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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을 갈아타다
김득진
나는 남편이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보험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남편은 먼저 화부터 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보험을 드는 건 미친 짓이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자신이 곧 보험이라고 했다. 자기를 믿고 시집을 와서 별 탈 없이 사는 게 보험회사를 잘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속옷을 뒤집어 입고 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나 있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나는 남편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어딘가에 믿을 곳을 만들려다 보니 보험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편이 보험을 기피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던 나는 호젓한 시간을 골랐다. 남편이 좋아하는 커피를 손수 갈아 내렸다. 집안에 커피 향이 퍼졌다. 남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이건 무슨 커피야?”
“당신이 가장 아끼는 르완다 커피잖아.”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커피가 이렇게나 맛있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
커피 향이 부드러운 음성에 섞여 방안을 메웠다. 르완다 커피는 드러나지 않는 여러 가지를 감추고 있는 게 아이러니가 아니냐고 내가 말했다. 그까짓 커피 때문에 몽롱해져 가는 내 목소리가 오히려 아이러니라고 남편은 말했다. 내가 나긋나긋해질 때마다 남편은 긴장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 때의 커피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친정과 시집 얘기가 오갔다. 집안 대소사도 일일이 짚어나가는 자리였다. 커피 한 잔으로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보험을 싫어하죠?”
“또 보험 얘기야?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말이야.”
“당신이 그토록 보험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는 게 싫어요.”
“N이 또 당신을 찾아갔었나 봐.”
“수수료 눈곱만큼 벌려고 보험회사에 덕을 보이는 구조도 맘에 들진 않아.”
내 질문을 에둘러 피하는 남편의 얼굴에 N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N은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 내 친구였다. 학교 다닐 때 가깝던 친구들도 보험설계사라고 명함을 내밀면 점차 거리가 멀어졌다. 보험 영업을 하는 애들은 자신의 일에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언젠가 보험영업을 하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보험회사가 사기를 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게 이상했다. 내 생각에는 보험회사의 약관을 꼼꼼히 체크한 후 가입하면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이 술이 취해 돌아온 날이었다. 양복 주머니에 서너 장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아는 이름이 적힌 명함이 눈에 띄었다. 명함에 보험회사 로고가 없었다면 나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N의 명함을 보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N이 어떻게 사는지 안부가 궁금해졌다. 몇 년 전 남편을 잃은 N은 생계 때문에 보험업계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는 N이 소속된 회사에 보험을 하나 들어주었다. 그건 궁핍한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이었다. 알고 보니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 모두가 그런 뜻으로 N에게 보험가입을 한 것 같았다.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N은 친구들뿐만 아니라 친구 남편들에게도 접근을 한 것 같았다. 여자들끼리의 계모임에서 부부계로 발전된 게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었다. 서로 친하다는 걸 핑계 삼아 주고받았던 전화번호를 N은 영업하는 일로 써 먹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남편에게 주의를 주었다.
“N이랑 나 몰래 전화하지 말아요.”
“한때는 스스럼없이 지내라고 했잖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평소에 보험설계사를 싫어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N이 내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남편이 N의 전화를 받았을 리가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보험보다야 남편이 더 듬직하긴 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여자 문제로 전과가 있다 보니 N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주어서 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나는 N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 넌 내가 들어준 보험이면 됐잖아. 더 이상 애들 아빠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넌,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니? 섭섭하다 얘.”
전화기 건너편의 N은 울먹이고 있었다. 내가 너무한 건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지금 단호하게 잘라놓지 않는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미안하단 말을 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남편의 귀가가 늦어졌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늘 해주던 하루 일과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나는 그게 회사의 어려운 경영 여건 때문일 거라고 여겼다. 환율 파동 때문에 일감이 줄었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댈 때였다. 잠든 남편의 손바닥을 살폈더니 전에는 없었던 굳은살이 보였다. 남편의 손바닥에 생긴 굳은살은 나날이 늘어갔다. 나는 어려운 회사 사정 때문에 온갖 굳은일을 도맡아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밤이 되면 지쳐 늘어진 남편에게 회사일을 물을 수는 없었다. 옆집 여자가 언제 보았던지 남편의 늦은 귀가를 두고 말을 꺼냈다. 우리집의 형편이 쪼들려서 보험가입을 하지 않는 줄 아는 그녀였다. 큰일이 닥쳤을 때를 생각한다면 보험을 들어뒀어야지.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간 아니야? 옆집 여자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먹고 사는 돈을 빼곤 모두 보험에 들어둔 터였다. 그랬으니 자기는 노후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알고 봤더니 그 집엔 바깥 심부름을 도맡아 해주는 보험설계사가 있었다. 그 전에도 그녀는 집안의 인테리어며 입고 나갈 옷의 코디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몇 번 봤던 코디네이터도 보험설계사였다. 보험영업을 하려면 적어도 한 가지의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늦게 귀가한 남편의 주머니에 작은 공이 툭 흘렀다. 공의 표면에는 1부터 0까지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게 탁구를 할 때 쓰는 도구인 걸로 알았다. 세탁을 하느라고 공을 장식장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걸 본 남편은 화를 냈다. 이게 뭔지도 모르면서 건드렸다고 트집을 잡았다. 나는 나대로 화가 났다. 그걸 넣은 채 세탁기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에도 주머니에 동전이 든 걸 모르고 세탁기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세탁기 날개가 망가졌다. 제법 많은 돈을 들여 애프터서비스를 받았던 세탁기였다. 남편이 화를 냈지만 작은 공이 무얼 하는 물건인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N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N은 진청색 정장을 주로 입었는데 그날은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N은 고객을 만나서 도장을 찍었던 계약서를 내밀며 자랑했다. 보여줬던 계약서를 N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 남편의 주머니에서 흘렀던 것과 같은 공이 보였다. 1부터 0까지의 숫자가 적힌 것도 똑같았다. 나는 N이 어떻게 해서 비싼 보험계약을 따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N의 머리며 구두, 그리고 화장까지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얘, 어떻게 된 거야?”
“장사 밑천이 동나면 이렇게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해.”
“딴 사람 같다, 얘. 웨이브 넣은 머리며 캐주얼 차림이 말야.”
“골프 아카데미에도 진작 등록을 했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N의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지나치다가 길에서 N을 만난다면 몰라볼 정도였다. 그걸 본 나는 내가 계약했던 자그마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만 같았다. 주위에서도 늦기 전에 보험을 갈아타는 게 낫다는 얘길 했다. N은 예전의 보험 아줌마가 아니었다. 손톱 열 개에 선홍색 매니큐어 칠이 되어있었다. 전에는 투명한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던 그녀였다. 내가 그녀의 차림새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N은 손을 뒤집었다. N의 손바닥이 보이자 손등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나타났다. 그건 여자의 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곳곳에 굳은살이 생겨 있어서였다. 나는 N에게 골프 레슨을 언제부터 받았느냐고 넘겨짚었다. N은 석 달, 이라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물어본 의도를 모르는 N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귀가가 늦어진 게 언제부터였는지 달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남편의 귀가가 더 늦어졌다. 열두 시가 되어 현관문의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덮어 쓰고 모른 척 누워있었다. 현관에서 무언가를 내려놓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궁금함을 참기 어려웠지만 이불을 들추지는 않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가 났다. 장롱을 여닫는 소리도 들렸다. 냉장고를 닫는 소리에 이어 무언가를 따르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카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났다. 나는 냉장고 포켓 속에 넣어둔 것들을 떠올렸다. 남편은 술에 취해 귀가를 할 때마다 더치커피를 들이키곤 했다. 그 옆에는 오미자효소가 있었다. 문짝을 열면 첫 번째로 보이도록 병에 식초를 진하게 타서 넣어두었다. 그건 화분의 진딧물을 없애는 약이었다. 남편은 식초를 마시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깼다. 낯선 가방이 거실 구석에 놓여있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그걸 본 것 같았다. 푸른 들판을 걸어가는 몇 사람 사이로 아가씨가 힘들게 메고 가던 가방이었다. 나는 가방에도 관심을 갖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그날은 남편이 일찍 퇴근했다. 구두를 벗자마자 가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가방의 뚜껑을 열었다. 속에 든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무언가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게 있는 것 같았다. 그것만 있으면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수월할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다뤘다.
N은 뻔질나게 나를 찾아왔다. N은 언제부턴가 내게 보험가입을 권유하지 않았다. 나와 얘기를 하는 중에도 N은 자주 전화를 했다. 전화 내용을 엿들었더니 건당 금액이 무척 컸다. N은 노는 물을 달리하면 큰 고기가 문다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점점 N을 통해 가입한 보험혜택을 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N은 때론 전화만으로 계약금액 천만 원짜리를 약속하기도 했다. 낮엔 그렇게 놀다시피 하다가 해가 지면 정해진 약속 장소로 가려고 택시를 불렀다.
남편이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이었다. 입사시험 공부를 하던 아들도 남편을 뒤따라 들어왔다. 술기운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남편에게 아들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은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였을 텐데도 아들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공부에 지쳐있는 아들을 앞에 앉히고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표정은 돌부리를 찬 것 같았다. 그걸 말리지 못했던 나는 괜히 마음만 졸였다. 그렇지만 어느 쪽을 꼭 집어 편들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두 사람 다 보험회사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머잖아 보험을 갈아타야 할 지경이었으므로 어느 한쪽 편을 들다가는 보험혜택을 못 볼 지도 몰라서였다.
점심 무렵 N이 찾아왔다. 남편은 전날 마셨던 술 때문에 속이 아파서 출근을 못하고 누워있을 때였다. N은 남편이 술 때문에 골병이 들어서 출근을 못한 것 까지 알고 있는 듯했다. 숙취에 좋다는 칡즙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젯밤에 남편과 N이 만난 건 아닌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N도 속이 안 좋은지 연신 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소금물을 좀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동치미 국물 한 그릇을 떠서 N에게 내밀었다. 그때 안방에서 나를 불렀다. 남편이 시원한 동치미를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릇을 남편에게 던지듯 건네주었다. 남편은 게슴츠레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방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그런 뒤부터 남편과 N,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들이 입사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나는 전날부터 아들 방의 벽에다가 갖가지 응원 메시지를 써 붙였다. 그건 대학시험을 칠 때 붙였던 것과 비슷했다. 아들이 그럴 듯한 회사에 취직을 해야만 남 보기에도 쪽팔리지 않고 남편의 부족한 수입을 보충할 수 있어서였다. 그건 어쩌면 보험을 한 가지만 가입했던 보완책이 될 것 같았다.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서 월급을 몇 달이나 더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편 친구들 중에도 실직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편은 고개를 떨궜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아들 방의 응원 메시지 글씨에다 테두리를 두르고 덧칠을 해서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아들은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필기시험만 하더라도 경쟁률이 백대 일이 넘었다고 뒤늦게 큰소리를 쳤다. 그 애보다 더 기뻤던 나는 두 손을 쳐들고 천장에 닿을 듯 뛰었다. 그러는 나에게 남편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 남았으니 방심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거실에서 놀던 아들은 제 방에 들어박혔다. 면접시험을 보기까지 한 달 동안 그 애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아들은 입사할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무언지 몰라도 회사 내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은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졸업생들과 입사 준비생들을 엮어주는 프로그램이 짜여있다고 했다. 아들은 입사가 확정되려면 아직도 부족하다 싶었던지 영어회화를 배우러 다녔다. 자기소개서 적는 법도 인터넷으로 배웠다. 나는 아들을 위해 큰맘 먹고 정장을 맞춰주었다. 다른 애들은 면접을 하기 위해서 성형수술도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들에게 돈을 얼마나 더 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를 준비하고 나면 다음 단계에서 예상하지 않은 돈이 들었다. 남편은 요즘 직장을 구하려면 뒷돈이 몇 천만 원 들어도 어렵다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아들이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아들이 돈을 써서 취직을 하게 된다면 떳떳하게 직장에 붙어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들은 장학금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가끔 남편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들이 더 든든하게 여겨진 적도 있었다. 남편이 취업을 할 무렵엔 구직자가 직장을 골랐다고 했으니 말이다.
N이 전화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요즘 실적을 많이 올렸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겐 그 말이 남편과 N이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 말을 잘 깨 씹어보면 어딘가 허점이 있을 것 같았지만 물증만으로 두 사람을 옭아맬 순 없었다. 그 일로 두 사람을 몰아붙이다가는 되돌아 올 파장이 클 것 같아서였다. N은 남편의 하루 일정과 서로 어긋나도록 억지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더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말에 따라 두 사람의 알리바이를 끼워 맞추다 보니 그들은 내 앞에 번갈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날도 N이 떠나자마자 남편이 귀가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자세하게 살펴보아도 두 사람의 손에 박혀있는 굳은살은 위치조차 똑같았다. 그런 일 때문에 남편에 대한 믿음이 점차 약해져갔다. 그랬으니 N도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N이 집으로 찾아오면 자기 자랑만 늘어놓아서였다. 그럴수록 내가 아들에게 기대는 마음은 더해갔다.
아들이 면접시험을 통과했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 애는 최종 면접에서 사장이 하던 말이 심하게 걸렸었다고 영상통화로 얘기했다. 자기소개서에 적힌 아들의 복싱 수상 실적이 눈에 거슬렸던 것 같았다. 사장은 아들에게 일을 하다가도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주먹을 날리지나 않겠느냐고 했다는 거였다. 그 말에 아들은 진정한 스포츠맨십은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게 맘에 걸린다고 입을 쭉 내밀었다. 전화기를 통해서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떠올랐다가 느리게 사라졌다. 아직도 아들이 최종합격이 되려면 멀었구나 생각한 나는 서류심사를 통과하길 기다릴 때보다 더 긴장이 되었다.
그 다음날이었다. N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홍삼액이 들려 있었다. 나는 N이 또 남편을 꼬드기려고 그걸 사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내미는 홍삼액을 받지 않으려고 밀쳐냈다.
“얘, 아들이 입사시험에 합격했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겐 정보가 장사 밑천이잖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늦었지만 손을 내밀어 선물을 받았다. N은 그때서야 입을 삐죽거리다가 미소를 띄었다. 정보가 장사 밑천이라는 N이 축하를 하러 오기까지 했으니 아들의 입사는 기정사실이 된 것 같았다. 모처럼 N과 함께 먹은 탕수육이 상큼하고 쫄깃했다. 나는 남편과 N에게 품었던 의구심을 거두어들이기로 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나눈 N과 나의 대화는 학창 시절처럼 맑고 고왔다.
남편이 술이 불콰해서 돌아온 날이었다. 현관에서부터 남편의 목소리는 컸다. 그건 평소엔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남편을 거실로 끌어들였다. 중문을 꼭 닫았다. 남편의 고함이 이어졌다.
“갈수록 힘들어.”
전 세계를 들끓게 만든 경기 침체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수출액수가 지난해에 비해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건 매스컴을 통해 여러 번 보았다. 남편 회사에서도 명예퇴직을 권고하는 무언의 압력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회사에서 권고를 하는 퇴사의 압력에는 주눅이 들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내 생각에도 남편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 같았다. 나는 아들 방으로 갔다. 벽에 붙였던 응원 메시지는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테이프로 응원 메시지를 단단히 붙였다. 아들은 인턴 교육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난 뒤였다. 인턴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테스트는 끊이지 않게 이뤄진다는 얘길 아들이 해주었다. 나는 최종합격자 발표가 언제쯤 날 건지 조마조마했다. 회사에서 아들을 인턴으로 실컷 부려먹다가 기한이 되면 자르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아들의 입사가 하루 빨리 결정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들이 취직만 된다면 나보다 더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편을 쉬게 하고 싶어서였다.
아들이 교육을 받으며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남편은 아들에게서 받은 숙소 사진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남편이 내게 보여준 아들의 숙소는 웬만한 호텔보다 나았다. 그걸 본 나는 아들의 입사가 확정이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남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포시럽게 자라온 아이들이 진작 입사를 포기할까 봐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나는 설마? 했다. 아들은 교육을 받는 중에도 더러 문자를 보내왔다. 식사는 훌륭한데 잠을 재우지 않는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하루 열두 시간 강의를 들어야 하고 그런 뒤엔 시험을 친다고 했다. 시험 결과로 당락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무슨 회사가 그러냐고 했다. 남편은 오히려 회사 편을 들면서 아들이 그런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남편 회사에서 명퇴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내거는 조건은 몇 천만 원의 위로금을 퇴직금에다 얹어주는 거였다. 당장 목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명퇴신청을 했다. 개중에는 아이들 결혼 시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명퇴신청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적립식 보험을 해약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보험영업을 하는 N은 그런 이유로 해약하는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다.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지, 몇 달 넣지도 않고 해약할 걸 무엇 때문에 가입 해.”
N은 남편을 통해 그 사람들을 소개 받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을 보는 N의 눈길이 전과 같지 않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들이 일주일 만에 귀가했다. 며칠 만에 홀쭉해 진 것 같았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새벽 출근을 해야 한다고 아들이 말했다. 퇴근 시간은 정해진 게 없다고 했다. 나는 회사의 상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알람 시간을 맞췄다. 남편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혹시라도 늦잠을 자면 어쩌나 하며 자리에 누웠지만 눈이 말똥말똥했다. 남편은 아들이 아침에 입을 작업복을 미리 챙기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분명히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남편은 나더러 알람소리를 듣지 못한 걸 나무랐다. 지각할 것 같았던 아들은 입지 않은 윗옷과 넥타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남편이 차 키를 찾았다. 아들보다 남편이 먼저 현관에 내려섰다. 나는 베란다 창을 통해 부자의 종종걸음을 내려다보았다. 차의 엔진소리가 새벽 공기를 뒤흔들었다.
어쩐 일인지 N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나타났다. 유명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사람 집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걸 본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곧 이어 점심때가 되었다. 그녀가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밥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N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밥 생각만 해도 먹은 게 넘어올 것 같았다. 내가 N에게 큰소리를 치려면 계약 금액이 큰 보험을 들었어야 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N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아들 방의 응원 메시지가 붙었던 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나는 서둘러 아들 방의 문을 닫았다. N에게 방안의 너저분함보다 더한 걸 들킨 것 같았다. N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손에는 한 뭉치의 보험가입 서류가 들려져 있었다. 나는 커피 기구를 꺼냈다. 친구 사이의 어색함을 메우는 데는 커피만한 게 없을 것 같았다. 아침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마음이어서 커피를 마시면 진정이 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커피밀을 천천히 돌렸다. 커피 향이 거실에 퍼졌다. 준비된 드립퍼에 갈아진 커피를 부었다. 드립 포트의 물이 커피 입자를 훑어 내렸다. N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내가 N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커피의 상큼한 신맛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
잘 볶아진 원두로 내린 커피의 맛을 감지하는 N의 능력은 놀라웠다. N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N은 아들이 입사하기로 한 회사도 대기업이라고 했다. 탄탄한 회사라 진급도 빠를 거라고 말했다. N은 몇 모금의 커피를 홀짝거렸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수첩에 그걸 적었다. 그때 펼쳐든 수첩의 맨 위에 남편의 이름이 보였다. N은 얼른 수첩을 덮었다. 그런 뒤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남편이 평소보다 늦게 귀가했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남편이 아침잠을 설쳐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말없이 꿀물을 탔다. 그는 꿀물만 마시고 샤워를 한 뒤 식사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아들이 언제 귀가할지 몰라 남편과 함께 잘 수가 없었다. 내가 티브이를 보다가 졸았던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탄내가 났다.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둔 냄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급히 주방으로 뛰어갔다. 얼른 중간밸브를 잠갔다. 냄비를 들어내서 물에 담갔다. 피식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연기가 멎었다.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찌개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나는 문이란 문을 죄다 열었다. 냄새는 쉬 빠지지 않았다. 레인지후드를 강으로 틀었다. 거실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남편이 잠을 깼다. 속옷만 입고 나온 남편은 짜증을 냈다. 나는 보험을 들어 두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보험을 믿다가 큰 불이라도 나면 어쩌느냐고 한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은 아들은 나와 눈을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아들의 옷이 날아 나왔다. 그런 뒤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금세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들 일이 걱정되어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첫 관문을 통과하는 아들이 저토록 힘들어 하는 걸로 보아 직장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날이 밝았는지 아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화닥닥하고 들렸다. 난 오늘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들의 볼멘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그건 한때 남편이 자주했던 말이었다. 엄마인 내게 대놓고 욕을 할 수 없었으니 상사를 향한 욕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아들은 늦었다는 구실로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남편이 뒤이어 일어났다. 바삐 세수를 했다. 차 키가 어디에 있느냐고 남편이 물었다. 남편이 키를 늘 놓아둔 자리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껏 남편이 무언가를 잊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현관을 나서는 아들은 며칠 후 극기훈련을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또 상사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들의 시중을 잘못 든 게 있지는 않았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편은 불평이 끊이지 않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차마 잘 다녀오란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옆집 여자를 찾아갔다. 속마음이라도 털어 놓으면 갑갑한 게 풀릴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베란다로 내 눈길이 꽂혔다.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죄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본 나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꽃가꾸기였다. 우리집에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베란다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윤기 나는 분재를 본 그들은 나를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났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정을 주는 만큼 몸피를 키워 보답을 하는 식물이 사랑스러워서였다. 요즘에는 내가 다육식물을 기르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마디 하나가 생겨나면 신생아의 팔을 보는 듯했다. 자고 나면 생겨난 마디에 나는 입을 벌려 감탄했다. 시장에 가서 분재를 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쁨을 나누려고 옆집에 다육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며칠 지나 옆집에 들러보면 그건 온데 간데없었다. 그녀가 제대로 키우지를 못해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보험영업을 해볼 요량으로 N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멀쩡하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험회사에서 교육을 받을 마음을 가졌던 나는 N을 부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N을 평소와 다르게 반갑게 맞아 들였다. N의 목소리는 갑자기 근엄하게 변했다. 자기가 얘기를 잘 해야만 보험회사에 입사를 할 수 있다고 내게 큰소리를 쳤다. 나는 다짜고짜 교육내용이 어떤지부터 물었다. N은 침을 튀겨가며 설명을 했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수첩을 펼쳤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천장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그걸 본 내가 교육과정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발을 뺄 듯하자 그녀의 표정이 다시 누그러졌다. 교육은 어렵지 않아서 받을 만하다고 구슬렸다.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많다고 N은 오히려 자세를 낮추었다. 나는 N의 그런 말에도 교육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아들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아들 눈에는 초점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아들은 힘없이 여행 가방을 꺼내 달라고 말했다. 입사시험의 프로그램에 있는 극기훈련을 가야 한다고 했다. 열흘이 지나기 전에는 연락조차 안 될 거리고 아들은 말했다. 내 말을 전해들은 남편은 앨범을 뒤졌다. 앨범에서 빛바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나는 그걸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몇 장 사진 속 남편의 얼굴은 검게 타서 분간을 못 할 지경이었다. 그걸 본 나는 아들이 받아야 할 훈련이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되었다. 남편이 꺼낸 낡은 사진 위에 짐을 싸는 아들 얼굴이 겹쳐졌다. 나는 아들에게 입사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 아들은 여행 가방을 끌고 남편 뒤를 따랐다. 아버지에게 끌려나가는 것처럼 아들이 사라진 자리를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눈에서 멀어질수록 뒷모습이 더 닮았다는 걸 나는 느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두 사람이 닮은 걸 본 뒤로 나는 아들 걱정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다. 집안에 들어오니 찬바람이 일었지만 다가올 일들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벼르고 있었던 화분의 분갈이를 하지 않기로 했다.
N이 또 찾아왔다. N은 보험회사에 내 얘길 잘 해두었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N은 전에 보았던 수첩을 꺼냈다. 언젠가 적어두었던 메모를 빨간펜으로 죽 그었다. N이 볼펜으로 메모를 지우는 걸 본 나는 그녀가 한 행동 때문에 내 몸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N은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여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떴다. N은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의외로 시큰둥했다.
뜬금없이 찾아온 N이 내가 든 보험을 갈아타야 한다고 말했다. 전에 내가 가입한 보험은 여든 살 까지만 보장이 되는 것이었다. N은 백세 보장이 되는 거라야 안심을 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노후 대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내가 백 살까지 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 말을 한 N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험회사에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기왕 든 보험을 해약하도록 만들었다. 그동안에 불입했던 돈은 해약을 하고 신규로 보험을 가입하는 것처럼 만들어 계약고를 올리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백세 보험으로 갈아타는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그러니 나는 해약을 하는 과정에서 손해를 본 거였다.
아들에게 숨겨둔 여자친구가 있는 듯한 눈치가 보였다. 스마트폰 요금이 갑자기 두 배나 나온 걸 보고 그걸 알게 되었다. 아들은 집에 와서도 문을 잠그고 오랫동안 통화를 하곤 했다. 그건 집안 내력인 듯했다. 남편도 아들 나이쯤 되었을 때 애인이 있었다고 했다. 가끔 내가 그 얘길 꺼내면 남편은 지나간 일로 생트집을 잡는다고 성질을 부렸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들은 나의 물음에 시치미를 뗐다. 나는 베란다의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군자란이 두터운 잎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걸 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쁘다던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입사시험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는 말만 믿고 있었던 터였다. 그랬으니 내가 결혼할 무렵 남편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여자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남편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나는 한 달 후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엄마는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뭘 믿고 남편과 결혼을 할 생각을 했느냐고 따지는 엄마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웬일인지 남편이 일찍 귀가했다. 아들도 뒤이어 들어왔다. 남편은 무거운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았다. 현관에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죔기척도 나는 것 같았다. 아들은 현관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나는 급히 옷매무새를 고쳤다. 남편이 좀처럼 하지 않던 헛기침을 했다. 아들이 현관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얘기를 했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아들이 활짝 웃는 소리를 들은 건 오랜만이었다. 아들의 뒤를 따라 낯선 아가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들은 아가씨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건 남편이 결혼하기 전 내게 했던 것이랑 흡사했다. 그때 일을 떠올린 나는 온몸에 전기가 흘렀다. 남편도 나랑 생각이 같았는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저녁 지을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밥을 준비해야겠다고 주방으로 갔다. 아들 방에 있던 아가씨가 주방으로 나왔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가씨는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주방에서 아가씨를 밀쳐냈다. 어머니, 저도 부엌일 잘해요. 아가씨의 말투가 정겨웠다. 나는 안심이 되었다. 아가씨를 아들 방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더 빨리 식사 준비를 했다. 저녁이 차려졌다. 아들은 아가씨 손을 잡고 식탁으로 왔다. 구운 생선살을 발라 아가씨 숟가락에 얹어주며 아들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남편은 내 눈치를 살폈다. 우린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디저트로 과일을 깎아 먹었다. 이런 경우에 흔히 하는 호구조사도 간략하게 마쳤다. 그런데도 도무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남편은 내 팔을 당겨 안방으로 이끌었다. 자리에 누웠지만 아들과 아가씨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아들은 아가씨가 다녀간 뒤로 말없이 회사에 출퇴근을 했다. 그토록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던 아들은 출근할 때마다 웃으며 현관을 나섰다. 퇴근을 할 때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웃는 모습은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아들이 인턴 월급을 탄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눈치로 알았지만 굳이 말을 하진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자 어깨에 힘이 빠져서 축 늘어졌다.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보험회사 간판에는 불이 꺼졌다. 정전은 아니었는데 그곳만 전기가 나간 것 같았다. 그걸 본 남편은 회사 간판 관리도 잘 못하는 보험회사가 어떻게 고객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며 나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했다. 남편의 태도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내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본 남편이 나를 돌려 세워서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어깨 주위를 주물렀는데도 명치 쪽이 시원해졌다. 남편과 아들, 그리고 N과 관련된 일들이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지워지고 있었다. 남편의 뜻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나는 보험회사는 믿을 게 못된다고 베란다 문을 열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계간 『시에』 2013년 여름호
김득진
부산 출생. 2012년 『시에』로 등단. 시집 『커피를 훔친 시』.
첫댓글 보험 갈아타는 일 쉽지는 않지요~ 잼나게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