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32> 1534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왜 로마교황청과 결별했을까?(下)
교황이 이혼 허락 않자 영국교회 수장이 되다
특별委 설치해 혼인 무효 선언, 수장법 의회 통과, 교황 권한 국왕에게
당시 잉글랜드에 반가톨릭주의 팽배, 수도원 해산시키고 재산 왕에 귀속
별다른 저항 없이 종교개혁 성공, 강력한 군주권 확립, 국가 토대 마련
헨리 8세는 제인 시무어(오른쪽)와 세 번째 결혼으로 간절히 바라던 아들 에드워드 6세(왼쪽)를 얻었다.(가상 가족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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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그의 성격답게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1527년 국왕의 이혼문제를 공론화했다. 만사를 자신이 맘먹은 대로 처리해온 헨리로서는 문제를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그는 최측근인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에게 문제 해결을 일임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 내에 교회 법정을 열어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했으나 끝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헨리 8세가 캐서린을 궁에서 ?i아내고 앤 불린과 결혼해 얻은 딸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캐서린이 끝까지 강경하게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헨리 8세와 비록 딸이지만 애까지 낳고 20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지금 와서 이혼하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문제가 꼬이자 화가 난 헨리 8세는 그 분풀이를 울지에게 했다. 국왕의 후원 아래 막강한 권력을 누려온 울지는 졸지에 왕의 총애를 잃고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교황이 이혼 요청을 허락해주지 않자 헨리 8세는 국내에서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캐서린이 마지막까지 소환을 거부하자 위원회는 궐석 판결로 혼인 무효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교황의 허락을 피한 채 앤 불린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때 해결사로 나선 인물은 1529년 울지의 실각에 이어서 부상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협조를 받아 의회를 통해 교황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1534년 연말에 ‘수장법(Act of Supremacy)’이 의회를 통과함에 따라 국왕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존재가 됐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로마교황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게 됐고, 더불어 교황이 행사하던 모든 권한은 잉글랜드 국왕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토머스 크롬웰. |
헨리 8세가 별다른 저항 없이 로마와 결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당시 잉글랜드에 팽배해 있던 반가톨릭주의 감정이 놓여 있었다. 당시 대다수 고위 성직자들은 세속적인 부와 명예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일반 민중의 존경을 잃고 있었다. 이들의 부패와 만행에 대한 반감은 당연히 교황과 로마교황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교회가 온갖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돈이 부패와 사치의 도시로 비난받고 있던 로마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대다수 잉글랜드인이 반가톨릭주의 감정과 로마교황청에 대한 불신으로 들끓고 있던 분위기를 십분 이용하여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결별을 단행했다.
이제 마지막 장애물까지 제거한 터인지라 헨리 8세는 캐서린을 궁에서 쫓아내고 앤 불린을 불러들였다. 1533년 1월 헨리는 비밀리에 앤 불린과 그토록 원하던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사랑하는 왕비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자식을 얻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찌 원하는 대로만 될 수 있을까? 그녀가 분만한 아이는 아들이 아니라 후일 엘리자베스 1세가 되는 딸이었다. 득녀의 기쁨은 잠깐뿐 앤 불린에게 절실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두 번째 임신으로 그 가능성이 엿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임신 4개월 만에 유산하고 말았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다. 공교롭게도 헨리 8세가 마상 시합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헨리 8세의 실망감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녀는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된 후 1536년 5월 참수형을 당했다.
이제 헨리 8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앤 불린이 처형되고 그 핏자국이 지워지기도 전에 제인 시무어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1537년 10월 중순 새 왕비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헨리 8세를 이어서 왕위에 오르는 에드워드 6세였다. 애석하게도 시무어는 분만 후 산후 여독으로 죽고 말았다. 헨리는 이후에도 클레브의 앤, 캐서린 하워드, 마지막으로 캐서린 파 등 총 6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망가진 자신의 몸이었다. 비대한 몸매에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던 헨리 8세는 1547년 1월 5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1534년 수장법 선포로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머리가 된 사건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장 가시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교회 및 성직자에 대한 감찰과 이를 빌미로 강요된 수도원 해산과 토지 몰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총 800개에 달한 수도원들은 대부분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혹자는 헨리 8세 종교개혁의 진정한 목적은 종교적 독립이 아니라 경제적 수탈이라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과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탕진한 데다가 대륙 국가들과 끊임없이 다툼을 벌이느라 부채가 쌓인 헨리에게 이러한 수도원 토지야말로 군침 도는 먹잇감이었다.
이제 영국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로서는 행동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치세의 전반기에 울지를 내세웠듯이 이번에는 크롬웰을 앞세워서 과업을 추진했다. 의회에서 수도원 해산 관련 법령을 통과시키는 정공법을 택했다. 수도원을 비롯한 반대세력의 반발을 의식한 듯, 먼저 수도원을 비롯한 모든 교회와 성직자에 대해 감찰조사를 명하는 포고문을 발했다. 수도원의 인적 동향과 물적인 수입 전반을 세밀하게 조사하겠다는 조처였다. 이름 자체도 묘한 느낌을 주는 일명 ‘검은 책(Black Book)’으로 불린 감찰 결과보고서에는 성직자들의 비리와 관련된 방대한 정보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끝낸 헨리 8세는 수도원 해산법을 제정하고 1536-1539년에 이를 집행, 수도원 재산을 국왕에게 귀속시켰다. 결국 수도원 해산 작업을 통해 헨리 8세는 막대한 돈을 모았고, 이것을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전쟁, 그리고 자신의 허영을 위한 비용으로 충당했다.
사건의 역사적 영향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이후 영국사 및 유럽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헨리 8세의 통치 시기를 통해 영국에 군주제가 확립됐다. 전통적으로 영국에서 국왕은 여러 힘 있는 귀족 가문 중 일인자라는 특징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왕위는 귀족의 일개 분파를 대변하는 직위로 인식되어 걸핏하면 왕권을 넘보는 세력들이 많았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자신의 강한 개성을 앞세워서 정적들과 도전 의심 세력을 냉혹하게 처단하면서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는 국가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회는 물론 종교도 헨리 8세의 통제권으로 들어왔다. 그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은 억울하겠으나 헨리 8세는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여 영국의 국가적 토대를 다졌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프리 엘턴과 같은 역사가들은 이른바 ‘튜더 행정혁명론’을 제기할 정도였다. 헨리 8세 시대에 관료제 및 전국 단위의 행정체제가 확립되면서 바야흐로 영국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의 통치기를 통해 영국은 유럽의 중심국가 중 하나로 부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실상 영국은 유럽 대륙의 맨 서쪽에 위치한 섬나라로서 주변부에 해당했다. 기껏해야 천혜의 목초지에서 양을 사육해 얻은 양모를 대륙의 플랜더스 지방에 수출하는 가난한 국가였다. 이러한 영국이 16세기 말 이래 용트림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세계적 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됐다. 이러한 부흥의 길 도상에서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 바로 헨리 8세였고, 그의 치적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국 국교회의 수립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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