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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전국관객 500만명을 돌파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필름 제작·쇼박스 배급)의 촬영지 중 한곳이 외암리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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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 조승우, 조인성 주연의 흥행 영화 '클래식' 의 배경 중 한곳 역시 외암리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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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영화로는 [소릉],[동첨]등이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
외암리 마을의 건재 이상익의 고택이 영화 [취화선] 속 이응헌의 집 배경이 됐다. 장승업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에 대한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곳이며 소운이라는 학처럼 고운 여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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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옥이이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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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임꺽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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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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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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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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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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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소문난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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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새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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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대하드라마 [야인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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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 CF |
그 외의 드라마로는 [여울][만강]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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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를 건너면서 약한 구릉지에 집들이 길을 따라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은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나무가지와 같이 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 열매가 맺어 있는 것과 같은 자연형태와 같은 마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마을이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원칙이 있다. 즉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을 주산이라 하는데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긴 선이 이어지는 축선에 일정한 영역을 만들어 그 영역 안에 집들을 배치해 두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집이 앉은 방향은 거의 서남향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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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공수로를 풍수에서 '염승(厭勝)'이라고 한다. 전통 오행(五行)사상에서 화(火), 물(水)은 서로 상극이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雪火山)의 발음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과 같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마을에 그 '화'의 기운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을내부에 화와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화'의 기를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스스럼없이 적응해 나가기 위한 선조들의 빼어난 착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외암리 마을에서는 자연적인 건축요소를 활용하는데 있어 하나는 그대로 둠으로서 자연을 살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인위적으로 이용함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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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게 된 집의 위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개 건재고택(영암군수댁)위치로 추측하고 있다. 건재고택은 마을의 중심을 지나가는 안길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이로 미루어 볼 때 건재고택을 기점으로 일가들이 전후좌우로 확산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집을 지을때는 남측으로는 개천을 넘지 않고, 반대쪽 북측으로는 안길에서 개천 사이만큼을 확보하여 그 범위 내에 집을 짓게 되었다. 북쪽으로는 지형적으로 장애가 없어 더 멀리 집터를 잡아도 될 것이지만 안길에서 좌우로 적당한거리가 유지되고 마을의 모양새가 그런대로 보기가 좋아지는 것이다.
마을 입구는 개천을 건너는 다리를 시작으로 하고, 마을 끝은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인공수로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개략적인 기점으로 삼았다. 인공수로가 감돌아 지나가는 마을 안은 주산인 설화산의 화기를 막아줄 수 있지만 인공로를 벗어난 지역은 설화산의 화기를 막지 못하므로 그 화(禍)를 피할 수 있는 수로의 출발점을 마을의 끝자락으로 삼았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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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살림집 중에서도 남자들이 주로 생활하는 '남성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사랑채의 방을 꾸미는 것을 보면 보통 가운데 부분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다. 큰 사랑방에 이어 붙거나 혹은 뒤쪽에 작은 방을 하나 두기도 하는데 이 방은 주로 서책을 두어서 '책방'이라 한다.
마을에 사랑채가 있는 살림집은 모두 11가구이다. 이중 건재고택 |
, 참판댁(큰댁), 송화댁은 처음지을때부터 양반집 모양으로 지었으나 이효숙 가옥은 근래에 다른곳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참판댁(작은댁) 사랑채는 초가이지만 처음 지을 당시의 구조와 모양을 잘 간직하고 있다.
외암마을 양반집 사랑채는 대개 대청마루를 작게 만들고 좌우에 크고 작은 사랑방을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전면에 퇴칸마루를 두었는데 전체를 마루로 하지 않고 한칸은 방으로 막아 두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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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아낙네들이 집안살림을 주로 하는 '여성공간'이다. 일상적인 식사준비를 비롯하여 제사음식 준비, 길쌈 등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곳에서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랑채보다 크게 만든다.
외암마을은 모든 가옥은 안채를 가지고 있다. 사랑채에 부엌을 두기는 어려워도 안채에 사랑방을 두면 조선시대 유교의 덕목으로 여겼던 남녀유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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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의 대표적인 안채로 건재고택, 교수댁, 참판댁 큰댁 및 작은댁, 송화댁, 감찰댁(이동식가옥), 이준세가옥등이다. 이중 안대청이 제일 큰것은 감찰댁으로 3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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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채는 보통 양반집과 같이 규모가 큰 살림집에서 볼 수 있는데 간혹 규모가 작은 서민살림집에서도 보인다. 양반집 문간채의 경우 옛날에는 집안에서 지체가 비교적 낮은 하인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서민들의 살림집에서 흔히 가족이 늘어나면 문간채를 더 지어 식구들이 사는 경우도 있다. 문간채는 바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창고나 외양간을 붙여두면 농사일을 하는데 여러모로 편리하다. |
문간채는 문이 있는 칸과 방 또는 마구간 등을 함께 설치하여 살림채 제일 앞쪽 바깥에 배치해 두었다.외암마을의 68가구중 문간채가 있는 가옥을 모두 28가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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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돌아가신 조상의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양반집에서는 별도로 사당을 두지만 서민주택에서는 마루방이나 안방 한쪽에 감실을 만들어 위패를 모셔두기도 한다.
조상숭배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선조의 은덕을 고맙게 여겼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주로 지대가 약간 높은 동측후면에 사당을 앉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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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에는 현재 외암선생 사당 외에 건재고택, 교수댁, 참판댁(큰댁), 참판댁(작은댁), 감찰댁(이동식가옥)에 사당이 남아 있다. 외암사당은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 사당이란 국가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이 높은 학자가 죽으면 나라에서 후손 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한 사당이다. 외암 선생은 당시 학문이 뛰어나 나라에서 불천위를 허락하여 지금도 이 부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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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채는 살림집에서 긴용하게 사용되는 공간이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넣어두거나 특히 외암마을과 같은 농촌에서는 각종 농사용 도구를 넣어두는데 꼭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옛날에 사용되었던 많은 종류의 도구가 이제는 사용되지 않고 대신 이것을 넣어두었던 곳은 창고로 활용되고 있다.기계화되면서 소를 기르던 외양간이 없어지고 대신 부속채가 자리잡게 되었다. |
외암마을 살림지중에서 건물다운 부속채를 가지고 있는 가옥은 19곳이다. 구조는 대부분 목조초가이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는 창고이며, 창고에 붙여 화장실을 두거나 세면실을 두는 경우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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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살림집이지만 그저 살림집만 모여있다고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을은 사람이 살아가는 거주공간인 살림집 외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과 생명을 이어주는 농경지, 집과 집, 집과 농경지, 농경지와 농경지를 서로 이어주는 교통로, 경관을 부드럽게 해주고 공기를 맑게 정화시켜주는 숲과 수목 등이 한데 어우러질 때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 지는 것이다.
외암리 마을의 경관은 크게 '마을 밖'이라는 외부경관과 '마을 안'이라는 내부경관으로 구분된다. 외부경관은 다시 멀리 본 경관(원경)과 가까이 본 경관(근경), 마을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 등이 있다. 내부경관은 자연적인 조형물과 인위적인 조형물, 상징적인 조형물, 꾸며진 경관과 꾸며지지 않은 경관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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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리 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인해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간 것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경계구분이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어귀 적당한 곳에 장승을 세우거나 솟대를 세워 자연스럽게 마을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마을 후면에 해발 441m의 설화산이 우뚝 서있고, 그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몇 개의 가닥을 뻗어내려 마을 주변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그 산줄기 중 하나는 마을의 남쪽에 불쑥 쏫아 면잠산이 되었다.면잠산의 한 능선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 앞쪽에서 작은 동산을 만든것이 바람동산이다.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 앞에는 송덕비, 장승, 솟대가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표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정려는 원래 다리를 건너 마을 안에 있었으나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정려 또한 선조의 선행을 누대에 걸쳐 모범으로 삼으려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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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시설물이 물레방아와 정자이다. 물레방아는 노동공간으로 마을의 중요한 공동생활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일정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마을어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정자를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지어 놓은 유희시설이지만 반드시 유희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경지 가까이에 세운 것은 농민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쉴수 있는 휴식장소로 이용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마을 안 경관은 안길을 중심으로 샛길들이 이어지면서 돌담과 집들이 다른 마을엣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거의 모든 담장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의 지질구조는 땅 밑을으로 일정한 지층에 이르기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을 걷어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은 것이다.
마을 안에는 2개의 정자나무(亭子木)가 있다. 하나는 마을 안길을 들어서면 샛길이 뻗어지는 고삳에 자리잡고 있고, 또 하나는 마을 후면의 가장자리인 개천 변에 있다. 안에 있는 것은 마을 동제나 마을 축제를 할때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 신성시되는 공간이다.
마을 안의 집들은 모두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사랑마당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각각 특색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재고택, 송화댁, 교수댁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고 이 마을의 대표적인 정원인 만큼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면 좋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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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살림집이지만 그저 살림집만 모여있다고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을은 사람이 살아가는 거주공간인 살림집 외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과 생명을 이어주는 농경지, 집과 집, 집과 농경지, 농경지와 농경지를 서로 이어주는 교통로, 경관을 부드럽게 해주고 공기를 맑게 정화시켜주는 숲과 수목 등이 한데 어우러질 때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 지는 것이다.
외암리 마을의 경관은 크게 '마을 밖'이라는 외부경관과 '마을 안'이라는 내부경관으로 구분된다. 외부경관은 다시 멀리 본 경관(원경)과 가까이 본 경관(근경), 마을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 등이 있다. 내부경관은 자연적인 조형물과 인위적인 조형물, 상징적인 조형물, 꾸며진 경관과 꾸며지지 않은 경관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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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리 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인해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간 것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경계구분이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어귀 적당한 곳에 장승을 세우거나 솟대를 세워 자연스럽게 마을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마을 후면에 해발 441m의 설화산이 우뚝 서있고, 그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몇 개의 가닥을 뻗어내려 마을 주변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그 산줄기 중 하나는 마을의 남쪽에 불쑥 쏫아 면잠산이 되었다.면잠산의 한 능선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 앞쪽에서 작은 동산을 만든것이 바람동산이다.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 앞에는 송덕비, 장승, 솟대가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표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정려는 원래 다리를 건너 마을 안에 있었으나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정려 또한 선조의 선행을 누대에 걸쳐 모범으로 삼으려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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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시설물이 물레방아와 정자이다. 물레방아는 노동공간으로 마을의 중요한 공동생활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일정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마을어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정자를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지어 놓은 유희시설이지만 반드시 유희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경지 가까이에 세운 것은 농민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쉴수 있는 휴식장소로 이용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마을 안 경관은 안길을 중심으로 샛길들이 이어지면서 돌담과 집들이 다른 마을엣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거의 모든 담장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의 지질구조는 땅 밑을으로 일정한 지층에 이르기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을 걷어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은 것이다.
마을 안에는 2개의 정자나무(亭子木)가 있다. 하나는 마을 안길을 들어서면 샛길이 뻗어지는 고삳에 자리잡고 있고, 또 하나는 마을 후면의 가장자리인 개천 변에 있다. 안에 있는 것은 마을 동제나 마을 축제를 할때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 신성시되는 공간이다.
마을 안의 집들은 모두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사랑마당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각각 특색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재고택, 송화댁, 교수댁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고 이 마을의 대표적인 정원인 만큼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면 좋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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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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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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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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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쪽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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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신창댁은 병사댁이라 불리워지던 택호가 바뀐것이다. 신창댁이라는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씨의 부인인 보성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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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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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의 묘소는 외암마을의 서쪽 100여m떨어진 구릉에 서향으로 자리잡고있다. 외암 이간은 1727년 윤 3월 14일에 별세하였고 그해 5월에 온양군 유곡에 장례를 치렀다가, 1961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비의 전체높이는3.75m이다. 비문은 지돈령부사 홍직필이 짓고, 전판돈령부사 윤용구가 썼으며, 외암 이간의 6세손이며 참판을 |
지낸 이정렬이 글을 새겼다.원래 신도비는 묘비의 일종으로 높은 벼슬이나 학문이 출중한 인물에 한하여 무덤 근처나 큰 길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세워 두는 것이다. 외암선생 신도비의 경우에도 마을의 서쪽에 있는 외암 이간 묘소의 50여m전방 속칭 삼상당의 평평한 대지에 세워졌던 것이 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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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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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동천 석각은 높이 52cm, 너비 175c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새겼다. 끝에는 세로로 이용찬서(李用瓚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을 새긴 이용찬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이며, 건재 이욱렬의 셋째 아들로 이승만정권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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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 건물 안에는 명정 현판과 정려기가 있는데, 명정 현판에는 '열녀안동권씨지문(烈女安東權氏之門)'이라 새겨져 있다. 열녀 안동권씨는 진사를 지낸 권연(權淵)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다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예안이씨 가문의 이용덕에게 시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용덕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후손이며, 퇴호거사 참판 이정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집간다음해에 남편이 |
15세가 되면서 요절하였다. 청상과부가 된 안동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변변치 못한 제물이지만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고, 나아가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다. 평생 과부로 지내다가 나이 86세가 되어 조카인 이홍선을 아들로 삼았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 이홍선의 동생인 이득선의 아들을 손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켰다. 안동권씨 부인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문교부와 문공부에 특별히 천거하여 표창장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려기는 안동권씨의 조카인 이득선씨의 부탁으로 1978년에 전원식씨가 글을 짓고 최병무씨가 글씨를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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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사는 원래 외암 이간이 강학을 하던 외암정사(巍巖精舍)였다. 조선숙종 33년 (1707)에 세운 외암 정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혹은 수암 권상하의 글씨라고도 함) '관선재(觀善栽)'라는 편액 때문에 관선재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의 [온양군읍지]에서는 천서 윤혼과 외암 이간이 이곳에서 서로 강학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외암선생이 별세한 다음 한참을 지나 1820년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지자 향유들이 그를 관선재에 배향하면서 외암서사(巍巖書社)라고도 일컬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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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대원군 때 서원이 철거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외암서사를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고, 공주의 마곡사에서 불상을 모셔다가 안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선재에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333호 외암 선생문집 판각 307매가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강법사(講法寺)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얼마전 보수할 때 '숭정후세삼을유삼월이십일일묘시중수상량(崇楨後歲三乙酉三月二十一日卯時重修上樑)'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량문으로 1765년 (영조 41)에 크게 보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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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龍湫)는 송악면 강당리의 안쪽 멱시 아래 냇가에 있는 못이다 옛날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바위에 '산고무이동침화양(山庫武夷洞沈華陽)' 여덟자를 새기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동침화양의 글자를 거꾸로 따서 양화담(陽華澹)이라 하여 널리 선전하였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인근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인데, 예전에도 외암리의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추의 바위 이곳 저곳에 외암리 출신 선비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외암 이간의 외암기에는 석문용추(石門龍秋)라는 표현들이 보이고 있으며 한시 외암오수에도 용추가 포함되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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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프로그램 |
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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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체험 |
마을도착(10:30)
마을소개(10시30분~12시)
중식(12시 ~13시)
체험
전통민속체험
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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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4~6월 |
모내기, 씨앗파종하기, 감자심기, 고구마심기, 냉이, 달래, 쑥 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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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7~8월 |
옥수수 따기, 밤 호박 따기, 감자 캐기, 물총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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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9~11월 |
고구마캐기, 추수체험, 호두따기, .메뚜기잡기, 땅콩캐기, 고구마구어먹기,감자구어먹기.옥수수구어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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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2~3월 |
연만들기, 썰매타기, 김장하기, 팽이만들기, 캠프파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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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체험 |
인절미, 솟대, 풍물, 염색, 두부, 모형곤충, 다식, 혼례복, 다도, 한지부채, 서예, 연만들기, 팽이만들기, 썰매타기, 조청한과, 사계절김치 담그기, 메주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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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민속체험 프로그램 |
널뛰기, 팽이치기,굴렁쇠굴리기, 제기차기, 곤장맞기,링/투호던지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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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 체험 |
전통이 살아 숨쉬는한옥(기와,초가)에서 일상의 피로를 풀고 옛 정취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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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체험(단체) : 중식포함 18,000원 - 1박2일(단체) : 3식 포함 38,000~ 45,000 - 2박3일(단체) : 7식 포함 68,000 ~ 9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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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상설체험 으로 운영] - 한지부채꾸미기. 모형곤충 만들기. 아기솟대 만들기 장소 : 외암마을 체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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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체험으로 운영] - 가족. 연인. 신혼. 들이 기념행사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습니다. 장소 : 외암민속마을 민속관 상류층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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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주말행사로 조청 만드는 과정 과 조청을 이용한 한과 전통소주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접해보고 저렴한 가격으로 시식과 구입이 가능 하다. 장소 : 마을입구 물래 방앗간 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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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체험으로 운영] - 방문객을 위한 다듬이 체험 장을 만들어 마을 어른들의 정겨운 다듬이 소리를 들어보고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장소 : 외암민속마을 민속관 중류층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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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매주주말에 마을청년들이 떡메체험 장을 운영한다. 직접 떡메도 처보고 만들어도 볼 수 있고 저렴 한 가격으로 인절미도 구입 할 수 있다. 또한 부녀회에서 만드는 전통 식혜도 저렴한 가격 으로 맛 볼 수 있다. 장소 : 외암민속마을 민속관 앞마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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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민속놀이마당 으로 언제든 전통 놀이를 줄길 수 있는 놀이 체험장 - 널뛰기.그네타기.줄타기.투호던지기.제기차기.링던지지.곤장체험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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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망]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국도21호(20km)
신도리코앞사거리
읍내동사거리
국도39호(10km)
송악외곽도로
외암민속마을
서해고속도로 : 서평택IC
국도39호(28km)
온양온천(6km)
송악나드리
읍내동사거리
송악외곽도로
외암민속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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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서울역
온양온천역(05:15 - 19:50 30분 간격, 1시간 30분 소요) 장항선 철도:온양온천역
서울강남터미날
아산(06:30 - 21:00 30분 간격, 1시간 30분 소요)
대전동부터미날
아산(07:05 - 19:55 30분 간격, 1시간 30분 소요)
청주터미날
아산(06:50 - 21:10 30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인천터미날
아산(06:00 - 20:00 30분 간격, 2시간 00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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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교통]
시내버스(온양)
강당골(06:20 - 20:50 40분 간격, 40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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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어린이ㆍ청소년ㆍ군인 |
어 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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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인 |
1,000원 |
2,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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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
800원 |
1,6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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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단체입장: 단체 인솔자에 의하여 30인 이상이 동시에 입장하는 경우 |
| ※ 관람료 면제
- 아산시민 (신분증 지참)
- 보호자가 동반한 7세 이하의 어린이
- 주민등록증 또는 경로우대증을 소지한 65세 이상의 노인
- 국가보훈대상자에 대한 예우 및 지원과 관련된 법률의 규정에 의한 국가보훈대상자 및 그 배우자와 유족 중 국가유공자증서 소지자.다만, 상이군경 1급에 해당하는 국가유공자의 경우에는 보조자 1인을 추가한다.
- 장애인복지법 제2조의 규정에 의한 장애인으로서 시장이 교부한 장애인 수첩을 소지한 사람. 다만, 장애1급,2급,3급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보조자 1인을 추가한다.
- 공무수행을 위하여 출입하는 공무원
- 지방자치단체가 주최하는 행사 및 설ㆍ추석 당일 관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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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은 입구에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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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절기/하절기 관계없이 입장시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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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544-8290 / 041-541-08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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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수용인원 |
6인이하 |
10인이하 |
15인이하 |
25인이하 |
25인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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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명 |
40,000원 |
60,000원 |
100,000원 |
200,000원 |
1인당 8,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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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찜질방 사용료 1일: 5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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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 저녁에 달이 떠서 망월을 할 무렵이면 마을 뒷동산이나 마을 옆 또는 마을앞의 들판 등에서 달집태우기를 한다. 마을 청소년들이 산에 가서 잎이 붙은 푸른 소나무를 베어다 세우고 그 주위에 가가호호에서 모아온 짚단을 세우고 새끼로 붙들어 매면 마치 노적처럼 된다.
이렇게 마을공동으로나 마을을 동서 또는 남북으로 나누어 각기 한개씩의 달집을 세우기도 한다. 이 달집에 달이 떠서 막 보일락말락 할때에 불을 붙인다. 화기는 형천하여 환하게 멀리까지 비친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농악을 울리며 달집둘레를 돌며 즐겁게 춤을 추고 환성을 지르며 한바탕 즐겁게 논다.
이 달집이 훨훨 잘 타야만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하며, 만일에 달집에 화기만 나고 도중에 불이 꺼지거나 잘 타지 않으면 마을에 액운이 들고 농사도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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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전래의 연날리기는 연줄을 한없이 풀어낼 수 있는 주위에 장애물이 없는 청계천변(서울), 개울가, 동산(시골)에서 많이 날렸는데 그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부터 대보름까지가 본격적이며 특히 대보름 며칠 전에는 구경꾼들의 성원과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다.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며칠 전에 큰 성황을 이루지만 대보름이 지나면 날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풍속이다. |
대보름이 되면 액(厄)연(鳶)띄운다' 하여 연에다 "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送厄"이니, "送厄迎福"이라고 써서 얼레에 감겨있던 실을 모두 풀어 멀리 날려 보낸다. 이것을 '액연 띄운다', 혹은 '액연 날린다'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연을 날리는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되었다. 이는 한국의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기에 연날리기를 하면 농사에 지장을 줄 것으로 보고,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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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정월 대보름 하루전 열 나흗날 밤이 되면 으레 쥐불놓는 풍속이 내려오고 있다. 논두렁 태우기라고도 한다.이 날 보름달이 뜨면 아이들이 횃불과 깡통을 들고 마을 앞으로 모인다. 빈 깡통 사방에는 구멍이 숭숭이 뚫리고 철사로 양쪽귀를 긴 끈으로 매단다. 그 속에는 오래 타는 삭장개비나 솔방울을 넣은 다음 불쏘시개를 넣고 허공에 빙글빙글 돌린다. 아이들은 '망월이야' 외치면서 밭두렁과 논두렁 마른 잔디에 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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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쥐불놀이는 쥐구멍 속에 든 쥐를 잡고, 마른 풀에 나붙은 해충과 그 알을 죽이뿐 아니라 타고 남은 재가 다음 농사의 거름이 되어 곡식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한 소망을 담고 있다. 쥐불의 크기에 의해 그 해의 풍년 또는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여 각마을에서는 다투어가며 불의 크기를 크게 하는 풍습이 있다.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기타 다양한 전통풍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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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도 장연 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즐겨온 민속놀이. 행사에 앞서 벌이는 윷놀이를 통해서 그해 농사의 흉풍을 점치는 까닭에 이와 같이 부른다. 대보름날 아침 '산패'와 '들패'로 나눈 마을의 젊은이들은 각기 2~3명의 대표를 뽑으며, 이들은 수숫대로 만든 작은 윷을 가지고 시절윷놀이를 벌인다. |
사람들은 자기들 대표가 윷가락을 던질 때마다 응원의 함성을 지르고 농악대는 잦은 가락을 울려서 분위기를 돋운다. 승리는 미리 작정해둔 점수를 먼저 딴 쪽에 돌아가는데 산패가 이기면 밭농사가, 들패가 이기면 논농사가 잘 되며 양쪽이 비슷한 점수를 얻으면 두 가지 농사가 다 잘 되리라 여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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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음력 7월7일은 견우와 직녀가 1년에 1번 만난다는 전설에서 나왔습니다. 이 때는 바쁜 농사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무더위와 장마도 끝날 때지요. 이런 때 잠시 몸과 마음을 쉬고 주변을 정리하는 날로 삼았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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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칠석날 옷과 책을 말리면 일년 내내 좀을 먹거나 상하는 일이 없다는 풍습이 있어요. 또 이 날 저녁에 처녀들은 바느질 솜씨가 늘길 빌었고, 소년들은 직녀성과 견우성을 제목으로 해서 작시를 했어요. 또 부녀자들은 우물을 깨끗이 치우고 떡을 해서 샘제를 지내거나 칠성제나 칠석제를 지내 집안과 자녀를 위해 빌었대요.
[음식] 칠석날은 햇것을 맛보는 날이었어요. 새로 난 고추와 가지 등 나물을 무쳐 먹었대요. 이 때는 호박이 잘 열고 오이와 참외가 많이 나올 때이므로 호박부침을 해서 칠성님께 바치기도 했대요.
[견우와 직녀] 하늘나라에서 옷감을 짜는 직녀와 소를 돌보는 견우, 두 사람의 이야기 알죠? 너무 좋아해서 둘이 붙어만 있고 일을 팽개치자 옥황상제의 노염을 사서 일년에 한번만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랍니다. 둘을 위해 까마귀와 까치들이 은하수에 다리가 되어준 아름다운 이야기죠. 실제로 칠석이 되면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는 것처럼 사람 머리 위로 높이 떠오른대요. 그리고 이 날은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경우가 많은데.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라는 전설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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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서(隨書)" 신라전에는, 8월 15일에는 풍악을 잡히고 관원들로 하여금활쏘기대회를 거행하여 상품으로 삼배를 주었다 하였고, 또 당나라 문종때 당나라에 와 있던 왜국인으로서 "원인" 이라고 하는 중이 지은 "입당구법순행예기 (入唐求法巡行禮記)"에는 산동(山東)지방에 머무르고 있는 신라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고 썻다는 기록 중에 |
절에서 떡을 만들고 8월 15일의 명일놀이는 오직 신라에만 있는데, 그곳 늙은 중의 말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 날을 명일로 삼고 일반 백성들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고 가무(歌舞)로써 즐겁게 노는데,이 절도 역시 신라사람의 절이므로 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여 8월 15일에 명일놀이를 한다고 하는 기록도 보인다. 이 한가위를 "추석"이라고도 한다.8월 15일을 "가위"라고 하고, "추석"이라고도 함은 문학작품에도 나타남을볼 수 있다. "가위"란 말보다 "추석"이란 말이 훨씬 후대에 와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타 마을행사는 청년회 및 부녀회 주관으로 실시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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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 인근에 있는 광덕산과 설화산에 지천으로 깔린 산나물은 봄의 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고, 호박으로 만든 떡과 고지 등이 있고, 호박채를 얹은 칼국수와 잔치국수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다. 무엿과, 꿀편, 도토리묵등은 여느 농촌이나 다를 바가 없다.
두견주ㆍ백일주ㆍ연엽주와 같은 민속주는 종류가 다양하다. | |
특히 1990년 12월 31일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연엽주(蓮葉酒)는 궁중에서 제조되어 임금에게 진상되던 것이라 한다.
어죽(漁粥)은 인근의 별미였다. 여름철 밤에 민물고기를 잡는다 하여 '밤고기'라 하는데, '중태미', 미꾸라지, 피라미, '구구락지', '통빠가사리', 메기, 붕어 등을 넣은 뒤 고추장을 풀고, 쌀을 넣어 끊인다고 한다. 여기에 국수와 수제비, 라면사리를 넣으면 야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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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그만이다. 모두 담백한 충청도 음식의 참맛을 확인할수 있는 먹거리들이다. 특히 건재고택은 한국 음식의 3대 명가라는 입소문이 퍼져있어서 흥미를 끈다. 이 모든 먹거리는 저자거리가 조성된 이후를 기약해야할 처지인데, 조성된 이후에 외암 또는 온양의 특색을 유지ㆍ발전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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