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 영화 속을 걷다〛(68)
내가 왜 서 있어야 하는데?
정지혜 감독의 <정순>
중년 여성의 주체척 삶을 위한 여정
여성은 항상 성차별, 성폭력이나 성희롱의 대상이 된다.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눈)의 대중화로 여성의 사적인 영역이 심심찮게 올라와 비뚤어진 성 의식을 지닌 남성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왜곡된 성적 환상에 탐닉한 남성들은 콜렉터가 되어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다. 사적 영상이 본인의 동의 없이 유포되어 피해를 입는 여성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유명 연예인이나 젊은 여성들이 이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때는 언론에 노출되어 세간의 관심과 이목을 끈다. 그러나 제법 나이가 든 중년 여성 그것도 유명세를 타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 여성들이 그런 성적 피해에 노출되었을 경우에는, 아예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끙끙 노심초사할 때가 많다. 더구나 그 대상이 중년 여성들일 경우에는 그렇게 크게 세상의 이목을 받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 끙끙 속앓이만 할 뿐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세상살이를 할 만큼 했고 나이도 들 만큼 들었기 때문에 피해에 대한 연민과 관심의 농도가 옅은 탓도 있을 것이다.
양산 출신의 신예 감독 정지혜의 첫 장편 데뷔작인 독립영화 <정순>(정지혜 감독, 2024, 104분)은 ‘사적 영상 미동의 유포’라는 소재로,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중년 여성 정순(김금순 분)의 속앓이를 다룬 작품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정순이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식품공장의 노동자 영수(조현우 분)와 관련된 사적 영상 미동의 유포의 피해자가 되어, 이전의 소극적인 자신을 탈피하고 주체적인 삶을 갖게 되는 짧은 삶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양산 출신의 정지혜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 <정순>은 고향인 양산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한 독립영화지만,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상으로 그 저력을 인정받고 있다. 2022년에만 해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여우주연상(김금순) 수상으로, 중년 여성의 주체적 삶을 온기 가득한 휴머니즘으로 그린 저력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는 오히려 유명 영화배우가 아닌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다소 낯선 배우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로부터 더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명배우일 경우에는 그 배우의 고정된 이미지 때문에 역할 인물의 캐릭터가 흐려질 수 있는 개연성이 많지만, 우리의 친근한 이웃 같은 배우의 신선한 이미지 때문에 역할 인물의 이미지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관객의 감정이입이라는 동일화가 더 쉽게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특히 정순 역의 김금선 배우와 딸 유진 역의 윤금선아 배우는, 사람 좋은 느슨한 성격의 엄마와 통통 튀는 적극적인 딸의 이미지가 대립되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적 추동력이 되었다. 두 역할의 개성적인 성격의 변별성이 대립과 갈등을 만들고, 그러한 부딪침의 여진이 장면과 사건을 낳고, 결국은 그것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사를 역동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상반된 캐릭터가 서사적 추동력이 되다
정지혜 감독의 역할 인물에 대한 배우의 탁월한 안목과 선택이 결국은 작품의 서사구조의 탄탄한 기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국은 정순이 사적 영상 미동의 유포의 피해자가 된 것도 유순하고 인정 많은 온유한 그녀의 성격 탓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공사현장에서 무릎을 다쳐 식품공장에 취직한 영수에 대한 그녀의 연민이 두 사람의 사랑을 이끌었고, 사랑의 감정 상태에서 그녀의 동의하에 문제의 사적 영상이 촬영되었다. 영수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동영상을 ‘단톡방’에 올려놓은 것인데, 그것이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그녀의 사생활을 뒤흔들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에 대한 행태를 주위 사람들은 왜곡해 동영상을 즐기며 그녀를 핀잔하게 된 것이다.
곧 결혼식을 앞둔 딸 유진 역시 그녀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성격 때문에 엄마의 사적인 사랑의 감정에 대한 정황을 경찰의 법적인 도마 위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그녀는 동영상의 유포를 줄여나가고 삭제하려는 노력과 시도, 그리고 그것을 엄마의 동의 없이 유포한 영수를 법적인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녀를 더욱더 옥죄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사랑의 감정에서 생긴 세속적인 여파에 대한 딸의 간섭에 분노하는 정순의 분노로 결국 두 사람의 성격은 폭발해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딸의 그러한 사적 감정은 결국은 엄마의 좋은 게 좋다는 엄마의 유순한 성격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유진의 그러한 적극적 개입이 모티브가 되어 엄마인 금순의 주체적인 삶의 태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이 작품의 서사적 추동력이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상반된 성격 때문이다. 직접 시나리오까지 쓴 정지혜 감독이 이 작품의 서사구조를 탁월하게 안배하고 있다는 탁월한 선택은 가히 놀랍다. 여느 영화였으면 발단부터 ‘시적 영상 미동의 유포’라는 소재를 터뜨려 법적인 과정을 추적해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감독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정순의 성격에 따른 일상적 삶의 풍경을 펼치다다, 중반 이후부터 그녀의 성격이 변화되면서 자신이 자신을 주도하는 성격의 변화로 주제적인 장면과 사건이 진전되는 구조로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감독의 혜안은 놀랍다.
이 영화의 절정은 정순의 주체적인 삶의 변화를 통한 적극적 행동이다. 한동안 쉬었던 식품공장에 찾아가 작은 난동을 부리고, 지금까지 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소극적인 삶을 살던 그녀가 운전면허를 취득해 직접 운전석에 앉아 직접 운전을 하는 시퀀스가 이 영화의 절정이고 반전에 해당되는 대목이다.
운전석에 앉아 직접 운전하는 정순의 주쳬의식
그녀가 식품공장에서 정순이 흰 가운의 작업복을 입고 도윤(김최용준 분)의 작업지시를 듣는 장면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정순이 다른 직원들에게는 작업 배당 지시를 내리고 정순에게는 아무 말이 없자 정순은 왜 자신의 이름은 부르지 않느냐며 항의한다. 도윤이 그녀에게 그냥 거기 서 있으라고 하자, 그녀는 “내가 왜 거기 서 있어야 하는데?”라고 응수하며 적극적 의지를 보인다. 결국 정순은 작업반장을 밀어붙이며 식품상자들을 내던지며 난동을 부린다. 여기서 작업반장인 도윤이라는 인물은 힘없는 여성을 외곽으로 물아부치는 사회적 권력으로서의 뭇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을 의미하고, 그녀가 난동을 부리는 행위는 지금까지의 소극적 삶을 청산하고 자신만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그녀의 주제적 삶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적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정순은 면허시험의 마지막 코스인 도로 운전 시험을 보다가 영수 일행을 발견하고 차에서 내린다. 영수가 기거하는 여관 앞에서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여자 노숙자를 그냥 지나쳤지만 이젠 자신이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노숙자에게 입혀주는 장면은, 핍박받는 여성의 권리 찾기에 직접 나서겠다는 연대의식으로서의 각오와, 지금 이 순간부터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로에 대한 은유적 상징이다. 엔딩 시퀀스에서 딸을 조수석에 앉히고 그녀가 직접 운전하는 장면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녀의 삶을 옥죄는 사회적 권력(도로)에 과감하게 도전하겠다는 적극적 참여를 의미하는 상징적 은유이다.
이 영화는 <정순>은 한 중년여성의 자아 찾기에 대한 희망과 온기의 메시지이다. 정순의 일상적 삶을 속속들이 살피는 서사구조는 같은 여성으로서의 응원과 연대의식이고, 정순과 딸이 여성의 삶을 옥죄는 사회적 권력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남성 권력이 횡행하는 지금 이곳의 사회 구조의 경직성에 대한 감독 자신의 현실 인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순이라는 한 중년 여성의 남성 권력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성으로 살아가기에는 벅찬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그런 취약한 여성의 삶에 대한 따뜻한 휴머니즘의 응원이고, 남성으로 은유되는 사회 권력에 대한 일종의 저항과 도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여성의 자아 찾기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이고, 남성적 사회 권력이 경직성을 탈피하고 여성을 끌어안는 인간적 온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대 사회적 발언일 수도 있다. 정순 역을 맡은 김금순 배우와 딸 유진 역을 당차게 소화하고 있는 윤금선아 배우는 절묘한 앙상블 연기로 이 영화의 서사 구조에 탄력적 리듬을 선사하는 일등 공신의 배우들이다. 윤금선 배우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정 연기로 역할 인물의 개성을 적확하게 표현하면서, 영화적 서사에 온기를 심어주는 탁월한 연기를 펼치고 있어, 다수 주눅이 들어있는 중년 여성 관객들에게 자신감과 주제적 삶을 살 것을 외치는 조용한 전사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어 앞으로의 영화적 활동에 큰 기대를 걸게 하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큰 포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닫힌 사회이다. 그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가 깨어 있는 의식을 견지해야 한다. 자신들의 상승을 막고 있는 유리 천정을 깨부숴야 하고, 한 개인으로서의 저항과 도전보다는 여성의 연대의식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처럼 사회체제의 경직성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더러운 것을 품어 안고 정화하는 바다로서의 모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게 되는 것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항상 깨어 있는 의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지혜 감독의 첫 데뷔작인 독립영화 <정순>은 여성의 자아 찾기와 주체적 삶을 위한 하나의 바이블에 가깝다.
(계간『문장』, 202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