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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골의사 박경철씨 블로그, 엽혹진
사랑아 사랑아 즈려밟힌 내 사랑아 1
사람이 사람을 사랑 할 수 있는 정도는 어느정도 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따라 죽는것,,? 혹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심장이라도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것,,? 혹은 그를,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칼로 가슴을 갈라서도 다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런것이 사랑일까?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은 영원히 함께하는 것, 결혼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레지던트 시절 나와 같은 연차로 트레이닝을 받았던 대학동기중에 가장 친했던 사람은 흉부외과를 전공했던 우선생이다. 우선생은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한편의 드라마다.
우선생의 아버지는 광산을 하시던 분이다,
우선생의 할아버지는 강원도 어디에서 큰 부자로 사신 분이고,우선생의 아버지는 부자집 외아들로 태어나 젊을 때부터 그야말로 온갖 사치를 다 누리면서 자라셨다, 아마 요즘식으로 치면 압구정 오렌지 정도는 족히 되셨던가본데, 그시절이 대개 그렇듯이 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을 하신 우선생의 어머니는 "인내"라는 전형적인 한국여인의 덕목을 전부 갖추신 분이다,
이쯤에서 대강 눈치챘겠지만, 우선생의 아버지는 탄광사업과 중기사업을 하느라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날렸다. 우선생이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해도 우선생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집이었지만, 이후부터 우선생네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선생의 아버지는 사회적 무능력자에 가깝다,
능력이 없어서 일을 하지 않으신다기 보다는 평범한 일은 아예 하려들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 어른은 3남매를 둔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도 보이지 않았고, 우선생 어머니가 아이들 학비를 걱정하면 그동안 집에 있던 그많던 돈 다 어쨌느냐고,,? 오히려 타박만 하셨다.
우선생은 어머니의 눈물만 보고 자랐다.
아버지는 과거 부자시절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매일 밤늦게 들어오시고, 어머니는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궂은일 마다않고 늘 남의집 일이나, 공장일을 하시느라 허리가 휘셨다, 가끔 아버지가 친구들과 먹다남은 갈비찌꺼기를 ( 갈비에 붙은 살은 다 먹고, 남은 뼈다귀를 집에 키우는 개에게 가져다 준다고 말하고 싸가지고 오셨다고 했다) 신문지에 싸오셔서 집에다 주시면, 어머니는 그걸로 갈비탕을 끓여서 우선생 형제들에게 먹이곤 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시절에 그럴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온가족이 같이 배를 주리다가 아이들에게 뼈라도 먹이기위해 갈비집을 기웃거리며 얻어온 것도 아니고, 혼자 친구들과 갈비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개에게나 던져주면 딱 좋을 뼈다귀를 던져주고 탕을 끓여 먹으라고 하는것은 좀 심했다.
그렇다고 우선생 어른이 나빠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사업이 뜻한대로 풀리지 않고, 또 그런상황에서 그시대의 가치관으로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다.
하여간 우선생이 고생한 이야기는 책을 한권써도 다 모자란다.
그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때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던날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삼륜차에 가재도구를 대충싣고 그동안 살던집을 떠나 새로살 집에 들어서던 날. 골목이 좁아서 삼륜차가 들어가지 못해 리어카에 짐을부려 밀고 끌어서 들어간 집은 온 사방에 대나무 깃발이 꽂힌 무당촌이었고, 그나마 이사 역시 아버지는 외출하시고 어머니와 어린 삼남매가 짐을 나르면서 어머니가 펑펑 울던 기억에, 또 이사 첫날밤 늦은 밥상을 앞에 놓고 삼남매를 부여안고 철철 흘리시던 어머니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그 이사가 바로 우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질곡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이후로 우선생은 방학때면 병원하는 고모집으로, 사업하는 외삼촌댁으로, 때로는 구청에 있던 이모부에게로 학비를 빌리러 다니는게 일이었다. 우선생은 인근 도시에사는 고모댁에 학비를 빌리러가면서도 터미날에서 내려 고모댁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차비가 아까워서였을게다.
고모부가 병원을 해서 살림이 넉넉했던 고모는 우선생이 대학시절 등록금을 빌리기위해 찾아가면 마치 남의집 개를 대하듯 하는 표정으로" 너네 형편에 대학을 다니는게 가당이나 하니? 사람은 자기 분수대로 살아야하는거야.." 라고 빈정거렸고, 외숙모는 6시간을 차를 타고 학비를 빌리러 찾아온 조카에게 점심 한끼 먹이지 않고 한 학기 학비를 내 던지듯이 건네주며, " 다른집 아이들은 몰래 아르바이트라도 한다던데, 넌 그런거도 안하니, 아니면 배불러서 못하니??" 라면서 우선생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때 우리시절은 대학생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에 우선생이 의과대학을 다니는 것은 거의 사투와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만해도 의과대학 학비는 일반대학보다 상당히 비쌌고, 학비뿐 아니라, 교재나 기타 비용이 정말 엄청나게 들었다. 때문에 실제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시골에서 의대를 보내려면 소팔고 논팔아야 한다는 부풀려진 얘기가 나올정도로 경제적인 부담이 컸는데, 의대는 커녕 고등학교도 겨우 보낸 우선생네 형편으로 학교를 무사히 마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날 우선생 아버지가 우선생을 불렀다.
"내 친구가 시내에서 호텔을 하는데 말이야. 그집에 아들놈이 영 꼴통이라네. 그레서 그집에서 몰래 입주과외를 할 대학생을 구한다길래, 얼른 널 시키겠다고 얘기했지. 매달 월급도 주고 밥도 먹여주고, 학교도 데려다 준단다, 내일 당장 짐싸서 그기로 들어가거라,"
우선생은 이일을 좋아할수도 그렇다고 싫어할 수도 없었다,
일단 매일 학교갈 차비를 걱정하고, 친구들에게 눈치밥먹어가며 담배 한개피 얻어피던 처지에 월급을 주고, 먹고 재워준다니 더할나위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대학제상 시험기간에 들어가면 남의집 과외선생을 하다가는 자칫하면 유급을 당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해진 일이라 그집으로 들어갔지만, 우선생이 그집에서 과외를 하던 4개월간 우선생이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과외보수를 직접 받으시는 바람에 과외보수를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다.더구나 한참 사춘기에 이르렀던 그집 딸이 우선생을 지나치게 괴롭히고 인간적으로 경멸을 하는 바람에 결국 못이기고 넉달만에 과외를 그만두고 나왔다,
우선생의 말을 빌면 머슴살이 넉달에 남은건 고기 실컷 먹은거라고 했다.
우선생의 청춘은 그렇게 돈에 찌들리면서 지나갔지만 그나마 우선생을 지켜주었던 것은 대학 2학년때 만난 여자친구의 힘이컸다.
그녀는 우선생이 힘들때마다 옆에서 지켜주었고, 심지어는 우선생이 필요한 교재를 복사하거나, 실습에 필요한 비용까지 자기 용돈을 털어가며 보태주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녀의 재기와 발랄함은 우선생뿐 아니라 우리 친구들 모두를 치어업 시켜줄 정도로 멋진 것이었다.
그녀와 우선생의 사랑은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는 특별한 사랑이었다.
드디어 우선생이 어떻게 어떻게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수련을 마친 후 우선생에게 던져진 다음 숙제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요새는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해도 사회가 그렇게 맑지는 않았다,
당시만해도 의사들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는데도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학교성적이야 어떻던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않고 대개는 의국에서 지원자를 사전에 선정하고( 물론 인턴 시절의 인간적인 면도 많이 고려하지만, 일부과목들은 집안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더 중요했다) 시험은 형식적으로 치르는 것이었다,
당시 우선생은 자신의 꼼꼼한 성격상 성형외과를 희망했지만, 사실 그것은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이말이 파문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만해도 성형외과를 지망하려면 우선생 "따위"의 집안 사정으로는 언감생심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일반인들 생각에는 지금 인기있는 일부 특수과들에 의학도들의 경쟁이 치열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경쟁률이 낮은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의사라면 메이져과를 선택해야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이 하나고, 둘째는 해당과의 선발과정에서 일어나는 묘한 불협화음이 싫거나, 혹은 그것을 감당 할 능력이 없어서이다.
하여간 우선생은 자신이 다루고 싶었던 분야를 포기하고, 같은 외과계열이긴 하지만, 지향점이 너무나 다른 흉부외과를 선택했다, 그것은 어차피 재미있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의미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게는 흉부외과를 전공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 지금 같이 근무하는 박선생도 그렇고, 대학동기 우선생도 그렇고,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10년째 막역한 정을 나누고 있는 최선생도 그런데, 그러고보면 나도 출신성분이 순깡촌 출신에 프로레탈리아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녀석이 흉부외과를 지망하자, 녀석의 여자친구가 강한 반대를 했다.
오빠가 비뇨기과 의사였던 그녀는 의사들의 미래와 소위전망이라는 것에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오빠. 흉부외과를 하면 굶어 죽는데.. 전문의 마치고나서도 개업을 못한다고 취직 할 때 다른과보다 월급도 반만주고, 맨날 병원 당직을 도맡아 시킨데. 그거 절대 하면안된데,, 오빠 지금 다른과에 자리가 없으면 차라리 군대 갔다와서 다시 시작해,, 흉부외과가 뭐야..만약 흉부외과 의사를 할거라면 나하고 결혼할 생각은 버려.. !!" .. 그녀의 반대는 정말 완강했다.
우리 친구들이.. 꼭 그런게 아니다,.. 미국에서는 정말 흉부외과 의사가 그레이트 서젼이다, 미국에서는 의사중에 의사가 흉부외과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심장병이 증가하면서 흉부외과 의사들이 가치가 돋보일거다,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등등 온갖 감언 이설로 그녀를 설득하고 달랬지만 그녀의 반대는 정말 완강했다.
사실 그녀가 옳았다,
나도 그때는 흉부외과를 지망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다른 친구들도 "한번 해볼까?" 라고 한번씩 고려 할 만큼 정말 매력적이고, 보람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현실은 다른것이다.
흉부외과 의사란 꿈을 먹고 살기에는 가장 좋은 전공이지만, 밥을 먹고 살기에는 가장 고달픈 전공이었다. 병원 경영자들 입장에서는 흉부외과의사가 없으면 응급실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긴 하지만, 대신 심장 수술을 하지 않는 병원에서는 수입면에서는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장수술이래야 전국에서 손가락을 꼽을정도의 병원에서만 이루어지고, 나머지 병원에서는 심장수술 시스템을 엄청난 돈을 들여 갖출 수가 없다, 때문에 흉부외과의사는 그저 외상으로 심장이나 폐를다친 환자들을 상대로 돈안되는 수술이나 하고 ( 그러나 이런환자들은 그병원에 흉부외과 의사가 없다면 다른병원으로 이송중에 그대로 죽게된다 ), 나머지는 다른과 환자들이 가슴에 탈이나면 이리저리 컨설트나 받는것 이 전부다,
병원경영자의 입장에서는 폐가 파열되어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5,6 시간씩 피를 쏟아가며 수술을해도 쌍꺼풀 수술비의 절반도 안되는 흉부외과는, 그야말로 없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있어봐야 돈이 안되는 계륵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정말 한참 후에나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자기가 선택한 전공을 수련받기 위해 각자 자신의 길로 들어갔다.
이제 캠퍼스라는 보금자리에서 같은 여건에서 같은 과목을 공부하던 친구들이,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가는 동료가 되었다.
일년차 시절 어느 겨울날,. 그동안의 혹독한 수련이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이제 한달만 있으면 새로운 일년차가 들어오고 우리는 이년차로 승급을 한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매일매일 휘파람을 불면서 달력에서 남은 날짜를 지우던 때, 우선생으로부터 삐삐가 왔다,
남겨진 번호는 병원 10층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잠시후 우선생을 만났다,
휴게실에서 만난 우선생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우선생은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 친구는 나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같이 다닌 동문이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반이 된적이 없어서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원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대학에서 다시 만나고, 이제 3년의 인연을 넘어 6년의 인연을 새로 만들었으니 저절로 친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원체 내성적이고 다른사람과 쉽게 사귀지 못하는 친구인지라 대학에서도 우선생과 가까워지는데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대개의 특징처럼 우선생의 내면세계는 상당히 넓고 깊은데가 있었다, 본인말대로 자습서 한권 마음대로 사보지 못한 처지에 독서량이 많았다거나, 그렇다고 숨겨진 바이올린 실력이 있다거나 한건 아니지만,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싸우면서 체득한 나름의 인생관이 있었고,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우선생의 어머니에대한 사랑은 자식으로서 부모에대한 사랑뿐 아니라, 세파를 헤치면서 살아온 강한 동지애와 연민같은것이 겹쳐진 강력한 유대같은 것이었다,
우선생의 어머니는 우선생을 의사로 만들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다고 한다. 공장에서 일을해서 몇푼 벌면 그중에 반을 우선생의 학비로 사용했고, 그덕에 우선생은 그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때까지 학원에서 영어,수학을 배울 수가 있었다고 했다, 민망한 얘기지만 우선생의 어머니는 맏자식을 의사로 만들어서, 가족의 크라이시스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우선생은 우선생대로 스스로 의사가 되어서 그 고단한 질곡의 가족사를 구원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우선생이 의대를 진학하는 일은 어찌보면 두사람에게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던 셈이다.
그런 우선생이 흉부외과를 지망했으니 정말 문제는 문제였다.
우선생의 집은 안그래도 경제적으로는 이미 사망상태였다, 우선생 어머니가 우선생과 동생의 대학교육을 위해 주변사람들과 사돈팔촌까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돈을 빌리는 바람에 빚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나마 그 빚들중에는 2부 ,3부로 급전을 빌려 쓴 것들이 많아서 매달 우선생의 전공의 월급을 모두 쏟아부어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조차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요즘은 그런일이 잘 없지만, 당시만해도 가끔 판검사 의사는 열쇠가 3개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사회가 다 그런건 아니지만, 비록 일부의 경우라고 해도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당시만해도 시골에서 과수원팔아서 아들하나 잘키워 판검사 의사만들면 온 집안이 형편이 풀린다고 믿었던 그런 시기였고, 그렇게 온집안의 희생과 기대를 짊어진 젊은 고시합격자나 의사들이 자신들에 지워진 짐을 덜기위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결혼을 하게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것은 대개 졸부집안에서 자신의 부가 부끄럽거나 부의 형성과정이 두려우면 어떻게해서라도 판검사 사위를 얻어야하는 사람들과, 딸자식이 비록 좀 못나고 좋은 처신을 못했다해도 의사사위 하나 구해다 놓으면 모두 묻힌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이해가, 어렵사리 아들을 판검사 의사로만든 사람들의 보상심리와 일치해서 생긴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 그렇게 의사사위를 얻은 사람들이 요새는 후회하는 분들이 꽤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런일들도 당시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었음은 분명했다,
시골의사 블로그http://blog.naver.com/donodonsu.do
첫댓글 아 이거ㅠㅠ 다시읽어도 벌써 마음아프다
헐 뒷부분 넘 읽고싶은데 블로그 들어가도 못찯겠엉 ㅜㅜㅜㅜ 혹시 뒷부분 어디서 읽으면 되는지 아는 여시 있나유 ㅜㅜ?
내가 끝까지 다 올렸어!
@초코가달콤한시간 잘읽을게요 고마워 여시야!
이분 글 진짜 잘쓰신다 스르륵 글이 읽히네 그나저나 이글 전편인데도 모든게 복선같아서 슬푸다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넹넹 안지울게요!
나도나도!! 댓글 달아놓고 이따 읽을게용!!! 여시 지우면 앙대앙대용!!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니야! 내가 이거 시리즈 계속 올렸어ㅠㅜ 검색하면 끝까지 나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