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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2일(화)
* 시작 기도
주님...
갈릴리 가나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혼인집에서의 포도주는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그것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정결예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에도 물이 비어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으로서 정결예식조차 엄격히 생각하지 않는다는 방증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이들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던 이들에게 항아리에 든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그저 맹물인 줄 알지만 주님의 명에 순종하여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자 그 물이 포도주로 그것도 극상품 포도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께서는 단순히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복음의 포도주를 나르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나 또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어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어디를 가든지 복음의 포도주를 나르는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내가 있는 자리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23:17-35
제목 :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하셨던 임마누엘,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20 솔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라.
22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 진리를 사되 팔지는 팔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7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28 참으로 그는 강도같이 매복하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29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김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은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 나의 묵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기가 뜻한 바대로 잘 이루어지면 그것을 형통하다고 말한다.
이런 형통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년 입춘이 되면 대문에 이런 걸 붓글씨로 써서 붙여 놓기도 한다.
‘立春大吉(입춘대길), 萬事亨通(만사형통), 建陽多慶(건양다경)’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집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福자가 들어간 곳이 참 많다.
베개, 한복 옷고름, 이불, 지붕, 신발 등등등.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우리보다 복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福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붙여 놓고서, 복이 쏟아지라고 비는 것을 보았다.
이들이 받기 원하여 그렇게 비는 만사형통의 복은 대부분 돈과 재물, 건강과 권력의 복들이다.
그래서 어느 동네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을 써서 동네 어귀에 붙여놓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이제 고생은 끝났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은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은 그 다음날부터 당장 차를 바꾸고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며, 그동안 입어보지 못했던 고급 명품 옷과 각종 명품들을 구입한다.
이런 모습을 보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들도 당장 로또를 사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 말씀은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죄인의 형통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인의 형통은 이 땅에서만 누리는 것들로써 결국 쇠락의 법칙에 의하여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이다.
사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 건강하게 하는 것,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을 것이다.
이 땅 위에서 한 번 사는 것 이것저것 다 누려보고 해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따라서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경우이다.
정말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주님을 잘 믿고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 일 곧 주님을 정말 잘 믿고 잘 섬기면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장래와 소망은 결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땅, 즉 만물 안에 속한 것으로는 온전한 장래와 소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원에 속한 것으로 오직 창세전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말씀으로 거듭나 위로부터 오신 아들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은 이 땅에 있는 그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창세전에도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아들은 이 땅에 오셔서도 아버지와 항상 함께 하셨다.
그것이 바로 형통이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이요, 임마누엘이 바로 형통이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하나님은 부러울 것 없는 보디발을 향하여 형통한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요셉을 향하여 형통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형통의 의미가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보디발은 요셉의 형통함을 보기까지 한 것이다.
(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요셉)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바로의 친위 대장 보디발은 애굽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으로 끝이 난다.
물론 그의 인생이 7-80년 떵떵거리며 누렸겠지만, 그에게 있어 형통은 잠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형통은 어떠한가?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가 되어 비록 그 땅 애굽에서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주인공으로 살았다.
또한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400년 후에 있을 출애굽을 바라보면서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출애굽과 땅의 약속을 전해 주었다.
(창 50:24-25)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로 인하여 요셉은 진정한 가나안 사람, 즉 하나님 나라 사람이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죽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따라서 주 안에서 육신이 죽은 자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으며, 무엇보다 주님의 재림 때에는 죽었던 몸이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 됨으로 영원히 살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두 말한 필요가 없는 진정한 형통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집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또한 그토록 부자를 부러워했다.
내 친구 충선이는 바로 옆집에 사는데 할아버지는 우체국장, 아버지는 면장을 하셨기 때문에 상당히 부자였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가난하였지만, 예수 믿는 집이었다.
어렸을 때 누룽지를 먹어도 나는 보리밥 누룽지를 먹고, 충선이는 쌀밥 누룽지를 먹곤 하였다.
내 눈에는 충선이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쌀밥 누룽지가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 조금 얻어먹어 보려고 쫓아다니다가 넘어져 이마를 깨트린 적도 있었다.
점점 성장하면서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어 남들이 보기에 보란 듯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학원 사업을 시작하였고, 새 아파트가 나오면 계속 이사를 다니면서 그것을 누리는 삶을 살기도 하였다.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도 나에게 있어서 형통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인 수가 많고,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이 부러웠고, 그 교회들이 대내외적으로 큰 일을 감당하는 것들이 부러웠다.
또한 은퇴하시는 목사님이 교회로부터 거액의 은퇴자금을 받아서 노년을 편안히 여행다니면서 보내시는 것을 보면 정말 부럽기도 하고, 그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목사가 되고 나서도 이 말씀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형통하는 것에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나의 목회의 목적과 방향은 기존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큰 교회를 이루어 더 보란 듯하게 성공해서, 윤택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에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만물 안에 목회의 목적을 두고 행하였다.
말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이 땅에서 누리는 영화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귀한 선물이 갑자기 찾아왔다.
수가성 여인에게 정말 귀한 선물이 갑자기 찾아 왔던 것처럼 말이다.
복음을 알고 보니 나의 지난날의 삶의 목적이나, 목회의 목적과 방향이 얼마나 인본주의적이고, 세상에 속한 만물 안의 것들로 점철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사실 창세전의 세계를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통치의 개념인 하나님의 나라를 시간과 장소적 개념으로만 알았기에 나의 착각은 결국 나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나의 영적 지식의 수준이 나를 목자로 알고 따르는 우리 교회 성도들의 영적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이상 그들에게 지금까지 먹였던 정말 쓰레기 밥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단하고 우리 성도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정말 창세전, 만물 위의 세계를 온전히 보지는 못할지라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는 알지 않는 것을 믿는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 영생을 누리면서 날마다 만물 위의 세계로 올라가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고 그 영광을 보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제는 그 삶이 이 땅에서 실재가 되어 날마다 그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이 영광을 볼 때마다 그것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새록새록 다진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목회의 목적이요 방향임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그 일은 지금 베트남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요 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시간 전하는 것은 오직 복음이다.
물론 복음이 목적은 아니다.
전하는 이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림에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너무 좋다.
그 영광을 비추시는 주님의 얼굴이 오늘도 나에게 다가와 따스한 빛으로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뼛속까지 죄인의 형통으로 도배하고 무장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다 부러워했고 그들이 성공하고 형통한 것을 부러워했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나에게 적용시키려 애썼던 말씀 도둑질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주님께서는 복음으로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나를 살리셨습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세상의 형통을 다메섹에서 주님을 영으로 알게 되면서 그 형통을 배설물, 즉 똥으로 여기고 진정 형통의 의미를 새롭게 하였던 것처럼 믿는 자의 형통은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임을 믿나이다.
요셉과 함께하셨던 임마누엘의 하나님.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셨던 임마누엘의 하나님.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오늘 우리들,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시마고 약속하시며 친히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임마누엘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