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콜릿공장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항상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동화는 생각만큼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권선징악이라는 동서고금의 원리는 악이라는 대칭점을 전제하듯 밝아만 보이는 동화에도 그늘은 숨어있다. 그리고 그 빛과 어둠의 경계 위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서 있다. 그 높은 공장의 굴뚝과 함께. 그 높은 공장이 만든 그 긴 그림자와 함께.
행복하지만 가난한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의 한없이 착하기만 한 아이. 이 지긋지긋하리만큼 익히 보아왔던 시추에이션이 그저 지겨운 반복 안에 멈춰버리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그림자 때문이다. 그 그림자는 자본주의 빛에 가려진 짙은 그늘이거나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검은 괴물들이다. 그늘과 괴물 속엔 열심히 일하지만 사회의 구조 속에 버려진 가장이 있고,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부르조아가 있다. 또 그 속엔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린 지식인이 있고, 승부욕과 물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연결고리로 악순환의 뫼비우스를 연상시킴으로써 지금 이곳의 단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며 재현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킴으로써 재현된 단면을 자신의 모습으로 조롱한다.
그러나 재밌는 건 그 조롱을 한껏 즐기던 웡커마저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왕궁 속에 고립된다는 점이다. 그는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버렸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모든 걸 얻었지만,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난한 가정의 작은 꼬마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림자를 조롱하던 자가 그림자가 되는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주류의 그림자에 빛을 뿌리는 것. 그것이 철저히 외부에 존재하던 힘없는 꼬마가 되는 순간. 영화는 한없이 맑고 투명한 한편의 동화가 된다. 익숙한 것을 전복시키는 역설의 쾌락과 함께.
하지만 영화 속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처럼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공장굴뚝의 긴 그림자를 피하지 못한다. 좀 진부하거나 오버일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상위단계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초콜릿공장(사실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초콜릿공장에 계몽의 빛을 던져줌과 동시에 다른 가족들과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 모범적 사례를 제시하는 찰리. 왠지 정반합의 정점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이와같은 가족의 이상향은 결국 '가족은 소중한 것'이라는 소우주의 삼각형안에 영화를 가둬버린다. 물론 팀버튼 감독의 전작 <빅피쉬>도 가족의 모습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의 순기능과 같은 교훈적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소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악수이고, 단절되어 있던 과거와 현재의 놀라운 화해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아쉬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영화는 동화적 구조를 따르고 동화적 내러티브를 유지하지만 그 속에 팀버튼이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매력이 부족하다. 물론 '그들'이 빠지는 덫의 공포감이나 기괴함은 <슬리피할로우>의 목없는 기사나 낄낄 웃어대던 <배트맨>의 악역 혹은 <에드우드>의 이해할 수 없는 표정과 같이 보는 이를 당혹의 쾌감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그 명약관화한 총천연색 대립관계는, 안개 속에 쌓여 경계의 감각이 흐릿하게 사라지던 몽환적 애매모호함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디즈니의 반대편에서 독야청청 빛을 발하던 그의 색깔이 많이 퇴색해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아니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결말을 향해 주구장창 달리던 디즈니표 애니메이션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