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댐 바닥에서 발견된 세계유산급 문화재의 정체는?
조회수 9.8만2023. 5.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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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대한민국 울산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만큼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자동차 공장이 울산에 있고, 세계 최고급으로 꼽히는 자수정도 있고, 돌미역, 미나리 등이 떠오릅니다.그런데 아마 또 많은 분은 울산 하면 고래를 떠올리는 분 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고래를 주인공으로 한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이 있어 매년 '고래축제'를 개최할 만큼 적어도 고래에 있어서만큼은 울산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산에서 고래가 유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한국에서 가장 큰 포경업 중심지가 위 '장생포'였기 때문입니다.
1986년 한국에서 상업 포경이 금지되기 전까지 울산의 포경산업은 대단했습니다. 1970년대 말 포경산업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 장생포에는 20여 척의 포경선과 1만여 명이 상주하는 거대한 마을이었고 1970~80년대 연평균 900마리를 잡아댔습니다.
그러나 국제포경위원회가 고래자원 보호를 위해 상업 포경을 금지하는 의안이 가결되면서 한국 역시 이 운동에 동참해 상업 포경을 전면 금지했죠. 그래서 지금도 사고로 잡히는 고래는 있을지 몰라도 돈벌이를 위해 고래를 잡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쨌든 울산이 포경산업으로 유명했던 것은 한반도에서 고래를 만나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울산이 고래로 유명한 것은 비단 현대 시대의 일은 아닙니다. 이미 7천 년 전 한반도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의 고래잡이 기록을 울산에 남겨뒀으니까요. 오늘은 울산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울산 지역의 원효대사에서 시작됐습니다.
1970년 12월 24일 이제 갓 서른이 된 미술사학자 문명대는 울산 지역에 원효대사의 자취가 서렸다는 '반고사' 절터를 찾기 위해 울산을 찾았다가 주민들이 절벽에 이상한 그림들이 보이는데 이끼가 끼고 흙탕물이 흘러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는 제보를 받았죠. 당연히 마애석불인가 보다 하고 절벽에 갔더니 이는 마애불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글자와 그림, 기하학적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입니다. 그런데 울주 천전리 암각화는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971년 3월과 11월 두 번에 걸친 조사 때마다 울주군 대곡리에 사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구경을 나왔는데 그들이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절벽에는 호랑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에 배 한 척을 빌려 곧장 그 호랑이 그림이 그려졌다는 절벽으로 향했습니다. 배 위에서 바라본 절벽에서 그는 대단한 그림을 봤습니다. 반질반질한 암벽에는 춤추는 무당과 거북이 3마리, 고래 머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절벽이 물에 잠겨 일부만 보였지만 그는 직감했습니다.
'이건 대단한 유적이다'라고 말이죠. 아마 많은 분이 눈치채셨겠지만, 국보 제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입니다.그런데 혹시 이 반구대 암각화를 두고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에서 조금 더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등재되지 않았지만, 세계유산 잠정 후보 목록에 올라 있는 이유는 대단한 역사를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명대 명예교수가 배를 빌려 타고 갔어야 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 이후로 3년 동안 제대로 된 조사를 펼칠 수 없었던 것은 댐 때문입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대곡천에 자리한 반구대는 1년 중 5개월 동안 물에 잠기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사를 하려면 물이 빠진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1974년 가뭄이 들어 물이 빠진 후에야 제대로 된 실직 조사가 진행됐는데요. 표면에 점토를 일일이 붙이며 조사한 결과 높이 2.5m, 너비 9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에 고래,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 동물은 물론이고 고래를 잡는 선원들의 모습 등 문양 300여 점을 확인했죠.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그가 1984년에 펴낸 저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그가 직접 그린 실측도가 담겼는데 그림의 면모가 대단합니다. 사실 암벽에 그림을 새기는 것이야 별 특별한 것도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반구대에 그려진 그림들은 늦어도 청동기시대 이르면 신석기시대 울산에 살던 조상들이 그렸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문명이 형성되기도 전에 우리 조사들은 암벽에 그림을 그려 자신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는데 벽화에 새겨진 선사시대 역사는 세계사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기록이죠.사실 암각화의 경우, 그 절벽이 몇십억 년 전에 솟아오른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탄소연대를 측정하는 등의 방식으로는 어느 시기에 제작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그려진 그림으로 제작 시기를 유추하게 되는데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 이르면 8천 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늦게는 5천 년 전인 청동기시대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몇천 년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도구를 이용해 암면에 그림을 남겼다는 점인데요.
우선 반구대 암각화에는 해양생물인 고래와 거북이, 물개 등이 새겨져 있고, 호랑이, 사슴, 멧돼지, 소, 토끼들을 새겼는데 몇몇 동물들은 내장까지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사냥하기 위한 배와 작살, 그물 그리고 창을 든 사냥꾼과 춤추는 주술사까지 무려 300점이 넘는 그림이 절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당시의 사냥 기술과 의식, 사상, 사회 경제상 등을 엿볼 수 있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암각화의 진짜 가치는 고래에서 나타납니다. 그림 속에서 확인되는 고래만 북방긴수염고래, 흑등고래, 돌쇠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범고래, 상괭이 등 최소 7종인데 암각화 전체에 고래 50마리가 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로써 당시 고래 집단의 종류, 행태, 습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죠.작살로 사냥하는 장면, 부구를 이용해 죽은 고래를 인양하는 모습, 그리고 포획한 고래를 해체하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림의 가장 위에는 한 남성이 성기를 노출한 채 춤추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무릎을 굽히면서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드는 모습인데 이는 샤먼이 춤추면서 감정이 고조된 신내림 상태에서 주술을 행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등 뒤로 거북이 3마리가, 그리고 수많은 고래가 이 남성을 향해 오르고 있죠. 또한 좌측 하단부에는 사지를 활짝 펴고 있는 사람이 한 점 등장합니다.
그의 손가락, 발가락은 굉장히 과장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정면을 바라보며 여성의 성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의 인물표현은 샤먼과 같은 종교인으로 그녀는 고래의 영혼을 달래 영계로 보내고자 하는 목적의 굿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고래의 영혼 여행을 돕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은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 1995년 6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습니다. 문명대 교수는 여러 시기에 걸친 한곳에 집중적으로 겹쳐 그려진 암각화는 세계적으로 예를 찾기 어렵다며 세계 미술사에도 구석기시대에는 라스코 동굴 벽화, 신석기시대에는 한국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고 쓰일 정도로 손꼽히는 유적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죠.
반구대 암각화가 다른 나라 관련 학계에 알려지기 전까지, 인간이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사냥한 시기는 대략 10~11세기로 추정되고 있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보다 수천 년이나 앞선 그림으로 인류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수천 년 전의 해양 어로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죠.
우리 땅에 살았던 조상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빨리 고래 사냥을 생업으로 삼고, 또 이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으로 그들이 얼마나 앞섰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그림에서 활을 쏘는 사냥꾼이 부각되면서 뒤늦게 한반도의 활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암각화에는 손에 활을 들고 노루, 늑대, 사슴 등을 사냥하는 사냥꾼의 모습이 여럿 새겨져 있습니다.그간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활쏘기 그림은 약 2천 년 전 고구려 고분 벽화였습니다. 고구려 벽화 이전 활쏘기 유물은 약 1만 년 전 화살촉으로,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됐고, 이보다 앞서 18,000년 전 단양 수양계 유적에서도 화살촉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슴베찌르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활쏘기 기능성만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었는데요. 그러다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실제 활을 쏘는 그림이 확인되면서 한반도의 활쏘기 역사를 선사시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김경진 울산 암각화 박물관장은 '암각화를 통해 보는 선사시대 사냥과 도구의 사용'이라는 논문을 통해 활은 구석기시대 후기부터 나타나는 사냥용 도구라며 활의 발달은 울창한 숲과 관련된 환경적 제약에 적응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즉, 한반도에 울창하게 숲이 우거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활이라는 것이죠.
암각화에서 보이는 활은 세상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큰 탄력을 내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각궁과 비슷한 형태인데 이를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활쏘기 기술이 뛰어났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기록물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초반에 말씀드렸듯 반구대 암각화가 자리한 대곡천은 1965년 지어진 사연댐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년 중 상당 기간 항상 물에 잠겨 있고 이에 따라 60년 가까이 침수와 노출이 반복되면서 훼손됐습니다. 실제로 2011년 훼손 실태 조사 결과 고래 문양 주변을 포함 56군데에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간 점이 확인됐고, 12년이 지난 지금은 더 많은 손상이 발생했을 겁니다.
고고학계에서는 꾸준히 수문을 설치해 수위를 낮춰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식수가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해결되지 못한 상황입니다. 댐 안에 생태 제방을 쌓는 방안, 물길을 돌리는 방안, 투명 물막이 설치 방안 등이 제시됐으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 속에 실현되지는 못했죠.
자칫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는 하단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암벽 전체가 무너져 내릴 위험성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암각화의 가치를 인정해 등재 잠정목록에 등록해 두고 있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이 암각화를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 서류로 제출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이견이 좁혀지지 않다 보니 보존 계획이 세워지지 못했던 것이죠.다만 작년 울산시가 반구대 암각화 일대를 명승으로 지정하고 사연댐 수문 설치를 추진해 보존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하면서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탄력이 붙었습니다.
비단 암각화뿐 아니라 암각화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절벽과 하천 등 일대를 모두 아울러 세계유산 등재 추진 구역에 포함했죠. 국회 역시 올 3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포럼을 열어 다양한 정책 토론이 오갔습니다. 이로써 국내에서 사전 절차를 마치면 202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고, 이르면 2025년 세계유산 등재라는 훌륭한 성적서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