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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마다 방송마다 소설 <혼불>의 배경인 남원의 종가에서 불이 났다고 납니다. 그 보도 속에 종갓집 맏며느리 박증순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황영순씨가 합니다. '혼불 문학관'에서 도우미를 했고,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정답고 다정한 향토문화해설사랍니다. 놀란 마음에 나는 황 여인에게 전화를 겁니다. "오라버니세요. 그저께 뵈울 때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어요. 어른이 계시던 본채만 타고 다른 곳은 다 멀쩡해요. 어제 하루 전화에다가 방송에 사진 찍히느라고 파김치가 되었어요. 누이가 큰 고생 했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신문사와 방송사의 질문에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혼불에 나오는 효원 마님의 모델이 된 종갓집 어른에 대한 존경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황 여인과 통화를 하면서 생전의 어른 모습이 떠오릅니다. 2000년 여름, <혼불>의 작가 최명희와 풍남국민학교 동창이고, 최명희가 졸업한 기전 여고 교감이었던 김환생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지요. 혼불의 효원인 종가의 마님이 남원에 계시다고 말입니다. <혼불>은 효원의 혼례에서 시작됩니다. <혼불>에서 효원이가 남편의 여자인 강실이를 미워하고 보살핍니다. 효원은 존경받을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책 속에만 있는가. 그러려니. 대개 독자가 하는 그런 생각의 범위에서 나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고요. 그 여인이 실존인물이고, 더구나 지금도 이 하늘 아래 살고 있다니. 효원 마님, 정말인가요. 전주로 달려가 김 선생의 차를 얻어 타고 남원의 사매면의 혼불의 시원인 종가로 갑니다. 혼불에 나왔던 솟을대문이 있는 곳의 사랑채와 안방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만 책 속에 있었던 이야기가 현실이었음에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낍니다. 기쁨이요, 다른 한 편, <혼불> 최명희를 말하면서 그이의 뿌리에 무관심했던 우리의 됨됨이에 대한 부끄럼입니다. 소설 <혼불>을 펼치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청사초롱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바람까지 일었다. 혼불 제1권 첫 줄이 바로 내 눈앞에 있습니다. <혼불>의 살아 있는 주인공 효원 마님이 사시는 대문의 기상이 시퍼렇고, 담을 끼고 대숲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혼불>의 첫머리 여는 대목이 소설처럼 '소소한 바람이 슬렁거렸다'입니다. <혼불> 문학 마을이란 글을 새긴 바위야, 너 보니 기분 좋고 낮닭의 홰치는 소리가 문득 시간을 깨며 다가옵니다. 빈손으로 차마 송구하여 동네 구멍가게에서 어른 드릴 마실 것을 챙겼으나 효원 어른 모시고 최명희 대신에 효도하리라 했던 마음 다짐치고는 너무 부족하군요. 개는 컹컹대며 <혼불> 소설 속에서 뛰어나오고, 대문에서 들어서니 빗발에 옷이 젖습니다. 김 환생 선생님은 "어른이 계실까?" 했지만 "아흔의 노인이 어디 외출을 하셨겠습니까? 필시 집을 지키고 계실 것입니다" 하는 내 말대로 마님은 계시니 당신이 효원, <혼불>에 나오는 '효원'이란 말입니까? 나는 어른께 여쭙니다. "할머님을 최명희가 효원이라고 부르던가요?" 어른께서는 유년 시절의 최명희와 청년 시절의 최명희 이야기를 도란 도란 해주십니다. 곁에 앉아 꼼꼼히 노트에 적던 모습이며, 혼불의 주인공 효원이 할머니라는 등 . 사실 혼불은 소설과 현실이 어울린 줄거리입니다. 혼불에 나오는 순정의 여인인 강실이 이야기를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에게는 강실이는 낯선 이름인가 봅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나그네는 어른을 뵙은 것만으로 목이 멥니다. <혼불>의 주인공 효원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어른이었고, 효원의 가슴을 태웠던 강실은 여기 여인이었습니다. 노적봉이 올려다보이는 이 마을의 이야기는 학생 최명희가 동네 어른들에게 묻고 듣고 하면서 골격을 이루고 살이 붙고 우리말의 영롱한 의상을 떨쳐입었군요. 언제 다시 뵐까. 짧은 시간에 최명희에 대한 이야기만 묻고 말았지만. 90 생애를 최명희처럼 끈질기고 다정하게 들어도 못다할 이야기를 한마디도 아니 묻고 나그네들은 떠나갑니다. 청암 부인이 역사를 했다는 청호 저수지가 <혼불>에서는 거창하게 물을 담고 있는데 실제의 저수지는 연못처럼 아담하니 최명희의 눈은 이 저수지를 호수의 너비와 강의 폭을 갖게 했군요. 머물고 싶은 마을은 가지 말라 하지만 다시 소설 밖의 세상으로 돌아섭니다. 만나 뵌 7년 세월 뒤 여름은 다시 오고 어른은 혼불 되어 떠나십니다. 어른의 자취는 소설 <혼불>로 남기신 채. |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