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오늘도 늦은밤 주님께 나왔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버티다고 나왔지요. 왠지 모르게 오늘은 그렇고 싶었는데 많이 늦은 시간이 되었네요. 욥기 말씀이 참 어렵지만, 참 여러가지의 제 모습을 보게도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또 힘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죄성과 부정성으로 오염된 영, 십자가의 보혈로 씻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길 원합니다.
@말씀주해: 하나님이 환난을 통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묘사한(36:5-21) 엘리후는 이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의 길(22-23절)과 하나님의 위엄이 부분적으로 폭풍의 힘과 목적을 통제하시는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것(37:1-13)에 초점을 맞춘다. 이 변론에서 엘리후는 청자/독자에게 자신이 묘사하는 것을 볼것(36:30)과 들을 것(37:2)을 촉구하고, 이것은 또한 욥이 단순히 하나님이 실제로 어디서 말씀하시는지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ESV 성경]
엘리후의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창조주로서의 위엄, 하나님이 하시는 크고 신비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원론적으로 너무 맞고, 반박할 근거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 또한 당연하고,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욥이다. 고난과 고통으로 심판받아 이제는 더이상 심판받을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는.. 그는 당대의 의인으로 어떤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짓지 않고, 그 어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겼던 이로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던 자다.
엘리후의 말은 다르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이 등장하시면서 하시는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이유는, 사망에 속한 말이냐? 생명(사랑)에 속한 말이냐? 이는 하는 이는 스스로 알기 어려우나, 옳은 말을 하는 이들(나 포함)도 얼마나 악한지 모르듯이, 듣는 이는 알 수 있다. 듣고 결국 주님의 생명으로 가게 하는지, 아니면 결국 나에게 집중하는지…
@나의 묵상 및 기도: 엘리후의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다. 옳은데 짜증이 나서 그럴 수 있고, 그의 의도가 가르치려는 데 있지 생명으로 가게 하는 데 있지는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생명을 주기 위한 말은 전제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전해지게 마련이다. 사망을 주기 위한 말은 그 말이 성경적이고 옳다 하여도(엘리후처럼), 결국 버려지는 말이 된다.
나는 외향적이고 말수가 많은 편이니 얼마나 많은 말을 해서, 얼마나 주변을 괴롭게 하는지..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을 때가 더 많다. 감정적일 때, 마음이 상할 때 나오는 말들을 가시가 돋혀 옳은 말일지 몰라도, 결국 상대를 죽일 수 있다. 다행히도 주님의 은혜로 감정이 올라올 때는 침묵하게끔 도우신다.
내가 너무 엘리후였음이 드러나 힘들다. 똘똘한 척 하며 맞는 말, 옳은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전혀 위로가 안되고, 전혀 생명의 말들이 아닐 때가 많다. 유하게 말하는 것 같고, 좋게 말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으로 하지 않는 것은, 사랑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악하다.
이미 저지른 것을 어찌할 수는 없으나, 매번 주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 또한 계속 부어져서, 한 영혼, 한 영혼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님께서 도우셔야 가능한 일이다.
주님, 참 쉽지 않습니다만, 옳음을 주장하고 교만한 엘리후가 바로 저 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런 자를 위해서도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자를 위해서도 용납해주시고, 저는 그저 용납해주시는 하나님 안에 거할 뿐입니다. 아버지 안에 내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는 연합에 있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