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금곡교를 지나 곡성읍내에 도착한 시간이 열 시쯤. 조금 늦은 편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김현준기자와 손동명씨를 태우고 동악산(動樂山·735.3m) 주차장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 안에 가득 차는 암반계류. 배낭을 챙긴 여섯명의 일행들이 물가로 내려간다.
도림사 아랫자락의 청류동(淸流洞)계곡을 “삼남 제일의 암반 계류”라고 부르며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계곡의 암반을 바라본 사람들은 느낄 것이다. 마치 두타산 무릉반석을 보는 것처럼 길이만도 200여m에 이르고…. 반석에는 수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암반계류의 절경마다 일곡(一曲), 이곡(二曲)에서 구곡까지 새겨 놓았고, 청류동, 단심대(丹心臺), 낙락대(樂樂臺) 등의 지명뿐 아니라 요산완초 음풍농월(樂山玩草 吟風弄月), 청류수석 동악풍경(淸流水石 動樂風景) 등 수많은 글씨들과 함께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터널을 이루는 곳이지만 지금은 나뭇잎마저 져버려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을 밟으며 한참을 오르자 길 위쪽에 도림사 부도밭이 보인다.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던 나말여초 때 만들어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나 지리산 연곡사의 동부도, 북부도, 그리고 여주 고달사지의 부도들과는 거리가 먼, 소박하기 짝이 없는 다섯 기의 부도를 바라보며 사람들의 운명이나 종교의 운명 역시 시대의 변천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름답다고 볼 수 없지만 이 부도를 만들 때 쏟은 정성이나 불심은 얼마나 지극했겠습니까?” 양병완선생의 말을 들으며 소박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 또한 남다르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된다. 부도밭에서 200여m쯤 오르자 도림사에 이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도림사는 공사 중이었다. 보광전 앞에 진흙더미가 쌓여있었고 요사채 툇마루 앞에 스님 한 분이 서서 공사 중인 인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기와조각이나 철근들이 널려있는 도림사 경내를 바라보며 도림사의 역사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동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도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로서 660년 태종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창건설화로는 582년경 신덕왕후가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신덕사라고 지었는데 660년경에 원효가 사불산 화엄사로부터 이곳으로 와 절을 개창하고 도림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 절에 도인과 고승들이 숲 같이 모여들어 도림사(道林寺)라 불렀다고도 한다. 도림사는 그 뒤 헌강왕 2년(876년)에 도선국사가 중건하고 지환스님이 중창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아있는 절집으로는 중심 건물인 보광전을 비롯, 나한전, 명부전, 약사전, 응진전, 무량수각,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고 조선 숙종 9년(1683년)에 제작된 괘불(掛佛)이 지방유형문화제 제 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 보광전(寶光殿)에는 영조 6년(1739년)에 그려진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아미타불의 땅 극락정토에서의 법회를 그린 그림도 있다. 삼베에 채색 그림인데 키 3m에 폭 2.78m다. 화면 가운데에는 아미타불과 두 협시(挾侍)보살―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있고 주위로 여덟 보살과 두 나한이 둘렀으며 그것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 그리고 팔부신중(八部神衆)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도다.
키 모양의 광배(光背)를 지닌, 모든 중생 제도(濟度) 대원(大願)의 아미타불은 네모진 얼굴에 차분한 표정이다. 머리 가운데는 타원형을 반으로 자른 듯한 중앙 계주(?珠), 육계(肉?) 둘레 구슬이 장식되어 있고 육계에 장엄(莊嚴)한 둥근 정수리 계주에서 피어오르는 광명이 양옆으로 길게 와운문(臥雲紋)을 이루고 있다. 약간 아래에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은 왼손을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자비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혜로 삼악도(三惡道)의 중생을 건진다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경책(經冊)에 연꽃을 들고 있다.
주변보살들은 화려한 무늬의 천의(天衣)를 입고 연꽃을 든 자세나 비구형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석장(錫杖)과 보주(寶珠)를 들고 있다. 이들을 호위하는 사천왕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검을 든 지국천왕(持國天王)은 털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가늘지만 유려(流麗)한 필선(筆線)으로 그린 이 그림은 밝은 홍색과 따뜻한 녹색이 주조색(主潮色)이다.
그 파스텔 느낌의 분위기 속에 극락의 모든 신들이 등장해 설법을 한다. 그리고… 천운으로 극락에 간 내가 그걸 보고 있다. 아! 그림의 메시지는 그것이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화원(畵員) 채인 등 네사람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보광전에 들어가 참배를 드리려 했지만 문이 잠긴 보광전에선 스님의 독경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응진전(應眞殿)으로 들어선다. 이 응진전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원효대사가 성출봉(聖出峰) 아래에 길상암이라는 암자를 짓고서 원효골에서 도를 베풀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16아라한(阿羅漢)이 성출봉에서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깨어난 원효가 곧바로 성출봉에 올라가니 한 자 남짓한 아라한 석상들이 솟아나 있었다. 원효는 열일곱번에 걸쳐 성출봉을 오르내리며 아라한 석상들을 모셔다 길상암에 안치하였다. 이후 육시(六時; 불교에서 하루를 여섯 번으로 나눈 염불독경의 시각으로 신조, 일중, 일몰, 초야, 중야, 후야) 때만 되면 하늘에서 음악이 들려 온 산에 고루 퍼졌다. 도림사 응진전에 모셔진 아라한들이 그 때의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지어낸 소리인 듯하다.
사실이라면 국보가 되고도 남았을 것 아닌가? 예전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없다. 형제봉 아래 있었다는 길상암 또한 폐사가 되었고 그 자리에 작은 암자가 새로 생겼다. 이젠 산으로 올라가야지. 중얼거리며 신발끈을 고쳐맨 후 오도문(悟道門)을 나설 때 한 마리 암캐가 곁으로 다가왔다. 청류동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100여미터쯤 올랐을까? 암반에 2단폭포가 흘러내리는 청류팔곡이 나오고, 20여분을 또 오르자 길이 갈라진다.
그런데 웬걸? 오도문에서 보았던 그 개가 지금껏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마치 유홍준선생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썼던 대흥사 유선여관의 개처럼 이 개 역시 우리를 안내하러 온 것이 아닐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조금 앞서 오르다가 내려갈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는 우리가 쉬면 저만치서 쉬고 우리가 올라가면 우리보다 앞서 가고… 심상치 않은 놈이다.
그 개의 이름을 지어본다. 도림사에 살고 있으니 도순이라고 할까? 아니면 고상하게 도림이라고 부를까? “같이 가자”고 말하면 천천히 가고 “잠시 쉬자” 하면 쉬었다 가는 도림이에게 “내려가면 맛있는 거 사줄께 아이스크림 사줄까” 하고 내가 말하자 황명화씨는 “아니야 내가 피자를 사줄께” 한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가고 내 마음도 덩달아 흘러가고… 이 산 속을 오르면서 나는 겨울이 깊어감을 안다.
산죽이 드문드문 나타나 푸르름을 드러내고 밤새 내린 첫눈이 그 위에 살포시 앉아 흰빛을 보여주는데 길 위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고 가는 나여! 어느 길을 따라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道)의 본뜻은 길이며 사람들은 이를 처리하는 방법을 길이라고 표시하였고 하늘을 처리하는 방법을 천도(天道)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길을 노자는 “도는 아득하게 멀어 형용하기 어렵다”면서도 “없는 듯 하면서 있고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물체를 도”라고 하였으며 니체는 “중대한 문제는 항상 길 위에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가는 길[道]은 과연 존재하는가.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자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있다. 건너편으로 형제봉이 보이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나무들마다 희고 흰 눈꽃이 피어있다. 그제서야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서 흘린 땀들을 씻어주고, 우리는 옷을 한 꺼풀 벗어 배낭에 넣고, 양병완선생이 가져온 귤로 목을 축인다. 먼저 온 사람들은 올라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한다.
“나 못가겠어 먼저 내려갈께.” “아냐 여기까지 와서 내려가면 나중에 후회할 껄.” 나중 말에 그들은 먼저 올라가고 우리 일행의 나머지들은 그제서야 도착한다. 다시 잠시 오르자 길이 능선으로 접어들면서 팻말 하나가 나타난다. 아래로 내려가면 월봉리에 이르고 위쪽으로는 동악산과 신선바위가 나온다. 150미터쯤 올랐을까? 신선바위와 동악산 갈림길이 나오고 우리들은 신선바위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등산로를 개설한 지 오래지 않은 듯 길섶의 나무들이 잘려 있다. 산자락을 휘잡아 돌아가자 신선바위에 이른다. 30평쯤 되는 이 바위로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놀면서 바둑을 두었단다. 옛시절에는 이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기우제는 정성껏 제물을 차려놓고 올리는 것이 아니고 특이하게도 신을 성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바위에 똥오줌을 누고 아낙네들이 술을 마시며 뛰고 구르면 신이 더럽고 무엄하다고 화를 내면서 뇌성 번개를 내려쳐서 큰비를 내려주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기축옥사로 희생된 곤재 정개청이 한때 이 곡성에서 현감을 지냈는데 그 역시 이 신선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지는 않았는지.
혹시 이 신선바위에 올라 곡성의 구석구석을 바라보지는 않았을는지. 남해쪽으로 흐르는 구름을 보며 나는 신선바위에 몸을 누인다. 이 신선바위에 누워있는 우리 일곱 명이 모두가 신선이 되어 양신선님, 김신선님, 황신선님이라고 서로를 부르는 그러한 시간을 꿈꾸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빨리 깰수록 좋으리. 머얼리 압록 구례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끝자락이 보인다. 신선바위에서 정상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정상이 보이는 아랫봉우리에 서면 남원 광한루 앞을 흘러 오는 요천과 섬진강이 몸을 섞는 풍경이 바로 눈 아래 보이며 고은의 시 섬진강이 그 아래로 깔린다.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옥과의 설산, 광주의 무등산이 지척이다. 조계산, 백운산은 잡힐 듯 가깝다. 이 곡성의 진산은 배넘이재를 가운데 두고 북봉과 남봉(형제봉)으로 되어있다. 도림사 창건 당시 풍악의 음률이 온 산을 진동하였다고 하여 동악산이라고 부르며 옛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모여들어 즐거이 노닐면서 풍악을 울리고 시를 지어 그 소리들이 산을 울린다고 하여 동악산이라고도 한다.
다른 전설로는, 곡성고을에서 장원급제자가 나오면 이 산에서 노래가 울려 동악산이라 했다던가. 주용기씨가 싸가지고 온 떡으로 시장기를 메우고 신선바위로 내려갈 무렵, 한동안 보이지 않던 도림이가 나타났다. 등산객 여러 팀이 앞서 지나갔는데도 우리를 기다리다가 따라 내려오는 도림이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팍팍하지가 않다.
그래,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일, 사소한 일에 감동을 받는다. 바위 숲을 헤집고 철계단을 뛰어내리며 따라오던 도림이는 배가 고팠는지 양병완선생이 건네주는 누룽지사탕을 잘도 받아먹는다. 가파른 능선길에서 골짜기로 길은 이어지고 옛시절 한때 집터였음직한 곳에 도착해서 잠시 쉰다. 언제쯤 쌓였을까? 허물어져 가는 돌담이 남아있고 그곳에서부터 길은 평탄하다.
청류팔곡에 일행은 남아있고 나만 먼저 내려와 아무도 없는 길섶의 겨울나무 숲속에 앉아 바람소리를 듣는다. 바람은 아직 남아있는 몇 잎의 나뭇잎을 떨군 채 지나가고 있다. 마치 오랜 인연으로 맺어진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산죽나무 우거진 길을 응시하는 도림이를 바라보며 만남과 헤어짐을 생각한다. 물소리, 바람소리 뒤섞어 흐르는 골짜기를 내려서 도림사에 닿자 도림이는 요사채 마당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가름하고… 그 사이 절 마당은 언제 그렇게 어지러웠느냐는 듯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글·신정일 사진·김현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