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80
8월12일[연중 제1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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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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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Shu0Jz_EMU
(이용현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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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항복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취한 행동은 참된 겸손,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 15-16)
아버지 처지에서 얼마나 애간장이 타들어 갔겠습니까? 의료 수준이 극도로 취약하던 시절, 중병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아비인 내가 대신 저 병에 걸렸으면,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대신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성인이 되고 나서는, 누군가 앞에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엄청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릎 꿇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졌습니다. 완전 항복입니다. 백기를 들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아픈 아들의 고통 앞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애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은 아버지는,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능력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사방이 가로막힌 높은 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난감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만사 제쳐놓고 주님 앞에 털썩 무릎 아이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항복입니다. 주님 졌습니다. 믿을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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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기가 만든 아름다운 여인상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실물 크기의 그 여인상에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이고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날마다 꽃을 바쳤고, 보듬고 어루만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망이 생겼습니다. 조각이 사람이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는 소원을 비는 축제일에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조각상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인상이 숨을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여인상에 키스를 하자 여인이 된 갈라테이아는 부드럽게 피그말리온을 향해 몸을 굽혀 왔습니다.
그 후로 강한 바람이나 염원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의미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 중일 때 해답을 찾기 위해 성당의 성모님께 청할 때 성모상이 살아계신 분처럼 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절실하게 답을 청하니까 성모님이 그렇게 응답해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로 저는 정말로 성모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고 계심을 꾸준히 느껴왔습니다. 만약 조각에 마음이 있다면, 그 조각의 입장에선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하는 조각가에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면 그 사랑에 부응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부모나 선생님, 상사나 동료가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하려고 노력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위 카사노바들의 ‘작업의 기술’ 중 하나라는데, 내가 상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누군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게 되면 왠지 그 순간부터 전혀 이상형이 아닌데도 그 사람이 점점 좋아지는 현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여 그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마귀 들린 아이를 고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은 왜 할 수 없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그런데 사실 기적은 행하는 쪽의 믿음만 가지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받는 사람의 믿음도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실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는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기에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은 상대방이 그 기적의 힘을 받아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예수님의 기적의 힘이 크실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대상자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누구를 위해 무언가를 청할 땐, 완전한 사랑으로 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쳐지면 좋은 거고, 안 고쳐지면 할 수 없고…….’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바람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커다란 사랑을 지니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아니면 너를 고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이만큼 원하면 너도 반드시 고쳐지기를 원할 것이다.’
이렇게 차가운 돌덩이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랑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변하게 하려면 나무라거나 비판하기 이전에, 사람은 사랑으로만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겠습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나의 사랑이 완전하다면 돌덩이도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나의 사랑과 믿음이 불완전함을 탓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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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4-20: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
예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갔으나,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마태 10,1) 그 아들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아버지는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애원하고 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15-16절) 이를 보신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절) 하시고 호통을 치셔서 마귀를 나가게 하시고 그 아들을 낳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많은 신자가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에 대하여 실망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에 예수님께 확실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이 예수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절) 제자들은 마귀를 몰아내는 권능부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까지 받았는데(마태 10,8 참조) 자신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절)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와 단식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다른 사람 안에 든 마귀를 쫓아내려 기도하는데, 자신의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는가! 기도와 함께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간질병 환자의 경우 귀먹고 말 못 하는 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인간들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에는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 아픔, 고통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나의 이웃들과의 일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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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중학교 때입니다. ‘우등생 교실’이라는 과외공부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46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님은 3가지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난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을 ‘난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든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배움을 통해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된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왕이면 난사람보다는 든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든사람이 되었으면 된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영어의 문법과 수학의 공식은 다 잊어버렸는데 선생님의 ‘된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직도 제게 큰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영신수련’을 공부할 때 ‘겸손의 3단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열심한 신앙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일미사 참례하는 사람의 비율이 30%도 안 되는 현실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계명은 당연히 지키고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피정,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본당의 신심단체와 구역에서 봉사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 신부는 힘이 절로 납니다. 세 번째 겸손은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입니다. 성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선생님께서 이야기했던 된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의 억센 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면 샘물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보답해야 할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쉐마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핵심이며, 예수님께서도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세는 이것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전해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된사람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의 3번째 단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저를 ‘초긍정 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잘 될 거야, 잘 했어요.’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힘든 것들도 견딜 수 있고, 말이 씨가 된다고 잘 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더 준비해 주신다.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하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믿음이며, 신앙의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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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 나라의 수도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습니다. 한국의 서울에는 남산타워, 경복궁이 떠오릅니다. 프랑스의 파리에는 에펠탑과 개선문이 생각납니다. 중국의 북경에는 자금성과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서울 신학교에도 몇 가지 상징물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동상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을 배우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 앞에는 ‘모든 이의 모든 것(Omnibus Omnia)'을 표현한 조각이 있습니다. 신학생이 공부하는 것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낙산의 오솔길에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나무판으로 세워져있습니다. 사제는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을 읽곤 했습니다.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업적을 남기는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의 모습은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예의 차릴 줄 아는 사제
본당 내 각종 단체를 만들고,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나가는 사제
교구장 및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신도들에게 알맞은 강론을 성실히 하는 사제
고백성사나 성사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였습니다.
저 자신 30년을 사제로 살면서 많이 부족함에 늘 부끄럽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표징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면을 마음에 떠올리시나요? 저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한 지커 퀘더 신부님의 그림을 묵상하면 좋습니다. 이 그림의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발 씻은 물에 비친 모습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는 봉사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겸허한 봉사를 통해서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육화(강생)의 신비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와 손에서 가장 멀리 있는 부분인 발을 씻어주는 행위야말로 상대방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감싸는 행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굴복의 자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을 바로 더럽다고 여겨지는 발 씻은 물에서 그분의 모습을 찾아보게 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바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은 발 씻은 물에서였던 것처럼 구차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봉사의 삶에서 오히려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 못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주는 모습을 봅니다. 같은 제자이지만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더욱 굳은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겸손을 만날 때 사랑이 피어납니다. 믿음이 희생을 만날 때 희망이 열매 맺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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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2-27)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제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당신이 직접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려고 산에 가시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시고, 그들을 먼저 보내신 것은, “군중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서 흥분 상태가 되어 있는 제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그 상황은 분명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에게 시련을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괴롭힌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회초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회초리는 제자들 자신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상징으로 생각하면, ‘맞바람’과 ‘파도’는 제자들 마음속에 생긴 여러 가지 의혹과 의구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임금이 되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거절하셨을까?”라는 의문, “예수님의 활동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혹, 그리고 “예수님이라는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라는 의구심. 그런 의문과 의혹과 의구심 등이 마치 ‘맞바람’과 ‘파도’처럼 제자들의 마음속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분, 즉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 세속의 임금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또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인가가 다가올 때 유령인 줄 알고 겁에 질린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았을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긴 한데, 그들의 심리 상태를 생각하면,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실감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인 줄 알았던 그 무엇이 사실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크게 안도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세속의 임금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28-33)
예수님께서 이미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베드로 사도는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즉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은, 아직도 그의 믿음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사탄이 했던 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마태 4,3)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을 한 것은, 사도들이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 주님의 권능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님처럼 자기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지만, 제자들 쪽에서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물 위를 걸어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말씀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주신 것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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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세상의 악 앞에 우리는 때로 무력함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는 “주님의 제자들”이 겪는 ‘무력함’이나 ‘할 수 없음’이 세 번(16.19.20절 참조) 나오고, ‘불신앙’이나 ‘약한 믿음’, 그리고 올바른 ‘믿음’도 여러 번 나옵니다.(17.20절 참조) 마태오는 주님의 파스카(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현존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는 초대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신 때(17,1-13 참조), 마을에 남아 있는 제자들의 상황, 곧 세상 속 교회의 현실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악을 물리치지 못하는 교회의 ‘무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대비시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악을 물리칠 권한과 온갖 질병을 고쳐 줄 능력을 받고도(10,1 참조), 악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을 고쳐 주지 못합니다.(17,16 참조)
오늘 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사가의 구도에 따르면 그 답은 바로 앞의 이야기, 곧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옵니다.(로마 10,17 참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자녀들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듣는다면 우리는 악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데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약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마태 6,30; 16,8; 28,17 참조) 어려움 앞에서 약한 믿음은 불신앙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이 사라지지 않도록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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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그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며 제자들의 불완전한 믿음을 상기시키시고, 나아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의존하는가?’ 아니면 ‘내 힘으로 하려 하는가?’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실까? 여기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는 기도하고 시험을 보면 이상하게도 아는 문제가 나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게 이탈리아에서도 통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첫 학기 첫 시험에 대비하여 45분 공부하고 15분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에 열 몇 시간씩 공부하였지만, 시험이 다가오자 불안감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책을 덮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 나이에 여기 로마까지 와서, 지은 지 400년도 넘는 건물 안에 갇혀 이게 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친구 신부들은 지금 본당 신부로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저는 뭔가요. 이 나이에 시험 공부를 하려니 정말 죽겠습니다!”
기도하고 나니 점차 편안해지며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유학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 책임지십시오.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할 터이니 함께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난 뒤 시험 준비를 하였더니 꼭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힘에 온전히 의탁합니까? 아니면 내 힘으로만 하고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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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적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 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슬픔과 충격에 무감각하지 않으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 위를 걸었습니다. 완전한 신앙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은 외적인 상황에 따라 약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니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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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선배 신부님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신학생 때부터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네가 하면 다 잘 되더라.”
신학생 때도 그랬고 또 신부가 되어 사목했던 곳을 떠올려 보면,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모두 무난하게 잘 해결되었습니다. 선배 신부님의 말씀처럼 제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셨고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글을 쓰고,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하는 제 모습을 3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작가나 강사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도 몰랐던 그런 ‘나’가 있었습니다. 이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교만에 빠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이 들었을 때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즉, 저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청하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찾아갔나 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이 아이를 고쳐 줄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활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병을 고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진실한 믿음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활동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이 세상 안에서 못 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큰 기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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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이의 기도>
마태오 17,14ㄴ-20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그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믿는 이의 기도>
당신이
느껴지지 않는
때와 곳일지라도
당신을
간절히 바라며
믿고픈 벗들에게
당신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하는
당신을
오롯이 믿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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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을 청하는 기도>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것은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자신에 대한 믿음 곧 자신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러니 믿음이 약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했다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악마 앞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쩌자고 악마 앞에 있는 것입니까?
사실 악마 앞에 있는 것부터가 문제이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악마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환난이 닥치거나 우환이 생길 수도 있고, 그때 마음이 허해지고 정신이 약해지기도 쉬운데 바이러스가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떨어질 때 쉽게 침입하듯이 이때가 악의 세력 또는 악마의 먹잇감이 되기 제일 쉬운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는데 용한 점쟁이나 무당이 있다고 하는 등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이 있으면 거기에 혹하고 넘어가고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악마 앞에 있는 이상 악마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이것은 마치 쥐가 고양이 앞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옴짝달싹 못하고 하느님이 옆에 계셔도 시선을 돌리지 못합니다. 이미 악마 앞에 있기에 옆에 계신 하느님께 시선을 못 돌립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 지경이 되면 옆에서 그를 빼 내줘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고, 주님께만 그럴 힘이 있기에 마귀병자의 애비는 주님께 달려옵니다.
제자들에겐 체면 구기는 일이었지만 이때 제자들은 얼른 자기들에게 구마(驅魔) 능력이 없음을, 아니, 주님 말씀대로 믿음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가능성을 보고 가능성 있는 쪽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은 개방 곧 가능성에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귀병자의 애비는 제자들에게는 가능성이 없고 주님께 있음을 보고 얼른 주님께 달려와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의 문으로 치유의 힘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 곧 마르코복음에는 기도하지 않고는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두 복음을 합쳐서 볼 때 주님처럼 치유의 힘이 있어서 직접 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자들처럼 그럴 힘이 없으면 주님께서 치유해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고, 기도한다는 것 또한 주님께 그 힘이 있음을 오늘 복음의 애비처럼 믿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믿음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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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
-믿음의 답이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새벽 성무일도 시편 136장 26절까지 매 구절마다 계속된 후렴이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이런 자바하신 주님을 선택함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부정적 비관적 삶이 아닌 긍정적 낙관적 믿음의 삶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보다 더 좋은 수행은, 처방은 없습니다.
밤에 일어나 휴게실에 들렸다 다음 주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신문 1면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신문 다 태극기 휘날리는 바탕에 “2027년 세계청년대회 한국 서울 개최”글자가 선명했고 기쁨에 환호하는 한국 가톨릭 젊은이들의 모습도 신선했습니다.
“아, 전쟁은 없겠구나!”
언뜻 스치는 안도감과 더불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반도의 평화도 정착될 것이라는 희망도 들었습니다. 요즘 제 기도 1순위는 한반도의 평화입니다. 반갑고 기쁜 소식은 엊그제부터 사드 배치이후 끊겼던 중국인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또한 한반도 평화에 희망의 징표가 됩니다. 압니까? 언제 교황님이 북한을 방문할지, 하느님 하시는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문득 떠오른 성가처럼 느껴지는 애국가 1절 첫연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그대로 될 것입니다. 저의 믿음이자 우리 신자들의 믿음입니다. 믿어야 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살기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야말로 인간 품위의 기초입니다. 믿음이 빠지면 남는 것은 천박한 삶에 무지와 허무뿐일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믿음의 빛입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다면 이 삭막한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살아갈수록 우리 삶의 여정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과연 믿음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는 믿음인지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은총이자 믿음의 선택이요, 믿음의 훈련이자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절대로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되어 평생 믿음의 훈련에 항구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 긍정적이고 낙관적 삶입니다. 병의 치유에 약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긍정적 낙관적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어제 신문에서 읽은 3년간의 투병을 마치고 드디어 암세포 완치 판정을 받은 51세 장로교회 신자인 가수 윤도현의 고백입니다.
“지난 2021년 건강검진후 암이란 말을 듣게 되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시간이었다. 이제와서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가 겪어보니 암세포보다 부정적인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긍정의 마음으로 부정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이겨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긍정의 힘은 바로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긍정의 마음보다,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평화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백 낫습니다. 건강할 때부터 이런 긍정적 낙관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신명기의 “셔마(들어라)” 믿음의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그대로 바치는 믿음의 고백이요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토요일 끝기도시 독서때 읽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 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신명6,4-9)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모세를 통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 입니다. “들어라!” 경청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겸손에 순종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듯 매 수행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수행, 진인사대천명의 삶입니다.
평생 사랑의 훈련이요 사랑의 습관화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삶입니다. 이런 사랑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불어 믿음도 깊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주님의 탄식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세대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호통치시자 마귀가 나갔고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낫습니다. 제자들과 주님의 대화가 오늘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대로 우리와 주님이 주고 받는 대화처럼 느껴집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환상이나 거품이 걷힐 때 알짜 믿음은 얼마나 될까요?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도약이나 비약,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결코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라 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니 우보천리(牛步千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우직하게, 한결같이 믿음으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온 마음, 온 목숨,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듯 매 수행을 사랑하는 것이요 믿음의 훈련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영원히 믿음의 초보자일뿐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늘 새롭게 시작할 뿐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으시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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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17,19)
'<믿음의 힘!>
오늘 복음(마태17,14ㄴ-20)은 '예수님께서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는 자기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17,17) 하고 이르신 다음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고,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7,1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마태17,20)
'우리 안에 어떤 마귀들이 있을까?'
'우리는 이 마귀들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호의와 선의와 성실과 온유와 절제를 방해하는 마귀!', '용서와 화해를 방해하는 마귀!', '하느님의 정의를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귀!', 등등
'이런 마귀들이 우리 마음 안에 있지 않을까?'
이런 마귀들을 쫓아내려면, 믿음의 힘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귀들에게 호통을 쳐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내 안에서 썩 나가거라!"
오늘도 믿음의 힘으로 마귀와 힘껏 싸워봅시다!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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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fRZ--ayz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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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 20)
부끄러운
우리 믿음을
만납니다.
비뚤어진
마음 안에서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현재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는 만큼
만나게 되는
믿음과 만남의
관계입니다.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우리들 약(弱)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스스로를
불가능이라는
현실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 설정된
한계를
부정하고
떨쳐나오는
가열찬
의지와 단호한
실천이 필요할
뿐입니다.
관념의 감옥에서
빠져 나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믿음과 함께
우리가 기쁘게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단정짓고
그 안에서
안주해왔던
우리의
생활을 뛰어넘는
생활의 새 출발이
건강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바라는 것보다
베풀 줄 아는
삶이 믿음의
건강한
삶입니다.
믿음이
만들어가는
세상입니다.
간절한 치유도
소박한 기도도
그 밑바탕은
언제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소중한 사랑을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믿음의
오늘이길
믿음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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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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