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드러나는 그림자
과장님, 대단한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뭔데?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에서 이천오백만 달러를 인출한 여자가 있습니다.
몇 살인데?
스물여섯 살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어?
어제 외환은행을 담당하는 오경식이가 갖고 왔습니다.
조사해 봤어-
예, 지난 1978년에 이용후라는 자가 예금한 것을 딸인 이 여자
가 상속하여 돈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라는 자는 죽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언제?
'1978년에 죽었습니다.
그런 걸 왜 이제야 찾아-
제 생각으로는 아마 그동안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
다.
십여 년간이나 모르고 있다가 이제와서 찾는다? 이건 뭔가 냄새
가 이상하잖아-
그래서 지금 저희 팀에서 조사중입니다.
그 여자는 어디 있어-
호텔에 투숙하고 있습니다.
뭐하는 여자야-
본래 미국에 살고 있던 여자입니다.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습니
다.
돈은 어디에 있나-
외환은행에 입금되어 있습니다.
누가 돈을 찾아주었나? 여자가 혼자 하지는 않았을 테고 ,,,,,,.
애인으로 보이는 자가 같이 왔었다고 하더군요.-금액이 워낙 크
고 대체결제이기 때문에 은행측에서 이 친구의 사실관계 보증을
받아두었다 합니다. 여기 보니까 반도일보 기자로 되어 있군요.
기자? 음, 어쨌거나 신속히 조사해봐, 틀림없이 문제있는 돈이
니까 철저하게 조사해봐.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자도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봐.
예, 알겠습니다.
보고 하던 사람이 나가고 나자 과장은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과묻고 생각에 잠겼다. 1978년도라면 외환관리법상 외국에 투자를
할 경우에도 십만 불 이상의 반출에 대하여는 대단히 복잡한 허가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나마 개인이 반출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에 개인이 입금을 하고 그만
한 거액이 십삼 년간이나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장은 벌떡 일어나 보고서를 작성하여 3국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3국장 이동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남산에서 잔뼈가 굵어온 이 사나이는 12,
12사태 후 중앙정보부의 국장급 이상이 모두 사표를 제출했을 때
도 순수 정보부 출신이라는 강점으로, 결국은 국내담당인 3국의 책
임자까지 을라온 사람이었다 대담하고 의리가 강하며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부내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국내에서 발생하
는 크고 작은 사건 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한 건도 없을 정
도로 그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안기부는 그 조직의 특성상 부장이 반드시 수직적 계통을 밟아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명의 계원만을 불러 은밀히 일을
시키고 그 비밀은 부장과 담당자만이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부장 바로 밑의 차장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철
저히 따돌림을 받다가 다른 데로 가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
장에 불과한 사람이 부장과 같이 막중한 국가대사를 이끌어 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눈을 감은 채 과장의 보고를 듣고 있던 그는 과장이 보고를 끝내
자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과장, 그 이용후라는 사람에 대하여는 조사를 좀 해봤소?
국내에 전혀 이름이 나 있지 않아서 지금 미국에서부터 거꾸로
더듬어오고 있습니다.
아까 그 여자가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다 그랬소-
그렇습니다. 이용후도 그렇고 그 딸도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습
니다.
강 과장, 내 생각에는 말이오, 이 일은 우리가 신경쓸 일이 아닌
것 같소. 한국인 중에도 스위스 은행의 비밀구좌를 이용하는 사
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돈을 한국에서 찾을 사람
은 없지 않겠소? 이것은 틀림없이 미국 돈이 이리로 넘어온 거
요. 경위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엄청난 액수
의 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소? 쓸데없이 말쌩을 일으켜
소문이 나거나 하면 미국에서 이 돈을 주시하게 될 것이고, 그렇
게 되면 돈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빠져나갈 공산이 크지 않겠소?
미국 국세청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결과가 될 것이오. 어찌 되었든
좀더 추이를 지켜보도록 하고, 내 강 과장을 영국 파견근무 발령
을 낼 테니까 이제부터는 그쪽으로 신경을 좀 쓰도록 하시오. 하
찮은 것 같지만 영어공부도 좀 열심히 하고, 영국 문화에 대해서
도 미리 좀 익혀두도록 하시오. 해외 나가는 직원들이 영어 한마
디 못해서 외환은행이나 대한항공 직원들 불러 통역이나 시키고
하니 창피한 일 아니오? 가끔 들어오는 대사들마다 영어공부좀
시켜서 내보내달라고 하소연을 한답디다.
강 과장으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강 과장은 오래전
부터 해외근무를 원했었다. 그로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봐
서 앞으로 안기부에서 장수하려면, 아무래도 해외근무 경력을 쌓아
두어야만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던 터였다. 사실 그는 얼마 전부
터 국장에게 은근히 부탁하고 있었고 해외담당부서 직원도 아닌 자
기가 나가는 것은 몹시 어렵던 처지였었다. 그런페 이제까지 아무
말도 없펀 국장이 갑자기 해외근무 결재를 내겠다고 하니, 그로서
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국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물론 영어공부
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괜히 미국시민권 가진 사람들을 조사한다든지 해서 말썽 일으키
지 말고 방금 얘기한 일은 싹 잊어버려요. 처음에 이 일을 누가
가져왔다고 그랬지?
외환담당 오경식이가 가져왔습니다.
모든 조사를 중단시키고 관련서류 일체를 내게 가져오시오. 외
환은행에서도 서류 몽땅 챙겨오고. 앞으로 이 건에 대해서는 절
대 함구시키시오. 괜히 이런 게 빌미가 돼서 전폭적 금응개방의
압력이 온다든지 하면 국가적 손해가 얼마나 큽니까? 그렇지 않
다 하더라도 이제 우리 안기부도 달라져야 합니다. 남의 약점이
나 잡고 비밀이나 캐내는 일은 이제는 모두 없어져야 해요. 세계
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강 과장, 영국 나가
면 열심히 한번 뛰어봐요. 앞으로는 내가 뒤를 좀 봐줄 테니까 소
신껏 한 번 해봐요.
네, 잘 알겠습니다. 국장님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과장이 나가고 나자 정 국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남산 쪽을 향하
여 탁 트인 창 앞에 섰다. 이미 늦가을의 풍경이 완연한 남산 기슭
의 숲에는 낙엽이 소복히 쌓여가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
람쥐 한 마리가 날랜 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나무등걸을 타고 쪼르
르 와서는 도토리 한 알을 입에 물고는 사라졌다.
(이용후의 딸이라,,,,,,.)
그날밤 성북동의 유서깊은 요정 대원각 깊숙한 방에서는 두 사람
의 사나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장님이 늦으시는군,
먼저 한 잔 하고 있을까?
연락도 없는 걸로 봐서 차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지.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전화를 넣어주
었다.
아, 국장님이세요? 그러시면 못 오시겠군요. 아닙니다. 국장님
오시면 시작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럼 제가 국장님
대신 얘기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사나이가 주문을 하자 호화로운 술상과 함께 마담이
들어왔다.
애들은 있다 부를까요?
그렇게 해.
마담이 따르는 술이 몇 순배 돌자 맞은편의 사나이가 말문을 열
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놈의 딸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래, 그놈의 딸이 나타났어.
딸이 어디서 그렇게 뚱딴지 같이 나타났단 말이야?
미국에 살고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라는 놈하고
같이 나타나 그 엄청난 돈을 찾았어.
기자-
그래, 반도일보의 권순범이란 놈인데 이놈이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
음, 더러운 놈이 붙었군.
이것저것 안주를 챙기며 술을 따르고 대략 분위기만 잡아주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마담은 도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더욱 아양을 떨며
효태를 부렸다,
아이, 좀 재미있는 얘기를 해요. 술집에 와서 웬 재미없는 얘기
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 마담은 잠시 나가 있어요. 우리 얘기 다 끝나면 부를 테니.
아이, 술 먹는 자리에서 하는 얘기 쳐놓고 제대로 된 얘기 있나
요? 다음날 술만 깨면 다 없어져버리는 얘기죠. 얼른 얘기들이나
끝내고 술 드세요. 저는 빨리 아가씨들 준비해야 하니까 신경쓰
지 마시구요. 요즘은 손님들이 많아 아가씨를 미리 불러놔야지
잘못하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에요.
흰소리를 해가며 마담은 윗목에 있는 인터폰을 붙잡고 예쁜 애들
로 둘 딴방 보내지 말고 두 사람대기시키라고 소리쳐댔다.
마담의 말을 듣자 얼른 얘기를 끝내려는지 사나이의 말이 빨라졌다.
사건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놈인데 이놈이 청주 박성길이 건도
캐고 있어.
박성길을 캐던 놈이 그 형사놈 말고 또 있었단 말인가-
이놈도 알고 있어. 이놈이 박성길이 건도 알고 딸도 데리고 와
돈을 찾았다면 무언가를 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커.
보통 일은 아니겠는데,
그러니까 그게 불안한 거 아닌가? 아까 얘기했던 외환건도 그
래. 다행히 국장님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강 과장이란 놈이 더 깊
이 조사해 들어가기나 했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지.
어쨌거나 이들을 그냥 두면 안 되겠군.
사실은 그래서 자네를 만나자고 한 거야. 국장님은 아마 자네가
알 거라고 하던데.
뭐 말이야?
인도에 깨끗하게 처리하는 놈 있파아?
있지.
바로 연락이 되나?
응, 될 거야.
이 기자라는 놈하고 딸이 인도에 간다는군.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뤘군. 갠지즈의 노인이란 놈에게 시
키면 되겠군.
이들의 대화가 꾼어지자 부산을 떨던 마담은 바로 문을 열고 손
뼉을 쳐서 아가씨들을 불러들였다.
다음날 아침 김포 공항을 떠난 순범과 미현은 흥콩을 거쳐서 인
도의 뉴델리에 도착하기까지 모처럼 즐거운 기분이 되어 제법 얘기
를 나눴다,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여행이라 그런
지 미현의 얼굴은 때때로 결연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만족스런
얼굴이었다.
미현 씨의 전공은 무엇이라고 했죠-
정신분석이에요. 특별히 범죄심리 치료도 연구하고 있어요.
범죄심리 치료, 그게 뭔데요卜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를 발견하여 해
소해주는 거예요. 치료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언어치료법도 대
단히 효과적인 한 방법이에요.
특수한 분야 같군요.
그런 셈이죠.
대화가 끊어지자 기내에서 제공되는 신문을 펴본 순범은 일면의
기사를 보고 깜차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일이 !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쥔 순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옆에 있던
일본인 부부가 순범의 기색을 느끼고 슬쩍 곁눈질했다.
(한국의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 선언 !)
이런 제목 밑에는 동북아의 평화와 북한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서
한국은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시설을 포함하는 모든 핵 관계 설비
의 건설을 포기한다는 기사가 써 있었다. 그 옆에는 마치 비교라도
하는 듯이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플루토늄 팔십 톤을 향후
십 년간에 걸쳐 사들이고 우선 일 톤을 곧 수송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런 엄청난 왜곡과 굴곡된 시각이 있을 수 있나? 동북아의 평
화를 위해 플루토늄을 포기하는 것이 남북한이 해야 할 일이라면
일본의 엄청난 플루토늄 보유는 무엇물 위한 것인가?)
이런 것을 선언이라고 내놓는 정부와 나라의 앞길을 생각하니 순
범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정보가 철저
하게 미국의 정보계통에서 흘러나오고, 아직 북한의 정확한 핵개발
상환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상 이러한 선언은 위험천만
한 것이었다. 만약에 미국이 북한의 불분명한 상황을 자국의 목적
에 따라 핵개발이 임박한 것으로 왜곡하여 알려주는 것이라면, 우
리나라의 핵포기선언이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왐스러운 것인가? 한
국정부는 핵포기선언의 대가로 무엇을 얻어 낼수 있겠는가? 오로지
북한만을 의식해 눈앞의 고식적 조치에만 급급한 정부의 핵포기선
언은 결국 국가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신문에 나란히 나와 있는 일본의 대규모 플루토늄 확보 계획에
대한 대응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이러한 선언문을 한국인이 기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한국인이 선언할 수 있단 말인가?
순범의 뇌리에 윤미가 얘기하던 네버 국장이라는 자가 떠올랐다.
앤더슨 정이 얘기하던 미국의 영주권을 가진 대통령 특보도 생각났
다. 한국의 핵정책을 주도한다는 그의 작품이 바로 이것이었던가
싶었다. 평화적 원자력에너지 이용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앞
으로 우리나라는 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효율적인 에너
지 이용을 위해 농축 및 재처리시설을 반드시 갖춰야만 할 처지였
다. 그런데 핵폐기물 처리장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면서, 연간 수천
억 원의 돈을 농축비용으로 외국에 지렬하면서, 이런 시설의 보유
를 포기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비핵화선언으로 지구상
에서 스스로 핵능력을 포기한 유일한 국가가 되어버린 것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를 정부는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참으로 한심했
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범은 아득한 기분이 들먼다.
(내 편은 어디에 있는가? 나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지키려했던 이 박사를 거리낌없이 살해
하고 구치소에 있던 박성길도 살해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조직에 맞
서야 하는 자신을 도을 사람은 이 세상에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상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지만,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움직이는 자들은 그림자조차 보
이지 않았다 답답하고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짐승과 같은 포
효라도 지르고 싶은 순범은 그러나 다음 순간 어느새 냉정한 자세
로 돌아와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차가워져야 했다. 이 박사의 행적을 파헤치
고 외국의 앞잡이가 되어 진정한 민족의 길을 가리고 있는 자들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결코 흥분해선 안 되었다.
뉴델리 공항에 내린 두 사람은 타지마할 호텔로 향했다,
타지마할 호텔은 전통적인 인도의 건축양식에 현대적인 시설을
더한 아늑하고 깨끗한 호텔이었다.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호텔도
별로 신통한 것이 없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두 사람에게 이 호텔은
정말이지 환상의 나라에나 있는 호텔처럼 여겨졌다. 종업원들도 모
두 친절했고 시설도 한국이나 미국의 일류 호텔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이 묵고 있는 8층을 담당하는 십
오 세 가량의 소년은 말할 수 없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목이 좁은
인도 국민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네루모자를 옆으로 약간 비스듬
하게 눌러쓴 이 소년의 이름은 라이였다. 라이가 크고 새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아직 변성도 되지 않은 목소리로 예스, 써 하고 대답하
면서 종종걸음으로 심부름을 다닐 때면 동화 속에 나오는 아이처럼
보였다.
호텔에 짐을 푼 두 사람은 라이의 도움으로 뉴델리 시의 전화번
호부를 뒤져 라프르 간다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다행히 이 이름
이 희귀한 성이었기에 주소와 대조하여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라프르 간다와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을 한 다음 순범과 미현은
서커스 구경을 나섰다. 중요한 일 때문에 오기는 했지만 인도까지
와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서커스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주로 코끼리를 이용한 묘기를 재미있게 보던 순범과 미현은 서커
스 천막을 나와 부근에 형성된 야시장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들은 마녀점을 치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앉았다.
순전히 흥밋거리였지만 불과 십 루피의 돈을 받은 마녀는 굉장히
오랫동안 주문을 외고 순범과 미현의 얼굴을 뜯어보곤 하면서 나름
대로는 더 이상 신중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나이도 얼마 들어보
이지 않고 얼굴도 매우 예쁜 여자가 왜 이런 마녀의 행색으로 점을
치는 일이나 할까 궁금했다, 이것저것 살피던 순범은 마녀의 등 뒤에
쓰여 있는 영문 선전문을 보고서야 마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네팔의 쿠마리 출신이었다. 순범은 언젠가 네팔에서
살아 있는 여신으로 신성시되다가 초경이 시작되면 다른 어린 소녀
로 교체되어야 하는 운명의 쿠마리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었다, 쿠
마리에서 쫓겨난 소녀는 고향에 머무르지 못하고 타지를 전전하다
가 주로 창녀가 되거나 비참하게 생활하다가 죽는다고 했다. 어떤
남자도 쿠마리 출신에게는 장가를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
쿠마리 출신의 마녀는 순범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주문을 외고 얼굴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눈을 뜨며 외쳤다.
"오! 처녀여, 그대에게 찾아온 이 위기를 잘 넘기고 나면 곁에 있
는 남자로부터 청흔이 있을 것이니 받아들여라. 아이를 한 다스
낳고 잘살 것이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갑자기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자
마녀는 영문을 모르고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쏘아봤다. 순범
이 영어로 좋은 말을 들으면 크게 웃는 것이 한국의 풍습이라고 하
자, 그제서야 마녀도 따라 웃었다. 백 루피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재미 있는 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순범은 미현과 호텔로 돌아오는 길
을 걸었다.
(미현의 기분은 어전을까?)
우스개 점이긴 했지만 자신은 마녀의 점괘를 들었을 때 내심 매
우 흐뭇했었다. 마녀의 점괘대로 자신이 미현과 결혼하는 일이 생
길 수 있는 걸까?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이 여자를 어쩌면 자신
은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여자도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까?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옆에서 걷고 있는 미현은 순
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듯 잠자코 걷고만 있었다. 여느 때
와 다름이 없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순범에게 미현은 역시 가
까우면서도 먼 여자라는 마음이 들게 했다. 미현의 천재성은 이성
에 대한 흥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날 라프르 간다를 만나러간 두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
다. 그는 이용후 박사는커녕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알지 못
하는 사람이었다.
순범이 이용후 박사에 대해 설명을 하자 그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얼굴에 환한 빛을 띄우며 반갑게 대답했다.
"아마 나의 형을 찾는 모양이군요. 나는 라프르 간다 윈이라는
사람이고 형님은 라프르 간다 싱이라고 하지요."
"형님이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형님은 인도에 계시지 않아요. 프랑스에 머무르고 계시죠."
순범은 허탈했다. 그 형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본 결과, 그는 유명
한 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시크 교도로 인도에서의 종교적 반
대파에 의한 견제가 싫어 파리에서 지낸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순범
은 그의 주소만을 받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기분이 되었지
만 다시 파리로 가야만 했다. 순범은 미현을 먼저 호텔로 돌아가 있
게 하고, 자신은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갔다. 프랑스와 비자면제협
정이 되어 있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인인 자신은 입국비자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현은 벨이 울리자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라이가 상냥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미현은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와, 라이."
라이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저희 호텔의 서비스인데 드셔보세요. 시원할 거예요."
미현이 보니 야채즙이었다.
"고마와 라이, 이따가 먹을께, "
미현은 접시를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있는
라이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미현은 깜짝 놀랐다. 무언지 모
르게 음산한 기분이 풍겨나오는 것 같아, 라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
피던 미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십오륙 세의 소년에 불과했던 그
의 피부가 탄력을 잃으며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크고 새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던 얼굴도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활짝 웃는 표정이 징그럽게 느껴지는 순간, 미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것이어서 미
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때 찌익 소리와 함께 미현이 입고
있던 원피스의 자크가 내려 갔다.
"어머나. "
미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얌전히 있어."
자크를 올리려던 미현의 가느다란 팔은 뒤로 꺾여 벗겨진 원피스
의 소매로 등뒤에서 결박당했다, 다시 라이는 미현을 뒤에서 밀어
바닥에 꿇어앉힌 다음 날이 새파랗게 선 면도칼을 꺼내 브래지어를
끊었다.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미현은 현기증이 날 지경이
었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흐흐흐. 유리처럼 깨끗한 몸이군. 야채즙을 안 먹기 잘했어. 너
의 미모를 보니 내 마음이 달라졌거든. 이제 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될 거야.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쾌락
의 절정을 느끼며 죽여달라고 몸부림치게 될 거야."
그는 꿇어앉은 미현의 얼굴 앞에 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끓어
오르는 분노와 모욕감을 어쩌지 못해 몸을 떨면서 미현은 눈을 감
았다.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 위로 눈물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끼며
미현은 이를 악물었다.
옷을 다 벗은 라이는 미현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상
하는 듯 미현의 머리채를 휘써잡았다.
"눈을 떠, 이제 카마수트라에 있는 온갖 방법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쾌락의 세계를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절정의 순간을 바로
죽음으로 이어주지 이 쾌락의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죽음이야말
로 최고의 기분이지. 나는 칼리의 여신에게 밤마다 물어보곤 했
지. 칼리의 여신은 내게 대답했어. 내 손에 죽은 여자들은 늘 행
복하다는 거였지."
그는 미현의 머리채를 끌고 침대로 데려갔다. 거기서 미현의 두
발과 두 손을 침대의 네 귀퉁이에 묶었다. 어느 틈에 꺼냈는지 예리
한 칼로 미현의 허리에 걸쳐져 있는 원피스를 잘라내어 끌어당기자
눈처럼 하얀 미현의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눈을 뜨고 입을 벌려."
음탕한 목소리와 함께 라이는 마지막 남은 미현의 속옷에 손을
뻗쳤다. 라이의 손끝이 허리에 닿자 미현은 반쯤 실신상태에 빠져
몸을 떨었다. 얼굴을 어리게 보이기 위해 수은 주사를 맞은 라이의
얼굴은 약기운이 떨어지자 두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징그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라이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미현의 가슴에
천천히 얼굴을 들이댔다. 동시에 힘을 주어 미현의 속옷을 잡아챘
다.
"아버지,,,,,,."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끝으로 혀를 깨물려는 순간, 미현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이, 옷을 입어."
순범 이었다.
라이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칼을 놓은 자리로 손을 뻗쳤다. 순범
은 시트로 미현의 몸을 덮으며 방안의 사정을 더듬었다. 칼을 손에
쥔 라이는 능글맞은 미소를 띄며 순범의 앞으로 다가왔다,
"흐흐, 나는 한 번 목표한 여자는 놓치지 않지, "
칼이 순범의 얼굴을 후려왔다. 순범은 첫눈에 이 자의 공격은 결
코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베어오는 각도나 속
도가 이미 전문가의 경지였다. 순범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칼날에
현혹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눈을 보아야만 한다.)
칼끝을 보면 그 변화에 현혹되고 교란되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칼끝의 공포는 사람의 오관을 마비시킨다. 순범은 상대
의 눈을 보았다. 라이의 칼이 순범의 눈앞을 어른거렸지만, 순범은
동요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려 있다는 생각이 순범으로 하여금 생
각지도 못했던 침착함을 유지하게 했다. 순범은 천천히 옷을 벗어
들었다. 라이의 칼이 순범의 가슴을 스치자 이내 피가 배어나왔다.
다시 한번 칼이 공중에서 춤추려 할때 순범은들고있던옷을날
렸다, 넓게 펼쳐진 옷이 라이의 시야를 가리는 순간, 순범은 뛰어들
며 라이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러나 라이는 민첩하게 몸을 돌려 피
했다. 다시 순범이 돌아서며 주먹을 날렸으나 라이는 엎드리며 일
어나는 반동으로 칼을 날렸다. 불과 일 센티의 차이로 스치는 칼을
겨우 피한 순범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라이는 도저히 순범의 상
대가 아니었다,
"흐흐흐, 이제 잔죄도 없어졌군. 오랜만에 피맛을 한 번 보-는
-
라이의 기괴한 얼굴에 스치는 살기를 보며 순범은 팔다리에 힘이 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도망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지만, 상대는 미 료
현의 목숨을 끊고 달아날 것이었다. 라이는 한발짝 한발짝 순범에 -
게로 다가오고 순범은 벽으로 밀리고 있었다. 인도의 전통무술을 로
익힌 듯한 라이의 재빠른 몸놀림이나 칼쓰는 법은 순범으로 하여금
함부로 몸을 놀리지 못하게 했다,
순범은 어떤 동작을 취해야 찰지 몰라 뒷걸음질만 쳤다. 이제 라
이의 손이 떨어지면 최후를 맞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때
순범의 손에 야채즙의 접시가 닿았다, 접시를 잡으려고 하면, 상대
는 먼저 칼을 휘두를 것이라 생각한 순범은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라이?
"나도 몰라. 다만 너희들의 운명을 탓할 수밖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자니 호흡이 거칠어져 왔지만,
접시에 손을 조금씩 접근시키면서 순범은 다시 물었다.
"우릴 살려주면 네가 달라는 만큼의 돈을 주겠어 통장은 지금
보여줄 수 있어."
순범은 라이가 살인청부업자라면 거액의 돈으로 마음을 돌려놓
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우리는 부탁받은 것을 바꾸지 않지. 설사 목숨을 잃어야 한다
하더라도 말이야."
순범이 접시를 제대로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라이의 칼이 접시
를 잡은 팔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팔을 삔
으나 이미 라이의 칼은 순범의 팔을 정확히 찔렀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순범의 몸 위로 다시 날아드는 날카로운 칼끝이 순범의
목젖을 정확히 레뚫기 직전 한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라이의 몸을 향해 다시 한 발
의 총알이 발사되고 라이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
음의 문턱까지 갔던 순범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순범은 두 사람이 방에 들어
와 있는 것을보았다. 그중한사람이 아직도권총을들고 있는것
으로 보아 총은 그 사람이 쏜 것임에 틀림없었다,
많이 놀라셨죠? 여자 분은 괜찮습니까?
순범이 급히 일어나 미현에게로 가니 미현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
리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잠시 방 밖으로 나간 사이 순범은 미현
의 결박을 풀었다. 미현은 순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쯤 실신했
다가 순범이 결박을 풀고 시트로 몸을 덮어주자 그제야 정신이 드
는 모양이었다, 미현은 공포에 젖었던 기억을 떨치려는 듯 순범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좌우로 흔들어댔다.
미현 씨 이제는 안심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올 수 있었어요?
항공권을 구입하려면 미현 씨의 여권번호를 알아야겠기에 전화
를 했었죠. 전화를 안받아 교환에 물어보니 코드가 뽐혀 있더군
요. 당번인 라이를 찾아도 없기에 불길한 생각이 들어 바로 달려
온 길입니다.
미현은 총소리에 정신이 들긴 했지만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순범이 문을 열자 한국인 두 사람을 비롯하여
경찰관 여러 명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경찰관들은 총에 맞은 라이
의 시체를 보자 모두 연행하려 했다.
"당신들 모두 경찰서로 갑시다."
"잠간, 우리는 한국대사관 직원이오. 여기 외교관 신분증이 있
소. 이 자는 살인청부업자요. 우리 국민을 살해하기 직전 내가 사
살했소.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 국민들이 귀국의 살인청부
업자에게 무참하게 희생당하여 커다란 외교문제가 생겼을 거요.
경찰서에는 나중에 출두할 것이니 지금은 현장조사만 해주시오.
필요하다면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하겠소."
대사관 직원의 당당하고도 자신에 찬 태도는 경찰관들을 압도했
다.
권 기자님, 대단히 미안합니다, 여기는 복잡하니 로비에 내려가서
얘기를 나누실까요?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짐을 가지고 나가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경찰의 문제는 나중에 우리가 처리하겠습니
다. 밑에 참사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선 호텔 응급실에 가서 응급처치를 하고 가겠습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순범이 다친 팔을 싸매고 로비에
내려오자 매우 점잖은 모숱의 신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는 잔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쬐송합니다.
아닙니다. 참사관님. 저야말로 정말 고맙습니다.
뜻밖에도 참사관이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공손히 대하는 것을 보
고 순범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참사관이란 대사관에서도 높은
직책이 아닌가? 그런 참사관이 직원들을 데리고 와 위기에서 구해
주고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나, 자신들의 방을 찾아온 것이
나,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아는 것이나,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
다.
권 기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모르겠
습니다, 부디 돌아가시면 잘 좀 말씀드려 주십시오.
누구에게 말씀을 드린단 말입니까?
그럼 권 기자님은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들은 권 기자님을 보호하라는 본국의 령을 받고 있습니
다.
본국의 훈령이오-
예, 그령습니다.
본국의 누구에게 훈령을 받았단 말씀입니까?
안전기획부장님으로부터의 훈령이었습니다.
안기부장?
대사관 직원들이 공항으로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공항을 향하는 순범의 머리에는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안기부
장이 어떻게 알고 자신과 미현을 보호하도록 훈령을 내렸단 말인
가? 최 부장은 물론 아무에게도 인도행을 알리지 않았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라이는 왜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
을까? 아까의 일을 생각하자 순범은 다시 한 번 섬뜩한 기분이 들
었다. 이것이 만약 청부에 의한 것이라면, 살인자들은 그야말로 보
통 힘을 가진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하긴 박 대통령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앞에서 이 박사를 살해할 정도니 이것은 약과인지
도 몰랐다. 위기를 려어서 그런지 순범은 미현이 더욱 가깝게 생각
되었다. 앞으로도 미현을 자신이 계속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자 순범의 가슴속에 어떤 뿌듯함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항의 에어프랑스 카운터에서 행선지를 은폐하기 위
해 컴퓨터 기재가 되지 않도록 부탁하여 즉석에서 항공권을 구입했
다. 파리에 도착하는 시간이 한밤중이라 호텔까지 예약하고 미리
에어프랑스 점보기에 들어오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미현은 아까
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좌석에 앉자 두통이 나는 모양이었다.
승무원으로부터 약을 얻어 먹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자 이내 잠이
드는 것 같았다.
비행기의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인도양에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
으면서 순범은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위험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십삼 년 전
에 이 박사를 살해했던 그들이 또다시 미현과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은 여전히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는 반면
목표가 되고 있는 이쪽은 일거수 일투족이 빠짐없이 노출되어 있다
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순범은 옆에 잠들어 있는 미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도에서
겪었던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인
도에서는 위기를 넘겼지만 앞으로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인
도에까지 뻗쳤던 마수가 프랑스라고 없으란 법은 없었다. 이미 상
대는 자신의 행적을 손바닥 안에 놓고 환히 들여다보고 있을지 몰
랐다. 뉴델리 공항에서 행선지를 컴퓨터에 입력시키지 않은 것쯤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몰랐다.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오직 정신을
차리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비행기는 파리에 정
시에 도착했다.