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사년 상 만력 21년, 선조 26(1593년)
1월 8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평양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머리 1천여 급(級)을 베었다. 10여 일 전에 여송이 의주(義州)로부터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기일을 정하고 진군하여 성밖 5리의 지점에 결진(結陣)하였다가, 바라[鑼 꽹과리] 한 번 치는 소리에 삼협(三協 좌(左)ㆍ우(右)ㆍ중(中))의 장수와 군사들이 일시에 성을 포위하고 화구(火具)를 엄중히 설비하여 성중의 집을 태우니 타서 죽은 사람이 심히 많았다. 대군이 기세를 타서 들이치니 적이 흩어지고 쓰러졌다. 낙상지(駱尙志) 등이 죽은 송장을 성 위에서 어지러이 던지니 적병들은 중국 병사가 날아서 성으로 들어온다고 여겨 더욱 당황하고 겁내어 모란봉의 토굴에 모여 보존하며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다. 중국 병사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두울 때에 이르러 군사를 거두었더니 행장(行長) 등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밤중에 가만히 도망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여송이 알고 군사들로 하여금 추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중화(中和)로부터 개성부(開城府)에 이르기까지 각처에 주둔한 적이 일시에 물러갔다. 여송이 배신(陪臣) 유성룡(柳成龍)ㆍ이덕형(李德馨) 등을 보내 황해ㆍ경기 일로(一路)의 말먹이와 군량을 독려하여 마련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관군이 성에 다다랐을 때에 적의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성에 올라갈 수 없었는데, 중국 병사가 죽어서 시체가 쌓여 안팎이 평평하게 된 연후에 대군이 성에 올랐다. 사상(死傷)이 이지경에 이르러도 제독의 본영에는 조금도 놀라거나 시끄러움이 없다.
○ 감천궁 속에 선마가 비치니 / 甘泉宮裏照宣麻
50장군이 모두 복파로다 / 五十將軍盡伏波
사람들은 주 선왕의 새 예악을 바라고 / 人望周宣新禮樂
하늘은 기자의 옛 산하를 열었네 / 天開箕子舊山河
포차가 밤에 붉으니 비린 피가 흐르고 / 砲車夜赤流腥血
옥장에 봄이 푸른데 개가를 듣네 / 玉帳春靑聽凱歌
멀리서 상상컨대 임금님 얼굴에 기쁜 빛이 많으리니 / 遙想天顔多喜色
삼한에 이로부터 전란이 종식되리 / 三韓從此息干戈
이산해(李山海)가 평해(平海)에 귀양 가 있으면서 승전의 소식을 듣고 지었다.
○ 늙은 조개가 볕을 쪼임은 추위를 겁냄인데 / 老蚌親陽爲怕寒
들새는 무슨 일로 괴롭게 서로 건드리나 / 野禽何事苦相干
몸이 구멍 속을 떠났으매 붉은 태가 부서졌고 / 身離窟穴朱胎碎
모래 여울에서 힘이 다되었으매 푸른 날개가 상했네 / 力盡沙灘翠羽殘
입을 닫고 있을 적에 어찌 입을 열 때의 화를 알겠으며 / 閉口豈知開口禍
머리를 들이밀 적에 어찌 머리 나오기 어려울줄 알았으랴 / 入頭那解出頭難
어부의 손에 함께 들어갈 줄 일찍이 알았더라면 / 早知俱落漁人手
구름과 나는 놈 물에 잠긴 놈 각기 스스로 편히 할 것을 / 雲水飛潜各自安
중국 장수가 평양을 돌아보다가 인하여 조개와 황새의 사세에 비유하여 이 시를 지었다.
○ 이여송이 평양에서 군사를 쉬어서 장차 경성으로 향하고자 하면서 군량과 말 먹이를 마련하는 문제로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니 다음과 같다.
천조 제독부(天朝提督府)는 국법을 신칙하고 태만한 것을 경계하여 타이르노라. 성천자(聖天子)의 명령을 공손히 받들어 생각건대 너희 작은 나라가 왜구에게 함몰되어 임금과 신하가 파천하고 인민이 도망하여 피하였으므로, 특히 대장에게 명하시어 가 진(鎭)의 관군을 거느리고 멀리 산과 바다를 넘어서, 위태롭고 빠진 것을 건져주려고 12월부터 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조선국 체찰사(體察使) 수신(首臣) 유성룡ㆍ윤두수(尹斗壽) 등이 복수의 일념으로 섶에 눕고 쓸개 맛보는 것을 마음으로 삼지 아니하고, 수치를 씻고 흉한 것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사사 집에서 편안히 지내면서 마음대로 술을 먹고 스스로 즐기니 천조에 대하여 태만할 뿐이 아니라 또 국왕으로 하여금 예법에 어긋나고 위엄을 없어지게 함이 자못 심한 바가 있다. 또 관군이 들에 둔치고 노숙하면서 목숨을 버리고 몸을 바쳐서 평양을 탈환하였으니, 너희 나라는 나라가 없다가 나라가 있게 되고 집이 없다가 집이 있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만약 죄를 따진다면 군량이 부족하고 말먹이가 없어도 가만히 앉아서 관망하기만 하여 군기(軍機)에 어긋나고 태만하였으니, 천자에게 상소하여 아뢰고 군사를 철수하여 요동으로 돌아가서 너희들로 하여금 죽어서 나라가 있다가 다시 나라가 없어지는 데 이르고 집이 있다가 다시 집이 없는 것을 슬퍼하도록 할 것이나, 본부(本部)는 충정(忠貞)한 성질을 타고 났으므로 마음을 위주(爲主)로 하여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국가의 대체를 단단히 지켜 군사가 평양에 주둔하며, 백성을 어루만져 계책을 내어 때를 따라 진퇴하고 기회를 헤아려 행동하여 너희의 국가를 안정시켜, 바로 일이 타첩(妥帖)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기다려 천자께 훈령을 청하여 복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 패문(牌文)을 내니 조선의 대소 배신(陪臣)은 수상(首相)에게 전해 알려서 빨리 부(府)로 달려와서 진격할 계책, 소용될 군량과 말먹이를 마련할 의론을 들어라. 만약 다시 어기고 태만하면 정히 중한 법에 부쳐 결단코 어름거리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모름지기 받아보도록 하라.
○ 청정(淸正) 등의 적이 함경도에 있다가 평양의 패전을 듣고는 즉시 30여 진의 군사를 철수하여 밤낮으로 물러와서 영동ㆍ영서를 지나 영남으로 흘러 내려가는데 지나는 곳마다 적지(赤地)가 되고 산천도 다 변하다. 청정이 왜놈 중에서도 흉하고 독하기가 가장 심하므로, 전후로 지나는 땅을 분탕질하는 혹독함과 살육과 약탈의 비참함이 다른 적에게 견줄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이른바 산천도 다 변한다 함은 산을 만나면 산을 파서 길을 통하고 물을 만나면 물에 다리를 가설하는 일들이다.
○ 중국 장수가 또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각 도의 관병과 의병을 모아서 경성 수복에 힘을 합하자 하다.
○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적을 죽산(竹山)에서 토벌하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다. 처음에 충청ㆍ전라에 군사를 조발하여 옛날에 당 나라의 방관(房琯)이 패군 한 계책을 본받아서 전차(戰車)와 마소를 준비하여 가더니, 이때에 이르러 죽산에 진군하여 거진(車陣)을 베풀어 학익진(鶴翼陣)을 쳐서 들어갔다. 적병이 마주 나와서 가로로 충돌하여 어지러이 작살(斫殺)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적이 불을 질러 수레를 태우니 수레에 들었던 군사가 모두 타 죽고 변이중은 겨우 몸만 탈출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구원하여 적의 머리 몇 급을 베다. 대개 수효가 이와 같다한 것이요 상세한 것은 먼 데 있어 알 수 없다.
○ 조정에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경성을 공격할 일로 체찰사 정철(鄭澈)로 하여금 여러 도의 관병ㆍ의병을 징발하게 하였다. 정철이 전라도 좌ㆍ우의병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달려가게 하니, 호남ㆍ영남의 선비들이 상소한 것은 다음과 같다.
무릇 일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기회가 있는 것이니, 미록 하늘에 달려 있다 하나 사람이 실로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장차 올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이미 이루어진 세력을 헐어버리면 다만 일에만 유익함이 없을 뿐 아니라 화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각 고을이 함께 무너졌는데 전라 한 도만이 홀로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좌우 의병이 있어 막아 가려준 까닭입니다. 의병이 일어난 처음에 금산(錦山)ㆍ무주(茂朱)의 적을 쫓아서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서로 약속하여 상도(上道)로 함께 달려가려 할 즈음에 영남에 주둔한 적이 바야흐로 치성하였습니다. 의병장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의 군사가 감히 홀로 당하지 못하여 정성을 다하고 슬피 호소하여 전라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두 의병장이 군사를 이끌고 거창(居昌)ㆍ합천(陜川) 등지로 달려가서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에 혹은 산성에 둔쳐서 진주(晉州)의 적을 쫓는 데 협력하였고, 혹은 요로를 지키면서 성주(星州)ㆍ개녕(開寧)을 나누어 공격하여 날마다 싸우지 않은 적이 없고 달마다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이 움직이지 못하여 영남 6, 7고을이 온전히 살게 되었으니 두 장수의 공이 이것으로 보아도 큰 것입니다. 만약 위험을 드날리고 적을 맞아 공격하여 살상한 공이 아니었더라면 6, 7고을은 이미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며, 6, 7고을이 버티지 못하고 왜적에게 들어갔다면 화가 호남으로 왔을 것이니, 호남이 없어지면 국가는 어디를 근거로 하여 회복할 터전을 마련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해에 호남이 마침 풍년을 당하여 창고가 가득 찼으니 이것은 하늘이 국가 회복의 근본을 도와준 것입니다. 북으로 짐바리를 운송하여 길에 연달았고 동으로 양식을 운반하여 끊이지 않게 대어주니, 왜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함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나 객병(客兵)으로 있은 지 한 해가 지나 창고의 곡식이 거의 다되었으니 왜적이 밤낮으로 힘을 합쳐 서로 엿보려는 것이 전일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날에 당하여 이미 이루어진 세력을 인하여 더욱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면 왜적이 감히 6, 7고을에 충돌하지 못하여 호남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요, 호남이 온전하면 경상도의 적이 절로 물러갈 것이요, 경상도의 적이 절로 물러나면 경성의 적이 어찌 홀로 보존되겠습니까. 그런즉 경상도 6, 7고을을 굳게 지켜서 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몰아가지 못하도록 함이 이것이 진실로 경성을 수복할 큰 기회입니다. 일의 공과 실패가 여기에 매였으며 적이 가고 머무는 것이 여기에 관계되니 두 장수의 거취가 중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적을 방비하는 계책이 호남ㆍ영남에서 조금 해이해져서 들어올 틈만 있다면 적이 창고의 재물을 그대로 먹고, 무뢰배를 몰아서 군사를 삼을 것이니 그 걱정을 이루 말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비변사(備邊司)에서 두 장수를 쓸 만하다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오게 한다니 우연히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의병이 한 걸음 물러나면 적병이 한 걸음 나아올 것이요, 의병이 오늘 떠나면 적병이 내일에 올 것이니 6, 7고을이 아침에 도륙을 당하면 전라도가 저녁에 그 화를 받을 것입니다. 호남ㆍ영남의 성세가 서로 의지함과 적병ㆍ의병이 서로 진퇴함이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그 사정을 모르는 이가 없거늘, 묘당의 계책이 도리어 여기에 미치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참으로 군부의 욕됨에 절박하여 장차 어찌 될 사정을 살필 겨를이 없기 때문이며, 군사의 심정은 멀리서 추측하기 어려우므로 이미 이루어진 형세를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듣고 보아 만전할 계책을 생각한다면 두 장수의 울타리를 걷어가지 아니할 것이 분명합니다. 보통으로 말한다면 변방에서 싸우고 지키는 군사를 이끌어 국난에 달려가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근본의 땅을 먼저 생각하고 지엽(枝葉)을 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위태로운 형세로 본다면 호남의 재력이 국가의 위태로움을 붙들 수가 있고, 왜적의 진퇴가 역시 두 울타리의 견고함과 견고하지 못한 데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한갓 경성의 적을 급히 공격하는 것만을 충성이라 하고 울타리를 굳게 지킴이 곧 경성을 수복할 근본이 되는 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울타리를 뜯어 도적에게 아첨하는 실수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존망과 성패가 숨 한번 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렸으니 장차 닥쳐올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이미 이루어진 형세에 어두워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한 도의 대장으로 순찰사ㆍ병사 및 창의사(倡義使)가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혹은 수원에 둔치고 혹은 강화에 진쳐서 수륙의 요로를 질러 막았고, 체찰사와 소모사가 한 도의 정예한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서로 응원을 하고 있으니, 추한 종자들을 다 섬멸할 것을 곧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만 유방(留防)하는 군사가 많지도 않고 울타리도 견고하지 못한 데 어찌 변통할 기회가 없겠습니까. 조치할 방법을 더욱 더하여 바야흐로 떨치는 적의 형세를 막는 것을 진실로 늦출 수가 없는데, 감히 두 장수의 군사를 이동시켜 호남ㆍ영남이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헐어서 왜놈이 충돌할 기운을 내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영남 몇 고을 백성은 두 장수가 간다는 말을 듣고 집을 헐어 가지고 바위 구멍에 들어가 숨는 자가 서로 잇달았고 늙은이와 어린이를 붙들고 사방으로 가는 자가 서로 연달아서 무너지고 흩어질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호남의 백성은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돌아가리까. 회복의 터전이 다시는 여지가 없으니 가만히 생각하매 살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장차 닥쳐올 사세를 살펴 울타리의 군사를 철수시키지 않으시고 이미 이루어진 형세로 인하여 더욱 보존하고 지킬 계책을 굳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다만 두 도의 백성이 도륙을 면할 수 있을 뿐이겠습니까. 장차 국가가 회복할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들은즉 천병이 경계에 들어오자 추한 종자들이 스스로 도망하여 경성의 적이 모두 영남으로 모인다 하니, 마땅히 군사를 엄하게 배치하여 굳게 지켜 합세하여 적을 맞아 쳐서 그 기회를 잃지 않을 뿐입니다. 신들이 진실로 임금의 명령에 순종함이 순(純)이 되고 뜻을 거슬림이 역(逆)이 되는 줄을 알고 있으나, 삼가 오늘의 사세를 보건대 자못 평상시와 다르므로 감히 지엽을 가지고 근본을 보호하는 방책을 들어 전하에게 우러러 호소하니, 삼가 바라건대, 굽어 살피소서. 신들은 지극히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또 체찰사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지금 회복할 형세를 7도에는 믿을 데가 없고 오직 호남 한 도가 회복의 근거입니다. 영남의 적이 항상 삼키려 하여 여러 번 방자히 덤볐으나 지금껏 마구 몰아 충돌하지 못하고 한 귀퉁이가 보존된 것은 임(任)ㆍ최(崔)의 두 군사가 그 요해지를 질러 막아 보거(輔車)의 형세가 되어 방어하는 방책을 설정한 까닭이니, 두 군사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요 국가의 병풍입니다. 지금 근왕(勤王)하려는 행동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나,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서 흉한 놈들이 먹어 들어오도록 한다면 아마도 중흥의 큰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 의로써 말하면 왕실을 호위함이 신자의 직분으로 국난을 급히 여기는 데 먼저 할 바이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호종하려는 계획이 두 장수의 당초의 마음이지마는, 사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영남이 없으면 호남을 잃는 것이요,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회복될 가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도 백성이 두 장수를 만류하고자 하는 것은 감히 한 도를 사사로이 하고 군부를 뒤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할 근거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요 한 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를 가지고 호남에 비교하면 한 몸에 털 하나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한 도의 존망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7도가 함몰된 뒤에는 돈ㆍ곡식ㆍ갑옷ㆍ칼이 모두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이도가 국가에 관계됨이 큽니다. 하물며 지금 멀고 가까운데서 유민들이 귀한 이나 천한 이나 구름처럼 모여들어 전라 한 도로써 목숨을 부치는 곳으로 하고 있는데, 이 도가 또 함락되면 유민들은 어디로 돌아가며 국가는 또한 누구에 의지하여 회복하리오. 두 군사가 올라가는 데는 또 낭패될 사세가 있으니, 지난해 가을ㆍ겨울 사이로부터 두 군사가 영남의 적진에 깊이 들어와서 얼음 얼고 비 오는 속에 매복하고 서리와 눈을 맞는 가운데 서서 적의 총칼을 무릅쓰고 거의 죽다가 살아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역질(疫疾)이 전염되어 죽음이 연이어졌으므로 모든 군사들이 전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한 자가 반이 넘고 유진(留陣)한 자는 피곤합니다. 만약 또 멀리 만리 길을 달려간다면 두 장수의 충성은 비록 근왕하기에 간절하나 군사가 흩어져 남음이 없다면 아마 하상(河上)에서 소요(逍遙)함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이미 난을 방어하는 이익도 없고 또 회복의 효과도 잃을 것이니, 아마도 두 장수가 가는 것은 해가 있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호남이 본래 정예하다고 칭해졌으므로 왜적이 간 곳마다 거칠 것이 없어도 오직 이 도만은 완전할 수 있었는데, 생등(生等)의 망령된 계책으로는 대가(大駕)가 파천하였으니 사세가 서쪽 한구석만 보존할 수 없습니다. 전란의 나머지에 경비도 부족하고 기계도 갖추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오래 머물 곳입니까. 진(晉) 나라의 건업(建業)과 송 나라의 임안(臨按)은 다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와서 마침내 중흥의 업을 이루었는데, 우리나라에 호남이 있는 것은 건업과 임안에만 견줄 것이 아니니 이 도를 완전히 보존하여 회복을 도모함이 오늘의 급무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어리석은 생등의 억측한 계책을 용서하고 살피시어 급속히 임금께 아뢰어 주시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경상도 우순찰사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10월에 진주(晉州)가 장차 함락되려 할 때에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 박성(朴惺)을 보내어 호남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임ㆍ최 두 장수가 호남과 영남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는데 존망과 성패에 기회가 급하다 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서로 잇달아 응원하였습니다.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또한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성주(星州)ㆍ지례(知禮)의 경계에 주둔하여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협력하여 적을 쳐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적이 자못 기운이 꺾여 숨고 나오지 못하므로 한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뢰하여 거의 의각(猗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남 사람이 행재소에서 돌아와서 전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두 의병장을 불러 근왕하려 한다 하매, 두 장수가 기별을 듣고 바쁘게 곧 올라가려 합니다. 본도가 함몰된 나머지에 겨우 보존된 것이 5, 6곳의 피폐한 고을이니, 흉악한 적이 사면에 가득하여 반드시 집어 삼키고야 말려 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호남의 군사가 비록 여기에 머물러 서로 응원하여도 역시 염려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군사를 걷어 물러간다면 적이 응원이 없는 것을 알고 마구 덤빌 걱정이 결단코 아침 저녁에 있을 것이니, 이 도가 이미 함몰되면 호남이 차례로 침범을 당할 것이요,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면 국가가 회복할 근거는 여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생각함이 이에 미치니, 마음이 찢어지려 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조정에서 십분 참작하여 두 장수를 본도에 머물기를 허락하여 보장(保障)을 견고하게 하도록 상세하게 잘 아뢰어 주소서.
체찰사가 또한 사정을 열거하여 급히 장계하니 조정에서 두 의병 부르는 것을 중지하다.
○ 제독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부터 황해도를 지나서 바로 임진강을 건너는데 초마(哨馬)가 회보(回報)하기를, “선봉장 사대수(査大受) 등이 왜적 1백여 급을 창릉(昌陵) 밖에서 잡아 베었다.” 하니, 여송이 크게 기뻐하여 다만 수하의 장관(將官)과 가정(家丁)들만 거느리고 달려서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더니, 적이 유인하여 진흙 속에 몰아넣고 좌우에서 공격하니 용사들이 많이 죽었다. 여송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후진(後陣)이 되어 퇴각하는데 적이 추격하여 앞 고개에까지 이르렀다가 관군이 크게 이르는 것을 보고 달아나 경성으로 돌아왔다. 고사(考事)에서 나온다. 이보다 먼저 선봉 사대수가 부총병(副總兵) 이여남(李如楠)과 더불어 정예한 기병을 뽑아서 거느리고 승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경성 서소문(西小門) 밖에 이르렀다가 적병이 맞아 싸워서 어지러이 죽이니 관군이 패하여 여남이 사령(沙嶺)에서 죽었다 한다. ‘이보다 먼저’ 이하는 들은 바가 고사에서 나온 말과 다르니, 길에서 들은 것으로 믿을 수 없다. 중국 조정의 병부에서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 본국에 보내주어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들에게 주기를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얻었는데, “조선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에게서 족히 충용(忠勇)을 보겠으니 상을 주기를 허락한다. 국왕에게 전유하여 각 도의 장령(將領)을 엄하게 독려하고 힘껏 회복을 도모하여 중국이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라.” 고사에서 나온다.
15일. 성주의 적이 군사를 철수하여 퇴각하여 내려가므로 연로(沿路)에 있던 호남ㆍ영남 여러 군사가 본성에 들어가 점거하다.
○ 각 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아!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지에 뻗쳐 항상 있고, 충의의 마음은 천성에 뿌리 박혀 없어지지 않아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니 어찌 권하기를 기다리랴. 비록 군사의 많고 적음이 같지 못해 소탕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이제 이미 천자의 위엄이 떨쳤으니 어찌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랴. 공손히 생각건대, 성천자께서 우리의 조종이 대대로 충성을 도탑게 한 것을 생각하고 과인이 풀밭에 파천한 것을 민망히 여기시어, 이에 천하 대도독(大都督) 이여송에게 명하여 정예한 군사 수만 명과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의 화포수(火炮手)를 거느리고 이미 본월 8일에 평양성을 쳐서 함락시켜 전성(全城)을 수복하여 왜적 2만여 명을 무찔러 죽이고, 적추(賊酋) 행장(行長) 이하는 찍고 베고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어서 벗어나 도망한 자가 없었다. 원래 본국의 인민으로서 역(逆)을 버리고 순종해 온 자는 일체 죽음을 면하여 모두 복적(復籍)을 허락한다. 황제의 은혜는 천지와 같아서 초목이 다 자라나고, 황제의 위엄은 뇌성 번개와 같아서 부딪고 범하면 타고 부서지지 않음이 없다. 흠차경략 병부시랑(欽差經略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친히 명령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매 무릇 지휘하는 바가 일마다 귀신의 계산과 같고, 찬획경략 병부원외랑(贊畫經略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병부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이 마음을 한가지로 해 협찬하여 적을 멸하기를 맹세하고 본국에 와 싸우면서 격려하고 권유하기를 조목조목 타이른 것이 명백하고 간절하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라면 누군들 감동하지 아니하리오. 또 접견하는 날에 대면하여 군사를 불러 모으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 열 줄의 글을 내려 팔방의 사람들에게 두루 타이르노니, 너희 각 도의 대소 관사(官司)와 초야에 있는 충의의 선비들은 각기 마음을 분발하고 목숨을 바치며 몸을 잊고 순국(殉國)하여 혹은 의병을 소집하여 관군을 돕고 혹은 호걸들에게 타일러서 왕사(王師)을 맞이하며, 혹은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막고 혹은 적이 군량 소송하는 길을 끊어서 무릇 기회에 맞는 바를 모두 스스로 편한 대로 따르기를 허락하노라. 아! 국중의 풍진에 오늘의 충절을 바치면 능연각(淩煙閣)과 운대(雲臺)에 만세의 공훈을 함께 누리리라. 그러므로 이에 타일러 보이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 경상 우병사 김면(金沔)이 졸(卒)하였으므로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를 임명하고, 황진(黃進)으로 충청 병사를 삼고 고언백(高彦伯)으로 경상 좌병사를 삼다.
전라 감사 권율(權慄)이 수원으로부터 군사를 나누어 두 패로 만들어 4천 명을 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산(衿川山)에 둔쳐서 응원이 되게 하고, 스스로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고양(高揚)의 행주 산성(幸州山城)에 나아가 둔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로부터 나와서 바닷가 언덕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쳐서 아울러 응원이 되었으며, 충청 수사 정걸(丁嵥)도 또한 응원 중에 있었다.
2월. 각 도의 인민이 유리(流離)하고 살 곳을 정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송장이 서로 잇달았고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이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ㆍ느릅나무의 껍질ㆍ뿌리ㆍ줄기도 모두 다 없어졌다.
12일. 전라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 산성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이 때에 서북의 적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세력이 더욱 치성하였다. 적이 호남 군사가 강을 건어 요해지에 있다는 것을 듣고 쳐부수려고 생각하고 길을 나누어 나오는데 그 수효가 헤일 수도 없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척후병이 경보(警報)를 알렸다. 권율이 군사들로 하여금 의혹하지 말게 하고 사람을 시켜 탐지해 본즉 성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적병이 가득 차서 호호탕탕하게 세력이 바람과 불길 같았다. 권율이 여러 군사들과 꾀하기를,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다가 문득 적을 만났는데 군사가 서로 대적이 못 되니 어찌 이겨내랴. 만약 한 번 죽지 않으면 국가에 보답할 수가 없다.” 하고, 또 마음을 합쳐 죽음을 같이하기로 모든 장수에게 타이르고 부대를 엄정히 하여 활을 당기고 기다리니 적이 이미 임박하였다. 선봉 1백여 기병이 먼저 이르러 위세를 뽐내더니 조금 있다가 대병이 덮치는데 세력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적이 세 패로 나누어서 나며 들며 번갈아 싸우는데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탄환이 비 오듯 하였다. 우리 군사가 죽도록 싸워서 화살과 돌이 비처럼 내렸다. 권율이 친히 밥과 장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며 배고프고 목마름을 막아 주었다. 묘시부터 유시까지 적병이 세 번 나왔다가 세 번 물러가더니, 마른 달대를 가지고 바람 따라 불을 놓아 목책(木柵)을 태우매 성중에서는 물을 가지고 막아냈다. 적병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며 외성(外城)으로 돌진하매, 승병(僧兵)이 붕괴되어 내성으로 들어와 일진(一陣)이 헤져지고 쓰러졌다. 권율이 칼을 빼어 들고 여러 장수를 꾸짖으매 여러 장수들이 앞다투어 적을 맞아 싸우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저희들의 송장을 모아서 불사르고 달아났다. 머리를 벤 수가 1백 30여 급이 되고 기ㆍ투구ㆍ갑옷ㆍ칼ㆍ창을 버린 것이 수가 없었다. 한창 싸울 때에 화살이 거의 다되어 진중이 위태롭고 답답하였는데 정걸(丁嵥)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바다로부터 성중에 들여와서 이어 쓰게 되다.
○ 이때에 이여송이 개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선봉장 사대수 등이 행주의 대첩(大捷)을 듣고, 다음날에 그 부하를 보내어 싸운 자리를 둘러보았다. 또 수일간 권율을 만나고자 요청하므로 권율이 진을 정비하여 영접하니 대수가 이르러서 보고는 탄식하기를, “외국에 이렇게 참된 장수가 있구나!” 하다.
16일. 개령(開寧)의 적이 철병하여 퇴각해 내려가다. 호남ㆍ영남의 모든 군사가 어울려서 또 선산(善山)의 적을 공격하다.
○ 권율이 행주로부터 파주(坡州)의 산성으로 군사를 옮겼는데, 경성의 적이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갔다.
○ 이여송이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용산(龍山)에 들어가서 행장(行長)과 강화를 약속하니, 적이 경성에 쌀 2만 석을 남겨 두고 부산(釜山)에 도착한 뒤에 두 왕자를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다. 고사에 나왔다. 용산은 지명이며, 서울 남대문 밖 10리쯤 되는 데 창고가 있다.
○ 경략 송응창이 의주로부터 나와 평양에 머물면서 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화살과 돌 사이에서 스스로 몸을 보존하여 / 矢石之間得自完
풀밭을 걸어 이슬에 자고 또 바람 앞에 밥 먹었네 / 草行露宿且風湌
이웃집에 싸움이 있어도 몸을 버리고 막는데 / 隣家有鬪捐身救
한 집에 다툼이 많은데도 팔짱을 끼고 보는구나 / 同室多爭袖手看
예부 시랑은 어찌 숨으며 / 禮部侍郞安可隱
장단 부사는 어찌도 그리 차가운고 / 長湍府使一何寒
모두 중국을 높일 줄을 모르는 때문이니 / 捴緣不識尊中國
누가 능히 거꾸로 매달린 것 풀어 주는가를 생각하라 / 也念誰能解倒懸
어떤 이는 말하기를, 조관(朝官)들을 비방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 이보다 먼저 영하(寧夏) 유동양(劉東暘)이 패승은(孛承恩)과 더불어 성을 점령하여 반역하였으므로, 황제가 이여송을 보내어 소굴을 소탕하고 다시 우리나라에 보내어 왜적을 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통사(通事) 계연방(桂聯芳)을 시켜서 유동양 등을 소탕하였다는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이르렀다. 배신(陪臣) 한준(韓準)을 보내어 평양의 수복을 아뢰고 겸하여 영하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고, 인하여 선후 조치(善後措置)를 청하였더니 병부에서 황제의 재가를 얻어 유정(劉綎)의 군사 5천을 남겨서 주둔하기를 허락하다. 고사에서 나온다.
○ 행주의 첩보(捷報)가 이르매 권율에게 자헌(資憲)으로 조경(趙儆)에게는 가선(嘉善)으로, 중 처영(處英)에게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에게 관직을 차등 있게 상주다.
○ 본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궁면(弓面)과 화약(火藥) 사기를 허락하기를 청하였더니 병부에서 허락하다. 고사에서 나온다.
28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3월.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을 파면하고 무과 첨지 조의(趙誼)를 임명하여 본도 좌조방장(左助防將)을 겸하다. 어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유민을 진휼하다.
4월. 여름. 선산(善山)의 적이 철병하여 퇴각해 내려가므로 호남ㆍ영남의 모든 군사가 의령(宜寧)에 나아가 진치다.
○ 경성에 합하여 진쳤던 적이 퇴각하여 내려가기로 서로 의론하고, 비밀리 명령하여 항복하였던 백성을 모두 죽이매 미처 피하지 못한 자는 다 죽다.
19일. 경성의 적이 철병하여 한강을 건너 충청도로 흘러 내려가다.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송도(松都)에서 나아와 경성에 진치다. 경기ㆍ충청ㆍ강원도에 주둔하였던 적이 일시에 내려갔다.
○ 이여송이 경성에서 군사들을 휴식시켜 가지고 남으로 내려가서 새재를 넘으려 하였다. 심유경이 용산(龍山)에서 왜군에게 출입하다가 인하여 왜영(倭營)에 머물더니 영남으로 따라 내려가서 관가(管家 하인(下人))를 보내어 군사를 돌려 일을 완성시키기를 청하므로 여송이 다시 경성에 주둔하다.
○ 권율(權慄)이 파주(坡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들어가 강을 건너 적을 추격하려 하매 이여송(李如松)이 유격장군 척금(戚金)으로 하여금 나룻배를 거두어 건너지 못하게 하다. 권율이 선거이(宣居怡) 등과 더불어 전라도로 돌아오다.
○ 평수가(平秀家)가 행장(行長)등의 적과 더불어 충주(忠州)에 모여 새재[鳥嶺]를 넘는데, 심유경(沈惟敬) 및 두 왕자와 김귀영(金貴榮) 등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앞을 인도하게 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미녀와 가수ㆍ광대ㆍ악공을 모아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크게 음악을 베풀고, 군사의 대오를 정돈하지도 아니하고 산에 들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음악을 하여 개선(凱旋)한다는 것을 보이다. 문경(聞慶)에 이르러서는 다시 새재로 향하여 두세 번 오르내리다가 영남으로 내려가서 연로(沿路)에 나누어 둔치다.
29일. 영남 초유사 겸 우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졸(卒)하고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을 임명하다.
○ 양호 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과 경기ㆍ강원도 체찰사 유홍(兪泓)이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가서 능침(陵寢)을 살피고 소제하다. 분탕된 나머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폐허에 곡식이 우거져서 모두 보기에 비참하다. 배신(陪臣) 정철ㆍ유근(柳根) 등을 보내어 삼경(三京)을 수복하여 준 데 대해 표문(表文)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고사에서 나온다.
○ 영남 좌우도 여러 둔의 적이 모두 철병하여 흘러 내려와서 연도(沿道)에 나누어 둔치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 각도의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으로부터 추격하여 영남으로 내려오다. 송응창(宋應昌)이 송도(松都)로부터 경성에 들어와 진 치다.
○ 호조 판서 박충간(朴忠侃)을 특별히 호남ㆍ영남에 보내어 대군의 양식을 마련하게 하다.
5월. 김명원(金命元)은 선산(善山)에 진치고 이빈(李薲)은 의령(宜寧)에 진 치며,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등 여러 장수는 경성으로부터 바로 의령(宜寧)으로 내려가 이빈에게 예속되었다. 전라 감사 권율(權慄)이 또 새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의령에 들어가 진치다.
○ 이여송(李如松)이 적병이 모두 바닷가로 물러간 것을 듣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내어 보내 호남ㆍ영남을 지키게 하다. 총병 유정(劉綎)과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은 각기 4,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星州)ㆍ대구(大邱)에 진치고, 유격장군 왕필적(王必迪)은 상주(尙州)에 진치며, 유격장군 송대빈(宋大斌)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와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호남으로 내려가 비상사태에 대비하다. 유정ㆍ송대빈은 임진년 11월의 분군(分軍)에는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추후에 강을 건넌 군사일 것이다.
○ 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의 영솔하에 조방장(助防將) 조의(趙誼)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령으로 들어가다. 이때에 본국의 군사가 선산ㆍ의령 두 진에 종속되다.
○ 적추(賊酋) 등이 두 왕자와 심유경ㆍ김귀영 등을 일본으로 보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병영에 머물러 두고 수길(秀吉)에게 처분을 청하였다.” 하니, 이 말이 진실에 가깝다.
○ 도탄(陶灘)의 의복병장(義伏兵將) 방처인(房處仁)이 그 군사를 가지고 의령에 가서 종속되어 방어하다가 얼마 안 되어 순천(順天)의 무사(武士) 강희보(姜希甫)에 종속되어 나오다.
○ 호남 사람들이 중국 병사의 양식을 선산ㆍ성주로 공급하는데 공급하는 양식과 반찬이 한 사람 앞에 두 짐바리[駄]가 되니 운반하는 노고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생원ㆍ진사 및 선비들로서 감관(監官)을 분정(分定)하여 그곳에 이르러 공급을 감독하게 하고 다른 도에서도 모두 그러하다.
○ 순변사 이빈이 권율 등 여러 장수와 더불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암(鼎嵓) 나루를 건너서 함안성(咸安城)에 나아가 둔치다.
○ 호남 선비들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 중국 병사가 남으로 내려오매 간 곳마다 물결처럼 쓰러져서 평양의 남은 적들은 이미 무찔러졌고, 개성에 붙어 있던 적들이 한 발길에 섬멸되니 웅장한 위엄이 거듭 떨치매 흉한 넋이 스스로 빠지다. 동으로는 거가(車駕)를 맞아오고, 서로는 원릉(園陵)을 살피고 소제하는 것을 아침저녁에 볼 것인즉 이는 진실로 삼한(三韓)의 전에 있지 않던 경사이니, 이미 끊어졌던 명(命)을 잇고 물ㆍ불에서 건져 구해준 은혜는 이루 형언할 수도 없다. 이 나라에 신하되고 백성된 자가 장차 무엇으로 보답하랴. 진실로 마땅히 바구니에 밥을 담고 항아리에 장을 담아서 들에 나가 영접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요 비록 살을 벤다 한들 무슨 아까움이 있으리오. 생각건대 우리 본도는 이미 마른 싹에서 오히려 번성하고, 이미 버려졌던 뼈에 오히려 살이 붙었으니, 7도가 판탕(板蕩)된 데 견주면 오히려 전죽(饘粥 죽)의 밑천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본도가 앞장서서 공급할 도리를 하지 아니하면 오늘 일을 위로하는 정성을 어찌 드러내며 즐거운 뜻을 무엇으로 나타내랴. 어찌 무엇을 먹이고 마시게 할까 하는 데에 소홀히 하여 오늘날 당연히 할 일을 저버리랴. 관군의 바탕과 의병의 공급으로 진실로 촌락이 온통 비고 재력이 이미 다된 줄 알지마는, 만약 천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왜놈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자나 여자라도 또한 춤을 출 것이다. 하물며 선비의 반열에 있는 이로서 여기에 극력 힘쓰지 아니하랴. 각기 그 고을에서 따로 유사를 정하여 그로 하여금 인민들에게 두루 타일러서 빈부에 따라 백미를 모으고 살진 소를 몰아 3, 5일 전에 급히 대방(帶方 남원(南原))에 모여 동으로 넘어서 좌도의 군중에 공급한다면, 비록 황제의 그지없는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족히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이 감사할 줄 안다는 뜻은 표시될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모든 군자는 힘쓸지어다.
○ 적추(賊酋)가 두 왕자와 여러 신하 및 심유경을 데리고 가서 수길을 보았다. 이때에 수길이 행장 등이 평양에서 패하고 여러 적이 물러나 둔쳤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새 군사를 거느리고 비전(肥前) 주(州) 이름 의 명호옥(名護屋) 군(郡) 이름이니, 비주(肥州)에 속한다. 에 나와서 둔치다. 비주는 일기도(一岐島)와의 거리가 1백 50리요, 일기도는 대마도와의 거리가 4백 80리요, 대마도 방진(芳津)으로부터 풍기(豐碕)까지는 3백 50리요, 풍기에서 부산까지가 3백 80리이다. 그렇다면 적의 괴수가 나온 것이 이미 반로(半路)를 지났으니, 아! 위태롭다.
김유경을 보고 강화의 말을 듣자 문득 우리를 속일 계책을 품고 두 왕자와 김귀영 등 여러 사람을 돌려보내고, 또 소추(小酋)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가지고 유경과 더불어 중국 조정에 보내다.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상성(上聖)의 널리 비치는 밝으심으로 미세한 데까지 다 비치지 않음이 없고, 하국(下國)의 숨은 정곡은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하는지라, 이에 낮은 속마음을 헤쳐 드러내어 높은 들으심에 우러러 아뢰나이다. 공경히 생각건대 황제 폐하는 하늘이 한결같은 덕을 도와서 날로 사방을 밝히고 황극(皇極)을 세워서 양계(兩階)에 간우(干羽)를 춤추고성무(聖武)가 드러나서 일만 나라에 먼 곳 사람을 회유하시니, 하늘같은 은혜가 호탕하여 먼 데 가까운 데 창생에게 두루 미치매 일본 같은 작은 것도 모두 천조의 적자(赤子)가 되었나이다. 여러 번 조선에 부탁하여 전달하여 달라 하였으나 끝내 숨기고 통해 주지 아니하매 호소하려 하여도 길이 없어 부득이 원망을 맺었던 것으로 원한을 품은 지 오래이니, 까닭 없이 군사를 쓴 것이 아닙니다. 또 조선은 간사하고 거짓되게 마음을 써서 이에 폐하의 들으심에 헛것으로 보고한 것입니다. 일본은 충정(忠貞)으로 자처하는데 감히 황제의 군사를 칼날로 맞으리까. 유격장군 유경이 충고로 밝게 타일렀으므로 평양을 미리 양도하였고 풍신행장(豐臣行長)이 정성을 바치어 강화하여 한계를 넘지 않았는데, 조선이 이간질[反間]을 하여 전쟁을 얽어 일으킬 줄 누가 생각하였겠습니까. 비록 우리 군사의 사상(死傷)을 내었으나 우리는 끝내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다만 왕경(王京)은 유경이 옛 약속을 다시 거듭하고 일본의 모든 장수들이 처음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여 성곽에 돌아와 추요(蒭蕘)를 바쳤으니 더욱 정성을 바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를 보내주고 토지를 돌려주어 공손한 마음을 다하고, 지금 한 장수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를 보내어 적심(赤心)을 진술하니, 천조의 용장(龍章)을 얻어서 일본이 진국(鎭國)하는 영광을 얻기를 바라나이다.
삼가 바라건대 해와 달이 미세한 데까지 비치는 빛을 넓히시고 천지가 덮어주고 실어주는 도량을 널리 하시어 옛날의 예(例)에 비추어 특별히 번왕(藩王)의 명호(名號)를 내려주시면, 신 길(吉)은 알아주시는 넓은 덕에 감사하기를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깊은 큰 은혜와 같이 알아서 구정(九鼎)과 대려(大呂)처럼 무거움을 더하여 함께 속국의 신하가 될 것이니, 어찌 제 살인들 아끼겠습니까. 길이 바다 나라의 공물을 바칠 것입니다. 황제의 기업(基業)이 크게 천 년에 나타나고 성수(聖壽)가 만세나 길기를 비옵나이다.
○ 중국 장수 참군 여응종(呂應鍾)이 추수(推數)에 밝은데, 지금 선산(善山)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 호남의 감공(監供)하는 선비에게 부치기를,
세상에 독을 풍기던 요망한 뱀은 큰 바다로 달아나고 / 毒世妖蛇走大海
사람을 삼키던 포악한 범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리 / 吞人暴虎入深山
추격하는 군사 백만이 무슨 일을 성취하랴 / 追兵百萬成何事
공궤(供饋)하느라고 한갓 백성의 돈만 손해 끼치네 / 饋餉徒傷百姓錢
하였다. 또 왜(倭)란 글자를 풀어서 점치기를, “글자 가운데 목(木)이 있으니, 마땅히 금(金)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정월 7, 8 금일(金日)에 이미 평양을 수복하였고, 김원수(金元帥)가 여러 번 승전한 것도 역시 이 징조에 응한 것이며, 글자 가에 인(人) 자가 있으니 주변 사람이 살 수 없으므로 살 곳을 잃어 정함이 없을 것이다. 글자 위에 화(禾) 자가 있으니 여름에라야 일이 성공할 것이며, 글자 밑에 여(女) 자가 있으니,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이 여인이나 다만 화(禾)의 음이 화(和)와 같고, 여(女) 자는 호(好) 자가 될 수 있으니 화호(和好)의 설이 또한 반드시 나올 것이다.” 하다.
24일. 전라 좌의병장이 상고(相考)할 일로 보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군인을 영솔하고 지휘하여 승전한 것은 실로 그때에 군사를 영솔한 장수의 공입니다. 부장(副將) 전만호 장윤(張潤)은 무주(茂朱)ㆍ금산(錦山)의 적의 세력이 바야흐로 치성하고 관군과 의병이 여러 번 연달아 패하고 여러 번 무너져서 인심이 겁내고 두려워서 감히 가벼이 범하지 못할 적에 몸소 군사의 앞장을 서서 적진에 드나들기를 제 집에 발을 들여 놓듯이 하여, 소굴을 점거한 흉한 적으로 하여금 마침내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뒤에 장차 경성으로 달려가려 할 즈음에 경상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이 공조 정랑 박성(朴性)을 보내어 말하기를, “진주(晋州)가 지금 장차 함락을 당하게 되었고 단성(丹城)ㆍ삼가(三嘉)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거창(居昌)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이 또한 위태함이 조석지간에 박두하였다.” 하여, 구원을 청함이 매우 급하였습니다. 의장(義將) 역시 몇 고을은 호남에 가까운 곳이니 적이 마구 몰아서 짓밟으면 화가 장차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므로 부득이하여 군사를 정돈하여 함양에 도달하니, 진주는 비록 함락을 면하였으나 개령(開寧)의 적이 한창 치성하여 의병장 김면(金沔)이 힘이 지탱하지 못하여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최경회(崔慶會)와 더불어 합세하여 함께 나아가서 10월 20일에 부장 장윤으로 하여금 선봉이 되어 습격하게 하여 쏘아 맞히고 머리 2개를 베었습니다. 11월 3일에 또 싸워서 쏘아 죽이고 머리 8개를 베었으며, 성주(星州)의 적이 또 치성하여 형세가 장차 덤벼들 지경이고, 이웃 고을의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이 여러 번 싸워서 불리하여 위급함을 고하는 사자(使者)가 하루 동안에 3번이나 왔습니다. 최의 군사는 그대로 개령을 지키고 우리 군사는 곧 성주로 향하여 같은 달 18일에 부장으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제 길에서 적을 만나 접전하여 쏘아 죽이고 머리 2개를 베었습니다. 2
2일에 또 싸우고 12월 2일에 또 싸웠으며, 7일에 유인하여 싸울 제 꾀를 써서 성 밑에 육박하니 말탄 왜놈 10여 명이 먼저 나오고 걷는 놈이 뒤따랐는데, 앞장선 왜놈 2명을 쏘아 거꾸러뜨리니 말탄 남은 놈이 놀라서 달아나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추격하여 쏘아서 또 4명의 왜놈을 맞혔습니다. 이튿날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내통하는 관인(官人) 황언(黃彦)이 정인홍에게 알리기를, “화살에 맞은 왜놈이 여섯인데, 즉사한 것이 5명이다. 그날 왜장이 서문으로 나오다가 말과 함께 참호 속에 떨어져서 오른팔이 뼈가 부러져서 거의 죽게 되매 적군들이 바야흐로 겁내어 소동한다.” 하므로, 그놈들이 기운 꺾인 기회를 타서 성주를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같은 달 10일에 의병장 정인홍 및 관군의 여러 장수와 더불어 약속하였는데, 그 뒤 4일 만에 우리 군사가 약속과 같이하여 종일토록 죽도록 싸워서 전장과 갈이 모두 핏빛이 되었으며 성 밑에 쌓인 송장이 언덕과 같았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왜적의 머리를 탐내어 앞다투어 성 밑으로 달려갔더니, 궁한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칼날을 돌려 우리 용사가 10여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장 또한 말이 피곤하여 달리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용맹을 떨쳐 돌입하여 한 화살에 한 놈씩 죽인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자, 적이 그제야 물러나 달아났습니다. 흉한 놈들 중에 죽은 자가 3분의 2는 되었는데 한창 싸울 때에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인 것은 낱낱이 들 수도 없으니, 성주의 수복이 꼭 그날에 있게 되었는데, 이 도의 모든 장수들이 약속을 배반하고 응원하지 않았으니 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 2월 2일에 적이 몰래 도망한 것을 탐지해 알고 추격하여 부상현(扶桑峴)에서 만나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인 것이 4백여 명이며, 같은 달 11일에 장윤으로 하여금 군사를 옮겨 개령의 적을 쳐서 2백여 명을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이고 우리나라의 남녀 4백여 명을 빼앗아 왔습니다. 같은 달 1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였더니, 같은 달 16일에 적이 이내 도망하여 가므로 장윤으로 하여금 추격하여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이게 하였습니다.
3월 26일에 또 선산의 적과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이며, 4월 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이며, 15일에 또 싸워서 쏘아 맞히고 쏘아 죽였습니다. 10월 사이에 개령에서 세운 전공(戰功)운 체찰사와 전라ㆍ경상 순찰사에게 보고하였고, 11월ㆍ12월 사이에 성주에서 세운 전공은 체찰사와 경상 우순찰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지금 계사년 2월간의 군공(軍功)은 체찰사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의병(義兵) 군공의 장계는 도사(都事)의 체찰사가 오로지 맡았다 하는데, 두 도의 순찰사는 혹은 장계하기도 하고 혹은 장계하지 않기고 하여 공을 세운 장사(將士)들이 아직까지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부장 장윤은 비록 무인(武人)이나 말을 듣고 기색을 보매, 다만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털 만큼도 공을 바라는 태도가 없으니 은전을 입지 못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마는 군졸들에 있어서는 깊이 다른 도에 들어와서 해[年]가 넘도록 고생하면서 사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쏘아 죽인 공이 많이 있으니, 세운 군공이 만일 누락됨이 있다면 각기 원통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임진년 11월 3일 이전의 군공은 은전이 이미 왔으나, 그 뒤 각일(各日)의 군공은 상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체찰사와 구체찰사가 교체될 때에 혹 유실된 폐단이 있었는지 염려되므로 부득이하여 각일의 군공을 다시 문서를 만들어 보고하니, 증거로 상고하여 그 공에 대한 상을 내려서 군사들로 하여금 격려되도록 하여 주소서. 봉사(奉事) 최억남(崔億男)은 날래고 용맹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분발하고 격동되어 장윤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으니, 각별히 상을 내려 몸소 군사들에게 앞장선 공을 표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상을 체찰사에게 아뢰나이다.
○ 전라 좌의병장 신 임계영(任啓英)은 진실로 황공하와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백번 절하고,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弘烈) 주상전하께 말씀을 올리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왜를 방어하는 방책이 3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군량이요 둘째는 기계요 셋째는 전사(戰士)입니다. 군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무엇으로 군사를 먹이겠으며, 기계가 갖추어지지 못하면 무엇으로 적을 방어하겠으며, 군사가 날래고 용맹스럽지 못하면 무엇으로 승전하겠습니까. 이 3가지는 군사를 쓰는 데 크게 요긴한 것입니다. 3가지를 완전히 구비한 데에 힘입어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이긴 것은 아마도 창의(倡義)한 이들이 군사를 불러 모집하고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 군량과 기계를 보급한 공이 아니겠습니까. 각 사람의 공이 이렇게 많은 고로 전란이 평정되면 신이 대궐 뜰에 가 뵙고 그들의 공을 기록하여 관직으로 상을 주게 하려고 계획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국운이 불행하여 적들이 가득하고 군사를 파할 기약이 없으니, 신은 죽은 뒤에야 말겠나이다. 그러나 군사 먹일 양식과 전쟁에 쓸 기계가 거의 다되어 계속하기 어려우니 진실로 통분하여 울 만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계책으로는 의병을 일으킨 뒤에 군량을 보조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군공이 있는 자에게 급급히 상을 내려 사람마다 이것을 본받아 곡식을 헌납한다면 무슨 부족할 염려가 있겠으며, 군사가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워서 적에게 죽기를 달게 여기면 어찌 승전하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도 부장 전 만호 장윤과 우부장 훈련 봉사 최억남은 몸소 군사들에게 앞장서서 죽음으로써 돌격하여 베고 죽인 것이 많으니 성주ㆍ개령이 수개월 동안에 수복된 데는 그들의 공이 큽니다.
그러나 위의 사람들은 강개히 분발하여 조금도 공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마는, 무지한 군졸들은 다른 도에 깊이 들어와서 일 년이 넘도록 서리와 눈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 공이 아직도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두 번째 싸움에 임할 때에 불평하는 태도를 깊이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각일에 세운 군공을 기록하여 책을 만들어 비변사(備邊司)에 올려 보내었습니다. 혹시 맡은 관원이 군무(軍務)가 바쁜 중에 아뢰지 못할까 염려되니, 지금 기록한 책대로 따라서 일일이 공을 논하여 그 공에 상주고 그 마음을 위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곡식을 헌납하여 군량을 보조한 자는 성명과 석수(石數)를 또한 뒤에 기록하였으니 그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차례로 상을 내려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여 권면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사세가 급박하므로 감히 아뢰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굽어 살피소서. 신은 지극한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비변사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신들이 임계영의 상소를 보니, 군량을 보조하고 기계를 갖추며 군공이 있는 사람에게 급급히 상을 주어 사람마다 이것을 본받게 하여야 할 것인데도 아직 은전을 입지 못하여 마음에 불평한 생각을 품었으므로, 군공을 책으로 만들어 올려 보내며 군량과 군기를 헌납한 사람 역시 뒤에 기록하여 바치니 차례로 상을 주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것을 솟구치어 권면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습니다. 임계영이 의병을 많이 모아 영남에 깊이 들어가서 이미 성주ㆍ개령 두 고을을 수복한 공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 사람에게 아직 상을 내리지 않았음은 과연 잘못되었습니다. 군량과 기계를 갖추어 납입한 자도 아울러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후의 장계와 끝에 기록한 대로 예(例)에 의하여 상을 내려 장려하고 권면하는 뜻을 보여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다.
○ 좌의병장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의장(義將)의 거느린 장수와 군사는 그 다소(多少)를 따라서 은전을 입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종사(從事)와 참모들은 모두 지혜와 재주가 있어 일군(一軍)의 일을 의론하고 계획하였으니, 비록 장수를 베고 기(旗)를 빼앗은 공은 없으나 계책으로 대응하여 승전을 거둔 데는 그 공이 또한 많습니다. 각 고을에서 이어 응원한 유사(有司)들은 성심으로 불러 모으고 재산을 다 내놓아 기계를 갖추어 멀리 다른 지역에 와 있는 의병에게도 부족할 걱정이 없게 하였으니 일군을 부지한 것은 오로지 이 사람들의 공을 힘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장수와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벤 공에 비교하면 경중이 판연하므로 의장(義將)의 힘으로는 상달(上達)할 길이 없으니 항상 걱정함과 답답함을 품었습니다. 허다한 유사를 총총한 중에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그 중에 표표(表表)한 사람만 첩(牒) 뒤에 기록해 보냅니다. 대저 흉한 적이 가득하여 온 나라가 바람에 쓰러지듯 하는 때에 홀로 이 서생들이 충성을 떨쳐 격려하여 나라에 죽기를 기약하고 총칼을 무릅쓰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산을 내놓아도 아까워하지 않았으니, 당당한 충의는 가히 표상하여 사람들의 이복을 솟구칠 만합니다. 차례대로 기록해 아뢰시어 권면하는 뜻을 보이기를 망령되이 헤아립니다. 이상을 감사에게 보고합니다.
○ 심유경이 이때에 행장(行長)의 병영에 있으면서 청정(淸正)이 진주를 공격하려는 일을 들어 알고, 진주성을 비워서 칼날을 피할 계책을 본국의 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통지하다. 송응창(宋應昌) 또한 이 일을 듣고 심유경에게 통지하여 여러 적장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침범하지 않게 하였고, 유정(劉綎) 또한 청정에게 글을 보내어 이해(利害)로써 설득시키게 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다. 이때에 변방의 경보가 날로 급하므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본도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및 여러 의병들이 함안(咸安)으로부터 진주로 물러 와서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더불어 성을 지킬 준비를 하다.
○ 적의 경보 때문에 호남 각 고을에서 또 남아 있는 장정을 긁어모아서 남원에서는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 오장(伍長)을 삼고 팔결ㆍ연호(八結烟戶)로 군사를 삼고, 연호는 다만 성 밑에 있는 이만 뽑았다. 생원ㆍ진사로 수문장(守門將)을 삼아서 성을 지킬 준비를 하다. 매 첩(堞)에 연결(煙結) 각각 한 명이요, 5첩에 장(長)이 하나요, 55궁가(弓家)인데 1가에 장이 있고 1군(軍) 45궁가가 1붕(棚)을 얽었으니 이른바 망덕(望德)이다.
○ 황제가 산동(山東) 양식 10만 석을 주어서 군량을 삼게 하고, 또 본국이 압록중강(鴨綠中江)에 개시(開市)하여 무역하기를 청하니 인하여 장시(場市)를 설치하다. 고사에서 나온다.
○ 북극(北極)에 치우기(雉羽簊)가 나타나다.
○ 심유경 등이 일본에서 나올 때에 왜인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강산은 예로부터 참 주인이 없는데 / 江山自古無眞主
해와 달이 지금에 대명하지 못하다 / 日月如今不大明
하다.
6월. 심유경(沈惟敬)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김귀영(金貴榮) 등과 더불어 왜적의 진영에서 나와서 본국으로 돌아오다. 행장이 양산(梁山)에서 유경을 전송하면서 작은 기를 주며, “후일에 전장에 임할 때에 이것으로 표(標)를 하라.” 하다. 또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연전에 군사를 보내었다가 진주에서 좌절을 당하였으므로 여러 장수로 하여금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 하는데, 나는 중지시키고자 하나 청정이 듣지 않으니 일본 군사가 진주로 향하거든 성을 비워서 부딪치지 말고 사람들을 살리라.” 하다. 유경이 오다가 선산에 이르러 본국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15일. 적장 청정 등이 군사 30여 만을 합하고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경유하여 수륙(水陸)으로 아울러 나아가다. 다음날에 선봉의 적이 돌연히 함안(咸安)에 이르매, 이빈(李薲)ㆍ권율(權慄)ㆍ선거이(宣居怡) 등 모든 장수의 수만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자도 매우 많고 짓밟혀 죽은 자도 역시 많았다. 적이 함안을 분탕질하다. 이빈이 의령(宜寧)에 이르러 여러 장수를 모아 의론하기를, “흉적의 계획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 말 것이니, 먼저 들어간 외로운 군사로서는 결코 보존해 지키기 어렵다. 본도의 의병을 더 보내면 기세를 더할 수 있으리라.” 하니, 곽재우(郭再祐)가 거절하고 응하지 않으며, “변통이 있는 이는 능히 군사를 쓰고 지혜가 있는 이는 능히 적을 헤아리는 것이니, 진실로 능히 군사를 쓰는 이라야 승리를 획책할 수 있고 적을 잘 헤아리지 못하면 끝내 반드시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지금 적병이 치성하고 날래어 천하에서 그 세력을 당해 낼 수 없는데, 3리 되는 외로운 성이 어찌 능히 지켜낸단 말이오. 하물며 모든 군사가 다 성중으로 들어가 버리면 또 안팎에 응원하는 세력이 없어지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 응원이 되고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하다. 우감사 김륵(金玏)이 자리에 있다가 크게 노하여, “장군이 대장의 영을 따르지 아니하니 군율(軍律)은 어찌 하겠소.” 하니, 재우도 또한 노하여, “한 몸이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족히 아깝지 않으나 백 번 싸운 군사를 어찌 차버린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자결을 할지언정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하다. 이빈이 그제야 재우로 하여금 정암진(鼎嵓津)을 막아 지키게 하다.
○ 김천일이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하니 거의 수십만 석이 되었다.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성은 높고 물은 험하며, 양식은 풍족하고 기계도 넉넉하니, 이야말로 오늘날 힘을 바칠 시기이다.” 하고, 그날로 군대를 나누는데 김천일ㆍ최경회는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황진은 순성장(巡城將)이 되며, 각 도의 관군과 의병은 성을 계획하고 부대를 나누어 계엄하여 변고를 기다리다.
18일. 적병이 함안으로부터 마구 몰아 바로 정암 나루를 건너매 곽재우가 형세상 당적할 수 없어 뒤로 퇴각하다. 이빈은 권율ㆍ이복남(李福男) 등과 더불어 퇴각하여 산음(山陰)으로 향하다. 적은 의령에 들어가 분탕하다.
19일. 적병이 의령으로부터 바로 진주로 향하는데 호호탕탕하여 산에 가득하고 들에 가득하니, 총소리는 땅을 진동하고 고함 소리는 하늘까지 이어지다. 척후병을 나누어 보내 혹은 단성(丹城)ㆍ삼가(三嘉)로 보내고 혹은 곤양(昆陽)ㆍ사천(泗川)으로 지정하여 밖의 응원병을 쫓다. 전리 병사 선거이가 경기도 조방장 홍계남(洪季男)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이르러 말하기를, “적과 우리가 많고 적음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으니 물러가 보존함만 못하다.” 하였다. 김천일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거이 등은 군사를 끌고 다시 나와서 이빈 등과 더불어 퇴각하여 함양(咸陽)으로 향하다.
21일. 적의 선봉에 있던 기병(騎兵) 수백 명이 바로 마현(馬峴)의 봉우리 위에 이르러 위엄을 날리며 달리더니, 이튿날에 많은 적이 마구 몰아 나오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어서 기세가 바람과 불길 같다. 일시에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기를 심히 급하게 하니, 성중에서 응전하여 물리쳐서 날마다 이렇게 하다. 아래에 나온다.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에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니, 개미 새끼도 통할 수 없어 소식이 아주 막히고 장수와 군사는 피곤하여 휴식할 겨를이 없다. 매일 밤 경(更)마다 적들이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고 높은 소리로 크게 외치며 일시에 총을 쏘매 성중에 어지러이 떨어져서 뇌성과 우박 같고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한참 만에 그치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가 쌓여 있었다. 하루는 경회와 천일이 누각에 올라 바라보고 말하기를, “구원병이 많이 온다.” 하니,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큰 종을 울리며 앞다투어 바라본즉, 멀고 가까운 1백 리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적병이었다. 천일이 말하기를, “하늘이 만일 정의(正義)를 도와 우리들이 성공하여 대궐에 가서 뵙는다면 하란(賀蘭)의 고기를 구워서 함께 먹으리다.” 하다.
○ 고성(固城)의 의병장 최강(崔堈)과 이달(李達)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이 작년의 비교가 안 되므로 손을 대지 못하고 다시 고성으로 물러가다. 이때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니, 진주ㆍ함안에 피란한 사람들로 최강을 따르던 자 3백여 명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다 죽게 되다. 최강이 말을 타고 달리며 충돌하여 밤새도록 심하게 싸워서 군사와 백성이 보전되고 죽은 적이 매우 많다. 진주의 생원 한계(韓誡) 역시 피란하는 사람 중에 있다가 산에 올라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수많은 옛 역사책 안에 이와 같이 용맹스러운 장수가 있었던가. 중직에 맡기지 못한 것이 아깝도다.”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이 때에 중국 조정의 제독 이여송이 경성에 머물러 진을 치고서 진양(晉陽)이 위급하다는 것을 듣고 낙상지ㆍ송대빈(宋大斌) 등을 독려하여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구원하게 하고, 또 영남에 있는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 등 여러 장수로 하여금 협력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어 모두 명령을 듣지 않았다.
○ 김명원을 체직하여 전라 순찰사 권율로 도원수 제도도찰사 겸 의정부 좌참찬(諸道都察使兼議政府左參贊)을 삼고, 전주 부윤 이정암(李廷馣)으로 전라 감사를 삼으며, 홍세공(洪世恭)으로 전주 부윤을 삼다. 이때에 권율이 함양으로부터 물러가 남원에 있으면서 급히 관내의 선비와 백성들을 모아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는데, 부사 조의(趙誼)가 능히 조치를 하지 못하다. 권율이 성을 내어 때리고 꾸짖기를, “국가에서 그대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은 정히 오늘날을 위한 것인데, 어찌하여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나라의 일에 죽으려 하지는 않는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곤장을 쳐서 죄를 다스리다. 관내에 있는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최적(崔頔)은 권율과 삼종(三從)의 척당이었다. 권율이 그가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을 듣고 군관을 보내어 잡아와서, “네가 나를 아느냐. 먼저 너를 베어 죽이지 아니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하고, 곧 묶어서 얼굴에 재를 바르고 성중에 외치며 보이게 하였다. 이에 품관ㆍ교생들이 피하려고 꾀를 내어 뒤에 처졌던 자들이 앞다투어 성에 올라서 각기 맡은 바 여장(女墻)ㆍ궁가(弓家)에 들어서서 계엄하여 변고를 기다렸다. 성안에 가마솥과 높은 사닥다리ㆍ도끼ㆍ낫 등의 물건을 많이 설치하매 사람들의 힘이 다 되었다.
27일. 참장 낙상지, 유격 장군 송대빈이 각기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전주ㆍ임실(任實)로부터 남원에 들어와 유진(留鎭)하다.
29일. 적병이 진주를 함락시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이상 3인은 삼충(三忠)이라 하는데 그 뒤 8년 만에 진주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워 제사지내다., 전라 복수 대장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 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 부장 장윤, 적개 의병 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영광 의장(靈光義將) 심우신(沈友信), 태인 의장(泰仁義將) 민여운(閔汝雲), 해남 의장(海南義將) 임희진(任希進), 도탄 복병장(陶灘伏兵將) 강희보(姜希甫), □□의장 이계련(李繼璉),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 진주 목사 서예원 등이 다 죽다. 충남 수령을 따라온 병사 중에 죽은 이가 심히 많으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적이 매일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하자, 속이기를, “사창대고(司倉大庫)에 피란하여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운운”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협박을 당하여 앞다투어 창고에 들어갔더니 적이 한번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다. 남원 사람으로 여러 의병을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던 자가 3백여 명인데 남강(南江)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뿐이었다. 적이 성과 참호를 다 헐어버리다. 군사의 죽은 수효는 아래에 상세히 보인다. 적이 바야흐로 성에 들어올 때에 최경회ㆍ김천일이 달아나 촉석루(矗石樓)에 오르매 장수와 군사들이 다 모였다. 적병이 죽이며 나아오는데 이잠ㆍ김준민 등은 화살이 이미 다되어 바로 죽창을 가지고 육박전으로 싸우매, 적병이 잠시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되어 죽다. 천일 등은 서로 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
○ 그 뒤에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체찰사가 되어 순시하며 진주에 이르렀다가 성이 함락되었던 곡절을 물어서 듣고 전(傳)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계사년 6월 □일. 적의 추장(酋長) 청정(淸正)이 여러 추(酋)의 군사를 합하여 30만 명이라고 소리쳤는데, 혹은 7, 8만이라 한다. 수륙으로 아울러 나와서 장차 진주를 범하려 하다. 이때에 총병 유정은 유격장군 오유충과 더불어 대구(大邱)에 있었고, 참장 낙상지, 유격 장군 송대빈은 남원에 있었으며, 상지 등이 그 때 남원에 도달하였는데 지금 ‘있었다’ 한 것은 틀렸다. 유격 장군 왕필적(王必迪)은 상주(尙州)에 있었다. 유격 장군 심유경은 바야흐로 왜장 평행장(平行長)의 병영에 있으면서 적과 강화하여 왕자를 데려오려고 계획하였다. 송경략(宋經略)이 유경에게 글을 보내어 꾸짖기를, “네가 이미 왜놈들로 하여금 바다로 내려가게 하고 왕자를 찾아온다고 하였는데 적이 아직도 주둔하여 침범과 약탈을 그치지 않으니, 너는 모름지기 다시 적의 병영에 들어가서 분명히 깨우쳐 타이르라. 그렇지 못하면 내가 장차 병부에 보고하여 너의 죄를 중하게 문책하여 용서치 않으리라.” 하다. 유경이 도원수 김명원에게 글을 전하기를, “일본이 진주를 공격한 일은 저들이 지난해에 거기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심히 많았고 또 배들이 모두 불타고 파손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분하고 한스러워하는 것이라고 불평하였다. 하물며 우리의 병사가 여러 번 일본의 삭초(削草)하는 왜인을 죽였으므로 저희 장수들이 관백에게 알렸더니, 관백이 말하기를, ‘너희들도 또한 나아가 진주성을 공격하여 성을 때려 부수어서 전일의 원한을 풀라.’ 하였다. 행장이 본부(本府)를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칼날을 피하게 하라.’ 하였는데, 저들이 성이 비고 사람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곧 철병하여 동으로 돌아왔을 따름일 것이다.” 하였다. 유경이 적의 병영에서 돌아올 때에 따라온 통역 이유(李愉)가 말하기를, “청정이 극력 이 일을 주장하여, ‘수길(秀吉)에게 말하여 기어코 진주를 함락시킨 후에야 그만두겠다.’ 하여, 행장이 힘껏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에 수가(秀家)ㆍ행장ㆍ삼성(三盛)ㆍ길계(吉繼) 등은 가지 않았고, 의지(義智)만이 응하여 가는 중에 들었으나 또한 중지하고 가지 않았다. 행장이 유격을 양산에서 전송할 때에 손을 잡고 작별하면서, ‘내가 힘껏 말려도 청정이 홀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진주 공격에만 그칠 뿐일 것이니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을 보장한다.’ 하였습니다.” 하다. 김명원이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더불어 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일이 급하니 힘껏 구해 주오.” 하니, 유경이 말하기를, “행장에게 하루 종일 밤새도록 간절히 말하였더니 행장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으나, 그 사세가 이미 결정되어 마침내 돌리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다른 계책은 없고 다만 진주의 여러 장수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조금 피하게 하려 하여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니 어찌 하리오.” 하다. 이때에 유 총병이 청정에게 글을 보내기를,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의 속국을 헐어서 군사가 얽히고 화가 맺혀 해가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매, 황상(皇上)께서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어 특별히 절월(節鉞)을 주어 범 같은 신하들을 나누어 보내 큰 고래[鯨]를 모두 죽여 동해를 길이 맑히려 하였다. 근자에 심유경이 가서 대면하여 강화하려 하니 일본이 드디어 마음을 돌려 갑옷을 풀고 정을 표시하고 맹약하기를 빌면서 조선 지방을 다 돌려주고 무리를 이끌고 귀국하고, 또 부산에서 소서비탄수구 대부(小西飛彈守久大夫)를 보내어 천조(天朝)에 가서 명령을 기다리니 지극한 정성이 깊이 가상하므로, 천조에서 보낸 수백만 군사가 장차 모두 압록강 머리에서 그쳤다.
대장군 제독 이(李)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왕경(王京)에 주둔하고, 곽 총병(郭總兵)ㆍ진 총병(陳總兵)ㆍ가 총병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요동에 주둔하며, 오 부총(吳副總)은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평양ㆍ개성에 분포한 것이 10만이 넘는데,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한 번 교전이 되면 문득 화의(和議)를 어겨서 우리 당당한 천조의 천지 같은 도량을 잃을까 염려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너희들이 돌아갈 뜻을 결정하지 않고 다시 진주를 공격하여 돌연히 전일의 맹세를 배반하여 전날의 분풀이를 한다고 한다. 대저 조선의 8도 지방에 이미 7도를 부수고 남녀들이 뜻밖의 재앙을 당하여 해골이 서로 쌓여 들에 가득하고, 머리를 매단 것이 장대에 찼으니 극도로 참혹하다 하겠거늘, 다시 무슨 원수를 갚겠다고 사마귀만한 진주의 땅에 하필 적은 혐의를 가져서 중국에 큰 신의를 잃는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마땅히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조속히 철병하여 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들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서로 부딪치거나 외국에 신의를 잃지 아니하고 너희들로 하여금 칼날에 걸리지 않고 바다에 떠서 동으로 돌아가도록 하기에 힘쓸 것이다. 만약 다시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여 군사가 쉬기 어렵게 된다면 반드시 조미복선(鳥尾福船)ㆍ누선(樓船)ㆍ백조(栢艚)ㆍ용조(龍艚)ㆍ사선(沙船)ㆍ창선(艙船)ㆍ동교소초(銅蛟小艄)ㆍ해도(海舠)ㆍ팔라호(叭喇唬)ㆍ팔장(八槳) 등의 배에다가 수군 1백만을 싣고서 바다를 질러 막아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끊고 너희 양식 운반을 끊을 것이니, 결전할 필요도 없이 너희 무리는 장차 섬에서 절로 죽어 한 조각의 갑옷도 돌아가지 못하리라. 또 관백과 너는 원래 비등한 지위인데 너희들이 그의 농락을 받아서 함께 구사(驅使)를 듣고 있다. 관백이 이미 천조를 사모하여 공물을 바치는데, 너희들은 왜 진주를 포위하고 공격하려는가. 오늘날 진퇴하는 사이에 이해관계가 작지 않으니 세 번 생각하여 스스로 살펴서 사향노루가 제 배꼽을 물어뜯는 뉘우침을 면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적이 오히려 듣지 않다. 이때에 변방의 경보가 매우 급하매 창의사 김천일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다.
충청 병사 황진은 군사 4백을 거느리고, 부장 장윤은 군사 3백을 거느리며, 의병장 이계련은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며,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거느리고 모두 먼저 와서 모이다. 본주 목사 서예원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것을 의론하는데,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및 홍계남(洪季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내면(內面)을 지킴만 못하다.” 하니, 김천일이 소리를 높여 반대하다. 거이와 계남 등이 나와서 운봉(雲峯)에 진을 치다.
21일에 적의 기병 2백여 명이 동북 산 위에 출몰하더니, 22일 진시에는 적의 기병 5백여 명이 북산(北山)에 올라서 진을 벌이고 기세를 뽐내었는데, 성중에서는 동하지 아니하다. 사시에 많은 적이 계속하여 이르러 두 패로 나누어서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 산중턱에 진치고, 한 패는 향교 앞길에 진치다. 처음 한 번 교전에 성중에서 30여 놈을 쏘아 맞히니, 적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가다. 초저녁에 다시 나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이 되자 물러가고, 3경에 다시 나왔다가 5경에야 비로소 물러가다. 이보다 먼저 성중에서 적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의론하기를, “성 남쪽 촉석루 남강이 가장 험하니 적이 반드시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오. 서북쪽은 참호를 파서 그 밑에 물을 채워 둘 수 있으니 다만 동편만이 적이 범할 곳이다.” 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적이 그 참호를 파서 물을 트고 마르기를 기다려 흙을 져다가 메워서 큰 길을 만들었다. 23일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그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더니, 적이 밤을 타서 일시에 크게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다. 성중에서 어지러이 쏘아서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일 수 없었다.
24일에 5, 6천 명의 적이 더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 6백 명이 더 와서 동쪽에 진을 치다.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서 흙으로 메워 언덕을 만들고 흙집을 지어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총 쏘기를 비가 퍼붓듯 하다. 충청 병사 황진이 또한 성 안에서 상대하여 높은 언덕을 쌓는데 초저녁부터 밤새도록 황진이 옷과 전립(戰笠)을 벗고 친히 돌을 지니 성중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울면서 힘을 다하여 쌓는 일을 도와서 하룻밤에 마치다. 이에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맞혀 부수니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날에 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또 4번 싸워 4번 물리치다.
26일에 적이 나무 궤를 만들어 소가죽으로 싸서 각기 그것을 지고 탄환과 화살을 방어하면서 와서 성을 헐었다. 성중에서는 큰 돌을 굴러 내리고 화살 쏘기를 비가 퍼붓듯 하니 적이 그제야 물러가다. 적이 또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위에다 판자 집을 설치하고서 성내에 대고 불[火]을 많이 쏘니 초가집들이 일시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다. 목사 서예원이 겁을 내어 넘어지므로 의병 부장 장윤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다. 이때에 큰 비가 와서 활이 모두 풀어지고 군사들의 힘이 이미 피곤하였다. 적이 성중에 글을 던지기를,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다. 성중에서 답서를 던지기를, “우리는 죽는 것이 있을 뿐이다. 하물며 천병(天兵) 30만이 이제 바야흐로 너희들을 추격하여 다 무찔러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하다. 적은 옷을 벗어 볼기를 두드리면서, “명병(明兵)은 이미 다 물러갔다.” 하다. 이날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치다.
27일에 적이 동ㆍ서 두 문 밖에 다섯 언덕을 쌓고 대를 엮어 책(柵)을 만들어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총을 비 퍼붓듯 쏘아대니, 성중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다. 또 나무 궤를 가지고 사륜차(四輪車)를 만들어 적 수십 명이 모두 쇠 갑옷을 입고 궤를 밀고 들어와서 쇠 송곳으로 성을 뚫다. 이때에 김해 부사 이종인이 군중(軍中)에서 제일 힘이 세었다. 종인이 연달아 다섯 놈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다. 성중의 사람들이 횃불을 묶어 기름을 부어서 던지니 궤 속에 든 왜놈이 모두 타죽다. 초경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에 범하였는데, 종인이 자기 수하들과 함께 힘껏 싸워서 물리치다.
28일 여명에 종인이 지키던 성첩으로 돌아오니, 그날 밤에 서예원이 야경(夜警)을 조심하지 않아서 적이 몰래 와서 성을 파서 성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종인이 크게 노하여 꾸짖다. 적이 나아와 성 밑에 육박하였는데 성중에서 죽도록 싸워서 적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적추(賊酋) 한 놈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여러 적이 송장을 끌고 가다. 황진이 성 아래를 굽어보며, “오늘 싸움에는 적이 죽은 놈이 1천여는 되겠구나.” 하다. 한 왜놈이 성 밑에 잠복하였다가 쳐다보고 탄환을 쏘니 궤 속에 목판이 튀면서 황진의 왼쪽 이마를 맞히다. 이때 황진과 장윤이 힘껏 싸우는 것으로 가장 칭송받아 모든 장수의 으뜸이 되므로 온 성중이 믿고 의지하였는데, 황진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혹은 탄환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가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피살되었다 하니 틀린 말이다. 성중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다.
29일에 서예원으로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으니, 예원이 겁을 내어 전립을 벗고 말을 타고 울면서 다녔다. 병사 최경회가 예원이 군중을 놀래키고 요동하게 한다하여 목을 베려다가 말고 장윤으로 대신 장수를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장윤도 또한 탄환에 맞아 죽다. 미시에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니 많은 적이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오다. 이종인이 친병(親兵)과 더불어 활을 버리고 창과 칼을 가지고 싸워 쳐 죽인 것이 쌓여서 산과 같으니, 적이 물러갔다가 또 서 북문에서 고함을 치고 돌진하니 창의사의 군사가 무너지고 흩어져서 모두 촉석루에 모이다. 적이 이내 성에 올라 칼을 휘두르며 날뛰니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다. 여러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이종인은 탄환에 맞아 죽다. 천일의 좌우 사람들이 천일을 붙들어 일으켜서 퇴각하여 피하도록 권하니 천일이 굳게 앉아서 일어나지 않으며 돌아보고 이르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에서 죽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아들 상건(象乾)과 서로 안고 강에 몸을 던져 죽다. 적이 본성을 무찔러서 평지를 만들었는데, 성중에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었다. 뒤에 감사 김륵(金玏)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니 성중에 쌓인 송장이 거의 1천여가 되고, 촉석루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 쌓인 송장이 서로 겹쳐 있었으며, 청천강(靑川江)으로부터 무봉(武峯)에 이르기까지 5리의 사이에 죽은 자가 강을 막아 내려갔다. 고득뢰(高得賚)는 남원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그가 우의 부장(右義副將)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줄을 아는데 이 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건대 다른 사람도 빠진 이가 필시 많을 것이다.
○ 《정원일기(政院日記)》에, “힘껏 싸워 적을 죽여 적의 송장이 산더미처럼 쌓이다. 몸이 죽은 뒤에야 성이 바야흐로 함락되다. 살아서는 보장(保障)이요, 죽어서는 충의(忠義)이다.” 하다. 이것은 이종인 등을 두고 한 말이다. 그 뒤에 종인 등의 정문(旌門)을 세우고 공신으로 기록하여 숭록(崇祿)으로 증직하였다.
○ 진주를 함락시킨 적이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흩어져 혹은 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악양(岳陽)의 길로 향하고, 혹은 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길로 향하여 분탕질하고 죽이고 약탈하다.
○ 권율이 이때 남원에 있었는데, 원수(元帥)에 임명되다.
○ 교지를 받든 사신이 서울로부터 영남으로 바로 내려와서 찾아 여기에 이르다. 권율이 밤중에 5리 밖에서 공경히 명을 받고, 익일에 다시 남원으로 향하다.
○ 이빈이 선거이 등 여거 장수를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물러와서 권율과 서로 만나 운봉에 주둔하여 변고를 기다리다.
[주-D001] 선마 :
당 나라 때에 재상을 임명할 때에 백마지(白麻紙)에다 썼다. 백마(白麻)를 발표하는 것을 선마(宣麻)라 한다.
[주-D002] 복파 :
후한(後漢)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남만(南蠻)을 평정한 명장이었다.
[주-D003] 하상(河上)에서 소요(逍遙)함 :
《시경(詩經)》〈청인편(淸人篇)〉의 내용으로 정(鄭) 나라 임금이 고극(高克)이란 신하에게 병권(兵權)을 주고 자신
은 하는 일이 없이 하상에서 소요하며 놀고만 있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주-D004] 진(晉) 나라의 건업(建業)과 송나라의 임안(臨安) :
외족(外族)에게 중원(中原)을 뺏기고 강동(江東)으로 건너간 동진(東晉)의 도읍은 건업이요, 남송(南宋)의 도읍은 임안이다.
[주-D005] 의각(猗角)의 형세 :
한 손으로는 그 뿔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 발을 비튼다는 뜻이다.
[주-D006] 능연각(凌煙閣)과 운대(雲臺) :
한 명제(漢明帝)는 남궁 운대(南宮雲臺)에 중흥한 28장수의 화상을 그렸고, 당 태종(唐太宗)은 능연각에 창업한 공신의 화상을 그려서 기념하였다.
[주-D007] 황극(皇極) :
《서경(書經)》에, ‘황극을 세운다’는 말이 있으니 황극은 대중(大中)의 도다.
[주-D008] 양계(兩階)에 간우(干羽)를 춤추고 :
순(舜)이 삼묘(三苗)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서 양계에 간우의 춤을 추니 얼마 후에 삼묘가 복종해 왔다. 간우는 문무(文舞)이다.
[주-D009] 구정(九鼎)과 대려(大呂) :
구정은 우(禹)가 구주(九州)의 쇠를 거두어 만든 아홉 개의 솥인데 전국(傳國)의 중보(重寶)요, 대려는 주(周) 나라 종묘에 있는 큰 종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성낙훈 (역) | 19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