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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러시아·폴란드 지배받은 우크라이나 역사..
독립 후 동서 간극 '분쟁의 씨앗' /박태성 (daum.net)
박태성 부산외국어대 러시아학과 교수 2022.03.03. 22:28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신냉전이 열전으로 비화했다. 러시아는 군사행동을 더 강화할 것인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유추해봐야 한다.
국가 생성 기원을 볼 때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큰형’이 된다. 키이우공국(882~1240)이 몽골-타타르족의 침략으로 멸망하기 100년 전에야 비로소 모스크바 이름이 연대기(1147년)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후발주자 모스크바의 급성장은 키이우를 대신해 정교 중심의 러시아 민족 재통합과 영토 확장의 중심이 됐다.
키이우공국이 사라진 이 공간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지배했다. 남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킨 가톨릭 세력은 동부의 슬라브족 유니아트교와 극명히 대립했다. 마침내 폴란드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코사크의 반란’(1648년)이 발생하고, 반란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의 알렉세이 황제에게 원조요청 서한까지 보냈다.
군대를 파병한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안드루소보 조약(1667년)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도심을 흐르는 드니프로강의 우안과 좌안(동과 서)으로 분할됐다. 이때부터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의 예속으로, 서부는 폴란드에 이어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갈리샤 지방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장의 근간이 됐다.
동과 서로 분리된 우크라이나는 19세기에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야 하나의 공화국으로 소연방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동과 서로 나누어진 인종·종교·문화적 간극은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는 민주국가로의 전환기에 수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다.
특히 친서방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친러시아파인 유라시아주의자 간 정치투쟁은 지역주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은 동서갈등의 첨예화로 치닫고, 그 후유증은 2013, 2014년 유로마이단 유혈 사태로 번지면서 친러시아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졌다.
2014년 3월 16일 러시아의 크름(크림)반도 병합은 오늘날 비극의 도미노를 몰고 왔다. 동부의 주요 산업지대인 돈바스 지역도 그해 5월 11일 주민투표를 거쳐 89% 찬성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돈바스를 방치했다.
흑해 함대와 전략 핵무기가 있는 크름반도는 지정학적·경제적 모험을 할 만했지만 돈바스는 쇠락한 중공업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 간 무력충돌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2014년 9월 5일 민스크 협정이 체결돼 돈바스 내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이 자치를 보장받았지만, 휴전과 합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중적 태도(반군과의 협상으로 지지층 이탈 우려)가 갈등을 부추겨왔던 건 분명하다. 이후 돈바스 지역 내전이 진행 중인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희망 등 나토의 동진이 계속되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다.
유로마이단 - (wikipedia.org)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어: Євромайдан 예우로마이단[*])은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에서 유럽 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요구로 시작된 대규모, 지속적인 시위이자 시민 혁명이다. 시위는 계속 커져 현재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아자로프 제2정부의 해임을 요구하고 있다.[67] 시위대들은 2013년 11월 30일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참여한다고 언급했다.[3] 2014년 1월 25일부터 시위대들은 광범위한 인권 억압, 권력 남용, 정부 부패 인식 등에도 항의하기 시작했다.[68]
이 시위는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EU와의 통합을 위한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위원회 조약과 우크라이나-유럽 연합 자유 무역 협정(DCFTA)의 서명을 무기한 연기하고 러시아와 경제 의존을 천명했고,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여 시작했다.[69] 며칠 후 대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규모가 불어났다.[70] 우크라이나-EU 통합 갱신 요구가 계속 이루어지지 않지만 유로마이단은 EU 자체에 대한 중요한 정치적 상징 사건, 특히 "역사상 사상 최대의 친유럽 집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71]
이 시위는 대규모의 우크라이나 경찰 파견, 계속된 영하의 온도, 강설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72][73] 11월 30일 아침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증가하는 폭력 때문에, 시위대는 12월 1일, 12월 8일[74] 키이우에 40만~80만명이 모이면서 계속 증가하고 있다.[36] 이후 몇 주 동안 항의 시위는 5만명에서 20만명으로 변동을 보이고 있다.[75][76] 경찰 및 정부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여 12월 1일과 2014년 1월 19일~25일 동안 폭력 집회가 일어났다.[77] 2014년 1월 23일부터는 유로마이단의 서부 우크라이나 주 정부청사 및 지역의회에 대한 점령 운동이 시작되었다.
[12] 자포리자, 수미,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등 러시아어권에서 시위대가 정부 청사를 점령하려 시도하고 있으나, 경찰 및 군병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12]
2013년 12월 설문조사(서로 다른 3개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들의 45%~50%가 유로마이단을 지지하고 있으며, 42%~50%가 반대하고 있다고 나타났다.[78][79][80] 가장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는 지역은 키이우(75% 지지)와 서부 우크라이나(80% 지지)로 나타났다.[78][81] 12월 7~8일간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는 73%의 시위대가 요구 사항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시위할 것이라고 응답했다.[3] 또한, 설문 조사에서는 의견이 3개 방향으로 나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청년층의 절대다수가 친유로파인데 반해, 고령층(50대 이상)은 벨라루스-카자흐스탄-러시아 관세 동맹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82]
결국 2014년 2월 18일 키이우에서 2만명의 시민이 우크라이나 헌법을 2004년의 헌법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날 75명이 죽고 1100명이 부상했다. 이후 이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되었으며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폭력 진압을 규탄했다. 다음날 정부와 야권, 시위대는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2014년 1월부터 지속적으로 폭력 시위를 주도해온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섹터와 스보보다(우크라이나 자유당) 계열의 시위대는 합의안을 거부하였으며,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키이우 시내를 장악하였다. 시위대가 키이우 시내를 장악한 뒤 이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피난길에 올랐으며 야권이 주도권을 잡은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에 대한 지지는 국가별로 엇갈렸다. 최고 의회는 5월 25일에 조기 대선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서부와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로 나뉘어 서로 합법 정부를 칭하는 이중권력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소속된 우크라이나 지역당 일부, 일부 무소속의원 그리고 동부 주민 조차 야누코비치의 잠적을 비판했다. 야누코비치가 잠적함에 따라 동부에서도 서부가 차지한 정부를 따르기는 했으나, 러시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한 크림 반도에서는 차라리 러시아로 돌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 혼란에 빠졌다. 크림 반도에서는 시민들이 행정 관청에 걸린 국기를 러시아의 국기로 바꿔다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편 2월 27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피신하여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2월 28일,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러시아 정부는 크림 반도에 2000여명의 군을 파병하였다.(크림 위기)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침공으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
아조프 대대 - (wikipedia.org)
아조프 특수작전분견대(우크라이나어: Окремий загін спеціального призначення «Азов» 오크레미 자힌 스페치알노호 프리즈나첸냐 «아조우»[*])는 아조프 분견대, 아조프 연대(우크라이나어: Полк Азов 폴크 아조우[*]), 아조프 대대(2014년 9월 이전)로도 알려져있다. 간단히 아조프는 아조프해 연안 지역인 마리우폴에 근거지를 두었으며[1] 극우,[2][3] 네오나치[4][5][6]로 과거 준군사조직이었으나,[7][8][9] 현재는 우크라이나 국민위병 소속이다. 아조프는 2014년 5월 의용 민병대로 결성된 이후,[10] 돈바스 전쟁에서 러시아 분리주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 2014년 6월 친러 분리주의자들로부터 마리우폴을 탈환하며 첫 전투 경험을 쌓았다.[7] 2014년 11월 12일, 아조프는 우크라이나 국민위병에 편입되었고, 이후 모든 대원은 국민위병에서 복무하는 공식 군인이 되었다.[11][12]
[영상] '구국 영웅'인가 '新나치'인가..우크라 '아조우 연대' 논란 [나우,어스]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2022.03.30. 10:13 (daum.net)
돈바스 친러 반군에 대항하려 결성
초기에는 극우 민족주의·나치즘 색채
"지금은 이데올로기 탈피..강한 이미지로 인기"
[유튜브 'CRUX' 채널 캡처]
우크라이나 남동부 전략 요충지인 마리우폴이 사실상 러시아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한 달에 걸친 러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조우(아조프) 연대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아조우 연대 창설 주역이자 초대 사령관인 안드리 빌레츠키가 29일(현지시간) 영국 주요 일간지와 통화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현재 마리우폴에서 항전하는 아조우 연대 병사들은 1500여명에 이른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붙잡아 재판에 넘겨야 할 대상이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보기에는 침략자에 맞서 가장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우는 구국의 전사들이다.
러시아가 다른 여러 도시에 대해서는 민간인 대피를 위한 ‘인도적 통로’ 개설에 합의해 줬으면서도 정작 인도적 위기 상황이 가장 심각한 마리우폴에서는 피란민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아조우 대원들이 민간인과 섞여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러시아군은 아조우 연대가 마리우폴의 대원들에게 민간인으로 변장해 도시를 빠져나오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해 오고 있으며 28일에는 마리우폴에서 아조우 연대 대원들의 도피에 쓰일 헬리콥터를 파괴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나치를 추종하는 아조우 연대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주민들을 상대로 집단학살, 고문 등 범죄를 자행해 왔다고 비난해 왔다. 러시아가 침공의 이유로 내세운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는 이를 염두에 둔 주장이었다.
아조우 대원들을 모조리 생포해 이들의 ‘범죄’를 낱낱이 밝히고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침공을 정당화할 최상의 선전 수단이 될 수 있다.
AFP에 따르면 아조우 연대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킨 돈바스의 친러 반군에 맞서기 위해 수백 명의 민병대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아조우 대대’로 불렸으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아조우 연대’라는 속칭을 얻게 됐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내무부 산하 국가경비대의 일원으로 편입돼 정규군의 지위를 얻게 됐다. 정식 명칭은 ‘아조우 특수작전 파견대’다.
아조우 연대는 2014년 분리주의 반군이 점령했던 마리우폴을 탈환해 명성을 얻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군의 침공 이후에는 마리우폴 등 몇몇 주요 도시의 방어에 투입됐다. 아조우 연대는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격을 견디고 마리우폴을 지켜내는 데 선두 주자 역할을 해 왔고 교전 과정에서 러시아군 장성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유튜브 'CRUX' 채널 캡처]
아조우 연대는 늑대 갈고리(Wolfsangel)를 형상화한 부대 상징을 만들어 깃발과 휘장 등에 사용했는데 그 모양이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Hakenkreuz)와 비슷해 보여 나치 추종자라는 이미지를 강화한 측면이 있다. 아조우 연대 측은 이를 부인하면서 늑대 갈고리 문양은 ‘민족의 이상(Natinal Idea)’이라는 말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아조우 연대가 초기에 나치즘의 색채를 띠고 있었고 빌레츠키를 비롯한 주도적 인사들이 극우 인종주의, 나치즘 성향의 언동을 일삼았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빌레츠키는 지난 2010년 우크라이나의 임무는 “최후의 십자군전쟁에서 유대인이 주도하는 열등인종들(Untermenschen)과 싸우는 전 세계 백인들을 선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015년 아조우 연대 대변인은 신병 가운데 10~20%가 나치 추종자라고 밝혔다. 이듬해에는 아조우 연대 대원들이 돈바스에서 친러 반군 포로들을 마리우폴로 끌고 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했다고 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대개 과거의 일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아조우 연대에서 극우 이념의 색채가 흐릿해졌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에 대항해 열렬히 싸우는 현재의 모습이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하는 서방 전문가들이 많다.
동유럽연구 스톡홀름센터의 안드레아스 움란드는 AFP에 “출범 당시 이 단체는 분명히 극우 배경을 지녔다.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조우 대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탈이데올로기”의 길을 걸었고 지금은 일반적인 전투 부대가 됐다면서 “이 부대에 지금도 많은 지원자가 몰리는 것은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강한 전투부대라는 이미지 덕분”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는 러시아·동유럽 전문가 안톤 셰호프초프도 영국 주요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아조우 연대는 네오 나치 그룹이 설립한 자원병 부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지금은 그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아조우 연대가 초기에 표방했던 극우 민족주의 이념이 우크라이나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빌레츠키를 비롯한 아조우 연대 창설 주역들이 설립한 정당은 선거에서 득표율 2%를 넘긴 적이 없다.
‘칼리나’라는 가명을 쓰는 마리우폴의 아조우 연대 부사령관은 텔레그램에 “애국심과 나치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타국 땅을 점령하려 한 적이 없지만 21세기의 진짜 나치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썼다.
첫댓글
1.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어: Євромайдан 예우로마이단[*])은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에서 유럽 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요구로 시작된 대규모, 지속적인 시위이자 시민 혁명이다>
2.<2014년 3월 16일 러시아의 크름(크림)반도 병합은 오늘날 비극의 도미노를 몰고 왔다. 동부의 주요 산업지대인 돈바스 지역도 그해 5월 11일 주민투표를 거쳐 89% 찬성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돈바스를 방치했다.
흑해 함대와 전략 핵무기가 있는 크름반도는 지정학적·경제적 모험을 할 만했지만 돈바스는 쇠락한 중공업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 간 무력충돌은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3.<AFP에 따르면 아조우 연대는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킨 돈바스의 친러 반군에 맞서기 위해 수백 명의 민병대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아조우 대대’로 불렸으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아조우 연대’라는 속칭을 얻게 됐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내무부 산하 국가경비대의 일원으로 편입돼 정규군의 지위를 얻게 됐다. 정식 명칭은 ‘아조우 특수작전 파견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독일 나치세력에 부역하며 유대인들을 탄압하였던 것을 기정 사실이라 할 것이고 연결하여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에 시작되었을 당시 이스라엘이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바가 있다 할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의 독일 패망으로 인해 나치에 대한 단죄가 동서독의 통일 문제와 나아가 독일의 G7 가입문제까지 연결되어서는 관련하여 지속적인 사죄와 반성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할 것이나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국 내의 나치화 문제는 그정도의 반성과 성찰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 할 것입니다.
@포퍼엔마스
그럼에도 신나치즘?이라 비판받고 있는 바 아조프 대대의 문제가 21세기의 우크라에서 일어난 사건 연대기를 감안한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와 연결하여 문제화하고 악마화하기만을 다소 곤란한 측면이 존재하고 있는 않은가 생각해 보는 바인데
2013년 우크라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혁명을 보아하자면 당시 친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을 반대하면서 우크라와 유럽과의 통합을 외치면서 폭력시위의 행태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나 그것이 극우적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내포되어 있었다손 치더라도 친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었지 우크라내 러시아 시민들을 향한 폭력행사로까지 번지지는 못했을 것으로 당시 유로마이단에 대한 지지정도만 보더라도 결코 그런 움직임이 지지또한 받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포퍼엔마스
아뭏튼 정부와 야당 그리고 시위대간의 협정이 있었으나 폭력시위를 주도해 온 극우세력들이 협정에 반대하면서 무장하고 키이우 시를 장악하면서는 당시 우크라 대통령이 피난길까지 오르게 되고 야당 주도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던 대 혼란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라는 대 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 그럼에도 우크라 국내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우크라내 러시아인들의 요청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우크라 영토를 불법 점렴하였던 바 러시아의 군사 개입이 과연 용인 받을 수 있는 일일까??
@포퍼엔마스
문제의 아조프 대대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파병이 있은 이래 그해 5월 크림반도 병합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조직 ... 우크라 극우민족주의 민병대라 할 것으로 언급했다시피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내에서만큼은 진행되지 않았었던 그리하여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던 나치화의 문제가 어느 정도 잔존해 있었을 것으로 그럼에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맞물려 부활한 것을 보면 어쨎든 구 소련으로 부터 독립하면서 그어진 우크라 영토에 대해 어떤 이유로든 러시아의 군대가 들어오면서 꺼져 가던 불씨를 다시 살린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 것인지...!
이후 돈바스에서의 아조프 대대가 만들어낸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제가 언급하지 않더라도 잘 아실 것으로 개인적으로도 문제의 심각함에 대해 강력 비판하는 바입니다만 우크라의 극우화에 대해 우크라를 비난하고 비판하기 이전에 러시아로서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사안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바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