만, 놀랍게도 매일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사시면서도, 넘치는 생명력과 활기로 가득 찬 충만한 목숨을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오늘 우리에게 참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아버지 마음에 들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간으로서의 목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목숨을 만끽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 24-25)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클라라 성녀 역시 그토록 놀랍고 충만한 목숨을 만끽하며 살다 가신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클라라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당시 아시시의 교구장이셨던 귀도 주교님께서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녀원장인 그녀였지만 수녀원의 허드렛일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해나갔습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던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동료 수녀들이 식사할 때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밭일을 끝내고 흙먼지투성이의 발로 들어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재빨리 수녀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클라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잔이 매끼니 식사였습니다. 실내장식이나 난방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비도 안 갖춰진 누추한 거처에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클라라는 한평생 봉쇄구역 안에서의 관상 생활에 전념하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 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감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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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ReQkMmpr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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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기도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돈을 섬겨서 예수님을 모실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 누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상대를 품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큰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향을 받는 그 대상이 내가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아주 많이 커지거나 아주 작아지면 됩니다. 온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시에 어떤 것도 쪼갤 수 없는 수준으로 작아지면 그것도 아무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화 중에서 우주에서 괴생명체가 지구에 추락하여 결국 그것들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우주를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구로 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들이지만, 온 우주로 보면 작디작은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커져서 세상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나보다 더 큰 자아를 만들어서 그것을 제삼자가 보듯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명상할 때 호흡이나 감각에 먼저 집중하라고 하는데 이는 나를 제삼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나에게서 벗어나 더 큰 나를 나로 의식하며 나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전직 방송인 김상운 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결국 불교의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거나 없게 만들기 위해 진짜 나를 우주의 크기만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상에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다시 자아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그리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다시 나로 살면 욕심이 생겨나고 욕망이 올라옵니다. 이는 ‘나’로부터 나오는데 나를 아무리 의식적으로 온 우주만큼 확장하려 해도 결국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나라는 정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도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 스스로 커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려는 노력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 부모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치는 것들을 제삼자, 곧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가 이와 같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작아져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보다 큰 분이십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란 사연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그 아들마저도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사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합니다.
이를 위해 아들은 먼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아야 하며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며 고생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오래된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 존재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불우한 환경과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대건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세상을 아버지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는 마치 탈출기에서 파라오가 속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성막 안에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들의 처지와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밀떡으로 부서져서 그 안에 하느님을 담은 성체와 같습니다. 비록 가장 작은 모습이지만, 온 우주보다 큰 분을 담고 계십니다. 그렇게 나는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안의 참 주인이신 분의 감정에만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탈출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기도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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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4-28: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원칙이고 강령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구원과 멸망과 같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즉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줄, 생명 대신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영광이 같으므로 본질도 같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는 이제 선택만이 남아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십자가를 선택하는 일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자신과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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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제게는 묵주반지가 있습니다. 2016년 은경축에 선물로 받았던 십자가를 어머니에게 드렸는데 어머니께서 묵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묵주는 손가락에 끼고 다니니 늘 곁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묵주를 보면서 어머니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묵주는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표지이지만 그 묵주가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묵주를 이용해서 매일 기도할 때에 나의 신앙은 성장하고, 나의 신앙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직원 중에 매일 혼인성사의 징표인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혼인한지 4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반지를 늘 끼는 그 정성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을 지켜주는 것은 혼인반지가 아닙니다. 혼인반지를 아끼는 그 정성으로 배우자와 가족들 돌보는 헌신과 사랑이 있기에 그 가정은 성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정에는 대부분 벽에 ‘십자고상(十字苦像)’이 있습니다. 십자고상은 신자라는 표식은 되지만 그것이 그 가정을 지켜주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삶을 따를 때 그 가정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쫓아오는 파라오의 군대를 피해서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굶주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응답할 차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신앙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응답해야 합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 십계명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은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꼭 젖과 꿀이 흐르는 장소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도록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표징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랐고, 그 표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표징이 제자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징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표징은 우리를 구원에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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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4-28)
신앙생활은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고, 그것을 원하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으니까 그 생활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의 시작입니다. 지금의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하게 완성되고, 영원한 것이 됩니다. <만일에 원하지도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하는 생활, 즉 강제노동이 될 뿐이고,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을까? 있습니다. 부모의 강요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고, 어른들의 경우에도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또는 막연하게 죽음 이후의 일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고, 어떤 세속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쁨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들을 모두 치워버리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생활은 내가 원해서, 또 내가 좋아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걸림돌들을 버리는 일도 내가 원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입니다. 큰 결심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고통이 따르는 일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
여기서 “나에게 이롭던 것들”이라는 말을, “내가 좋아하던 것들”로, 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라는 말은, “싫어하게 되었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예수님만이 기쁨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그 기쁨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버리라고 하지 않아도 당연히 버리게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통의 크기와 무게는,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의 크기와 무게보다 작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기쁨입니다. 아무리 십자가가 크고 무겁더라도 그 기쁨을 빼앗지는 못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 생명만을 희망하면서,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허무한 것들은 원하지도 말고 찾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온 세상을 버려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의 심판은 각자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일이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만을 원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고, 허무한 것들만 원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죽기 전에 나의 재림과 심판을 볼 사람들이 있다.”인데, 아직까지도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바로 뒤에 나오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마태 17,1-9) 예고하신 말씀일 수도 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거나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는 것도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향해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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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24절).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보다 먼저 왜 자기를 버려야 합니까? 예전에 나치주의자들은 많은 유다인에게 기차에 타도록 회유하면서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맞은 것은 절망과 지옥의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더 태우려고 기차가 역에 멈출 때마다 진실을 예감한 유다인들은 “열차에서 내려 도망쳐라.” 하고 말하였답니다. 그렇게 내린 몇몇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이라는 기차가 출발하였고,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놓인 상황과 같습니다. 분명 우리의 본성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이 기차에서 뛰어내려 생명으로 가는 다른 기차로 갈아타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갈아탐’을 실현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리라는 말도 육신의 삶을 내팽개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참된 인생을 살도록 최고의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이익과 뜻을 좇는 세상에서 지상의 영광과 성공과 영예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자신을 버린다는 의미에 대하여 묵상합시다. 우리가 버려야 할 ‘자신’은 하느님께서 본디 우리에게 주신 모습,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 낸 ‘자신’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자유 의지로 지금까지 저지른 죄와, 우리를 죄로 이끄는 성향들(이기심, 교만함, 질투, 탐욕, 게으름 등)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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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구약 성경은 선택된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개인적인 사랑을 드러내고, 오늘 독서에서 보여 주는 대로, 그런 사랑에 머무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개인적이고 생생하며 심오한 관계를 맺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쓰셨고(이집트 탈출), 개인적으로 자연 현상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조상들을 사랑하셨기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개인적인 관계에 머무르고자 이스라엘은 자신의 망상을 버리고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에 일치해야 합니다.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고서는 사랑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과 일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빌려, 당신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는 이는 참된 행복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맺는 우리 관계의 개인적인 측면은 더욱더 분명해지고 강해지며 친밀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 준 시나이산의 천둥 대신 이제 우리는 우리처럼, 우리 형제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표징과 기적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직접 대가를 보상하시는 당신의 희생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에 일치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과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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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디서 우리의 존엄성을 찾을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을 추종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6,24) 하십니다.
제자들은 반대를 받고 단죄받아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을 닮는 데서 자기 존엄성을 찾아야 합니다. 적대심을 품은 군중을 지나 모든 자존심을 버리는 그 십자가 추종의 길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나, 자신의 몸과 감정, 올바른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의나 부당한 권력 앞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마지못해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세상의 무관심과 차별, 불의와 불평등을 위해 자기 생명을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 바쳐 불의에 저항하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고난과 제자들의 고난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점, 곧 예수님과 동화되는 지점이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이요 나의 존엄성을 찾는 꼭짓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6,25)
다시 말해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그분의 생명을 향하여 걸어가야 할 사람이 자신에게 몰두한다면 하느님의 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보잘것없고 실패한 듯이 보일지라도 영원한 보화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16,26) 인간의 행복은 현세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의 소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존엄성을 찾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주 달콤한 돈의 마력에 빠져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빚으신 옹기그릇이요 주님의 성전인 나를 허망한 세상 것들과 바꿔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소유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채울 때 우리는 존엄성을 되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져 구조적인 악과 집단적 이기주의, 돈의 우상,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바로 그 몸짓에 나의 존엄함이 드러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인간성과 생명을 되찾고, 절망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속박에 해방을 주시려고 전 존재를 투신했던 예수님을 닮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과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에 동참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살펴야겠지요.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수많은 병리적 현상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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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장우영 요셉 신부님]
<기쁜 마음으로 지는 십자가일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
여러분은 교회, 예수님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바로 십자가가 떠오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 부활을 담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교도인들의 눈에 십자가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영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영원’이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신 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은 자신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살라고? 자신을 희생하라고? 세상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십자가의 행복을 맛본 사람이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나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어떻게 자기를 버리란 말인가? 세상살이는 그렇지 않는데!! 여기에 그러한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부활을 안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오묘한 경륜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끝 날에 승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경륜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러한 승리를 확신하고 믿고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혹 <춤추는 신>에 관해서 들어보셨는지요? 신이 춤을 춘다? 무당이나 무용수면 몰라도?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 하고 돌아다니며 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니체가 참으로 사랑한 신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춤추는 신이었습니다. 신이 춤을 추는 춤은 어떤 춤일까? 디스코? 관광버스에서 혹 카바레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추는 춤? 물론 아닐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춤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고통에 못 이겨 부르르 몸을 떠시는 그 몸짓, 그 몸부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예수께서 춤을 춘다, 신이 춤을 춘다고 말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춤을 추는 신만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는 분이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바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춤을 추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춤을 흥겹게 출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불가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고’라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을 달게 짊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를 어떤 모습으로든 기쁘게 짊어지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몫인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느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지는 십자가일 때,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통의 길을 걸으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춤사위에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혹 아직도 망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춤사위에 동참합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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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다른 이의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넘어지셨다 다시 일어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걷고 또 걷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자신을 버린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마지막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클라라 성녀는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바라보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행한 대로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 16,27)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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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십자가의 성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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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날씨만 좋으면, 매일 새벽 일어나 먼저 기도한 뒤에 곧바로 운동하러 나갑니다. 운동하러 나가면서 “아싸~ 운동하러 간다.”라면서 신나게 밖으로 나갈 것 같지만, 새벽 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날씨도 별로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새벽에 다른 것을 하고 싶기도 하고, ‘낮에 자전거 타면 안 될까?’ 등의 유혹이 계속 몰려옵니다. 하지만 싫은 일을 먼저 해야 다른 일도 할 수 있음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처음 30분까지는 힘만 들고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30분 이상을 타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감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운동하시는 분들은 이 과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를 ‘러너스 하이’라고 합니다. 보통 심박수가 1분에 120회 이상 되면서 느끼게 되는 쾌감입니다. ‘러너스 하이’라는 쾌감에 도달하면 새로운 힘이 생기면서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 쾌감을 얻게 되는 이유는 힘들게 달려온 과정 때문입니다.
우리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힘들게 달려온 과정을 통해서 ‘러너스 하이’와 같은 또 다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과정은 경험하기 싫고 대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새로운 힘만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과정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없듯이 힘든 과정을 거쳐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신 그 이후에 있을 ‘러너스 하이’를 기대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무엇인가라도 한다면 여기에 맞는 결과를 분명히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지만, 그 영광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이 있어야 했습니다. 십자가가 곧바로 영광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이에 따른 고통과 시련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피하고만 싶습니다. 남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그 길을 내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 데 가야 하냐고 따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훨씬 크기에 또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 있기에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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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목숨>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하느님께서
바로 나에게 주셨으니
하느님의 목숨은 나의 목숨
나의 목숨은 하느님의 목숨
하느님의 뜻을
오롯이 내가 따르니
하느님의 목숨은 나의 목숨
나의 목숨은 하느님의 목숨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나의 목숨 잃어도
하느님의 목숨은 남아
나의 목숨은 여전히 산 것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나의 목숨 간직해도
하느님의 목숨은 사라져
나의 목숨은 이미 죽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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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난하기에 기쁜, 고통스럽기에 행복한>
올해는 ‘클라라의 기쁨’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클라라를 아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가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알 것이고, 그래서 그의 삶은 거룩하기는 해도 기쁨이 없었을 거라고 많은 분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제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유언 27-8)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한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떤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 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클라라 전기 41)
그러니까 거룩하면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사람이 기쁘고 행복함을 클라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칼부림과 그것을 보고서 모방 범죄를 하겠다는 것을 보면서 전문가들은 심리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차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말하지만 저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불행한 많은 젊은이의 행복한 이에 대한 분노입니다.
나만 불행하고 다른 이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실은 젊은이들이 거의 불행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 이리 쉽게 불행할까, 행복하기가 왜 이리 힘들까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바이지만 건강에는 육체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 이 네 가지가 있는데 많은 젊은이가 육체만 빼놓고 다 불 건강하거나 육체도 허우대만 크지, 면역력 면에서 그리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거룩한 사람이 제일 건강하고, 영적으로 제일 건강하기에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건강하며, 그렇기에 가난도 고통도 제일 잘 견딜 수 있으며, 견딜 뿐 아니라 그런 가운데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클라라에게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지 마음의 고통이나 정신과 영혼의 고통은 아닙니다.
가난이나 병은 육체를 괴롭힐 뿐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사랑을 불타게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가난이나 고통은 두려워하고 피하면 오히려 쫓아오고 달라붙지만 껴안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껴안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것들을 땔감 삼아 사랑이 불타오르고 기쁨과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가난하기에 오히려 기쁘고,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행복한, 클라라의 그 사랑의 경지를 배우라고 주님으로부터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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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라 “해맞이꽃 사랑”으로-
오늘날을 정의하면 길을 잃고, 희망과 꿈을 잃고,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 한마디로 요약하면 병든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도 병들고 사람들도 병들고 있습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특히 한국은 더한 것 같습니다. 정말 총체적 난국같습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참 난감합니다. 자살자들도 많고 이해하기 힘든,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곳곳에서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깊이 잘 들여다 보면 대부분의 자살自殺은 희망을 잃은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지옥과 같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상실한 적반하장, 후안무치의 비정한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타살他殺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과연 나라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물심양면의 연대와 도움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심리적 무정부 상태 같습니다. 세대가 서로간 단절도 너무 크고 좋은 전통도 끊겼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되는 공부가 학교 교육현장에도 전무해 보입니다.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들의 죽음후의 화장에 이들을 보관한, 사람들로 하면 납골당같은게 있다는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사실 반려견의 화장터에서 슬피우는 동영상의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참 괴이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분이 몹시 얹짢았습니다.
“병든 사람, 병든 사회다! 그것도 중병이구나! 인간 정신의 타락이구나! 이를 어쩌나?”
하는 말이 저절로 탄식처럼 새어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주제가 참 고마웠습니다.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강론 제목에 대한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면 됩니다.
길을 잃은 사회, 희망을 잃은 사회, 중심을 잃은 사회, 병든 사회라 했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희망이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내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건강한 삶의 회복입니다.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참 희망이자 참 기쁨, 참 평화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요즘 곳곳에 청초한 샛노란 달맞이꽃들이 한창입니다. 아무도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때되면 저절로 피어나는 달맞이꽃들에 다양한 들꽃들입니다. 7-8월에 한창 피어나는 칠레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인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밤의 요정’, ‘소원’, ‘무언의 사랑’등 많은 꽃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들이 때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야생화 들꽃들입니다.
어제 달맞이꽃들을 보며 새삼스런 감동에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달맞이꽃만 있고 ‘해맞이꽃’은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달맞이꽃이 아닌 “해맞이꽃 사랑”이란 제목을 달았습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바로 거기가 꽃자리이다
누가
봐주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상관치 않는다
때되면
샛노란 청초한 사랑으로 하늘 향해
피어날뿐이다
하늘 사랑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인데 더 무엇을 바라리
너는
달맞이꽃
나는 해맞이꽃 사랑이다”-2023.8.10.
‘해맞이꽃 사랑!’ 얼마나 멋진 명칭인지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면 됩니다. 태양인 해가 상징하는 바, 하느님이자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우리 영혼의 태양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중심에 모시고 살면 됩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가 참 적절하여 고맙습니다. 주 하느님의 위대함과 선택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명기의 말씀이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깨우쳐 주시려고 하늘로부터 당신의 소리를 너희에게 들려 주셨다. 그분께서는 몸소 당신의 큰 힘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오늘”이 거푸 두 번 연속 나옵니다. 한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누구나 해맞이꽃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활짝 열린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만고불변의 구원의 진리입니다. 사실 이런 선택과 영성훈련의 습관화보다 더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기 버림의 여정에 항구한 이들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수 있습니까? 얻은 것은 덧없는 삶이요 잃은 것은 영원한 삶이라면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바로 영원한 삶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자기 버림이요, 제 고유의 운명의 십자가,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때, 구원의 잣대가 됩니다.
어제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축일이고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영원한 영적도반으로 깊은 영적우정을 나눴던 성녀 글라라 기념일입니다. 성녀 글라라 예외없이 해맞이꽃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평생 시종여일 한결같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이름 뜻 그대로 “주님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40여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말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살았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1253년 8월11일, 바로 오늘 성녀 클라라는 선종했고 그 임종어입니다.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받으소서.”
선종 2년만인 1225년, 최단기간에 성인품에 올린 교황 알렉산드로 4세의 성녀에 대한 소감은 바로 성인품에 올린 근거가 됩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성인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해맞이꽃 사랑으로 주님 따라 성인의 삶을 살라고 삶의 좌표의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해맞이꽃 사랑으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다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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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구원의 길!>
오늘 복음(마태16,24-28)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먼저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가나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나의 강한 에고(ego)'와 '내 안에 있는 내 것들, 곧 나의 육의 행실들(칠죄종)'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것이 '나와 너의 구원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그러니 먼저 '나의 것을 비우라.'(자기비하)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는 '나의 약함'입니다. 구원의 가장 큰 장애물인 내 것들을 비워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나의 약함'입니다. 그리고 내 것들 때문에 찾아오는 아픔들과 예수님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와의 충돌 때문에 겪게 되는 아픔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말할 정도로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했고, 그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동반자인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녀 클라라'는 아씨시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삶)인 '작음(minorum)과 십자가 수난의 사랑(fratrum)'을 단순하게 따라간 분입니다. 성녀 클라라는 철저하게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사셨고, 그런 수도회인 '클라라 수도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성녀 클라라와 성 프란치스코처럼 '단순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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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q27rJdR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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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목숨으로
시작되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목숨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기위한
십자가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목숨이며
대신 지고
갈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목숨과
십자가를
아우를 수
있는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순
없습니다.
사람이 되어
가게 하는
십자가이며
목숨입니다.
목숨에 던져진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깨닫게하는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목숨임을 알기에
하느님을 향합니다.
목숨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복종하게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하는
목숨이며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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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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