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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묵상글 ( 대림 제4주일. - 하씨 집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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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씨 집안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오늘 사무엘기는 다윗이 말년에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자
그럴 필요가 없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평생 전쟁만 하던 다윗이 말년에 적들을 다 물리치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고 자기 궁도 잘 짓게 되었는데
하느님은 여전히 천막에 머무시니 그것이 다윗에게는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당신이 다윗 집안을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집안이 하느님 집안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오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서이고,
요셉이 메시아의 양부가 되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고 오늘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성당은 아니 지어드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우리 집안이 하느님 집안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저의 경우 이제부터 김씨 집안이 아니라 하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요셉처럼 제가 낳은 자식이 없지만
하느님이 제게 맡기신 자식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키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요즘 하느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젊은이들이
저의 아들딸이자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키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아들딸을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면
여러분도 하씨 집안을 일으키는 분들이 될 수 있는데
자녀 가운데 하나가 사제나 수도자 되게 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자녀를 내 자녀로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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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대림 마지막 주간에 복음은 마리의 믿음의 순종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게 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마지막 주간에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 일상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서 주님이 잉태되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믿음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믿음으로 모든 인간적인 사고나 경험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분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기를 바랬습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이라고 하는 두가지 열매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겸손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판단을 중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순종의 마음입니다.
순수한 믿음의 길은 우리의 영적 여정이 어디 와 있는지를 염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나의 것보다 더 좋다 판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믿음을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지고 높여져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관념적으로 이해했다 하여 믿음이 싹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를 지지하신다는 자신의 산 체험만이 신앙을 눈뜨게 합니다.
믿음을 가질 때 인간은 그 믿음이라는 옷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온갖 다른 덕보다 뛰어나서 강력하고 교활한 악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항구한 인내심이 수반합니다. 항구한 인내심이란 모든 덕의 극치와 완성이며 공로의 어머니요 상급의 수단입니다’라고 베르나르도 성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항구한 인내심을 버리면 순종이나 친절로 은총을 얻지 얻지 못합니다’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척도는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위해서 시간을 갖고 중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무엇이든 보람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서는 시간을 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주간에 마더 데레사의 기도를 상기하고자 합니다.
“침묵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침묵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한 중국인 아 록
신 대영제국, 비스마르크 군도 -1905년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선교를 맡고 있는 코우프(Couppe) 주교가 그의 어린 양들에게 성사를 베풀어 주기 위하여 지치지 않고 주교구의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던 도중에 이 두 형제의 농장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 섬에서 얼마 되지 않은 가톨릭 신자에게 미사를 집전해 주고 또 성사를 베풀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아카이는 그의 친절한 호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아카이는 거룩한 미사성제를 마치고 난 후에 주교에게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 주교는 그의 소원을 들어 주고 자신의 체류기간을 늦추어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가톨릭 교리와 신앙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 아쿤에 의해 개종을 하였던 가브리엘 초우(Gabriel Chow) 는 친구의 농장에 선교의 배가 들어왔다는 것을 듣고는 즉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자신의 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곧바로 배를 타고 왔다. 아카이는 그 두 어린아이에게 대부가 되어 주었다.
아카이는 변함없이 자식을 14명이나 둔 가정의 가장 모범적인 크리스찬 가장으로서 살아갔다. 세 아들과 세 딸은 커서 주님을 선교하는 소명을 받들었다. 아카이 자신도 그가 세례를 받은 날부터 40년 동안 성스러운 영성체를 받았다. 마음의 탐욕을 제어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어떠한 길도 멀지 않았으며 어떠한 향해도 길지 않았다.
아 록에게는 이러한 모든 일이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는 죽음에 임할 때까지 평신도 사도직으로서의 소명과 그리고 성스러운 제단의 성체를 흠숭하는 열심한 신자로서 일하였다.
그러나 1939년 1월 25일 아기예수는 아 록에게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해 그를 하느님의 나라로 데리고 갔다. 아 록은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아기예수를 따라갔다. 이 날은 그를 기념하는 본명축일이었다.
중국인들은 아 록의 선행을 잊지 않고 뉴잉글랜드에 있는 전원 도시 라바울(Rabaul)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라바울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격심한 피해속에서도 아 록의 동상만은 아무런 손상도 없이 보존되었다.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중국인들은 그 동상 앞에서 자신들도 사도의 직분을 열심히 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오늘날 그의 학교와 자선사업은 더욱 증가되었다. 그리스도와 같은 그의 생활은 이 폐허에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간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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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가 1, 26-38(대림 4 주일); 긴 강론-해군중앙성당 대림특강
[대림환]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하얗게 타오르는 네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양광모 시인의 “기다림”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누군가 /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
그리하여 /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
우리는 /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 기다리는 날이라네. //
기다림의 끝자락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바로 오늘 밤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의 계시”(로마 16,15)를 선포합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낸 이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로마 16,26)
<복음>에서는 <제1독서>에서 예고되었고, <제2독서>에서 증언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경위를 전해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는 “기뻐하여라.”고 선포하고, 그 이유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은총이 가득한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말에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그리고 천사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말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 라고 말합니다. 이에, 천사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 너를 덮을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고 말하고,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시간에는 이 ‘마리아의 응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응답’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응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1. <맨 먼저>, 우리는 ‘말씀 앞에 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경청이 발생하는지?’, 곧 ‘말씀의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응답’의 ‘첫 마디’ 안에 있습니다. 곧 “보십시오.” 라는 첫 마디는 바로 ‘그가 있는 자리’를 드러내줍니다. 곧 그가 있는 자리는 ‘주님의 현존, 주님의 면전’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고 있고, 그를 ‘향하여’ 있고,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과의 면전’이라는 자리가 바로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요,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응답’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바로 이 ‘현존’에서 시작해서 ‘현존’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현존’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모름지기 대상을 향하여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애시 당초 하느님의 ‘현존’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만남’도 벌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주님 현존’ 없이 기도한다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한갓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독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비록 자기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기도 곧 하느님과의 만남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 있어, “하느님 현존에 대한 면전의식”은 그야말로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이고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존’은 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될까요?
‘만남’은 대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될까요?
그것은 분명,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의 방문’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고,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남’, 곧 ‘면전’은 그분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먼저’ 찾아오신 까닭이 아니고서야, 그 ‘사랑의 방문’이 아니고서야, ‘만남’은 애초에 발생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자렛 마을 마리아의 집으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현존’은 ‘먼저 방문’하신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주님의 현존’이라는 ‘지극한 주님의 사랑 앞’에서 “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로 지금, 우리가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 그분의 사랑의 방문 앞에 나와 대면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그분의 면전에서 마리아는 ‘그분과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단지 당신이 “주님”이시고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만은 아닙니다. 곧 사실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한 감격으로, 진실 된 인정과 승복과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의 마음을 품은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 ‘“종”이 되고 싶으세요?’ ‘진정, “종”이 되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요?’ ‘대체 누가 ‘종살이’를 좋아할까요?’
사실,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하는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천하고 뒤틀린 질곡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더군다나 군대의 계급사회의 생리에서 상관 아래 매여 있는 하급자의 신분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우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하늘나라라 하더라도 “종”으로는 살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겠죠.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의 종”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종”이란 대체 누구를 말할까요?’
대게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모세, 엘리야, 다윗 등이 ‘주님의 종’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 대사제들, 왕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종”을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 이’(첫째노래, 42,1-9), ‘사명을 받은 이’(둘째노래, 49,1-7), 그리고 ‘사명을 수행하면서 ‘박해와 거부당하는 이’(셋째노래, 50,4-11), ‘무죄하면서도 죄를 짊어지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이’(넷째노래, 52,13-53,12)로 불리어 집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금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으로 그분 면전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이에 합당한 마음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솔로몬 왕은 제사를 지내려 기브온에 갔을 때, 주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그렇습니다. 바로 이 ‘듣는 마음’에서 지혜가 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듣는 마음’이 필요할까? 곧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마음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신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귀담아들어라.”는 것은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하여 귀 기울여 들음’이요, ‘말씀을 넘어 말씀하시는 분께 귀 기울여 들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듣기를 원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의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들음’에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귀’로 듣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청은 이미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또 그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이미 믿음(의 마음)으로 잉태하셨다.”
이처럼, ‘듣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에 앞서,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귀 기울이는 ‘인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경청이란, “전 인격이 말씀의 경청으로 팽팽”(암브로시우스)해져 있음이요, “하느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그레고리우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그처럼 전 인격으로 주님의 사랑에 젖어 매달려 있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되,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이나 자기 견해나 주장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 자기 관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려주신 분을 ‘향하여 듣는 것’이며, 그분을 ‘맞아들여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먼저 들려주시는 분이 “주님”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요, “주님”이 진정 주님 되시도록 ‘주도권’을 넘겨드리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의 종’으로서, 바로 그렇게 먼저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이 “들려주는 대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고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되, ‘실행하기(지키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듣다’라는 단어로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듣는 것을 너머,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 ‘들은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을 듣고 명심하고 실천하여라.”(신명 6,3)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히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신명 28,1-2)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말씀을 그저 흘러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담아 듣고, 들은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려는 순명의 마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두 번째>로, ‘말씀을 품으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말씀은 대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
그것은 ‘듣는 이 안’에서 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입니다. 이를 마리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활동하시도록 내어주는 공간은 바로 ‘마리아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는 이’가 없으면, ‘듣고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면, 말씀은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읽는 이(듣는 이)와 함께 자란다.”
그렇습니다. 결코, 말씀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그저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공중에 내뱉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분명하게 누군가를 선택하여 “향하여” 건너오는 것입니다. 곧 “향하여” 건너오는 사랑이요, 방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곧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여 먼저 건네지고 ‘선사된 선물’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인가!’
이는 천사가 알리는 ‘마리아의 잉태 예고’의 첫 마디에서도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그러니 이는 결코 자신이 만든 아닌 것입니다. ‘주신 분’에 의해 건너오는 것이요,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신 분’이 먼저 있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선물로 주어진 말씀과 은총’을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여 품으셨습니다. 마음속에 품으시고 간직하셨습니다. 자신을 승복하고 수락하셨습니다. 말씀의 침범에 자신을 허용하고, 자신을 정복하도록 기꺼이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머무는 자리’요, ‘하느님의 지상거처’요, ‘말씀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바로, ‘성령의 활동’이요, 그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천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 너를 덮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이고 있는 ‘덮다’(επισκιαξω)라는 단어는 모세가 ‘성막을 세워 봉헌하는 장면’에서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라는 표현과 서로 연결됩니다. 곧 ‘마리아를 덮은 성령’의 모습은 <탈출기>의 “성막을 덮은 영광의 구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리아의 몸’이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임을 말해줍니다.
곧 ‘옛 계약 궤’ 안에는 ‘두 개의 십계명 판’,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든 금 항아리’,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었듯이, 이제 ‘새 계약 궤’인 마리아는 ‘십계명 판’을 넘어 선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을, ‘만나’를 넘어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사제 아론’을 넘어선 ‘하늘의 참된 대사제’를 잉태(요한 1,14,6,55-58)한 거룩한 그릇으로 드러납니다.
한편, <2마카베오서>에서는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2마카 2,8). 그리고 이제 ‘영광의 구름’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바로 여기,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말씀을 따르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fiat’으로 응답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이 황당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혹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이미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인가?’, ‘대체 그것을 원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고서, 마침내 그분께 자발적인 믿음으로 ‘피앗’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나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본문>에 보면,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뜻’이기에 자유롭게 ‘순명’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곧 ‘주님이 원하시니까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2009년에 복녀품에 오른 끼아라 루체 바다노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신 ‘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 대한 오롯한 충실함과 신실함으로 실행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응답’은 지성적 동의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이요, 전 인격을 건네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일’을 끌어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훼손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훼손을 통하여 응답하는 일이요,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훼손되는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승복하고 순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마리아는 동정으로 잉태하심으로써, 율법을 어기는 자로 간주되고 불결한 자로 처벌 될 수 있는 상황에 순명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뜻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랑을 실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그분에게로 건너감이었습니다.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임과 동시에, 그분에게로의 진입이며 결합이었습니다.
4. 이제 우리는 마지막 <네 번째>로, ‘말씀을 이루신(희망하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이루어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바람을 말합니다. 이제 ‘마리아의 바람’은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바람’이 곧 ‘마리아의 바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 안에는 단순히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 맡기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그분의 뜻’을 자신도 희망하였습니다. 곧 ‘자신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은 ‘하느님의 희망’인 것만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자신의 희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희망’은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를 바라는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는 ‘주님의 희망’을 ‘자신의 희망’으로 품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서 흘러들어오는 힘’, 곧 ‘성령의 덮음에 대한 순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의 힘’이 스스로 마리아의 힘이 되어, 마리아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들어 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바람’은 마리아에게로 ‘건너 와’ 마리아의 바람이 되고, 마리아는 그분에게서 힘을 받아 자신의 바람이 그분의 바람 안으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바람’이 ‘마리아의 바람’이 되고, ‘그분의 마음과 뜻’이 ‘마리아의 마음과 뜻’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전인격이 그분에게로 건너가게 되고, 마침내 그분의 선사와 사랑이 마리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일인가요! 참으로, 신비롭게 벌어진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일치를 이루고,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참으로, 마리아는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공간이 되어 드렸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수락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았고, 주님이 원하신 바를 자신도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희망하여 자신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오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우리 어머니!
이처럼, 마리아는 ‘그분의 바람’, ‘그분의 희망과 뜻’을 ‘관상’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를 비추는 주님의 희망, 주님의 사랑, 주님의 믿음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에게 ‘먼저’ 베풀어진 그 ‘주님의 은총과 말씀’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곧 그분의 희망과 뜻에 자신의 희망을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니까 그녀도 원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자신도 원하게 되는 사랑이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그 거룩한 희망과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주님의 지고한 사랑이 실현되고, 은총이 실현되고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일이 벌어지길 빕니다. 그리하여 오늘 밤 ‘거룩한 탄생’, ‘기쁨의 탄생’을 맞이하길 빕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아들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의 지상 거처지’로 삼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기쁨인가요’? 야곱이 에사우를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베델에서 꿈을 꾸고서 외쳤던 그 놀라움과 경탄(Eureka!)(창세 28,17)을 외쳐봅니다.
‘바로 내가 하느님의 집이라니!’ ‘내가 당신의 지상 거처지라니!’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마리아와 함께 진정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희망하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희망이 있다’는 이 사실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바야흐로 성탄의 기쁨이 몰려옵니다. 희망이 이미 수태된 까닭입니다. 이토록,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희망이 이미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며, 우리가 받은 그분의 희망이 실현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
주님!
당신 말씀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당신 사랑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그 말씀에서 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사랑에서 제 생명이 솟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는 당신이 진정, 저에게는 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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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정한 성탄 준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대림 초 4개 모두에 불이 밝혀졌습니다. 빛이 밝아진 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성탄 준비를 잘하고 계시죠? 성당 마당에는 이미 구유를 만들었고, 주변의 나무에는 반짝이 등을 달았으며 성탄 트리도 마련되었습니다. 합동판공 성사도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성탄 준비가 끝난듯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준비를 통하여 내면의 거룩함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시간 마음을 다잡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과 원한을 품은 채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마음이라면 아기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물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서는‘성탄 준비 끝!’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식을 달고 집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은총 잔치를 하고, 선물을 주며 성탄트리를 장식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끗이 정돈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 대한 온전한 의탁의 모범이 되신 성모님처럼 성령께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모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거듭 태어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눈뜨는 성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1729년에 지어진 미국 샌디에이고 미션성당에 가시면 제단 정면에 양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 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은 항상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은총은 우리의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은총을 주시고,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인사말을 듣게 되었는데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천사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는 메시지를 받고 마리아는“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묻습니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결국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응답 없이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돌팔매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기를 죽이고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니 우리를 위한 구세주를 세상에 낳아드렸습니다.
성경은“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혼자 하시길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순명의 모범 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없구나’하는 이야기를 예수님께 하신 어머니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유를 달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어부인 베드로가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고’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라는 자존심을 내세웠더라면 능력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계산을 하는 한 그만큼 주님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마땅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말씀대로 행하면 행할수록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어떤 처지가 되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은 종입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내 생각, 내 뜻을 접고 주인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흠승하라’ 하시면 흠승하고,‘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나 핑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예언자를 통해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자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리고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그분의 몸이 되어 주님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의 기쁨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어렵고 힘든 일, 곤란하고 궂은일에 기꺼이 나설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당신의 도구와 연장이 될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을 마련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의 예수, 구세주가 되어야 이웃이 구원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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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의 허드슨 강을 건너는 것은 대부분 다리이지만 터널로 건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터널이 ‘링컨터널’입니다. 터널은 어둡고, 터널은 좁고, 터널은 답답합니다. 하지만 터널의 끝이 보이면 점차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내 밝고 환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해 나아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나온 터널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탄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대림 제2 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행동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망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는 위로와 희망으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는 일치와 용서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언덕은 겸손과 나눔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언덕은 인내와 관용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대림 제3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자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터널에서 우리는 ‘순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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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12월 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 전야 미사
찬미 예수님.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마태오 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첫째, 족보에 제시된 인물의 역사가 곧 구원의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족보는 14대씩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대씩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14대는 역사적 자료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간적 기원의 성조들, 임금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망라하는 유구한 이스라엘 역사 안에 뿌리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섯 여자,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가 나옵니다. 이방인인 햇 사람 우리야와 결혼한 바쎄바의 이름이 마태오 복음 1장 7절에서 생략된 것은 아마 그녀와 불륜을 저지른 다윗의 죄를 상기시키지 않으려는 데 기인한 것 같습니다. 죄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족보의 중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 출신인 다말, 라합,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온 것은 이분이 이방인들의 구세주이심을 가리킵니다. 또 위의 세 여자는 파격적인 결혼을 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제시된 것 같습니다. 그들의 파격적인 결혼은 성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다윗 왕가의 예수 메시아를 정점으로 전개됐습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결속되어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성취하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곳에 하느님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와 함께 걸으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삶도 이스라엘의 족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전쟁과도 같은 시간이 있었고, 아픔과 고통의 역사와 배신과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 탄생하신 주님을 찬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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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수 있는 방법은?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귀찮아도 극복하는 정도가 사랑하는 정도다.’라고….
사랑하면 귀찮아도 그것을 감내한다는 뜻입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귀찮음은 그저 귀찮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면 언제든 상을 차리는 모든 어머니의 사랑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귀찮음을 감내하는 모습.
나를 내놓는 모습.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모습.
그것이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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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얼마나 당구가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흠뻑 빠지다 보니 계속 당구만 생각나더군요.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천장이 당구대로 보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보지 못했던 천장의 무늬가 보이면서, 그 무늬에 따라 당구공이 배열되고 이를 어떻게 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강의하실 때도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고 교수님께서 움직이는 동선에 따라 흰 공, 빨간 공이 연상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통 당구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특히 초보자일 때 그렇게 됩니다. 축구할 때, 공만 쫓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보자입니다. 그러나 실력자는 어떨까요? 주변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공을 처리할지 판단하면서 공을 찹니다.
이 세상 것만 집중하며 사는 모습은 초보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주님께서 도움을 주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바라보며 앞으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세상 것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실력자의 삶은 세상 것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면서 자신의 삶을 방향 짓습니다. 세상과 주님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이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실력자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탄생 예고가 성모님께 이루어집니다. 성모님께서 어떤 가문에 속해있는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아주 평범한 여인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일은 평범한 사람이 사는 평범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봐야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일을 보신 분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남자를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처럼, 하느님의 일은 이 세상 안에서 언제나 가능한 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온다고 해도,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은 흔들림 없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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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생기에 차 있을 때다(루이제 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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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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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겸손(信), 경청(望), 순종(愛)-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대림 제4주일 B해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시편 가사와 곡이 참 좋습니다. 오늘 산책중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목청껏 부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성탄시기 주일이나 축일등 한결같이 신바람나는 화답송 후렴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원장 수사와 주고 받았던 메시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새 책, 좋은 책을 보면 참 행복해집니다.
“수사님이 부탁한 책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사랑이 가득 담긴 윗트에 얼마나 마음 따뜻했는지요! 바로 다음 저절로 떠오른 말마디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하느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같은 날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삶의 의미입니다. 참행복도 바로 여기 주님과의 깊어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날로 깊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전 써놓고 행복해 했던, 겨울나무, 겨울땅을 보며 써놓은 “나 겨울에는”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푸른하늘 배경한
빛나는 배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나
겨울에는 동안거의 추위에도
따뜻한 봄이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나 겨울에는
이 행복에 산다
내 이름은 ‘이행복’.”-2023.12.3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동안거중인 배나무들 강추위 속에서도 흡사 따뜻한 봄, ‘겨울속의 봄’을 살아가는 듯 합니다. 문득 어제 강론을 읽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훈훈한 덕담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손수 뜬 털쉐타를 선물한 자매입니다.
“저도 책 한 컨테이너 추가로 사드리겠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마음에 사랑 담아 둡니다!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털쉐터 사랑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텅빈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재미가 없으면 하루하루 날마다 이 삭막한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자주 고백성사 보속시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1-2)
어떻게 이런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겸손, 경청,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겸손, 희망의 경청, 사랑의 순종이니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직결됩니다.
첫째, 겸손(信)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信)입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겸손한 믿음 없으며 서지 못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교만이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참으로 겸손한 분이요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분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함께 갑니다.
보십시오. 하늘 높이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천사를 통해 무명의 촌구석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 나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문득 삼고초려(三顧草廬) 무려 세 번씩이나 제갈량을 찾아 나선 삼국지의 유비가 생각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나선 하느님의 그 간절함은 유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을 찾아 그의 무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 주도로 다윗을 이끌어온 삶임을 환기시킵니다. 1독서에서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을 읽어 보십시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하느님 주어의 문장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알립니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 같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신 삶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겸손하게, 기도하게 합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의 문장에서 주어는 내가 아닌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없이는 참 겸손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둘째, 경청(望)입니다.
남말하기는 쉬워도 잘 듣기는 정말 힙듭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말씀의 경청입니다. 희망의 경청, 겸손의 경청입니다. 겸손은 희망의 경청으로 표현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시작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서에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경청의 달인(達人)’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경청은 개방입니다. 침묵의 개방도 경청을 위함입니다. 주변에 활짝 깨어 열려 있는 침묵이요 경청입니다. 경청또한 훈련입니다. 평상시 경청의 훈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희망의 사람, 경청의 달인 마리아인지 깨닫습합니다. 참으로 눈밝은 하느님의 분별력은 정확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당신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경청의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속내를 다 밝히시니 그대로 전폭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주님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은밀한 말씀들이요 한결같이 경청하는 마리아입니다.
셋째, 순종(愛)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희망할 때 순종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이 진리도 깊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기념비적 응답은 늘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림 제4주일, 제대 주변을 환히 밝히는 4개의 대림 촛불이 마리아는 물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망애(信望愛)의 빛’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이 임박함을 알립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주님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이 결정적 순간의 한번만으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마리아 성모님의 생애는 말그대로 순종의 여정이요 “예스맨(Yes-Man)”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내려 품에 안을 때의 피에타 성모님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케노시스 비움의 절정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요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러니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믿음의 겸손과 희망의 경청, 그리고 사랑의 순종의 삶을,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삶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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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대림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응답>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듯이
나
주님께
다가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듯이
나
주님을
바라보리라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듯이
나
주님께
말씀드리리라
주님께서
나를
느끼시듯이
나
주님을
느끼리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듯이
나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나를
믿으시듯이
나
주님을
믿으리라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듯이
나
주님께
바라리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나
주님을
사랑하리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듯이
나
주님 안에서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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