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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망국에 견준다면 한 여인으로서 겪은 치욕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이신애의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이건세(李建世)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자향(李慈鄕)이었는데 모태 기독교 신자인 신앙심을 북돋고자 이름을 신애(信愛)라고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신애는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신애는 개성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塾)에 진학하여 낮에는 편물(編物)로 학자금을 벌고 밤에 공부를 하던 중에 결핵에 걸려 1913년 3학년 때 중퇴했다. 다시 원산으로 돌아온 이신애는 1914년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에서 공부한 다음 1918년부터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樓氏女學校 斗山里分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루씨여학교는 1903년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감리교 계열의 근대 여성교육 기관이다. 학교 이름은 학교 건축비를 기부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교회 여선교회 회장 루씨 커닝김(Lucy A. Cuninggim, 1838~1908)에서 따온 것이다.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화강암으로 지은 교사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학교의 상징은 『신약성서 갈라디아서』(5장 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상징하는 9개의 포도송이였다. 이 학교는 함경남도 지역의 근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친 학교로서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용신(崔容信)이 이곳 졸업생이었다. 여성 교육을 통하여 여성의 의식과 지위를 향상하고자 설립한 이 학교는 일명 원산여학교(元山女學校)라고도 하는데, 수업 연한은 4년이었다.
이신애는 이곳에서 교사로 생활하면서 여성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신애의 생활근거지는 정춘수(鄭春洙) 목사가 시무하는 원산 남촌동 94번지 원산남감리교회였는데, 이신애의 신심을 훌륭하게 여긴 정춘수 목사가 그를 전도사로 임용했다. 이 무렵에 이신애는 부흥회의 초빙 목사로 온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고 민족을 위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원산을 찾은 현순(玄楯) 목사도 만났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사상에는 진보적 성향이 짙게 나타났다. 그 두 목사의 가르침에 따라 이신애는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血誠婦人會)에 가담하여 장선희(張善禧)와 더불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모금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차에 1919년 9월 강우규(姜宇奎)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암살을 계획할 때 이신애는 한기동(韓基東)과 함께 가회동 62번지 숙소로 찾아가 군자금 모집을 부탁 받고 민대식(閔大植)을 찾아가 군자금의 제공을 요구하는 한편,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탁명숙(卓明淑)을 통해 경성부 누하동 임재화(林在和)의 집에 강우규를 은닉시켜주고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했는데, 사건 이후로 수사를 피해 은신했다.
역사는 늘 격동이었다고는 하지만 1919년의 절박한 상황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망국 10년이 되는 그 무렵의 민족의식은 분노와 절망의 이중주였다. 국내외 민족주의 세력의 성숙과 연계, 서구에서의 반식민지주의의 풍미, 그리고 러시아혁명이 보여준 소수민족의 보호 정책에 힘입어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거족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판단한 일부 민족주의 세력들이 지난날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조직을 통해 민족운동을 다시 전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었다. 이들은 3․1운동의 지도 세력이 전략적으로 대중의 역량을 투쟁화 하는 데 실패했고, 열강들이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비폭력주의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하였다.
대동단은 전협(全協)을 단장으로 하여 출판 담당에 최익환(崔益煥), 조직 동원에 한기동(韓基東)과 권태석(權泰錫), 이념 정립에 정남용(鄭南用), 자금 동원에는 부채표활명수를 만들어 거금을 모은 동화약방 사장 민강(閔橿), 기독교 대표에 전필순(全弼淳), 불교계 대표에 동창률(董昌律) 등의 대표들이 주동이 되어 총재로 전 농상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을 추대함으로써 조직을 완비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1919년 4월 무렵이었다.
1919년 9월 초순에 서울로 올라온 이신애는 경성부 인사동 7번지 김상열(金商說)의 집에 거주하면서 한기동의 소개로 필동 3번지에서 전협·나창헌(羅昌憲)을 만나 대동단에 가입하여 여성 대표를 맡기로 하고 박정선(朴貞善)과 한일호(韓逸浩) 등의 여성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기동은 미곡상을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원산에 자주 들렀는데 그때 이신애를 만났다. 이신애와 한기동 사이에 혼담이 오고 갔으나 이신애가 연상이어서 부모의 반대로 말미암아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비밀 결사인 대동단은 황족(皇族)·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종교단(宗敎團)·교육단(敎育團)·청년단(靑年團)·군인단(軍人團)·상인단(商人團)·노동단(勞動團)·부인단(婦人團)·지방 구역 등의 11개 지단(支團)으로 구성되었는데, 종교단 총대(總代)에는 정남용, 유림단 총대에는 이기연(李起淵)과 이내수(李來修), 상인단 총대에는 양정(楊楨), 청년단 총대에는 나창헌, 군인단 총대에는 유경근(劉景根), 노인단 총대에는 김상열, 부인단 총대에는 이신애를 선출했다. 이 무렵의 활동은 주로 지하 문서의 배포를 통한 독립 사상의 고취였는데 1919년 10월 7일에 최익환·이능우(李能雨)·권태석·권헌복(權憲復)·박형남(朴馨南)·이건호(李建浩)·김용의(金溶儀)·황란(黃鑾) 등이 체포됨으로써 조직에 상처를 입었다.
이신애는 11월 초순까지 김상열·김익하(金益夏)·이종춘(李種春)·이겸용(李謙容)·김종진(金鍾振) 등을 권유하여 대동단의 동지로 참가하게 했다. 이종춘은 이신애를 보면서 ‘저토록 젊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투쟁한다면 우리도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조직에 참여했다. 이종춘은 기독교 계통을 통하여 2년 전부터 이신애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김상열은 이신애가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이었는데 이신애의 권유로 대동단원이 되었다.
이 무렵에 전협 등의 수뇌부는 1919년 10월 초순경 조직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義親王) 이강 공(李堈 公)의 상해 망명과 독립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목적으로, 이들은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하였는데, 이때 이신애는 여성 대표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이미 상해로 망명한 김가진 총재와 임정 요인들의 권유에 따라 황족 대표로 이강 공을 임시정부에 합류시키려는 계획은 종로경찰서 김태석(金泰錫)과 미와(三輪) 경부의 수사망에 걸려 11월 11일 일행이 만주 안동역(安東驛, 오늘날 단동역)에서 체포됨으로써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이강 공 탈출 사건의 실패로 말미암아 전협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된 이후의 대동단에는 비통과 적막만이 감돌았다. 분노와 회한이 엇갈리는 가운데 남은 단원들은 자신들의 투쟁 과업이 중단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이에 따라서 탈출에 성공한 나창헌과 이신애, 정규식(鄭奎植), 박원식(朴源植), 안교일(安敎一), 정희종(鄭喜鍾), 이정찬(李貞燦) 등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만세 운동을 논의했다.
1919년 10월 중에 상해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이 서울로 들어와 한편으로는 송세호(宋世浩)·윤종석(尹鍾錫)·나창헌 등과 함께 연통제(聯通制)의 조직에 주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에 있는 각종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 단체와 협동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10월 31일에 천장절(天長節)을 맞이하여 상해 방면으로부터 송부해온 박은식(朴殷植)과 그 밖에 몇 십 명의 제2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일대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동단 총재 김가진 등의 찬동을 얻어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와 같이 전협, 정남용, 양정, 한기동, 이신애, 나창헌 등은 제2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가운데 정남용, 전협, 양정, 한기동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다. 이에 체포망을 벗어난 나창헌은 이신애․정규식 등과 협의하여 11월 25일 경 경성부내에서 등사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유민임을 천하만국에 선언할 것을 계획했다.
이신애는 11월 5일 종교예배당(宗橋禮拜堂)에서 서로 알게 된 박원식에게 11월 23일 경 원동 162번지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보여주며 등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박원식은 자신은 시골 출생이므로 글쓰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동대문 밖에 있는 안교일을 찾아가 그 뜻을 전한바, 선언서의 등사를 의뢰 받은 안교일이 곧 이를 승낙했으나 자기는 등사판기를 소지하지 않았으므로 원고와 등사원지를 마련하여 정희종이 봉직하고 있는 흥인학교(興仁學校)의 등사기를 빌려 창신동 93번지에 있는 그의 방에서 안교일의 주도 아래 「선언서」와 『독립신문』 호외를 8절지에 인쇄하여 김종진 숙소에서 나창헌과 이신애에게 교부했다.
그 후 이신애는 여러 차례 그 계획에 대하여 협의하면서 한일호․김상열․김익하․이종춘․이겸용 등에게 같은 계획을 알리고 함께 서명자가 되기를 권유했다. 박정선․김상열․이종춘․김익하는 선언서의 문사(文詞) 등에 대하여는 이를 간부에게 일임했다. 제2 독립 선언의 의미를 담고자 서명자의 숫자는 상징적으로 33인으로 구성했다. 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월 26일에 박원식은 이신애와 만나 다음 날 선언서를 자동차로 뿌릴 뜻을 전달하였으며, 27일 밤에 정규식, 나창헌, 이신애, 박정선, 김종진 등을 만나 28일 오후 4시 30분에 안국동 광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26일 오후 3시경에 다시 만나 정규식과 이신애에게 1원을 주어 안국동 중국인의 집에서 당목(唐木)과 잉크를 사서 교부함에 그들은 김종진의 집에서 정규식·정순화(鄭順和)·김종진을 만나 다음날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를 먹으로 쓴 깃발 두 장을 제작하여 휴대하고 안국동 광장으로 나아갔다. 한편 나창헌 등은 26일 밤 경성부내 여러 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이튿날인 27일 오후 5시 만세운동을 거행할 터이므로 참가하라는 뜻을 전달하고, 이신애는 김상열, 김익하, 이종춘 등에게 장춘관(長春館)에 모이라는 뜻을 알렸다.
그들은 11월 27일 오후 5시를 기하여 서울 시내에 이를 배포하는 동시에 일대 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틀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점 조직 이외의 대중 동원 체제를 갖추지 못한 이들로서는 지난날 3․1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동적인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들이 구상한 방법에 따르면, 자동차 세 대를 구하여 오후 5시를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제1대에는 정규식이 타고 남대문의 조선은행(朝鮮銀行) 앞에서 출발하여 하세가와정(長谷川町)과 광화문(光化門)을 향하여 달리면서 전단을 뿌리도록 하고, 제2대는 이신애와 박정선이 타고 동대문의 한일은행(韓日銀行) 지점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로 향하면서 선언서를 뿌리며 보신각 쪽으로 달려가도록 하며, 제3대는 이정이 정동 배재학당(培材學堂)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달리면서 전단을 뿌리도록 했다.
같은 날 저녁에 안교일은 나창헌으로부터 이강 공 외 32인 명의로 등사한 독립선언서 약 50매와 최은식(崔殷植) 외 29인 명의의 활판인쇄 선언서 약 50매를 26일 밤에 배포하라는 의뢰를 받고 이를 받아 강정희(姜正熙)로 하여금 이를 정희종의 집으로 보내 종로 5정목과 6정목의 민가에 배포하기를 의뢰하였다. 정희종은 다음날인 26일 아침에 선언서를 효제동 202번지 전대진(全大振)의 집에 가지고 가서 27일 만세운동의 계획 개요를 말하고 그에게 교부하였으며, 전대진은 이를 승낙하고 받아 같은 날 밤에 종로 5정목 노상에서 박용주(朴龍柱)에게 계획을 알리고 배포 분담을 의뢰하여 그 선언서 약 50매를 교부하고 두 사람은 각각 분담 구역을 정한 뒤에 종로 5정목과 6정목 각 민가의 대문 안에 선언서를 투입하여 배포했다.
다른 몇 명의 노인들은 장춘관에 모여 음식을 먹고 있었으며, 이정과 정규식은 각기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여 보니 자동차는 왔으나 만세를 부르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았으므로 정규식은 집으로 돌아가고 이정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신애와 박정선도 역시 지정 장소에 가기로 했으나 자동차가 오지 아니하므로 집으로 돌아갔다. 장춘관에서 모여 기다리던 김상열·이종춘·김익하·조형구(趙炯九)·정설교(鄭卨敎)·김횡진(金宖鎭) 등의 노인단 대표들도 아무런 소식이 없게 되자 오후 10시경 헤어졌다.
이들이 약속 장소를 떠나 원동 162번지에 있는 김종진의 집으로 가보았더니, 그 곳에는 나창헌과 박원식, 전협의 아내인 변화(卞和)와 이강 공 탈출 사건 때 공평동에 함께 있었던 일본 유학생 김선(金善)과 박원식 등이 있었다. 이들은 그날의 실패에 분개하며 어차피 단체 시위가 불가피할 바에야 각자의 양심과 용기에 따라 다음 날인 28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정하고 헤어졌다. 27일 밤에 이신애, 정규식, 박원식, 나창헌 등은 김종진의 거처인 원동 162번지 김정하(金鼎夏)의 집에 회합하여 당일의 실패에 분개하여 밤을 지새우며 논의한 끝에 다음날 28일 오후 4시 반을 기하여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만세운동을 거행할 것을 약속했다.
다음날 28일 아침에 이신애는 박정선의 집에 도착하여 해당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요구했다. 같은 날 오후에 이신애, 정규식, 박원식 등은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 쓴 깃발 각 한 폭을 제작했다. 오후 4시 반경에 이신애, 박정선, 정규식, 박원식은 차례로 안국동 광장에 모였다. 계획을 들어 알고 있던 이종진도 역시 그 운동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통행인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서 이신애와 정규식은 깃발을 흔들며 앞장 서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각 신문사에 만세운동 사실을 통고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투옥에 대비하여 흰 솜두루마기를 입고 남바위를 쓰고 있었다. 약속된 오후 5시가 되자 정규식이 먼저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백기를 펼쳐 들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신애와 박정선 등도 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행인들이 모여들기도 전에 안국동 주재소의 경찰관들이 솔개처럼 일행을 잡아채어 갔다. 박원식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체포되었다.
종로경찰서에 수감된 대동단원들은 고등계 형사 김원보(金源甫)의 취조를 받았다. 1920년 2월 2일부터 6월 28일까지 지루한 예심이 진행되었다. 예심은 주로 경성지방법원의 나가시마 유조(永島雄藏) 판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러는 가운데 1920년 3월 1일이 되었다. 이 당시 유관순(柳寬順)과 같은 동(棟)에 수감되어 있던 이신애와 박정선 등은 독립 만세 1주년을 옥중에서 맞이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미와 경부로부터 더욱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신애는 이로 말미암아 고막과 유방 파열의 고통을 받았으며, 나체로 신문을 받았다. 이신애는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출판법 상 불온문서 반포죄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 질서를 방해한 정치범죄처벌령(政治犯罪處罰令) 및 조선형사령에 따라 징역 4년 구형, 3년 선고를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대동단원들은 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전협이나 최익환과 같은 식자들은 형무소 안의 인쇄소에서 문선(文選)과 교정(校正)으로 수형 생활을 했으며, 박정선이나 이신애와 같은 여성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 생활과 완구 제조에 종사하면서 형기를 보냈다. 정남용은 옥사했다. 수형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메주에 가까운 콩밥은 이미 각오했고 또한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20평 남짓한 감방에 90명씩 수용된 시설은 견디기 어려웠다. 더구나 별도의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감방 내에 6~7개의 변기를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방안의 악취로 코피를 쏟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신애는 2년 이상의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6월 1일에 가출옥했다. 이신애는 명천 3·1운동의 주역으로 순국한 동풍신(董豊信, 1991년 애국장)과 더불어 관북을 대표하는 여성독립운동가였다. 그 뒤의 행적에 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신애는 충남 공주읍 옥룡동에 거주하면서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47년부터 11년간 부녀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말년의 생활은 간고(艱苦)했다. 정부에서 마련해 준 대전시 문화동 집에서 남편 문홍범(文洪範)과 함께 병고를 치르며 1982년에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