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권의 방송 장악 프로젝트가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다.
MBC 총파업을 기점으로 국민적인 반발을 사게 될 이번 MBC '사영화' 논란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십보 후퇴시키는 듯한 독재적 성향의 방송 장악이 어디까지 갈지 심히 걱정되는 가운데 과연 역대 정권의 방송 장악은 어떤 식으로 진행 되었는지에 대해 반추해 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드라마' 는 어떻게 권력에 아부했을까.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 민주주의가 짓 밟혀 버린 과거의 -그러나 현재와 비슷한- 치욕의 역사를 살펴보자.
드라마가 정부 권력에 지배 당해 휘둘리기 시작한 것은 1962년 군사 정부 시절부터다. 군사 정부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혁명으로 격상시키고 국민들을 계도하기 위해 '재미' 로 보는 드라마를 철저한 계몽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당시 박정희는 국가재건의 원칙 하에 철저한 반공의식의 고취, 구정치 체제와의 결별과 민족 통일 과업에 위배되는 제반 소재 요인을 배제하고 '새나라 건설' 을 위한 계도성을 드라마에 요구했다.
국민의 편의와 복지보다는 국론통일과 정권안보 차원의 프로그램이 장려되면서 언론과 방송 또한 이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반공극과 계몽극이를 주를 이루었으며 정부의 재정지원 하에 중앙정보부 실무자가 대본을 쓰고, 당대의 인기 연기자가 총출연 한 [실화극장] 이 방송을 타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규율적 통제기' 에 놓여 있던 그 때에 한국 드라마는 철저히 정권에 열성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이미 방송을 장악 당해버림으로서 시작한 비극이었다. 1961년 8월 국영 텔레비전 설립 계획을 발표한 공보부 문건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정권은 "1. 여론을 만드는 서울 시민의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해, 2.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 3.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어서" 라며 드라마를 하나의 정권 홍보물로 정당화 시키는 일을 당연스럽게 자행했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방송 장악' 행태는 6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도 변함없는 기조를 유지했다. TBC, MBC가 차례로 개국하며 어느 정도의 다양성이 인정받는 시대이긴 했지만 여전히 텔레비전 드라마는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계도적 반공극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로는 격변기의 1인 영웅을 소재로 영웅적 지도자상을 보여줘 그것을 박정희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세대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며 사회를 그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 으로 제도하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 박정희 정권의 드라마를 통한 사회 장악은 아주 노골적인 형태로 심화된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날로 격렬해져가는 유신반대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국민을 억압적인 방식으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때 박정권은 퇴폐풍조 일소를 위한 방송시책을 발표(1971)하고 가정의례를 법제화하며(1973), '근면-자조-협동' 을 슬로건으로 한 새마을 운동 계획을 발표한다. MBC 방송의 초창기와 맞물려 있는 이 시기는 유신과 새마을 시대로 집댝된다. 규제와 통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물리적 억압이 역할을 대항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한 방송제작자는 "방송이 바라본 1970년대 초 정부는 고등학교 규율부와 같았다." 고 증언한다.
1970년 반공극이 확대 편성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박정권은 끊임없이 반공극을 만들어 국민을 계도함으로써 시선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리려고 했다. 북한이 주적이므로 북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드라마를 통해 은연 중 설파한 것이다. 당시 방송 되었던 [KBS 무대] 의 '6.25 동란' 은 6.25의 시발점부터 그와 관련된 내용을 각종 기록필름을 통해 극화, 당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 평가함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용공주의자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며 통일의 길을 제시하는 뜻으로 제작 된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드라마로 전형적인 정권에 아부한 드라마 중 하나다.
이 외에도 당대 최고의 반공극이었던 [실화극장] 은 '박쥐' 를 통해 국내 잠입해 있는 고정간첩의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습성을 비디오를 통해 드라마화하여 고발하고 있는 촌극을 연출한다. 이 외에도 [홍콩 101 번지] 는 적화통일을 꿈꾸며 자유와 환락과 음모의 도시 홍콩에서 날뛰는 북한 괴뢰, 여기에 뛰어든 용감한 한국 정보원이 겪는 사건을 엮는 반공물로 제작되었고 남파간첩이 남한의 자본주의에 감명하여 자수한다는 [피양서 왔수다][밤과 낮]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1970년대 드라마는 유신과 긴급조치의 거대한 억압과 통제의 틀에 철저히 순응, 적응하는 분위기였다. 당국의 지침대로 반공극을 강화하고,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는 정책 드라마, 발전된 한국상을 보여주는 드라마([꽃 피는 팔도강산]), 화합하는 이웃, 이상적인 사회모습을 묘사한 드라마가 많았다. 또한 역사적인 영웅의 삶을 박정희와 동일시하고, 민족 정서에 호소력을 가진 시대극을 반영하여 내적 단결과 화합을 목적으로 방송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1974년 긴급조치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던 반유신 반정부 운동이 77년 다시 본격화 됨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방송 장악은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실현된다. 방송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유례없이 강력했던 이 시기에 박정권은 1976년 외래어 사용 금지, 히피-장발 단속을 시작으로 1977년 드라마기준을 제정하고, 코미디 프로그램 폐지 소동을 일으키며 1978년 외화 사전심의를 결정, 장발 연예인의 TV 출연을 금지 시키는 등의 통제적 움직임을 보인다. 이로써 1979년 10.26으로 긴급조치의 효력이 소멸 될 때까지 드라마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은 철저한 통제에 놓였다.
이 시기 한국 드라마는 정권의 '통제' 에 순응하면서 또한 통속을 통한 저항의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실사회에서 강력한 통제와 억압의 힘과 그와 대치하는 저항의 힘이 팽팽한 가운데,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목적극 [일요사극-맥][예성강][사미인곡] 등을 내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골목안 사람들][기러기][후회합니다][안녕][갈대] 등을 통해 억압된 현실에의 탈출을 갈망했다. 바야흐로 박정권의 몰락이 눈앞에 있는 시점에 벌어진 드라마의 일탈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TV 코미디와 더불어 드라마의 정책적 수난의 해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때 박정권은 드라마 시청 열기에 국책을 실으라고 요구했고 따라서 국책드라마, 국난극복 드라마가 오후 8시대에 일제히 자리하게 되었다. 역사상의 위인, 충렬지사가 한동안 다루어졌으며 새마을 드라마도 한 몫 하였다. 각 방송사는 문공부의 통일편성 방침에 맞게 드라마를 기획해야 했다.
이 시기 드라마가 통속으로서의 저항만을 소극적으로 수행하였을 뿐 정부 권력에 동조, 순응, 아부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문화공보부가 76년 '가족시간대 프로그램 편성, 제작 지침' 을 통해 '민족사관 정립극' 이란 것을 제창하고, 78년에는 '프로그램 지침' 을 통해 사극 중심의 민족사관 정립 드라마를 새마을 운동과 반공을 소재로 한 현대극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프로그램 편성과 소재에 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1979년 궁정동 총성으로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됐다. 이것은 비단 드라마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도 잠깐, 이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좌절된다. 잠깐의 몽상으로 끝난 '서울의 봄' 이후는 희망 후의 좌절이라는 점에서 1970년대 유신시대의 좌절과는 다르다. 현실사회가 희망과 좌절로 특징화 될 수 있는 이 시기, 텔레비전 드라마는 박정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전두환과 조우함으로써 현실적응과 고발로 현실에 조응하고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추동궁 마마][개국] 등 명백하게 정변의 정당성을 암시하거나, 선조나 성공한 기업인의 경제 정신을 다루면서 정부의 경제안정화 정책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드라마가 많았고 도농 간의 화합을 모색하는 농어촌 드라마([전원일기])가 생겨났다. 또한 [한국인의 재발견 시리즈][매천야록] 등 민족정신을 담은 드라마를 방영하여 민족 정체성 함양이라는 정부의 방향에 철저히 순응했다.
이러한 드라마는 대부분 정권의 요청에 의해 장려된 정책 드라마였고 더 나아가서는 방송 자체가 소극적 자발성으로 만든 성격도 없지 않다. 이렇게 텔레비전 드라마는 일정 부분 권력의 요구에 스스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이 시기에 시도된 정치 드라마는 정경유착이나 권력형 비리를 다루면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야기했다.
[제 1공화국][야망의 25시] 등이 권력 결탁과 금권 비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당대의 민감성을 자극하여 논란이 되고 조기 종영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드라마는 그대로의 현실에 소극적으로 협조하며 적응해가거나 혹은 현실을 직시하고 때로는 고발하고 있었다. [굴레][해 저무는 들녘에] 같은 사회현실극이나 소시민적 윤리나 삶의 방식을 제시했떤 [드라마 게임] 같은 드라마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1987년 한국사회는 또 한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정권의 위기돌파 방안으로 나온 6.29 선언은 새 질서의 필연성의 증거인 동시에 기점이었다. 누적된 반정부운동과 권력형 비리에 노출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정국 전환을 위해 6.29 선언을 밢한다. 그리하여 직선제 개헌과 정치인의 사면-복권으로 이어지는 한국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언론기본법이 1987년 폐지되고, 월북작가의 해방 전 작품이 해금되며(1988), 언노련, 전대협이 발족하고(1988), 전교조(1989)가 탄생됐다.
이 시기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 사회 폭로와 그 조건에서의 처세를 보여주면서 사회-수용자와 교감하고 있었다. 군사문화의 권위적 특성과 민주화 요구가 충돌하는 과도기적 사회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금기시되던 주제를 다루었고, 나아가 그 허구성을 들춰내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 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 [우리들의 조부님][어머니의 노래] 등이 방송됐고, 현대 산업사회의 파괴적 모습을 재현한 [지포리에서 생긴 일][침묵의 도시] 가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인 인신매매, 미혼모, 철거민의 삶을 다루면서 현실사회를 폭로, 고발하였다. 그런 반면 그러한 현실사회 안에서의 삶의 방식, 윤리 등을 보여주면서 처세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 자체가 변화하는 한국사회, 전환기, 과도기에 그렇게 현실사회에 적응하며 처세의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이 이후에 한국 드라마는 우리가 알다시피 다양성의 시대, 흥미의 시대, 쾌락의 시대로 접어든다. 정부의 규제가 사라지고 드라마와 권력이 떨어졌으며, 새로운 드라마의 시대가 열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딱 20년이 지난 2008년,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계승한 이명박 정부가 또 다시 방송 장악의 야욕을 드러내며 지금의 드라마 시스템도 방송 장악의 일부로서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부분이든 적은 부분이든 상당한 변화의 바람에 휩싸이게 됐다.
과연 이것이 21C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상적' 인 일이 맞긴 한 것인가. 권력의 개로 정권에 아부했던 한국 드라마의 치욕적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다시금 재현하려는 21C MB 정권의 야욕이 새삼 한심스러우면서도 무섭다.
참고자료: 정영희, [한국 사회의 변화와 텔레비전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