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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격려의 서신
베드로전서 4: 12~19
1.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의 본래의 직업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학벌은 대단하지 못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학문이 짧은 어부라는 이유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난 후 지혜가 넘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설교 한 편으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언어를 가지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철학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증거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2등 하라고 하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에도 수석 사도였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사도는 베드로요, 이방인을 위한 사도는 바울입니다. 베드로의 복음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은 값싼 것이 아니고,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받는 다는 말은 의인의 구원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렵게 얻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이 구원받는 데에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쉽게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는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채찍에 맞으셨고, 얼굴에 침 뱉음도 당하셨고, 온갖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리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값을 치른 값비싸고 어려운 것입니다. 또 예수 믿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생명이 위협당하는 수난을 수없이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마음껏 설교하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비행기 타고 1시간만 가도 마음껏 예수 믿을 수 없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설교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매 맞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성도로 사는 것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3장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사는 길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쉽게 확보하신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예수 믿는 길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길만이 생명 길이요, 천국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2. 초대교회의 핍박과 고난
그래서 베드로는 소아시아, 오늘날의 튀르키예(터키) 지역에 있는 성도들(1:1)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 대박해를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원래 로마는 종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취했었습니다. 그러나 네로 때부터는 조직적으로 박해를 시작했고, 밀라노 칙령(A.D. 313년)에 의해 박해가 중지될 때까지 기독교 박해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네로는 폭군으로 악명 높은 왕이었습니다. A.D. 64년 여름, 로마에 큰 불이 났습니다. 강력한 불길이 6일 동안 온 도시를 휩쓸어 도시의 14개 구역 중 10개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 사이에는 ‘네로가 로마를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 건축하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이다’라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네로는 수금을 치며 노래했다는 말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은 네로를 비난했고, 네로는 자신을 향한 비난과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성도들이 짐승의 밥이 되었고, 높은 장대에 매달려 로마 궁정을 밝히는 횃불로 불탔습니다. 그러니 그때 예수 믿는 성도들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고난 너머에 있는 영화로운 구원을 바라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소망의 서신’(Epistle of Hope), ‘격려의 서신’(Epistle of Courage)이라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죄 없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 받고 어려움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물론, 예수 믿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후서에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했습니다. “경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을 추구하는 성도라면 어려운 일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 ‘고난’이라는 단어가 17번(개역개정 기준)이나 나올 만큼 ‘고난’이 핵심 주제이며 성도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 지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고난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당연한 고난’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죄의 댓가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지요. 그런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지금 당장은 악인이 형통한 것 같아도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했습니다. 요즘 그랬다가는 큰일 나겠지만 뉴스에 나오겠지만, 옛날에는 학교 선생님 중에 ‘회초리 /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의 매’라고 써서 가지고 다니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사랑해서 때리는 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라’, ‘지금의 아픔이 너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랑의 매를 드실 때가 있습니다. ‘잘못을 회개하라’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징계하십니다. 그렇지만 징계를 받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받는 사람에게는 고통입니다. 때로는 자기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음에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억울한 고난’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 2:19) 살다보면 부당하게 … 때로는 억울하게 … 고난당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이 전혀 없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은 아니지만 옛날에 학교 다니신 분, 군대 다녀오신 분은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반에서 누구 한 명이 잘못 하면 그 학생만 혼나기도 하지만, 모두 벌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의 잘못은 모두의 잘못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동기야 잘하자>라고 구호를 외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기의식이 강합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원죄가 되었고,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아간의 범죄 때문에 아이 성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죄지은 아간만 벌 주시지 않고 아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전쟁에서 졌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로 인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억울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요즘에도 일부 성도, 특정 교회의 잘못 때문에 모든 성도와 모든 교회가 비난 받고 때로는 조롱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가 치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유익한 고난’도 있습니다. 마땅히 겪어야 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4,17)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보면 …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 하면 …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고통만 당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기억해 주십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 내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기억해 주신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 71) 했습니다. 천국 소망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러니 세상 방식과 하나님 방식이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남들은 놀러 가거나 집에서 편히 쉽니다. 하지만 성도는 예배드리고 어떤 이는 봉사합니다. 그럼에도 힘들다, 어렵다는 불평 없이 감당하십니다. 구석구석에서 봉사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 교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깁니다. 재물이 우선입니다. 돈, 물건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그래서 돈을 쓰는 방식도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 일천번제, 선교 헌금, 건축 헌금 등 물질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삶의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혹, 예수 믿기 때문에 /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수해야 합니다.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요,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3.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상 방식을 거슬러야 하고, 세상 방법대로 따라가면 안되고 세상 자리에 앉으면 안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어려움을 당해도 승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에게 예기치 못한 시험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고난이 닥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왜? 내가? 주일마다 예배 잘 드리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 내가 왜?”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했습니다. 그냥 ‘시험’이 아니라 “불 시험(the fiery ordeal)”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불 같은 시련’ 혹은 ‘불 같은 고통의 체험’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이 여러 가지인데, 그것은 마치 불로 단련하는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했습니다. 불같은 시험을 당하셨나요? 예상치 못한 고난 때문에 힘드신가요? 하나님이 그 고통을 어떻게 축복으로 변화시킬지 …그 고난을 어떤 간증으로 만드실지 기대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이것은 권면이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명령’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알맞은 고난을 주시고 고난 뒤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겪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정체성입니다. ‘너 내 뜻대로 살고 있니? 내가 준 성경말씀 대로 살고 있니? 너 정체가 뭐니? 너 그리스도인이니? 너 이래도?’라고 하시며 정체성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선택을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 예수 믿니?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했니? 이래도? 이렇게 힘들어도? 모욕당해도? 네 선택에 후회가 없니?’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공부하려면 힘듭니다. 일하려면 힘듭니다. 힘든데 왜 합니까? 땀 흘려 일해야 돈을 벌고, 먹고 살 수 있고, 자녀를 키울 수 있습니다. 결혼하려면, 자녀 키우려면 …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때문에 잠 못자고, 눈물 흘려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괴롭다고 안합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예수 믿는 / 천국 가는 우리는 그 길에서 좁은 길 가는 자의 책임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 때문에 구원 받은 하늘 백성으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겪는 아픔이, 어려움이 있습니다. 견뎌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고난이 힘들고 어려워도 향기롭게 바꾸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버텨야 합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자가 됩니다. 그래야 간증자가 됩니다. 그래야 축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여러분, 잘 참고 견디고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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