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유대 전쟁의 끝을 장식한 장소로 열심당원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 끝까지 대항하다 함락되자 노예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전원이 자결한 장렬한 이야기의 무대다.
이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곳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성지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정확히는 히브리어 מְצוּדָה(metsuda, 멈추다)가 고전 그리스어 Μασάδα(masada, 마사다)로 음역되었고,
이게 라틴어 Masada로 정착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명칭과 한국어 정식 명칭도 이와 동일하다.
2.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전
마사다가 처음 군사적 요지로 사용된 것은 하스몬 왕조(마카비 왕조)의 대제사장(사실상 국왕)인 요나단 시기이다.
이후 헤로데 대왕 시절,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를 등에 업고 공격해오자 대왕은
가족과 8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고
그 뒤 로마로 건너가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왕으로 인정받은 다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로마의 지원을 받은 만큼 대왕의 치세는 안밖으로 다소 불안정했다.
그래서 유사시 피난해 농성할 곳을 본격적으로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성곽을 구성하고 요새와 무기고를 지었는데 여기에 잠시 피난할 장소 이상으로 오랜 기간 버틸 수 있게
수십 년치 양식을 보관할 창고에 대량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고,
로마의 영향을 받은 수로와 목욕탕까지 조성해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놨다.
그러나 정작 헤로데 대왕 시절 마사다를 본격적으로 쓸 사건은 없었고 대왕 사후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며 마사다도 로마군의 손에 넘어가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고 만다.
로마를 사악한 이교도라고 증오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로마에 맞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소요를 벌였는데,
이때 친로마파인 유대 왕족인 헤로데 아그리파 2세가 군중들을 찾아가서 "너희가 게르만족보다 용감한가?
그리스인보다 지혜로운가?
이집트인보다 인구가 많은가? 갈리아인보다 부유한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로마에 맞서 싸우기로 하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제지했으나,
이미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군중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3.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 마사다 항전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유대교의 파벌 중 하나인 열심당원이 마사다에 주둔하던 소수의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마사다를 되찾았다.
유대-로마 전쟁의 전황이 로마쪽으로 기울어진 70년, 예루살렘마저 함락되자
도주한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휘하 열심당원과 소수의 일반 유대인까지 대략 천여 명을 데리고 마사다로 대피, 로마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이들 외에도 헤로디움, 마카에루스 등의 요새에도 저항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마사다보다 먼저 무너졌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시했으나 이들은 무려 3년 넘게 마사다에 틀어박혀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공격했다.
예루살렘 정복 후 기념주화까지 발행하며 승리를 자축하던 로마였지만
피해가 누적되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 기나긴 유대전쟁의 마침표를 찍고자 했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로마군은
제10군단 장병 9천 명과 유대 노예, 노역인으로 이루어진 6천 명을 포함한 총 1만 5천 명을 동원하여 마사다 점령에 나섰다.
로마군은 우선 마사다 주변 지역에 8개 요새를 건설하고 벽을 지어 포위망을 형성했으며
수적 우세를 앞세워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마사다에 있는 인원은 1천 명도 안 되고, 여성과 아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던 터라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은 소수였다.
그러나 헤로데 대왕이 작정하고 건설한 마사다는 약 450m 높이의 바위 절벽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로,
연간 강우량은 50 mm 미만이다
5m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m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는데다가 진입로가 오직 뱀처럼 꼬인 정면 길밖에 없는 난공불락이었다. 이런 지형 특성상 공성병기 동원도 불가능한 마사다는 철벽을 자랑했고 로마군의 마사다 공략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마사다가 위치한 유대 광야는 광활한 사막으로 밤낮으로 무더위와 혹한이 공존하는 극한의 환경을 자랑해 식량,
식수 등 각종 보급에 차질이 잇따라서 부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무려 2년이 이어졌고 로마군의 실바 사령관은 고심끝에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무모한 방법을 동원했다.
마사다에서 가장 성벽이 낮은 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토산(土山)을 쌓아 발리스타 등 공성병기를 배치하여 공격을 가하고
마사다까지 흙과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 비탈길을 만들어 공성추를 전진시키는 방법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의 의도가 적중한다면 난공불락의 마사다도 함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비탈길을 만들어 마사다를 공격하는 로마군
그렇게 6개월이 흘렀고 토산과 비탈길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공성병기를 동원해 공격을 시작한다.
마사다에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벽 뒤에 또 다른 성벽을 쌓으며 방어를 강화했으나,
지형적 우세를 상실한 이상 오래 버틸 방법은 없었다. 결국 성벽이 붕괴됐지만, 로마군은 재정비를 위해 일시 퇴각한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유대인들은 모두 모였고, 로마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극단의 선택을 감행한다.
물러난 로마군은 마사다에서 피어오르는 큰 불길을 보고 당황하여 황급히 요새로 올라갔다.
폐허가 된 마사다에 남아있는 건 수백 구에 달하는 유대인들의 시체였다. 로마군은 주변을 수색하여 하수도, 우물 등지에 숨어있던 5명의 어린이와 2명의 노파를 발견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유대교 가르침에 반하는 자살을 할 수는 없으니
모든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 처자를 죽이고, 남자들 중 10명을 뽑아 이들이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10명끼리 추첨을 통해 다른 이들을 죽일 최후의 한 명을 뽑고,
이 마지막 한 사람이 요새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모두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마지막 1명은 동포들을 위해 유대교의 가르침을 어쩔 수 없이 어긴 셈이다.
그렇게 마사다는 한 줌의 잿더미가 돼서야 로마인들의 손에 떨어졌고,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7명의 유대인들은 로마군이 살려두었다.
이후 마사다는 적어도 40년은 로마군 주둔지가 되었다. 5~6세기에는 소수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완전히 버려졌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숨었다가 살아 남은 여자 2명과 이린이 5명이 유대인 역사 학자 요새푸스에게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하여
마지막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사다를 포위했던 로마군 본진 자리에서 발견된 가이우스 메시우스(Gaius Messius)라는 병사의 봉급 명세서가 적힌
파피루스가 2021년 2월에 공개되었다. 봉급으로 50 데나리우스 받았지만 식대(20), 말과 노새의 사료값(16),
튜닉 1벌(7), 신발 한 켤레(5), 장구용 가죽띠(2)를 공제하고 나니 실수령액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