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딸네 집에 들렀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큰손자는 내일이 개학이다.
맞벌이하는 딸 내외는 삼 개월의 긴 여름방학 내내
큰 손자를 썸머 캠프에 보내야 했다.
방학이면 돈도 더 많이 들고 , 딸 내외, 손자도 더 바쁘다.
개학을 앞둔 오늘은 계획된 일이 없고 , 집에 혼자 두지 못하기에 ,
내가 성당에 데려가기로 되어 있다.
매주 월요일마다 성당을 가는 것을 아는 사위가
지난주에 죄송하다며 그래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여덟 시 십 분 전,
딸네 집에 도착하니 큰손자는 아이패드에 열중하고
딸은 출근 준비로 바빠 나를 맞이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개구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 돌아보니,
잠 덜 깬 모습으로 토스트와 요플레를 먹고 있는 작은 손자가 보인다.
내가 자신을 못 본 체했다고 생각한 거 같아서 두 팔을 활짝 펼치니
손자는 달려와서 내 품에 안기며 반가움의 표시로
‘야옹야옹’ 소리를 낸다.
손자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고유한 신호다.
잠시라도 더 머물면 장난감이며 ,
쌓인 설거지거리에 손이 갈 것 같아,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작은 손자가 "잠깐만!"을 외치더니
빛의 속도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간다.
잠시 후 내려온 손자가 내민 것은 구겨진 종이 한 장이었다.
선물이라며 건넨 종이에는 무지개가 그려져 있고,
뒤집어 보니 푸른 선 위에 손가락을 펼친 외계인이 하나 있다.
할머니, 나를 그렸단다.
얼마 전 작은 손자를 봐주느라 레고와 기차놀이를 하며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재미있는 척하며 노는 것도 힘이 들어 혼자 놀라고 했더니,
손자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 가방에서 무지개 그림을 꺼내 건네주었었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나 내 기분을 맞추고 싶을 때,
제 장난감을 선물이라면서 우리 집에 갖고 가라고 한다.
그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때 나는 평소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참 좋은 선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뒤,
손자가 엄마에게 귓속말하길래 물어보니
'할머니한테 준 그림을 다시 가져오라'라고 말이었다.
나는 슬픈 표정을 지었더니 그 그림은 돌려받고 다시 그려준다고 했다.
사실 그 그림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당황했지만,
집에 와서 찾아보니 다행히 가방 속에 그대로 있었다.
며칠 후 사위와 함께 들른 손자에게 그 그림을 다시 돌려주니
해맑게 웃었다.
할머니가 속상하다는 말을 하니 다음에 꼭 다시 그려주겠다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그 그림이 오늘 우리의 약속이다.
네 살 반 아이는 그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지개는 아이에게 어떤 세상일까?
뒤편에 그려진 할머니는 아이에게 어떤 존재로 여겨질까?
구겨진 종이에 그려진 무지개는 아이의 꿈과 희망,
사랑이 가득 찬 아름다운 세상이길 바란다.
뒤편의 할머니는 장난감 좋아하고,
잘 삐지고,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하면 울어버리는
천진난만한 저랑 같은 또래의 마음인 줄로
오래오래 알았으면 좋겠다 .
작은 고사리손으로 삐뚤빼뚤 그려낸
무지개와 할머니 그림은
내게 그 어떤 명화보다도 소중하다.
이 그림을 잘 간직해야겠다.
언제 또 손자가 엄마에게 귓속말로
"할머니가 가진 그 무지개 그림 다시 갖고 싶어"
라고 할지 모르니까.
첫댓글 야옹야옹... 네살반 손자가 할머니를 위해 정성껏 그려준 그림을 잘 간직하시고 마음이 허전할때 펼쳐 보세요..
그애 생각이 나면 웃음이 지어집니다 .
유치원에서 말썽 많이 피워 딸이 가끔 불려 갑니다 .
딸말이 친가쪽은 아니고 우리집 유전인자 인것 같다고
고백을 하네요 .ㅎㅎ
맛벌이 하는 딸네 가족과 그리고 손자,
나름으로 모두가 열심히 살아 갑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그려 놓고 왜 돌려 달라고 하는지
그게 조금 궁금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더 잘 그려서 할머니에게
드리고 싶은 그런 생각으로 받아드렸습니다.
딸은 가정과 직장을 겸한 워킹 맘으로써
친정 엄마가 곁에 계시니 얼마나 든든할까요.
저도 아녜스님이 든든합니다.
게시글로 댓글 답글이 오가지만,
서로 마음을 모은다는 것은
수필방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손자가 그 그림을 돌려 달라고 한것은 그 그림이
어른들이 칭찬 해 주니 아주 잘 그렸다고 생각이
되어서 할머니 주기는 아까웠던것 같아요.
가끔 도울 일이 있어서 곁에 살고 있어요.
엄마 아니었으면 둘째는못 낳았을거라고 하네요.
큰 도움은 안 되고 서로 돕고 살고 있는것이지요.
수필방에 글이 적어서 양쪽에 올렸습니다 .
그림도 귀여움이고
야옹야옹 신호를 보낸다니
그도 귀여움이네요.
아이들이 있어야 여러가지
사는 의미가 생깁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야옹야옹 합니다 .
화 낼때는 당나귀처럼 날뛰기도 합니다 .
운정님 말씀이 맞습니다 .
아이들 때문에 웃어요.
천진난만 할때가 제일 귀여운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 처음 그린 사람이 저렇게 막대기 형태의 사람이었어요. 그런 경험 많이 있지 않나요?
한때는 저렇게 막대기, 스틱 모양으로 생긴 '졸라맨'이라고. 인기 한창이던 캐릭터도 있었지요.
무지개와 팔과 손을 활짝 펴고 초원 위에 서 있는 할머니를 그린 배경은 저도 궁금하고,
그림을 그린 어린 화가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지네요.^^
어린 손자에게 이 세상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평화와 희망의 낙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그리고 한결같은 신뢰와 안정의 긍정적인 대상으로서의 할머니, 무한히 따뜻한 할머니의 한 표상으로서의 아녜스 님의 이미지가 그림에서 보이는 듯 해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내며 할머니에게 안기는
아녜스 님 손자의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할머니를 왜 귀퉁이에 작게 그렀는지 모르겠어요.
옆 모습인가봐요 . ㅎㅎ
유전적인것으로는 아마 그림에 재주는 없을것 같아요.
모르죠 . 사위쪽도 미대 나온 사촌 형제들이 있고
우리는 제 엄마쪽이 재주가 좀 있긴 해요 .
큰 손자도 늘 만화 그림을 그리는데
작은 손자는 유투브를 제일 좋아해요 .
아녜스님의 글을 읽으면
글로 쓴 잔잔하고 고운 그림책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문맥이 잘 안 맞아도 마음자리님의
상상력을 가미하면 재미가 더 할것 같아요.
야옹 야옹 응석 부리는 손자와 함께 하는
아녜스님 모습이 상상됩니다.
우리 손자도 자기 할머니 하고 온갖응석 부리곤
합니다.
저도 시애틀 에 가면 주일마다 성당에서
한글 공부하는 손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시간이 참 즐겁기도 합니다.
작은 손자는 한창 귀여울 나이이지요.
매일 놀기만 해도 되니까요.
4학년이 된 손자는 많이 바빠요 . 뭘 그렇게 많이 하는지 ~
성당 한글학교 다니는데 자꾸 영어만 하려고 하네요 .
딸 사위 가 좀 더 한국말 쓰게 노력하면 좋을텐데..
그런게 맘에 안 들지만 아무말 하지 않습니다 .
알아서 하겠지 ~ 하고요 .
손주들이 주는 기쁨 딱히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지요.
제게도 2명의 외손녀와 2명의 친손자가 있어 제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큰 의지처가 되어 준답니다.
손주들은 자식과 또 다른 사랑으로 제게 와주었으니 그들은 보물 중 보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수피님은 누구보다 좋은 할머니신것 잘 알고 있습니다 .
손주가 4명이니 든든하시지요 .
하지만 손도 많이 간 다는것 잘 알고 있지요.
저는 이것도 한때라 생각하며 이뻐 해주고 있어요.
제 자식들과 달리 책임감은 없으니 맘도 편하고요 .
수피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정말 ET하고 꼭 닮았네.
저랑 닮은것 같아요 ㅎㅎ
구겨진 종이 한 장에
무지개와 할머니가 함께 담겨 있다니
그 어떤 명화보다 귀한 선물이라는 말씀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손자가 잊지 않고 다시 그려준 그림이라
더 소중한 약속처럼 느껴집니다.
아이의 작은 손끝에서 나온 무지개가
할머니 마음에는 오래오래 빛나는 추억으로 남겠네요.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지는
참 예쁜 수필 잘 읽었습니다.
제 형과 달리 유치원에서 종종 '반성의 의자'에
자주 앉아 있는다고 합니다 .
말썽꾸러기가 어떻게 차분히 저 그림을
그렸는지 신통하네요 .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