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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7월29일
1999년 7월 29일
윌리엄 코헨 국방부 장관 방한에서
김종필공화당 총재,..
12·12사태 직후 美에 "김대중 복권 지지"
12·12 군사반란 직후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가 미국측에 자신은 김대중의
복권을 지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는 6일 미국 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미국 측 문서 사본 21건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21건 문서 가운데에는
1980년 1월 17일 김종필과 리차드 홀부르크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와
통화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오늘의 역사 7월 29일 🌺
🌲05년 가쓰라 태프트 밀약 성립 :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에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
🌲07년 보안법 공포, 집회.결사 금지
🌲22년 전국에 큰비내려 197명사망, 가옥피해 2만여호
🌲46년 비키니수영복, 파리의 패션 쇼에 처음으로 등장
🌲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에 우리 나라 처음으로 참가
🌲49년 육군참모학교, 제1기생 29명 졸업식 거행
🌲60년 민·참의원 총선거 : 민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
🌲64년 계엄해제,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구속.
포고령에 위반 890건에 1120명 검거
🌲65년 김해에서 군인 30여명 난동, 경찰서 습격코 기자 납치
🌲66년 국무회의,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 공표 (경제성장률 연7%)
🌲67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기공
🌲71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들 집단사표,
전국 판사들 동조 (사법파동), 8월28일 사표철회로 매듭
🌲81년 한국, 제11회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루마니아)에서 20위
🌲83년 인구시계, 우리 나라 인구 4000만을 돌파 했다고 표시(인구밀도 세계 3위)
🌲84년 LA올림픽 개막
🌲86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민우 신민당 총재 회담,
국회 헌특위 통한 합의개헌을 재다짐
🌲88년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일해재단등 30건을 1차조사대상으로 확정
🌲88년 4당대표 및 국회의장단,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준비접촉 국회대표 15명을 8월 판문점에 보내기로
🌲88년 경제기획원, 경제개발 6차5개년계획 수정계획 확정
🌲89년 전남 영광원자력발전소 경비원의 부인인 朴모 여인,
2차례나 뇌없는 태아를 제왕절개수술등으로 유산
🌲89년 문규현신부 평양파견 관련, 천주교 사제단의
남국현·박병준·구일모 신부 등 3명 구속
🌲89년 태풍 주디호의 영향 부산·경남지방에 집호우가 내려
부산 사상공단이 침수되고 산사태로 12명 사망
🌲90년 전북 남원의 기온이 90년 들어 최고인
섭씨 37.5도 기록하는등 전국이 불볕더위 33명이 익사실종
🌲91년 정부,북한의 두만강유역 경제특구개발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유엔국제개발계획기구회의 개최 발표
🌲91년 서울지검, 조춘자(42.여)의 주택조합사기 분양사건
피해자 36명에 피해액은 도합 266억원 발표.
🌲91년 태풍 캐틀린 강타, 3명사망, 4명실종, 30여억원 피해
🌲92년 14대 개원국회(제157회 임시국회)자동폐회 민자당은
14일간 회기의 임시국회소집요구서 전격제출
🌲92년 경제기획원, 음료수 종이 철제품등 재원 재활용 촉진법(가칭)제출.
🌲92년 올림픽,이근철 선수(25.한국통신)는 사격 남자
소구경 소총복사에서 702.5점으로 우승.
🌲93년 헌법재판소, 85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
국제그룹해체는 부당한 공권력행사라며 위헌 결정
🌲93년 한ㆍ미국간 특허비밀보호협정 발효
🌲93년 상록수부대 해외첫 파병-소발리아에 250명-유엔 깃발아래
🌲93년 일본,비 자민 7개당 연립정부-사회 공명등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93년 헌법재판소,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적용된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헌 판시
🌲93년 서울고법, 항공기사고 경우 조종사 과실에 의한 사고일 때
손해액 전부를 항공사측이 배상 판결.
🌲93년 정선군 고간읍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막장 지주붕괴 4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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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29일..백남봉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
백남봉 직업은 한국의 희극인·영화배우이며
지난 1939년에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극단 출신으로 원맨쇼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으며,
유창한 팔도 사투리와 뛰어난 성대모사로 큰 인기를 얻었답니다.
지난 1967년 물랭루즈쇼단에서 희극인 활동을 시작했고,
1969년 <장기자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에 데뷔했답니다.
원맨쇼 <팔도 마라톤 중계방송>로 유명해졌답니다.
또한 영화 <팔도 가시나이>, <예비군 팔도 사나이> 등에 배우로도 출연했습니다.
지난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한때 담배를 끊고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2010년 7월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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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9일
대한민국, 첫 하계올림픽에 출전하다.
->제 14회 런던올림픽이 2차대전으로
12년간 중단됐던 영국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을 비롯한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초청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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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29일..해군-해병대 여성 장교 국내 첫 탄생
해군 및 해병대에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군 장교들이 생겼다.
2001년 6월 29일 거행된 제96기 해군사관후보생과 제87기
해병간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해군 13명,
해병대 7명 등 모두 20명의 여군장교(소위)가 처음 배출됐다.
2001년 3월 해군 32대1, 해병 17대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이후 14주간의 혹독한
군사훈련을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끝마쳤다.
4시간 동안 연병장 50바퀴를 도는 명예구보도 해냈다.
이중에는 해군의 경우 함정을 타는 항해병과가 7명이며,
해병대의 경우 병사들과 함께 발로 뛰어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보병병과가 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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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9일 한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1948년 7월 29일, 제14회 올림픽이 런던에서
개막됐다. 2차대전으로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한국을 비롯,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 일본·독일·
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첫 참가한 한국대표단
한국은 광복 후 처음 출전한 하계올림픽에
축구·복싱·역도 등 7개 종목에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을 출전시켰다. 그 해 1월,
단 3명 뿐인 초미니 선수단이 파견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이 광복 후 출전한 첫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복권인 '국민후원권'(안전행정부)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참가비용은 액면가
100원인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해 조달했다.
1948년 7월 29일 개막한 제14회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의 김성집 선수가 역도에서 동메달을 따냈고(왼쪽)
이화여중 박봉식은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여자선수가 됐다. 독립기념관제공
6월 21일 서울역을 출발해 열차로 부산에 닿은
선수단은 다시 배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7월 2일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런던행
비행기를 탔으나 인도·이집트·로마를 경유하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결국 20일이 지난 7월 8일이
돼서야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사이클 선수인
황산웅(왼쪽)과 권익현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고 황산웅 선생의 아들인
황덕수 서울대(생명과학부) 교수가 소장 중이다.
8월 11일 김성집이 역도에서 첫 동메달을 따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감격을 맛본데 이어 한수안도 복싱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은 참가국 58개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리(李)가
하이다이빙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런던 올림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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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7월29일 파리 개선문 완공
1836년 7월 29일 파리의 에쿠알 광장에
개선문이 들어섰다.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연전연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기 시작한 개선문은 고전주의 건축가
샬그랭의 설계로 착공했으나, 설계자도 얼마 뒤 죽고
, 나폴레옹도 실각해 공사가 중단됐었다.
이어 여러 건축가와 조각가의 손길을 거쳐
7월 혁명 이듬해가 돼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 다리 부분을 장식한 조각 장식 가운데
뤼드의 ‘라 마르세예즈’는 특히 유명하다.
높이 49 m, 너비 45 m의 개선문은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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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7월29일 히틀러, 나치스당 당수 선출
아돌프 히틀러
1921년 7월 29일 뮌헨에서 열린 나치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특별 당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543표대 1표차로 당 제1위원
당수에 선출됐다. 대회전에 히틀러는 다수파방식과
의회적인 절차를 모두 폐지하고 당수를 정점으로
한 엄격한 명령-복종의 원칙 `지도자 원리`를
확립하고 당의 구성을 바꿨다. 이로써
히틀러는 나치스의 독재자가 됐고 이후
그의 결정은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
1932년 7월 31일 총선거에서는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고 1933년 1월 30일에는 마침내
독일 수상에 취임해 전세계가 전쟁과
학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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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법륜 스님,
막사이사이상 평화부문 선정
법륜 스님
2002년 7월 29일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상`의 수상자로
한국의 법륜(본명: 최석호) 스님을 비롯해 모두
6명이 선정됐다. 법륜 스님은 정치적 정파에
개의치 않고 탈북자 지원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평화 및 국제이해 부문의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7월 2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막사이사이상
평화 및 국제이해 부문 수상자인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가운데)이 다른
수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인 법륜스님은
1988년 정토회와 정토법당, 불교환경교육원을
설립한 이래 불교 교육과 환경보전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1993년에는
국제 기아·질병·문맹 퇴치 기구인 JTS를 발족하여
제3세계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
법륜 스님이 북한 지원에 뛰어든 것은
1996년 여름. 북한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서
기아 상태에 빠진 북한 어린이를 직접 보면서였다.
당시 북한은 잇단 대홍수와 경제 정책 실패로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북한 잠수정의
남한 침투로 대북 경제지원은 중단됐었다.
그는 개신교·천주교·원불교 등 다른 종교인,
민간단체와 힘을 합하여 북한을 돕는 한편
`북한 식량난 실태조사 보고서`
`북한 난민 실태 및 인권보고서`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법륜 스님이 이끄는 정토회는 어린이 급식과 농업
지원을 중심으로 한 해 약 10억원
정도의 물품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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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29일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1981년 7월 29일 결혼식을 올린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버킹검궁 발코니에서 키스를 하고 있다.
32세의 찰스 영국 황태자와 20세의 다이애나
스펜서양이 1981년 7월 29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런던 성바오로
대성당에서 ‘세계의 결혼식’을 올렸다.
황태자는 해군 정장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문장이 그려진 파란띠를 두르고 있었다.
오전 11시 ‘트럼펫 바운타리’가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가운데 다이애나가 식장으로
걸어나와 찰스에게 다가갔다. 찰스까지의
거리는 7.62m로 4분이 걸렸다. 그녀는 엷은 아이보리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필립 찰스 아서 조지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로버트 룬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맹세했다. 찰스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가락에 웨일즈 금반지를 끼워 주었다.
결혼식은 1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신혼부부는
70년 된 마차를 타고 버킹검 궁으로 향했다.
이로써 다이애너양은 지난 1970년 이래
첫 황태자비가 되었고, 3세기 만에 처음으로
왕위계승권자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맞이했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1남 3녀 중 막내로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다이애나는 동화에서
튀어나온 진짜 공주처럼 세상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엄격한 왕실 생활은 숨이 막혔고 12살 연상인
남편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 후 계속된 불화로
우울증에 걸려 5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다
결국 1996년 8월 찰스와 정식 이혼,
1997년 8월 31일 파리 알마광장 지하터널에서
새 애인 도디 알 파예드와 파파라치의
추적을 피하다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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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영국 해군,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16세기 지중해를 주름잡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1571년 오스만 제국와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명성을 떨쳤다.
1588년 7월 2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대패함으로 힘의 중심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세말 이후 지방 분권적인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수립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광대한 식민지로부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한 펠리페 2세 때,
레반토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포르투갈도
합병해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스페인의 세력확대를 위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행한 청혼과
스페인 상선을 습격한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의
처형요구가 모두 거절당한데 앙심을 품은
펠리페 2세는 1588년 5월 28일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무적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
수병 8천명에 육군 1만9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 병력 8천명으로 이에 맞서게 했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해상 장군, 존 호킨스 경, 사진: Youtube]
태풍으로 이날에서야 영국 해안에 도착한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공격에 지리멸렬했다.
피신한 프랑스 칼레 연해에서 영국함대로부터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었으며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페인이 이 전투에서
70여척의 배와 약 1,800여명의 병사를 잃은데 비해
영국은 배 한척에 전사자도 겨우 100명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자리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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