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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24위 복자 약전
(2014년 8월 16일 시복)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목차
1. 개요
2. 연혁
1. 개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는 조선 왕조가 가톨릭을 탄압한 1791년(신해박해), 1795년(을묘박해), 1797년(정사박해), 1801년(신유박해), 1814년, 1815년(을해박해), 1819년, 1827년(정해박해), 1839년(기해박해), 1866년(병인박해), 1868년(무진박해), 1888년의 박해 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124위이다. 2014년 8월 14일 4박 5일 일정으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 1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해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뉴스기사 축일은 5월 29일이다.
2. 연혁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을 거행하면서 한국 가톨릭교회에 103위 성인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신해박해(1791년)와 신유박해(1801년) 때의 순교자들은 시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신유박해 200주년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시복 조사 법정은 2004년 7월 5일 개정되어 2009년 5월 20일 폐정되었다. 2009년 5월 28일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시복 청원서가 교황청 시성성에 접수되면서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당 안건은 2013년에 교황청 시성성 역사 위원회와 신학 위원회의 심의를 각각 통과했으며, 2014년 2월 4일 교황청 시성성 추기경, 주교단 심의를 통과한 후 2014년 2월 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 결정 교령 발표를 허락하면서 하느님의 종 124위에 대한 시복이 결정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식이 한국에서 거행되었더라도 시복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반면, 이번에는 시복식부터 한국에서 거행하는 특별한 경우이다. 또한 시복식이 열리는 장소가 순교자들이 순교한 형조, 좌·우포도청, 의금부 등이 자리했던 광화문 광장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2014년 8월 16일 오전 10시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의 시복 청원과 김종수 사도 요한 신부의 순교자 약전 낭독이 있은 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124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을 선언했다. 시복 선언 후 김영주 이멜다 화백이 그린 상본 '새벽빛을 여는 사람들'이 공개되었고, 다음으로 교황의 강론이 있었다.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124위의 시복 기념성가 <일어나 비추어라>를 발표하였다. 시복식 당일에 성가로 불려졌다.
2015년 8월 12일,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의 시복식이 거행된 광화문광장에 이를 기념하는 표석이 설치됐고, 2015년 8월 23일에 축복 예식을 거행한다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밝혔다. 8월 23일, 예고한 대로 광화문 광장에 표석이 설치되었다.
한국 124위 복자 : [가]
33. 강경복 수산나 (1762∼1801. 7. 2, ?-한양 서소문 밖, 참수)
강경복(姜景福) 수산나는 1762년 양민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며, 그녀가 살던 집은 ‘양제궁’이었는데, 1798년 무렵 집주인 송 마리아는 수산나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하고 수산나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 신부로부터 영세를 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후 자기도 피신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수산나는 즉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 하였다. 수산나는 마침내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32. 강완숙 골롬바 (1761∼1801. 7. 2, 충청도 내포-한양 서소문 밖, 참수)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60년 충청도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덕산 지방의 홍지영 후처로 들어간 그녀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이 후 열정과 극기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4월 6일(음력 2월 24일)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77. 고성대 베드로 (?∼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성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1815년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78. 고성운 요셉 (?∼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고성운(高聖云)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래 성격이 착하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고, 형제끼리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었다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모두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75. 구성열 바르바라 (?∼1816. 12. 19,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는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그 후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배교할 마음이 있어 보이자 그녀의 사위인 프란치스코의 권면 덕택에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았다. 17개월이 넘게 옥중 생활을 하였고, 그 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약 40세였다.
109. 구한선 타데오 (1844∼1866, 경상도 함안-경상도 함안, 장사)
구한선(具漢善)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 즉시 이를 받아들여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타대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그를 옥에서 끌어내도록 하여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 형벌로 인해 7일 만에 선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82. 권천례 데레사 (1784∼1819. 8. 3, 경기도 양근-한양, 참수)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65.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1769∼1802. 1. 30, 경기도 양근-경기도 양근, 참수)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3.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12. 8,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참수)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73. 김강이 시몬 (?∼1815. 12. 5, 충청도 서산-강원도 원주, 옥사)
김강이(金鋼伊, 시몬)는 충청도 서산의 중인 출신으로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강이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들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으나 상처가 심하고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59. 김계완 시몬 (?∼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계완(金啓完) 시몬은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1791년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얼마 후 최창현(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12월경 토마스가 체포되자, 시몬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몬의 늙은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또 시몬도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문초가 계속될수록 시몬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44. 김광옥 안드레아 (?∼1801. 8. 25, 충청도 예산-충청도 예산, 참수)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출신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았으나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그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60세 가량이었다.
111.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816∼1867. 1, 제주도 함덕-경상도 통영, 교수)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탄생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김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휴양중인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리노는 김기량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안되어 아주 깊어지게 되었다. 그해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제주의 복음화 노력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통영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혹독한 매질을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94. 김대권 베드로 (?∼1839. 5. 29, 충청도 청양-전라도 전주, 참수)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야고보)은 그의 아우이다. 한때 베드로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며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열심히 수계하며 살아가던중 아우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나타냈다. 그 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에게 웃는 얼굴로 잡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89.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 5. 26, 충청도 서산-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 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그의 큰아버지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다. 대구로 압송되어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56.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1802. 1. 25, 충청도 덕산-충청도 청주, 장사)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은 하나 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고 다음 2개월 뒤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되어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고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85. 김세박 암브로시오 (1761∼1828. 12. 3, 한양-경상도 대구, 옥사)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오히려 심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그는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나갔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한 달 후 대구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이재행(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는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70. 김시우 알렉시오 (1782∼1815. 5.(음) (혹은 6월), 충청도 청양-경상도 대구, 옥사)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는 1782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출신이며 성품이 착하고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반신불수인 탓에 결혼도 못하고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는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이나,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교우들을 체포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다. 안동으로 끌려갔다가 대구로 압송되었다. 옥에서 그는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어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옥사하였다. 1815년 5월 혹은 6월경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36. 김연이 율리안나 (?∼1801. 7. 2, ?-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는 양민 출신의 부인으로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천주교의 매파(媒婆 :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인 양제궁을 자주 드나들며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수산나) 등을 안내하여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시켰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김계완(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다음해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알렉시오)이 그녀의 집으로 피신해 왔다.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고 강완숙 ․ 강경복 ․ 한신애 등 동료 8명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07. 김원중 스테파노 (?∼1866. 12. 16, 충청도 진천-충청도 공주, 교수)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라고 하여 발래기 신자들은 대부분 분부대로 하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나 김원중만은 거절하였다.
나중에 출두하여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 책이라고 하자 즉시 그를 가두어 버렸다. 진천 관아에서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후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69.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1815. 4. 말(음) (혹은 5월 초), 경상도 상주-경상도 대구, 장사)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로 신앙을 배반하여 석방되었으나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안드레아)을 만나 그의 권면으로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배교를 취소하자 심한 매질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42. 김이우 바르나바 (?∼1801. 5.(음), 한양 명례방-한양 포도청, 장사)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마태오)는 그의 아우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아우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주 신부에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우 마태오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결국 형벌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경이었다.
45. 김정득 베드로 (?∼1801. 8. 25, 충청도 대흥-충청도 대흥, 참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 태생으로 친척인 김광옥(안드레아)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김광옥과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그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그는 김광옥과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96.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 10월 경, 충청도 덕산-전라도 전주, 옥사)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원만한 성격 때문에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가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옥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옥중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49. 김종교 프란치스코 (1754∼1801. 10. 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는 1754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원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데다가 호감이 가지 않는 외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취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이벽(요한)은 이러한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김범우(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처음부터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다음해 초 세례를 받았다. 체포된 후 두 번이나 신앙을 버리겠다고 했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는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는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홍필주(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119. 김종륜 루가 (1819∼1868. 9. 14, 충청도 공주-경상도 울산, 참수)
김종륜(金宗倫)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가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그는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허인백(야고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8년에는 그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종륜 루가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79. 김종한 안드레아 (?∼1816. 12. 19, 충청도 면천-경상도 대구, 참수)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가 되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맏형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이 일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나갈 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68. 김진후 비오 (1739∼1814. 12. 1, 충청도 면천-충청도 해미, 옥사)
충청도의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으로 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 교리에 무관심했으나 자식들의 노력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1791년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0년간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47.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 8. 27 (혹은 8. 28), ?-전라도 전주, 참수)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고 그 뒤를 이어 김천애와 유항검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34. 김현우 마태오 (1775∼1801. 7. 2, 한양 명례방-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현우(金顯禹) 마태오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바르나바)는 그의 친형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형제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형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형 바르나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히 그가 체포될 때는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에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80. 김화춘 야고보 (?∼1816. 12. 19, 충청도 청양-경상도 대구, 참수)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그는 기도 생활과 성서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할 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고, 고성대(베드로) 형제, 구성열(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74.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 12. 19, 충청도 예산-경상도 대구, 참수)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곧은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한국 124위 복자 : [마]
35. 문영인 비비안나 (1776∼1801. 7. 2,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는 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여덟 살이 되던 1783년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문서 쓰는 일을 맡았다. 22살 때 병에 걸려 잠시 궁궐에서 나왔을 때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병이 완쾌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갔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 자주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다가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는 26세의 동정녀였다.
한국 124위 복자 : [바]
84. 박경화 바오로 (1757∼1827. 11. 15,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옥사)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33살 무렵 입교하였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노령으로 감내하지 못하고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5개월 후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123. 박대식 빅토리노 (1812∼1868. 10. 12, 경상도 김해-경상도 대구, 참수)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군 진례면 시예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의 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이에 따라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빅토리노의 나이는 57세였다. 가족들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88.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 5. 26,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다.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자 관장은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112. 박상근 마티아 (1837∼1867. 1, 경상도 문경-경상도 상주, 교수)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가 칼래 신부와 함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신부를 숨겨 주었다.
3일 후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울면서 따라가서 도와드리기로 애걸했으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 후 숙모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어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0. 박취득 라우렌시오 (?∼1799. 4. 3, 충청도 면천-충청도 홍주, 교수)
충청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교우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 때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는 모두 1천 4백 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에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였다.
121. 박경진 프란치스코 (1835∼1868. 9. 28 (혹은 9월 29일), 충청도-경기도 죽산)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그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그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9. 방 프란치스코 (?∼1799. 1. 21, 충청도 면천-충청도 홍주, 장사 혹은 교수)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슬퍼하는 교우 두 동료들도 권면하여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 순교하였다.
13. 배관겸 프란치스코 (?∼1800. 1. 7, 충청도 당진-충청도 청주, 장사)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裵)관겸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입교하였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어 즉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쳤다.
이후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10월 3일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하였다.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0세였다.
한국 124위 복자 : [사]
72. 서석봉 안드레아 (?∼1815. 말, ?-경상도 대구, 옥사)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훗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과부 바르바라와 혼인한 그는 그 후 사위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다.
57. 손경윤 제르바시오 (1760∼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는 1760년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였다. 1790년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여전히 석방되자마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 되어 그는 아우와 함께 피신해 다니다 자기 대신 처자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수하였다.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113. 송 베네딕도 (1798∼1867, 충청도 충주-한양)
송(宋) 베네딕도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그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송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도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도의 나이는 70세였다.
114. 송 베드로 (1821∼1867, 충청도 충주-한양)
송(宋)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베네딕도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부친 베네딕도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베드로와 그의 부친 베네딕도,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47세였다.
106. 신석복 마르코 (1828∼1866. 3. 31 (혹은 3월 18일), 경상도 밀양-경상도 대구, 교수)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 쫓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91. 신태보 베드로 (?∼1839. 5. 29, 경기도-전라도 전주, 참수)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31. 심아기 바르바라 (1783∼1801. 4. 초(음), 경기도 광주-한양 포도청, 장사)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고 그녀도 곧 체포되었다.
이후 그녀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반면에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
97. 심조이 바르바라 (1813∼1839. 11. 11, 경기도 인천-전라도 전주, 옥사)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토마스)와 결혼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루가)은 그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두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그녀는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예비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한국 124위 복자 : [아]
86. 안군심 리카르도 (1774∼1835, 충청도 보령-경상도 대구, 옥사)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리카르도는, 언젠가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117. 양재현 마르티노 (1827∼1868. 여름, 경상도-경상도 동래, 참수)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체포되어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수군의 병영에서도 여전히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옥에 수감되었다. 옥에서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다시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장대(將臺)에서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122. 오 마르가리타 (?∼1868. 9. 28 (혹은 9월 29일), ?-경기도 죽산)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105. 오반지 바오로 (1813∼1866. 3. 27 (혹은 3월 26일), 충청도 진천-충청도 청주, 교수)
오반지(吳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후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관장의 유혹에 오반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있던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는 배교하였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사형 집행 전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103. 오종례 야고보 (1821∼1840. 1. 4, 충청도 은진-전라도 전주, 참수)
오종례(吳宗禮) 야고보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다른 교우 여럿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는 관장의 배교 유혹에도 꿋꿋하게 이를 참아낸 다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24. 원경도 요한 (1774∼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4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과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후에 체포된 요한의 장인 최창주도 함께 있었다. 1800년 10월에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고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11. 원시보 야고보 (1730∼1799. 4. 17, 충청도 홍주-충청도 청주, 장사)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이때 그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피신하였으나, 원시장은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즉시 첩을 내보냈다.
2년 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청주로 이송되어 온갖 혹형으로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 순교하니,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4. 원시장 베드로 (1732∼1793. 1. 28, 충청도 홍주-충청도 홍주, 장사)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60세가 가까워졌을 때 사촌 형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사촌 원시보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그는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 매질을 해도 소용이 없자 관장은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하였다.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54. 유문석 요한 (1784∼1801. 11. 1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교수)
유문석(柳文碩)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이에서는 그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중순 그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67. 유중성 마태오 (?∼1802. 1. 31,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참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 유배지로 가며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53. 유중철 요한 (1779∼1801. 11. 1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교수)
유중철(柳重哲)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5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10. 2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능지처참)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24. 윤봉문 요셉 (1852∼1888. 4. 1, 경상도 경주-경상도 진주, 교수)
윤봉문(尹鳳文)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통영시 이운면)에 정착하였다. 그의 부친은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 담임 신부인 로베르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요셉은 로베르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 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듬해 봄에 박해가 일어나 통영 포졸들에게 요셉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는 요셉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봉문은 진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 날 밤으로 옥리들을 시켜 교수형을 집행토록 하였으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로, 당시 요셉의 나이는 37세였다.
27. 윤운혜 루치아 (?∼1801. 5. 14, 경기도-한양 서소문 밖, 참수)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그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25. 윤유오 야고보 (?∼1801. 4. 27, 경기도 여주-경기도 양근, 참수)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윤유오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5.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6. 28, 경기도 여주-한양 포도청, 장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40. 윤점혜 아가타 (?∼1801. 7. 4, 경기도-경기도 양근, 참수)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때부터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1.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12. 8,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참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52.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10. 24,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능지처참)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그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전주 감영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58. 이경도 가롤로 (1780∼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이경도(李景陶)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의 동생들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경도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83. 이경언 바오로 (1792∼1827. 6. 27, 한양-전라도 전주, 옥사)
이경언(李景彦)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누나였다.
그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성 정하상(바오로)이 북경을 왕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된 포도청에서 전주로 이송되었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그는 1827년 6월 27일(음력 윤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43. 이국승 바오로 (1772∼1801. 5. 말(음), 충청도 음성-충청도 공주, 참수)
이국승(李國昇)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철저히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 땅으로 권일신을 방문하여 교리를 배웠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하였다.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이를 피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옥에 도달하였을 때,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자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8. 이도기 바오로 (1743∼1798. 7. 24, 충청도 청양-충청도 정산, 장사)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바오로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여 6월 8일 체포되어 정산 관아로 끌려간 그는 6월 10일 아침, 정산 형장으로 가서 갔고, 그곳에서 비신자들까지 가세한 혹독한 형벌을 받아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15.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 1. 9, 충청도 덕산-충청도 해미, 장사)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난폭하였으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어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98.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27∼1839. 12. 5 (혹은 12월 6일), ?-전라도 전주, 교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바오로)과 김조이(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로 인해 피신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그녀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하나의 작은 천사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나이가 어려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포졸과 옥리들은 그녀의 나이가 어린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104. 이성례 마리아 (1801∼1840. 1. 31, 충청도 홍주-한양 당고개, 참수)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8세 때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수리산 교우촌에서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66. 이순이 누갈다 (1782∼1802. 1. 31, 한양-전라도 전주, 참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받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보존하고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6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주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신부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 유중철이 머리에 떠올랐으며, 이에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다음해 9월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76. 이시임 안나 (1782∼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요한)는 그녀의 오빠였다.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뱃사공은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몇 해 안되어 남편이 사망하였고, 어린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1815년에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약 1년 6개월이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115. 이 안나 (1841∼1867, 경기도 인천-한양)
이(李)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도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송씨 집안이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 안나와 그녀의 시댁 식구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안나의 시조부인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그녀의 시아버지 송 베드로, 베드로의 딸,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안나의 나이는 27세였다.
118. 이양등 베드로 (?∼1868. 9. 14, 경상도-경상도 울산, 참수)
이양등(李陽登)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양등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허인백 ․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90. 이일언 욥 (1767∼1839. 5. 29, 충청도 홍주-전라도 전주, 참수)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태문(李太文)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이후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일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하다며 사흘 후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87.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 5. 26,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래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로 은거해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면서 격려하였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증거하였다. 대구로 이송되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안드레아)과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이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재행 안드레아의 나이는 64세였다.
116. 이정식 요한 (1794∼1868. 여름, 경상도 동래-경상도 동래, 참수)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그는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장대로 압송되었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102. 이조이 막달레나 (1808∼1840. 1. 4, ?-전라도 전주, 참수)
이조이(李召史)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20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수계를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23. 이중배 마르티노 (?∼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래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촌인 원경도(요한)와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이 모임에서 체포되어 6개월이나 옥중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는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기적과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1800년 10월에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에 따라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92. 이태권 베드로 (1782∼1839. 5. 29, 충청도 홍주-전라도 전주, 참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후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은 그의 삼촌이다.
그는 열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후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다. 1827년에 다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김대권(베드로), 이태문(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37. 이 현 안토니오 (?∼1801. 7. 2, 경기도 여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李鉉) 안토니오는 삼촌 이희영(루가)이 김건순(요사팟)의 집에서 살게 되자 자주 그곳을 왕래하였으며,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에게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정광수(바르나바), 최필제(베드로), 김종교(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 후 그는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홍필주와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계속된 형벌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형조로 이송된 안토니오는 포도청에서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동료들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4. 인언민 마르티노 (1737∼1800. 1. 9, 충청도 덕산-충청도 해미, 장사)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황사영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해미 옥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한국 124위 복자 : [자]
108. 장 토마스 (1815∼1866, 경기도 수원-충청도 청주, 참수)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으나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곧 청주 포졸들에게 그와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고 진천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그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60. 정광수 바르나바 (?∼1802. 1. 29,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부모의 반대로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순매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 윤점혜(아가타)가 체포되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운혜가 체포되었다. 정광수는 피신해 다니다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9월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형벌을 받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28. 정복혜 칸디다 (?∼1801. 5. 14, 한양 인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신자들 사이에서는 ‘정 과부’라고 알려진 정복혜(鄭福惠) 칸디다는 한양 근처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혼인한 뒤 한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무렵 이합규를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과부가 된 후에는 한신애(아가타),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과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성물과 서적들을 한신애 집에 숨겨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2월 체포되어 그 동안의 행적을 추궁하였다. 이때 그녀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2. 정산필 베드로 (?∼1799, 충청도 덕산-충청도 덕산, 참수 혹은 장사)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는,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비상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그에게는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사박해 때 각각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산필이 체포된 것은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덕산 관아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였다. 1799년 형장으로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내지 60세였다.
41. 정순매 바르바라 (1777∼1801. 7. 3 (혹은 7월 4일),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는 열아홉 살 되던 1795년에 한양에 살던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오빠는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바르나바)였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루치아)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과부로 행세하였다. 그녀는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윤점혜(아가타)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순매 바르바라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 주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주로 이송되어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이나 4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세로 동정녀였다.
18.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 4. 8, 경기도 광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29. 정인혁 타대오 (?∼1801. 5. 1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어 그의 형제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그는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의 가족들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으므로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고 최필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10. 정찬문 안토니오 (1822∼1867. 1. 25, 경상도 진주-경상도 진주, 장사)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는 먼저 영세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니, 그때가 그의 나이 42세 때인 1863년이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도 그 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진주로 끌려간 그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주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고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30. 정철상 가롤로 (?∼1801. 5. 14, 경기도 광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정철상(丁哲祥)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 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93. 정태봉 바오로 (1796∼1839. 5. 29, 충청도 덕산-전라도 전주, 참수)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그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을 때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이일언(욥),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81. 조 숙 베드로 (1787∼1819. 8. 3, 경기도 양근-한양, 참수)
조숙(趙塾)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16. 조용삼 베드로 (?∼1801. 3. 27, 경기도 양근-경기도 감영, 옥사)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2. 주문모 야고보 (17521∼801. 5. 31, 중국 소주-한양 새남터, 군문효수)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사람과 닮은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만나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고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주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음력 3월 11일, 주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며,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고, 새남터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신부가 순교할 당시 청명한 하늘이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7. 지 황 사바 (1767∼1795. 6. 28, 한양-한양 포도청, 장사)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 실패하여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사바의 나이는 29세였다.
한국 124위 복자 : [차]
99. 최 비르짓다 (1783∼1839. 12. 8 (혹은 12월 9일), 충청도-강원도 원주, 교수)
최(崔) 비르짓다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남편은 유배된 후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곧 최해성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최해성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자 그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아 받았다. 굶겨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녀는 금방 죽지 않고 4개월 후에도 그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비르짓다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비르짓다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71. 최봉한 프란치스코 (?∼1815. 5월경(음),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옥사)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안드레아)과 구성열(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그는 이후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 최필공(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대구로 이송된 후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1815년 5월경(음력)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었다.
48. 최여겸 마티아 (1763∼1801. 8. 27, 전라도 무장-전라도 무장, 참수)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결혼한 뒤에는 이존창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무장, 전주 감영으로 차례로 이송되었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그곳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6.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6. 28, 한양-한양 포도청, 장사)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인길은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1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져 버렸다.
38. 최인철 이냐시오 (?∼1801. 7. 2,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는 교회 창설 초기에 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이 그의 형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였지만,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호소에도 신앙을 증거하였으나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형이 순교한 뒤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 피신을 돕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따라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101. 최조이 바르바라 (1790∼1840. 1. 4, 경기도 여주-전라도 전주, 참수)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뒤 바르바라는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후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하나마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는 올 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22. 최창주 마르첼리노 (1749∼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다.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와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베드로)가 바로 그의 사위들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한양으로 피신중에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6개월의 옥중생활 후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17. 최창현 요한 (1759∼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최창현(崔昌顯) 요한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에서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은 비록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그 후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즉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처음 문초 때에 일시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다시 용맹한 마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20. 최필공 토마스 (1744∼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1790년에 사촌 동생인 최필제(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토마스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토마스는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유혹에 굴복하여 석방된 후 토마스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3년 뒤, 그는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에는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토마스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임금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인 12월 17일(음력), 형조에서는 그를 다시 체포하였다. 이틀 후에는 동생 최필제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최필공 토마스는 이후 이전의 행실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사형장에서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가면서 피가 손으로 흐르자 토마스는 이것을 보면서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26. 최필제 베드로 (1770∼1801. 5. 1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토마스)의 사촌 아우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사촌인 최필공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 후에는 거짓으로 최필공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0년 12월 19일(음력) 자신의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에 체포되어 형조의 옥에 갇혔다. 그의 늙은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부친은 비신자였는데, 죽을 때는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가받고 옥에서 나오게 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의 관리들은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순교의 원의를 나타냈다.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95. 최해성 요한 (1811∼1839. 9. 6, 충청도 홍주-강원도 원주, 참수)
최해성(崔海成) 요한은, 1839년에 순교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이후 그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해성 요한은 우선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요한은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한국 124위 복자 : [하]
62. 한덕운 토마스 (1752∼1802. 1. 30, 충청도 홍주-광주 남한산성, 참수)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39. 한신애 아가타 (?∼1801. 7. 2, 충청도 보령-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신애(韓新愛)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庶女) 출신으로, 장성한 뒤 한양에 살던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1795~1796년경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정복혜(칸디다)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1800년 여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가타는 그 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 입교시키지는 못하엿다. 김연이(율리안나)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강완숙과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그런 다음 강완숙 ․ 김연이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46.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 8. 26, 전라도 김제-전라도 김제, 참수)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20. 허인백 야고보 (1822∼1868. 9. 14, 경상도 김해-경상도 울산, 참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8개월간 옥에 갇혀 지내다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2년 뒤인 1868년에 죽령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경주 진영에서 문초 후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55. 현계흠 바오로 (1763∼1801. 12. 10,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현계흠(玄啓欽) 바오로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했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의 순교자 성 현석문(가롤로)은 그의 아들이며, 1839년의 순교자 성 현경련(베네딕타)은 그의 딸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후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제르바시오), 김이우(바르나바), 정인혁(타대오)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요 비밀 집회소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19. 홍교만 F. 하비에르 (1738∼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해오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레오)은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양근에 사는 고종 사촌 권일신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어 피신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2월 14일 즉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사형을 선고를 받고 정약종, 홍낙민(루가) 등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21. 홍낙민 루카 (1751∼1801. 4. 8, 충청도 예산-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낙민(洪樂敏) 루가는 1751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으며,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아들이다. 그에 앞서 그는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지도층 신자의 일원으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2년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후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루가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거한 후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61. 홍익만 안토니오 (?∼1802. 1. 29, 경기도 양근-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64. 홍 인 레오 (1758∼1802. 1. 30, 한양-경기도 포천, 참수)
홍인(洪鏔)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 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그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두었다가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부친 홍교만은 한양으로, 그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가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그에 앞서 그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홍인도 그 뒤를 이어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100.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 1. 4, 충청도 예산-전라도 전주, 참수)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루가)은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후,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한 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였으나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의 관장은 문초를 하고 전주로 이송시켰으나 전주 감사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50. 홍필주 필립보 (1774∼1801. 10. 4, 충청도 덕산-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계모 강완숙(골롬바)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부친 때문에 고향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795년 5월에 어머니 골롬바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집을 옮겨다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와 그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졌을 때 어머니 골롬바의 권면으로 즉시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63. 황일광 시몬 (1757∼1802. 1. 30, 충청도 홍주-충청도 홍주, 참수)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1800년 2월 그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 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참아냈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향으로 보내 참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시복(諡福)
시복(諡福, Beatificatio)이란 가톨릭에서 어떤 사람을 '복자(il beato/the Blessed)'로 인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절차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복절차는 시복 대상자의 사후에 행해지며, 시복된 이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 검증 하에 성인으로 추앙 받을 자격이 있는 경우 시복식 후에 성인추대 추진자의 신청에 의해 성인 추대 절차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복 후에 성인 추대 절차가 개시되었다 하여 모든 성인 추대 대상자들이 성인으로 선포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시복 절차와 시성 절차에서는 각 단계에 있어서 그 대상자에 의해 이루어진 일정한 수의 기적의 엄밀한 검증이 요구된다. 모든 검증 과정은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인 교황에 의해 이끌리는 교황청 시성성(Congregatio de Causis Sanctorum)에 의해 추진된다.
시복식 이전에도 거쳐야 할 다른 단계들이 있는데, 처음 단계를 지나면 '하느님의 종'으로서 불리고 그 이후에는 '가경자'로서 불린다. 가경자의 단계를 지나 시복 시성의 단계들을 거치게 된다. 단, 모든 단계 이전에는 추진 대상자가 살았던 지역 가톨릭 교구의 주교가 신청하는 공식 신청 절차와 함께 기타 관련자들의 신청 절차가 요청된다.
한국 124위 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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