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십만양병설주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식하기를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임진왜란의 참화를 당했다라고 생각들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십만이라는 병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와 전력형태를 가진 병력인지를 생각해볼 사안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병력체제를 오늘날 방식으로 환산해서 해석할 경우 쉽게 달성할수 있는 전력수준인지도 생각해볼것입니다.
보통 생각하는 십만양병에 대해서 십만이라는 병력을 그냥 장교 부사관 사병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형태로 볼것인가, 아니면 완전 전문직업군인으로 형성된 병력구성으로 볼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조선의 군사력정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내용중에서 제대로 직업군인체제로 나아가지 못한것을 탓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시각을 기준해서 볼적에 십만병력을 모두 전문정예화된 직업군인체제로 할 경우 당시 조선의 국가재정형편상 쉽게 달성할 사안인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것을 쉽게 이룰수 있는 것인지도 그러하고요.
제가 생각하더라도 율곡이 주장한 십만병력 양성에서 이 병력들은 그냥 징병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아닌 정예전문화된 직업군인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직업군인이라면 장교 부사관이 해당되겠지만 사병의 경우 일반 징병제하의 병사들이 아닌 최소한도로 얼마전부터 시작된 유급지원병이라는 어느정도 전문성을 가진 부류들을 말하겠죠.
현재 한국의 군대총병력수가 65만의 대병이라고는 하지만 그중 실질적인 직업군인수만을 계산한다면 아마도 20만이하일것입니다.
일반사병은 전문직업군인에서 제외되고 장교 부사관중에서도 병역의무를 목적으로 복무하는 초급장교나 초급부사관의 경우역시 제외하여야 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 초급 장교나 초급부사관의 경우도 단지 병역의무이행이 아닌 직업군인에 뜻을 둔 경우는 보다 더 정예적인 존재로 볼수 있죠.
그러기에 징병제하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된 정예화된 직업군인에 해당된다라고 보는 병력은 불과 20만이하수준이 되는데 16세기 후반 십만이라는 숫자는 당시의 총국민수 대비한 계산을 오늘날에 적용할 경우 대략 40~50만명에 해당됩니다.
당시 총인구수가 정확치는 않지만 이미 천만명은오버했슬것이라고 추측한다면 현재 남한인구의 `1/4~1/5정도에 해당되는데 십만이라는 숫자를 그렇게 해서 오늘날 국민수비례되로 할 경우 40~50만이 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현재 한국실정에서 40~50만이라는 병력을 모두 정예화된 직업군인으로 구성할 여력이 되는지를 따져볼것입니다.
당연히 무리겠죠.
병사들을 징집해서 65만대병을 유지하는데 그중 40~50만이 전문정예화된 병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것이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외 다른 국가들도 인구비례해서 그정도 정예전문화된 병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정예병력을 많이 양성할수록 결국은 국민세금부담이 전제되어야 하여 국민의 등꼴이 빠지는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당시 조선의 입장역시 상당수 위정자들이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했던것은 자명할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문제들을 제대로 상기해보고나서 십만양병설이 그렇게 현실화되기호락호락한 사안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것입니다.
첫댓글 그런데요~~~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史實입니까?
조선이 현재같은 과세체제가 있다면 꼭 불가능하다곤 생각되지 않습니다. 양반들은 과세대상에서 제외되던 시대입니다. 현재 대한민국도 공직자 및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대폭적으로 축소하거나 제외시킨다면 세금규모는 뻔합니다. 의료보험도 가입자 10프로가 보험료 절반이상을 낸다고 하니 할말 다했죠. 현재 대한민국도 고위장교들에 대한 복지정책을 축소시킨다면 어느정도는 가능합니다. 율곡이이 선생께서 내신 10만양병설을 위정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자신들에 대한 과세확대를 우려해서가 아닐까요? 백성들에게 받을 수 없다면 그다음은 뻔하죠. 위정자들이나 상인들이겠죠. 한국도 불가능한건 아닙니다. 현재 국방비가 gdp에 4프로정도
로 알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2배의 국방비를 책정하면 40만 정병도 가능하죠. 약8프로정도를 사용하는거죠. 장교에 대한 복지정책을 줄인다면 6~7프로정도로도 가능하겠죠. 그럴 경우 한국경제는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주변국들의 눈치겠죠. 조선의 경우는 명나라의 눈치이외에 기득권층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